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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연심 (13): 공을 깨닫다[悟空]

요연(了緣)

【정견망】

홍몽(鴻濛)의 초기에는 성(姓)이 없었으니
완고한 공(空)을 깨려면 모름지기 공(空)을 깨달아야 하니라.

鴻蒙初辟原無姓
打破頑空須悟空

보리조사가 원숭이에게 이름을 하사하시니, 바로 “후손(猢猻 원숭이)”에서 “猻(손)”을 취한 후 짐승을 뜻하는 좌측의 “犭(견)”을 빼니 바로 손(孫) 즉 子+系가 된다. 여기서 “子”는 아들을, “系(계)”는 어린아이를 뜻한다. 바로 영아(嬰兒)의 본성과 같다. 이렇게 원숭이의 성은 “손(孫)”으로 정해졌고, 또한 항렬자인 오(悟)를 더하고 여기에 “空(공)”을 더했다. 그때부터 손오공(孫悟空)의 명성이 뭇 신(神)들의 시선에 들어온다. 물론, 수련의 길에 올라온 오공은 또한 각 로(路) 요마귀괴의 욕망을 자극했다.

“猻”에서 “犭”을 제거한 것은 수련인은 가장 먼저 수성(獸性), 즉 타고난 마성(魔性)을 제거해야 함을 뜻한다. 물론 마성을 제거한다고 해서 무언가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정(正)의 에너지로 전화해 자신의 불성(佛性) 속을 충실하게 할 것이다. 말하자면 수련(修煉)이란 바로 한바탕 에너지의 전환(轉換)이다. 남은 것이 바로 子, 小이고 여기에 오(悟)가 더해지는데, 당연히 “너, 어린아이[小子]야, 깨달아야[悟] 한다”(사부님의 마음의 소리)는 뜻이다. 도제(徒弟)의 오성이 좋고 나쁨은 수련의 성패를 좌우하고 사부의 안목이 좋고 나쁨을 직접적으로 증명한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수련의 일을 사부님께서 다 가르치셨다고 해서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包教不包會]. 신선[仙]이 되고 도(道)가 되려면 반드시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모순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전혀 모순이 아니다. 사부가 전하는 법(法)이 더 클수록 만상(萬象)을 포함하기에 함의가 더욱 심오하다. 우주 대법은 호한(浩瀚)하고 끝이 없어 모든 중생이 수련하기에 적합하다. 세간에 얼마나 많은 중생이 있으면 얼마나 많은 수련의 길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수량에 상한선이란 없다. 제자가 아무리 많아도 수련의 길은 결코 겹치지 않는다. 하지만 요구는 오히려 같은 것으로, 그것은 바로 우주 특성 진선인(真善忍)을 향해 닦는 것이다. 제자마다 모두 달성할 수 있는 상한이 없으며 오직 깨달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높이 수련하더라도 반드시 당신의 위치가 있다. 바로 당신이 어느 한 층까지 깨달을 수 있는지에 달렸다.

따라서 사부님께서 같은 법(法)을 전하신다 해도 오성(悟性)이 천차만별하기 때문에 제자가 닦아낼 수 있는 경지는 같지 않다. 도태되는 비율도 상당히 높다. 말하자면, 마음에 얼마만큼의 누락이 있다면, 그것을 걸러내는 체도 그만큼 여러 층(層)이 있다. 요행 심리를 지니고 아직까지도 내려놓지 못한 집착이 있다면 결국에는 체로 걸러지게 마련이다. 그 구멍들은 자신이 남긴 것이라 스스로 자신에게 걸려 넘어질 뿐이라 조금도 재미가 없고 오히려 큰 비극이다. 바로 “사부가 문으로 이끌어 들이나 수행은 자신에게 달렸다.”

만약 도제가 오성이 좋지 않아 마장(魔障)에 갇혀 깨닫지 못한다면, 사부님께서 지켜보시며 조급해하시고 도와주려 하시겠지만 아주 은밀하게 점화하실 뿐이다. 그마저도 시기(時機)가 성숙해야 하고, 점화할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부가 함부로 개입하면 고험(考驗)이 무효가 된다. 심성이 제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고 정념이 나오지 않으면, 뭇 마(魔)를 제압하지 못해 위덕(威德)이 없고 자비심이 부족하면 다시 해야만 한다. 더 높은 층차의 표준이 그곳에 놓여 있기에 조금만 치이가 나도 안 되며 반드시 표준에 도달해야 한다. 수련의 일은 누구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조금이라도 잡질(雜質 불순물)을 지니고 올라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보리조사는 진짜로 전할 제자[真傳弟子]를 받아들이는 것이 쉬웠을까? 아주 오랜 시간 고생스레 기다려서야 하나가 오는데 오성이 반드시 좋아야 한다. 이는 모든 사부가 도제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오공이 사부를 찾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부는 줄곧 같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원숭이의 본심 속에서 원숭이가 세상에 들어온 후 신성(神性)을 깨닫고 도처로 법(法)을 찾기 시작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각종 기연(機緣)에 이끌려 원숭이가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다. 오성은 말할 필요도 없고 선천적으로 아주 영험한 원숭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을 찾지 않고 사부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부가 그더러 깨달으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한 글자 ‘공(空)’이었다. 더 높은 층차에서 낮은 층차를 보면, 자신이 있는 층차 아래의 모든 것은 다 좋지 않은 것으로 마음대로 주재할 수 있다.

비록 당사자는 혼란스러워도, 그 층차 중생의 법왕(法王)은 아마 자신이 가장 높고 가장 완벽한 지극히 높은 곳에 도달했으니, 더 위로는 주재자가 없다고 여김으로써 자신의 인식을 제한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자만이야말로 바로 그가 있는 층차의 국한이며, 무지(無知)가 자신의 지혜를 제한해 무량무제(無量無際)한 세월 동안 조금도 진보하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괴멸(壞滅)의 단계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하여 구세력이 생겨났고, 무지하게도 자신이 우주의 궁극적인 주재자라 믿었다. 어찌 단지 한 층면을 주재하는 것에 불과함을 알겠는가! 설령 궁극적인 주재자라 해도 창세주(創世主) 발치에 있는 영아에 불과할 뿐임을 모르고 유치하게도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운지 몰랐다.

성주괴멸(成住壞滅) 구우주의 이치에서 벗어나려 하고, 멸(滅)의 과정에서 구원받으려 한다면, 반드시 자신을 개변해, 지혜의 층면을 넓히고, 신우주의 이치를 받아들여, 더 큰 법으로 자신을 새로 만들고, 사상을 개변해 점차 정법(正法)에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 이는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이고 구도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구세력은 유아독존(唯我獨尊)의 느낌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무시하는 오만방자함이 습관이 되었다. 이를 통해 오만하게도 자신을 구하도록 배치해, 망령되이 우주 갱신을 간섭하고, 정법을 파괴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성취하고자 했다.

이는 마치 유치원생이 대학 입시를 배치하는 것과 같다.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짓인데 유치원생의 지능으로 어찌 대학생을 검증할 수 있는가? 장차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여전히 자신의 천하이며,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으며, 미래에도 여전히 유아독존하고 모든 것을 주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제한된 지혜 속에서 맴돈들 무엇을 개변할 수 있겠는가? 단지 식탐이 강한 아이에 불과할 뿐이다. 사탕의 분배권을 놓고 당신이 하나 나도 하나라며 끝없이 다투는데 누구도 손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남에게 주느니 차라리 없애버리려 한다. 바로 이렇게 자사(自私)가 심한데 도태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이렇게 온갖 소란을 피워도 결국 원래의 그 구덩이가 아닌가? 도태되기로 정해진 생명이 오히려 미래를 주재하려 하지만, 자신도 그 멸망의 구덩이를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중생들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미래를 원한다면, 그럼 미래를 포용할 흉금과 지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좁은 길은 자사(自私)이고, 가장 어리석은 행동은 그 좁은 길의 끝에 도달했음에도 여전히 오만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허영(虛榮)을 지키려는 것으로 장차 철저히 훼멸될 것이다. 하늘의 그물이 성글어도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정법을 파괴하는데 참여한 생명은, 존재하는 층차에 관계없이 모두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물고기는 죽고 그물은 끊어진다. 악행을 저지른 자는 결국 형신(形神)이 모두 소멸되는 결말을 벗어날 수 없다. 그 누구도 우주 정법의 갱신 과정을 가로막을 수 없다. 정법제자는 구세력의 바둑돌이 아니라, 그것의 바둑판을 부수는 사람이다. 구세력의 모든 배치, 계략, 그리고 강요된 박해는 대법제자들의 위덕을 성취하고, 층층 수련해 올라가 법광에 동화해 대신하게 하는 것 외에 그 어떤 존재가치도 없다.

이는 중공사당(中共邪黨) 체제 내의 부패한 관리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권력과 이익을 위해, 위로는 당 두목부터 아래로 아첨하는 응원단까지, 모두가 내부 투쟁의 고수들이다.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공산사당(共産邪黨)이 부여한 특권은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영혼을 팔아 부패와 권력 독점의 길로 내몰았고, 마치 지방의 폭군처럼 행동하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공산사령에게 조종(弔鐘)을 울리고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말이다. 구도 받을 기연이 이렇게 많았은데 얼마나 안타까운가! 아! 이 현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말세의 광기는 그야말로 구세력의 복제품이다.

그러므로 오공의 이름에 있는 ‘공(空)’이란 글자는 바로 낡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불순물을 비워, 자신을 순정(純淨)하게 해서, 사심(私心)과 잡념(雜念)을 더 줄여, 사상의 질곡이 갈수록 많이 열려 오성이 비로소 신령하게 움직일 수 있고, 심성이 저절로 승화해 올라가고 지혜가 열려야만 자신이 있는 층차의 극한을 돌파할 수 있고 보다 높은 법리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

이는 또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집착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련해야만”(《정진요지》 〈수련은 정치가 아니다〉)과도 같다. 바꿔 말하자면, 수련이란 사부님 말씀을 따르면 손해 보지 않는다. 대체로 손해를 보는 것은 다 사부님 말씀을 따르지 않거나, 혹은 선택적으로 일부만 따르거나, 수련에 개인의 취향을 더한 것이다. 즉, 자신이 듣기 좋은 것만 기억하고, 귀에 거슬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선택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정법의 말후(末後)가 되었고 사람 마음의 집착을 여전히 제거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잘못된 점이 있다면 어느 것도 감출 수 없다. 사부님께서 마음 쓰실 필요조차 없고 구세력의 검은 벽돌이 기다릴 것이다. 서로 비슷한 에너지 물질이기 때문에 공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검은 벽돌과 주파수가 같은데 어찌 구세력의 표적이 되지 않겠는가? 벗어날 수도, 숨길 수도, 가져갈 수도 없다. 층층의 이런 마장(魔障)이 다 있으니 내려놓지 못하면 머리를 내려칠 것이다! 당신이 철두공(鐵頭功 역주: 머리를 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기공)을 단련하려 하는가? 그러나 법(法)에는 없으니 결국 자신만 괴로울 뿐이다. 정말로 이끌려 나아가지 못하고, 얻어맞아 물러나는데, 왜 구태여 이렇게 비참하게 수련하는가?

그러므로 가장 좋은 수련 상태는 사부님 말씀에 따라 자신의 길을 걷고 요마귀괴(妖魔鬼怪)가 틈 탈 기회를 주지 않고 그것의 길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