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연(了緣)
【정견망】
오공이 사부의 수수께끼를 깨달으니 당연히 기뻤지만, 다만 기쁨을 숨기고 남과 나눌 수 없으며, 아무 일 없는 듯 평상시처럼 행동해야 하니,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저 달이 버들가지 끝에 걸리고, 약속한 자시(子時, 밤 11시~1시)가 되기만 바랄 뿐이었다.
[역주: 사부의 수수께끼란 보리조사가 방으로 들어가기 전 오공의 머리를 세 번 친 후, 손을 등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한밤 중 삼경에 뒷문으로 몰래 오라는 신호였다. 원숭이는 오성이 좋아 이 수수께끼를 단번에 깨달았다.]
기쁨을 억누르고, 간신히 자시까지 버틴 오공은 일어나 옷을 입고 몰래 빠져나와 달빛을 본다. 달은 밝고 별은 드문드문하니, 바로 도(道)를 찾고 진(真)을 구할 때였다. 뒷문으로 가 보니,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오공은 속으로 기뻐하며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과연 내게 도를 전할 생각으로 문을 열어 두셨구나.’
그 기민한 모습은 정말 원숭이처럼 영리하다. 앞에는 문을 한번 닫고, 여기서는 한번 여니, 문이 닫히고 열리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수수께끼다. 오공은 보자마자 사부님이 전달하려는 마음을 즉시 깨달았다. 이것은 자신에게 뒷문(後門)을 열어 도(道)를 전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 후대에 유행한 ‘뒷문으로 간다(走後門, 비밀리에 뒷거래를 한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오공은 문 안으로 들어가 조사의 평상 아래에 이르렀다. 조사는 몸을 굽혀 안으로 돌아누워 잠들어 있었고, 그에게는 등만 보였다. 이것은 또 하나의 시험이었다. 여기서 조사가 시험한 것은 오공의 태도인데, 즉 법(法)을 구하려는 성의였다. 사부님은 잠들어 계시고, 뒷머리만 보이신다. 뒷머리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으니, 이는 곧 오공이 이 순간에 구속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심원(心猿, 마음 원숭이)은 민첩하고 정(定)함이 없어 조사의 설법을 들을 때도 얌전히 앉아 있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사부님이 잠들어 보지 못한다면? 사부님의 침실 안에 있고, 사부님의 모든 재산이 이곳에 있다. 어쩌면 어딘가에 보물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완성된 불로장생약 같은 것이 있다면 한 알만 먹으면 수련할 필요 없이 편안히 누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오공에게 조금이라도 탐심(貪心)이 있다면, 정말 훔쳐갈 수도 있다. 게다가 오공은 또 실제로 훔쳐갈 잠재적인 소질이 있다. 나중에 천궁(天宮)을 소란스럽게 할 때의 전주곡이 바로 반도회(蟠桃會)에서 복숭아를 훔치고, 지나가는 길에 태상노군(太上老君)의 연단로(煉丹爐)에 있는 단(丹)을 훔쳐 먹어, 엄청난 대형 사고를 친 후에야 일이 수습되지 않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이때 사부 등뒤에서 한 오공의 행동이야말로 진짜 성정(性情)이었다. 하지만 오공은 장생(長生)의 법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눈에는 오직 사부님만이 있을 뿐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았으며, 조금의 삿된 마음도 품지 않고 매우 겸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다.
때문에 오공은 감히 사부님의 단잠을 방해하지 못하고, 곧장 평상 앞에 꿇어앉아 잡념(雜念) 없이 묵묵히 시기(時機)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이런 태도는 사부를 매우 만족스럽게 했고, 오공이 또 하나의 관(關)을 통과한 것을 축하했다. 그야말로 ‘사부는 인도할 뿐, 수행은 개인에게 달렸다(師父領進門,修行在個人)’와 같았다. 진법(真法)을 찾으러 왔다면 마땅히 공경한 태도와 충분한 성의를 보여야 한다. 진법은 길거리에 흔한 배추가 아니다. 진전(真傳)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사부님을 존중하고 도를 존중해야 한다. 이는 단지 태도 문제가 아니라, 장차 법을 얼마나 정오(正悟)할 수 있는가 하는 층차 문제와도 관련된다. 왜냐하면 수련에서 오성(悟性)은 신사신법(信師信法)의 기초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초는 반드시 있어야 하며, 또한 더욱 충실히 다져야 한다.
게다가 수련은 엄숙한 것이다. 진전을 얻으려면 반드시 진정으로 수련해야 하며, 사부 역시 날마다 지켜보며 당신의 수련을 독려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오직 자율적으로 해야 한다. 오로지 스스로 그 들끓는 마음을 다스려 고요하게 만들고, 자각(自覺)적으로 정진해야만, 겹겹의 마장(魔障)을 뚫고 금광대도(金光大道)를 증득(證得)할 수 있다. 오공이 이렇게 꿇어앉은 것은 사부님을 존중하고 도를 중시함을 확실히 실천한 것이니, 가르칠 만한 했다.
그러자 조사도 계속 자는 척하기 어려웠는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며 이렇게 읊었다.
어렵고 어렵고 어려워라!
도(道)는 가장 현묘하니,
금단(金丹)을 예사로 여기지 말라.
지인(至人)을 만나 오묘한 비결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공연히 입 아프고 혀에 침만 마르리라
難難難,道最玄
莫把金丹作等閒
不遇至人傳妙
空教口困舌頭乾
수수께끼에 수수께끼가 더해졌다. 금단(金丹)은, 접시와 같은 모양이다. 이것을 깨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조사는 입을 열자마자 수련의 어려움을 먼저 말한다. 오로지 수련의 어려움을 제대로 알아야지만 미혹을 타파할 결심이 선다. 결심이 없는 사람은 어려운 걸 알면 물러나기 마련이라, 서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도(道)의 현묘함은 내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 예부터 이런 경(經), 저런 경이 한 무더기인데, 경이라 불리는 것은 다 도(道)와 관련이 있다. 즉 옛 성현(聖賢)들이 도를 증득한 길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이다. 인도(人道)는 천도(天道)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 인간의 문자로 묘사할 수 있는 도란, 도를 증득하려는 마음[證道之心]이 겉으로 표현된 것이다. 쉽게 말해 도란 바로 사람 마음이 걸어온 여정이며, 인생 경험에 대한 정확한 체험이다. 이 체험이 천도(天道)와 합치되면 천인합일(天人合一)이 되고, 마도(魔道)와 합치되면 타락(墮落)이 되니, 그야말로 좋고 나쁨은 일념에 달렸다!
그런데 오공을 왜 심원(心猿)이라 부르는가? 그는 당승 정념(正念)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며, 또한 정념의 집행자(執行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공을 행자(行者)라 부른다. 서천(西天)까지의 길이 십만 팔천 리나 된다고 말하지만, 오공이 엉덩이를 한 번 비틀고 근두운을 타면 바로 도착하며, 찻잔 하나 비울 시간에 왕복할 수 있다.
정말로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수련인의 정념이 어디를 가고자 하면 단번에 도착하는데 염두를 움직이는 순간 곧장 도달한다. 다만 이 육체 범태(肉體凡胎)는 저울추처럼 무겁고, 사람 마음(人心)이 매달려 있어서, 정념은 언제든 사념(邪念)으로 대체될 수 있다. 정념을 시시각각 유지할 수는 없고, 아주 작은 정념으로 육신을 이끌 수는 없다. 사람에게는 불성(佛性)도 있지만, 마성(魔性)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공은 정념의 집행자이기에, 정념이 있으면 오공의 능력이 크지만, 정념이 위축될 때는 사념(邪念)이 작용한다. 정념은 마음에서 나오지만, 사념도 마음에서 나온다. 심마(心魔)가 요마귀괴(妖魔鬼怪)로 드러날 때면, 오공이 요마를 물리치는 능력은 전적으로 당승의 심성에 달려 있다. 다른 공간은 정(正)과 사(邪)의 대전장(大戰場)이다. 사람의 현실 공간은 바로 사상(思想)으로 체현되는데 정사(正邪)가 교전하는 염두는 상당히 격렬해서, 속칭 ‘사상투쟁’이라 부른다. 이 과정은 사람의 심성을 교란하기에 충분하다. 이야말로 법(法)을 실천하는 가장 좋은 체험이며, 마음을 연마(煉心)하는 과정이다. 모든 진수(真修) 제자는 반드시 한 갈래 정오(正悟)의 길을 개척해야 하며, 이를 통해 더 높은 차원의 본성을 깨닫고, 봉인되었던 에너지를 되찾아 법 속에서 제련해 순도를 높여야 한다.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오공의 금고봉(金箍棒 여의봉)은 사실 주원신(主元神)인 당승의 공기둥이다. 부원신(副元神)은 호법(護法)이며, 주원신과 일체동심(一體同心)으로 주원신의 의지를 집행하고, 수련이 잘된 에너지를 동원해 요괴를 물리치고 층차를 제고한다. 하지만 당승의 심성이 반드시 안정적이고, 일직선으로 상승해야만 오공이 정상적으로 발휘하거나, 심지어 초상적으로 발휘할 수 있다. 반대로 당승의 심성이 떨어져 내려가면, 오공의 능력은 사람 마음에 제한당해 차원이 떨어진다. 작은 요괴조차도 그를 다치게 할 수 있다. 당승의 사람 마음이 무거우면 오공이 불리해지고, 금고봉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직 마난(魔難) 속에서 심성을 제고해야만 차원이 올라갈 수 있고, 제자리에 남아 있는 사악한 것들의 차원을 떨어뜨려 제거할 수 있다. 영산(靈山)은 이 육신에 매달려 있으니, 십만 팔천 리 길은 정말이지 몇 걸음도 줄일 수 없다. 당신이 24시간 정념을 유지하고, 매 관(關)마다 즉시 깨달음을 얻고 차원이 상승해, 늘 요괴의 차원을 떨어뜨려 물리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저 영산은 엉덩이만 비틀어도 도착할 수 있다는 말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필경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것은 여의한 법(如意法 뜻대로 되는 법)이다. 수련이 뜻대로 되지 않고 온갖 재난을 겪는 것은 모두 사람 마음에 누락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안으로 찾는 법보(法寶)를 잘 파악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의 기점에서 바르게 깨닫고, 시시각각 누락을 점검하고 보완한다면, 어찌 수련에서 빨리 성취하지 못할까 근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분초를 다투어 여의법을 깨닫고 그것을 제대로 실행한다면, 그 수련은 정말 통쾌할 것이다!
문제는 깨닫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좀 주제넘은 말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일찍이 깨달았지만 아직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대심판(大審判) 때 이것 때문에 점수가 깎이지 않을런지 모른다. 이렇게 점수가 깎일 필요는 없으니 뻔뻔하게 아직 억울하다고 외쳐볼까! 아! 언제쯤 사상(思想)가 정념과 동기화되어 일 초의 차이도 없이 착실하게 행동으로 옮기고, 사상이 언행과 일치하며, 중간의 저애력인 사심(私心)과 잡념(雜念)을 모두 순식간에 제거하고, 진정으로 신신합일(身神合一)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 신체와 마음의 모든 세포가 고에너지 물질에 동화해, 정념과 마찬가지로 순정하고 불순물이 없어져야만, 시공 차원의 제한을 돌파할 수 있고, 비로소 신(神)처럼 되어 한눈에 만 년을 보고, 일념으로 온 창궁(蒼穹)을 가득 채울 수 있다.
당신이 보라, 수련은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간단하지만, 실천하기란 천 개 만 개의 난(難)이 있다. 이 길에서 도태되는 확률은 마치 만두를 찌는 것과 같은데, 척척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실로 깨닫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란 어렵다! 하물며 표상(表象)에 미혹되어 있다면 어려움에 다시 어려움을 더하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5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