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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연심 (19): 깨달은 자에 속한 진상

요연(了緣)

【정견망】

오공은 침대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조사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그는 ‘도(道)’의 현묘하고 현묘함을 알았고, 유명한 스승을 만난 것을 속으로 기뻐하며 진법(真法)을 얻기를 바랐다.

이에 황급히 대답했다.

“사부님, 제자가 진작부터 여기에 꿇어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사는 여전히 시치미를 떼면서 오공더러 앞채에 가서 자지 않고 왜 여기에 왔느냐며 나무랐다. 오공이 보니 이 사부가 고지식하게도 이렇게 앞에까지 왔음에도 여전히 수수께끼를 내는 것을 보고 인내심을 갖고 사부의 몸짓 언어를 풀어냈다.

“(사부님께서) 부르지 않으셨다면, 제자가 어찌 감히 침실 같은 이렇게 사적인 공간에 올 수 있겠습니까?” 조사는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자 매우 기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은 과연 하늘이 낳고 땅이 기른 놈이로군.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가 낸 수수께끼를 풀 수 있겠는가?’ 진실로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영험한 원숭이로 정말로 보물이었다.

오공이 말했다.

“이곳에 여섯 귀는 없고 제자 혼자뿐입니다. 사부님께서 부디 커다란 자비를 베푸시어 제게 장생(長生)의 길을 전해 주십시오. 그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오공은 진전(真傳)을 얻기 위해 급히 충심(忠心)과 결심, 그리고 경계심을 다했다.

여기서 “여섯 귀는 없다[無六耳]”는 말은 우리 둘 외에 사부님의 가르침을 훔칠 제3자가 없다는 뜻이다. 알리지 않고 얻는 것은 훔치는 것이라, 진법(真法)을 전함에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오공은 너무나 영특한 원숭이라 심지어 사부가 자신을 때리는 것 속에 현기(玄機)가 있음을 알았고 나쁜 일을 좋은 일로 여기며 수수께끼를 풀었고, 임기응변에 능해 비로소 시기(時機)를 움켜잡아 사부에게 다가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얻고자 해도 역시 이렇게 큰 지혜와 오성이 있어야 한다! 장생의 법을 얻으려면 천기(天機)를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이치는 종종 반대로 된 것이라 수련은 하늘을 거슬러 해야 하고, 층층의 극한을 타파해야만 비로소 세속을 벗어날 수 있다. 정말로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사부를 만나 천도(天道)의 족쇄를 벗어나 대도(大道)를 증득(證得)해 날아올라, 하늘과 수명이 같도록 인도해준다면 이야말로 정말 다시 창조해 주신 은혜가 아니겠는가! 이런 은혜를 어찌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위 “큰 은혜에는 감사의 말이 필요 없다[大恩不言謝]”는 말은 제자가 사부보다 층차가 높지 않기 때문인데 무엇으로 감사할 수 있겠는가? 사례하고 싶어도 찾을 수 없다! 저층의 것은 고층에 대해 말하자면 순정(純淨)하지 못한 것으로 가져오면 곧 오염원이 되니, 사부도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너무 한가한 나머지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높은 층차의 신(神) 누가 낮은 층차의 것을 소중히 여기겠는가? 아마 피하기 급급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각성해서 선(善)을 향하는 이런 마음만 있다면 신(神)은 여전히 마음에 들어하며 제도할 수 있다고 본다. 신이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사람은 각자(覺者)가 될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렸다[人命關天]”는 말이 있으니 이 역시 인과(因果) 때문이다. 관련된 생명이 하계(下界)에서 전생(轉生)해 정법 시기를 만나, 인연이 있어 법을 얻으면 그럼 그와 관련된 모든 생명들이 다 동화해서 등급이 올라갈 기회가 있고, 또한 말법(末法)의 겁난을 피할 수 있다. 단지 대도태(大淘汰)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등급이 올라갈 수 있으니 정말로 만고(萬古)의 기연(機緣)이 아닌가! 지혜가 더 큰 신들은 이미 일찍이 서약을 맺고, 대표를 선출해 세상에 내려가 전생해서 정법제자가 될 기회를 놓고 경쟁하도록 했다. 마치 생명을 건 도박처럼, 법을 얻을 인연이 있는 제자의 몸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배팅한 생명이 많을수록 법을 얻을 확률이 더 높아진다.

신(神)의 생명은 체계(體系)로도 계산할 방법이 없는데, 각 신의 생명 체계마다 모두 무량한 중생이 있으니 그야말로 너무나도 방대하다. 그러나 정법제자의 정원은 제한적이니 경쟁이 상당히 치열하다. 따라서 오직 누가 짊어진 생명 체계가 더 많고, 책임이 크며, 딸린 뭇 신들의 원력(願力)이 어떤지에 달려 있다. 어떤 신도 배팅을 잘못해서 도박에서 패배하려 하지 않을 것인데, 잃는 것은 미래이다. 말법 도태에 훼멸되고 싶어할 신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대표의 몸에 원력(願力)을 집중해 함께 노력해서 법을 얻을 기연을 만들었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 관음보살이 취경인(取經人)을 선택한 후, 당승에게 가사를 주지 않았는가. 그것은 삼계 중생이 천상(天上) 지하(地下) 및 무한하고 미지의 영역에서 보다 높은 존재 생명의 원력(願力)인데, 마치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우선 가장 강력한 원력을 실로 만들고 이를 꼬아 천을 만들고 또 이를 엮어 원력이란 옷으로 만든 것이다. 당승이 이 옷을 입은 것은 계약을 맺은 것과 같고, 당승의 서쪽 여행을 줄곧 보호하며, 단련시키고 정화해서, 대법이 널리 전해질 수 있도록 길을 닦고, 성스런 인연을 맺어 오늘을 기다려 온 것이다.

오늘날 대법제자들의 몸에 입은 옷도 이런 가사가 아닌가! 아울러 원신(元神)의 몸에 입어 영혼과 결합되어 이미 생명을 구성하는 부분이 되었다. 때문에 당신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당신이 있다. 서로 관련된 뭇 불도신(佛道神)은 모두 우리의 생생세세 전생 과정을 눈여겨보고 있다. 진정으로 수련하면 이 가사는 바로 원력(願力)의 그물이라 무량한 정신(正神)들이 우리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을 지켜보면서, 적당한 때 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정념을 가지(加持)할 수 있다. 누가 공덕을 쌓을 시기(時機)를 놓치고 싶겠는가?

하지만 진정으로 수련하지 않으면 이 가사는 원망[怨力]의 그물이 되는데, 정법제자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해 무량한 뭇신들을 실망시키고 절망에 이르게 하면, 청산해야 하고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한다. 모든 인과를 선해(善解)하고 싶다면 유일한 방법은 바로 용맹정진해서 서약을 실현해 마땅히 구할 것은 다 구하고 마땅히 갚아야 할 것은 다 갚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얽힌 매듭을 하나하나 풀고 인과를 법광(法光)에 동화하는 것으로 승화시켜 모두가 행복하게 윈윈할 수 있다. 빚이 있으면 갚아야 하고, 은혜가 있으면 보답해야 한다. 선연(善緣)과 악연(惡緣)을 다 청산해서 빚이 하나도 없어 온몸이 가벼워지면 한 팀이 되어 원만할 수 있다. 그런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각자 어머니를 찾거나, 또는 원만해서 우리 생명 체계 안에서 존재하며 미래 세계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진정으로 수련하지 않고 서약을 어긴 이들이여, 당신은 채권자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가? 누가 동의했는가? 서약을 어기면 당신을 믿고 투자한 사람을 채권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큰 인과(因果)는 몇 차례 생명으로는 갚을 수 없다. 무수한 중생의 명(命)을 짊어졌기에 비로소 법을 얻을 기연이 생긴 것이다. 당신이 수련하고 싶으면 수련하고, 수련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인 그런 것이 아니다. 좋은 것을 얻고도 빚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람이 될 자격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희망이 없는 뭇 신들은 훼멸되기 전에 우선 당신을 처리해 사적인 원한을 풀려 할 것이다! 독(毒)으로 독을 공격하는 구세력의 체에 걸러진, 분란을 일으킨 찌꺼기들, 당신들은 정말로 타락해 철저히 훼멸당하고 싶은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기회는 정말로 많지 않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제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업력(業力)을 감당하셨는지,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 깨끗하게 씻어주셨기에 비로소 정법(正法)을 얻어 수련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씻어주셨는지 당신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우주에는 “잃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이치가 존재하며, 업력 역시 공짜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 당신의 순정(純淨)한 에너지를 업력과 교환해야만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실 수 있다. 자신의 에너지 역시 자기 생명의 일부이니 사부님께서 중생의 생명을 모두 당신 몸 안에 거두어, 생명을 사용해 중생을 수호하신 셈이다.

그 결과, 사부님의 본존(本尊)께서 인간 세상에서 아주 큰 손상을 입으셨고, 시시각각 늘 우리를 위해 소업(消業)하시느라 막대한 고통을 감당하셔야 했다. 그로 인해 노쇠한 모습을 드러내셨으나, 어떤 이들은 심지어 사존께서 말씀하신 법(法)을 의심하기도 한다. 알아야 할 것은, 생명의 층차가 높을수록 형상은 더 아름답다. 사존께서 우리를 제도하지 않으셨다면, 가장 자재하고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계실 것이니, 아무런 형상도 필요하지 않으시다. 그러나 우리를 제도하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바치셨음에도. 세인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는 것은 차치하고, 제자조차 사부님의 고심(苦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속의 애달픔을 누가 풀어줄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그토록 마음을 졸이시는 것도 결국은 제자들이 분발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단지 “높은 곳은 춥기 마련”이란 한 마디로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이토록 호탕하신 불은(佛恩)임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사존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이런 나쁜 생각은 배은망덕한 사람(白眼狼)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사존께서는 다른 것은 원하지 않으셨고, 오직 선(善)을 향하는 우리의 마음만을 원하셨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는 무량무제(無量無際)한 중생의 생명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든 중생이 구원받는 것이다!

이제 더는 나는 대법을 위해 얼마나 많이 감당했고, 얼마나 많은 일을 했다는 그런 유치한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모두 자신을 위해 한 것으로, 그렇게 많은 중생의 명이 묶여 있는데, 조금만 적게 해도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 당신은 이미 오래전에 좋은 것을 가져갔고, 본전(本錢)을 갚을 때가 되었는데도 예전 빚을 인정하지 않고, 일을 조금만 하면 폼을 잡으며 한껏 자만심에 부풀어 있다. 당신은 자신의 양심에 떳떳할 수 있는가? 당신이 한 고만한 일로는 원금은커녕 이자를 갚기도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물며 대법 수련은 이익의 교환이 아님에도, 당신은 감당했으면 곧 상응하는 보답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데, 보답이 적다고 여겨 원망하는 생각을 품고 마난(魔難) 속에서 관(關)을 넘지 못하고 고통을 좀 받으면 곧 사존을 원망한다. 사존께서 당신을 위해 업력을 감당하시고, 미혹을 깨뜨려 주셨음에도 당신은 미련하게 깨닫지 못하고, 해내지 못하며, 자신을 찾지 않고, 도리어 사부님을 찾아 따지려 한다. 정말로 받은 것이 너무 많고, 너무 쉽게 얻으니 탐욕이 생겨 한없이 구하려 하고, 준 것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도리어 당신에게 무슨 빚을 진 것처럼 여기는가!

보라! 요만한 이기적인 생각만으로도 당신이 진정으로 수련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위사(爲私)한 기점조차 별로 개변하지 않았고, 마음속의 사욕(私欲)과 백골정으로 변할 수 있는 집착마저도 살찌워 놓고 또 방출해서 어지럽게 한다. 이것이 당신인가? 사람 마음의 집착에 이끌린 당신은 바로 구세력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슬프지 않은가?

사람을 벗어나려면 첫걸음이 바로 생사(生死)를 내려놓는 것이다. 이 ‘죽음’은 범골(凡骨)로 나타나는 ‘백골정’의 죽음에 해당한다. ‘생’이란 당신이 법(法)에서 깨달아 수립한 무사무아(無私無我)의 기점 위에 선 정념(正念)이다. 순진(純真)하고 순선(純善)한 그것만이 진정으로 순미(純美)한 당신이다. 먼저 법에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인식해야 한다. 최후까지 수련하고도 사람과 요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잠시 사람이 되었다가 또 잠시 요괴가 되면서 신(神)처럼 되지 못하는가? 오직 구우주의 사(私)를 끊어낼 때라야 비로소 진짜 나(真我)가 각성해서 진짜 신(神)이 될 수 있다. 당신이 보라, 폐단을 고쳐 바로잡고, 가짜 나를 제거하고,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비로소 본래의 참모습이 되돌아 나와 가장 진실된 자신이 되는 것이 좋지 않은가?

제자로서 사부님의 감당은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고 무엇을 얻으려 하시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련해서 사부님께 주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높이 수련해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보다 더 좋고 더 순수한 것을 내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부와 도제가 같은 경지에 있다면 그래도 좋은 것을 내놓아 누리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련의 일은 속인 중의 무슨 기능이나 학문이 아니라 “청출어람(靑出於藍)” 할 수 없다. 사부가 제자를 이끄는 것은 자신의 에너지장으로 이끄는 것이다.

수련의 일은 너무 커서 하늘을 거스르고 마장(魔障)이 겹겹이 있고, 생생세세 업력을 모두 한데 모아 청산해야 한다. 그러니 관관(關關)마다 모두 생사관이다. 만약 사부님이 보호막을 씌워주지 않으시면, 제자의 작은 목숨조차 지키기 어렵거늘, 당신이 무엇으로 사부님을 초월하겠는가?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것으로 자신이 능력이 있다는 과대망상에 빠져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지(理智)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길을 막을 정도로 팽창하지 않을 것이며, 자아 도태의 길에서 점차 멀어질 것이다.

수련인이 일단 득의양양해지면, 곧 향상할 공간이 없으니 이때면 아주 위험하다. 이미 한 발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이다. 수련이란 원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후퇴하는데, 당신이 진보하지 못하면 어디로 물러날 것인가? 마(魔)가 반작용력으로 당신을 끌어당겨 한패가 되는 외에 제 3의 길이란 없다. 어쨌든 당신이 정념(正念)을 내보내지 못하면 곧 사념(邪念)에 의해 통제될 수밖에 없다. 육신 속의 불성(佛性)과 마성(魔性)은 대립하는 것으로, 어느 것이 줄어들고 어느 것이 자라는지, 어느 것이 상대를 압도하는지에 따라 수시로 변화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주의식이 반드시 강해야 하는데 수련의 최후에 부처로 성취하지 못하면 마가 된다. 티베트 밀종의 어떤 법문에서는 신체 속에서 동시에 하나의 법왕과 하나의 마왕을 닦아낼 수 있는데 물론 남의 법문(法門)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에는 모두 이치가 있다는 말이다.

나는 다만 수련의 엄숙성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제자로서 선(善)을 향하는 마음이 비교적 순정해서 사부님의 눈을 더럽히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제자가 사부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다. 사부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탐내실 리는 더욱 만무하다.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은 단지 선(善)의 체현일 뿐,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 무슨 선(善)을 말하겠는가?

또한 창세주께서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무엇을 탐내시겠는가? 하물며 세계는 모두 당신 스스로 개창하신 것이니 본래 당신의 것이라 무엇을 가지려 하면 마땅히 무엇이 있을 터인데 또 무엇을 탐내실 필요가 있겠는가?

이 일은 나로 하여금 박해 초기, 박해를 자행한 악경들이 불법으로 납치한 정법제자들을 향해 자주 외쳤던 한마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너희들은 아직도 바보같이 여기서 줄줄이 감옥에 앉아 고생하고 있지만, 너희 사부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지만, 너희 사부는 해외에서 별장에 살며 스테이크를 먹고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간질하는데 한 말은 전부 사람의 말이 아닌가? 너무나 모욕적인 짓이다! 나처럼 부족한 제자도 속세에 연연하지 않고 물질적 향락을 탐하지 않으며, 의연하게 나서 생사를 내려놓고 정법하는데 사부님께서 이런 것들을 탐내시겠는가? 사부님께서 복을 누리려 하신다면, 우리를 제도하지 않으시면 그만이다. 원래가 대자재(大自在)하신 존재시지만 오로지 우리를 제도하시느라 자재하지 못하신 것이다. 게다가 설사 사부님께서 무엇을 누리신들 이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사부님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을 공양받으실 자격이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직접 밥을 지어도 바라만 보고 먹지 못한다는 것과 같지 않은가? 자신이 지은 밥을 먹는 것을 탐욕심이고 죄악이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물며 내가 납치당해 고생을 좀 겪은 것 역시 다만 나의 업력을 감당할 뿐이다. 그나마도 사부님께서 대부분을 감당하시고, 나의 수련과 심성 제고에 쓰라고 약간만 남겨두신 것이다. 고생스럽다고 불평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감사를 드려도 모자란다. 게다가 제자를 사부님과 나란히 거론할 수 있는가? 근본적으로 같은 위치가 아니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다. 그러니 언제라도 사부님을 의심하려는 염두도 내지 말아야 하는데 사부님께 불경한 마음을 내는 것 자체가 바로 자신을 사부님의 보호권 밖으로 던지는 것과 같아서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오히려 자비롭게 구도하셨기 때문에 중공사당의 공격과 비방을 받으셨고, 죄명을 감당하셨으며, 억만 제자의 업력을 짊어지셨고, 무량한 중생의 죄업을 없애, 시간을 벌어주시고, 중생을 일깨우기 위해 무수한 기연(機緣)을 창조해 구도받을 기연을 주셨다. 이토록 호탕한 불은(佛恩)임에도 세상 사람들이 감사했는가? 어떤 이들은 심지어 진상(眞相)을 들을 용기조차 없다. 믿으면 스스로 미래를 얻고, 믿지 않으면 자신의 길을 막는 것이다. 얻고 잃는 것은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다. 사부님의 자비는 감로(甘露)와 같아서, 촉촉하게 만물을 적시되 소리 없이 어느덧 세간에 이미 널리 퍼져 있다.

구하지 못한들 유감만 좀 남을 뿐, 사부님께서 무엇을 잃진 않으신다. 어쨌든 구우주도 사부님께서 개창하신 것이고, 신우주 역시 사부님께서 개창하신 것이고, 사람을 한 번 만들 수 있다면 여러 번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저 염두를 움직이시는 것에 불과하다. 사부님께서 다시 사람을 만들지 않고 정법을 전해 사람을 제도하시는 것이 사부님의 자비이다. 비록 구우주가 완벽하지 않고 결함이 있어 괴멸(壞滅)로 나아가고 있지만, 법은 원융(圓融)한 것으로 일체 부정확한 요소를 바로잡을 수 있다.

구우주의 원주민으로서, 구우주의 위사(爲私)한 기점을 우주 대법 속에서 무사(無私)한 기점으로 바로잡기만 하면, 이는 곧 탈태환골(脫胎換骨)하여 영혼을 다시 만드는 것과 같다. 우리가 줄어드는 것은 단지 업력일 뿐이며, 수련 중에서 덕(德)으로 전화해 불성(佛性) 속을 충실하게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깨닫는 중에서 우리는 층층 봉인된 에너지를 되찾게 될 것이며, 동시에 수련해 낸 순정한 에너지로 정화해 새롭게 차원을 높여 신우주의 표준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제자가 모든 중생을 구하지 못하면 그저 유감스러운 문제만이 아니다. 수련 성취해도 그저 나 홀로 대장[光杆司令]이 될 것인데, 하물며 이런 상태로는 근본적으로 수련 성취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해야 한다. 설령 일부 떨어지더라도, 너무 초라해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생명 체계는 어떤 것은 전부 다 따라 내려와 전반 세계가 텅 비어 있으니, 속세에 미혹되어 우리가 가서 진상을 알려 일깨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가급적 원래 멤버들을 온전하게 데리고 돌아가고 싶다면,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법이 커서 지혜가 크고 능력도 큰 데다 그래도 안 되면 사부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오직 이런 바람이 있다면, 그럼 더욱 힘을 내라! 좀 정진하고, 더 정진하며, 더더욱 정진한다면, 그럼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5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