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연(了緣)
【정견망】
이렇게 이름을 얻은 원숭이는 정식으로 수련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이상한 것은 사부는 그것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대신 원숭이는 두 번째 문밖으로 이끌려 나가 여러 사형들을 모시고, 말과 예절을 배우고, 경을 배우고 도(道)를 토론하며, 글을 연습하고, 향을 피우는 것을 배웠다. 이런 일상이 날마다 이어졌고, 가끔 잡일도 좀 했지만, 아주 즐겁게 살았다.
또 6, 7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겉보기에 한가해 보이는 이런 생활에서 사부는 어렵사리 소중한 제자를 얻었지만, 그저 이름만 지어주고 아무런 지시나 가르침도 없었고 법을 전하지도 않는다. 오공은 마치 옆으로 제쳐놓은 듯 만나주지도 않고 마치 잊은 듯했다. 도대체 원숭이더러 무엇을 닦으라는 것인가? 하지만 오공은 뜻밖에도 아무런 불평이나 게으름 없이 바닥을 쓸고, 정원을 가꾸고, 나무를 심고, 땔감을 모으고, 물을 길어 왔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겉으로 보면 6, 7년간 하찮은 일, 아무 의미도 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한 듯하다. 한마음으로 장생(長生)을 원했던 오공은 뜻밖에도 수많은 산과 강을 건너 마침내 스승을 찾았으나 대도(大道)를 얻는 법을 성급히 구하는 대신, 오히려 이토록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했다. 구함이 없이 저절로 얻는 이런 심성은 실로 얻기 힘든 것으로 이 원숭이가 평범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사부가 오공에게 본성(性)을 안정시킬 시간을 준 것임을 어찌 알겠는가? 소위 ‘심원의마(心猿意馬)’라 마음 원숭이가 움직이면 오성(悟性)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쉽게 들뜬다. 성정이 안정되지 않으면 사소한 자극에도 불안해지고 실수가 나올 수 있는데 이는 수련에서 큰 금기다. 일반적인 법문(法門)에서는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없기에, 단 한 차례 실수라도 있으면 사문(師門)에서 쫓겨나 이때부터 영원히 수련할 기연(機緣)을 잃는다.
따라서 수련은 가장 먼저 마음을 고요히 하고 성정을 단련해야 한다. 오직 마음이 고요해야만 자신의 기민함을 발휘해 고심한 법리(法理)를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오성이 좋고 나쁨은 청정심(淸淨心)에 달려 있고 고요함이 깊을수록 깨닫는 것이 더 높다. 마음을 닦고 성을 기르는 수심양성(修心養性)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늘 청정심을 지킬 수 있어야지만 일에 부딪혀, 총애 받는 치욕을 당하든 놀라지 않을 수 있고, 신중히 생각한 후에 움직일 수 있다. 보리조사가 원숭이에게 오공(悟空)이란 법명을 준 것이 이미 수행의 큰 방향을 암시한 것으로 현기(玄機)가 아주 깊다. 이제 남은 것은 바로 사부에 대한 원숭이의 믿음을 고험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수련하려면 최소한 사부를 믿어야 한다. 제자가 이왕 사부를 모셨다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흔들림 없이 믿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운명을 개변해 속세를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겉보기에 잡일만 한 6, 7년의 생활이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사부에 대한 오공의 믿음을 진정으로 검증한 것이다. 사실, 사부가 ‘오공’이란 두 글자를 알려준 것만으로도 원숭이는 매일 마음을 청소하고 장애물을 제거하기에 충분했다. 겉으로는 잡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태도로 교만하거나 경박하지 않게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이 또한 평범한 일상속에서 심마(心魔)를 제거한 과정이 아닌가? 만약 원숭이가 조금만 더 경박했더라면 아마 오래전에 불평하면서 마음속에 십만 가지 의문이 가득 찼을 것이다.
‘이런 잡일이야 어디서나 할 수 있는데 왜 기어이 천신만고 끝에 달려와, 사부님의 눈길 아래에서 이런 잡일을 해야 하는가? 아직 장생(長生)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방치되다니. 게다가 이렇게 여러 해 무시하니 이 사부도 믿을 수 없겠구나.’
만약 제자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곧 끝장이다. 아주 사소한 원망조차도 사부님에 대한 믿음을 절충해 이후 수련에 예상치 못한 각종 마장이 나타나게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며 소원을 빌면서 신(神)을 모시는 현대의 종교 신도들과 같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지 못하면 신을 원망하고 신을 미워하며 심지어 신을 비방한다. 그들은 신을 모시는 것을 무슨 등가교환처럼 여긴다. 내가 절을 올리고, 돈을 기부하고 희생했으니 신(神)이 곧 보답을 주실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고도 보답을 받지 못하면 하늘을 탓하고 땅을 원망하며 자신에게 너무 불공평하다면서 잘못을 저지고 업을 짓는다. 돈으로 신을 부르고 장부를 결산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또 좋은 점을 얻고 심리적인 위안을 얻으려 하는 데 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하물며 그 돈이 깨끗한지 여부는 말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다른 심보를 품은 사람이 신을 모시는 것은 차라리 신을 모시지 않는 것만 못하다. 비뚤어진 마음과 삿된 생각으로 좋은 것을 구할 수 있겠는가?
말법 시기에 신(神)과 부처는 모두 자신의 위치를 떠나 더는 사람을 돌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올바른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구함이 없이 신을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모두 사심(私心)이 가득해서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행운을 얻기 위해 신을 모신다. 이렇게 심술(心術)이 바르지 않은데도 신이 준다면 이는 공범이 되는 것이다. 신이 사람에게 이끌려 죄를 짓겠는가? 게다가 뭇 마(魔)들이 세상에 나와 인간 세상을 혼란시키고 있으니 지금 세상에 사람 마음을 개변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우주 대법뿐이다. 정법(正法)이 바로잡으려는 것은 바로 끝없는 사람마음의 욕망이다. 오직 전통문화를 회복하고 도덕을 바로잡아서 예의지국(禮儀之國)의 풍채를 회복하는 것만이 사람이 진정 지녀야 할 상태이다.
사부에 대한 오공의 아무런 유보 없는 믿음과 사부가 안배한 일을 하면서 아무런 불평 없이 순종하는 것은 모두 일상의 평온한 심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장생(長生)에 대한 그의 바람과 무관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할 일을 아주 즐겁게 했다.
기왕 사부를 모셨다면 자신의 성명(性命)을 사부에게 맡긴 것이니, 사부의 안배를 믿는 것이야말로 모두 가장 좋은 것이고 무엇을 하든 다 마음을 닦는 것이다. 나아가, 사부님 앞에서 어디 허비하는 날이 있겠는가! 한마음으로 도(道)를 향하면 일체 평범함이 모두 현기(玄機)이며, 오직 마음을 고요히 할 수만 있다면 대도(大道)는 저절로 그 속에 있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아무런 유보조건 없는 진정한 신사신법(信師信法)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2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