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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를 관통하는 재학으로 만세에 모범이 된 제갈량 (8)

——북벌과 국궁진췌(鞠躬盡瘁) 하

고춘추(古春秋)

【정견망】

청 전장본(殿藏本) 제갈량 채색 초상 (공유 영역)

제갈량이 기산에서 팔진(八陣)를 펼치다 (공유 영역)

제4차 북벌

건흥 9년(231년) 2월, 제갈량은 여러 군대를 이끌고 다시 기산(祁山)을 포위했다. 새로 만든 목우(木牛)로 군량을 운반했으며, 이엄에게 중독호(中督護)로 승상부의 일을 겸하게 하여 한중(漢中)에서 군량 수송을 전담하게 했다. 이때 위의 대사마 조진이 병석에 눕자, 위 명제 조예는 완성(宛城)을 지키던 대장군 사마의를 특별히 불러들여 “서쪽에 일이 생겼으니 그대가 아니면 맡길 사람이 없소”라고 말하며 그를 장안으로 보냈다. 사마의는 옹주(雍州)와 양주(涼州)의 군사 업무를 총괄하며 거기장군 장합, 후장군 비요(費曜), 정촉호군 대릉(戴陵), 옹주 자사 곽회 등을 거느리고 촉군을 토벌하러 나섰다. 장합은 사마의에게 군대를 나누어 옹현과 미현에 주둔시켜 후방을 지키자고 제안했다.

사마의는 장합의 말에 찬성하며 기산으로 진격했다. 제갈량은 사마의의 대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 병력을 남겨 기산을 계속 공격하게 한 뒤 자신은 직접 상규(지금의 감숙 천수)로 가서 사마의와 맞섰다. 곽회와 페요 등이 맞서 싸웠으나 모두 제갈량에게 격파되었다.

제갈량과 사마의는 상규(上邽) 동쪽에서 대치했다. 사마의는 촉군이 멀리서 와 식량이 한정되어 있어 결전을 서두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촉군의 기세를 피해 험준한 곳에 의지해 굳게 지키며 끝내 싸우러 나오지 않았다. 제갈량은 유인책을 쓰기 위해 퇴각했으나, 사마의는 뒤를 쫓기만 할 뿐 촉군이 멈춰 서면 다시 진을 치고 수비에만 전념했다.

청 전장본(殿藏本) 제갈량 채색 초상 (공유 영역)

사마의가 산에 올라 진을 파고 수비만 할 뿐 교전하지 않자, 장군 가후(賈詡)와 위평(魏平)이 여러 차례 출전을 요청했다. 사마의가 허락하지 않자 장수들은 “공은 촉나라를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시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라며 비웃었다.

5월, 사마의는 장수들의 거듭된 요청에 못 이겨 군사를 내보냈다. 장합에게는 기산 남쪽에 주둔한 촉의 무당감(無當監) 왕평(王平)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중군을 이끌고 제갈량에 맞섰다.

제갈량은 대장 위연, 고상(高翔), 오반(吳班)을 보내 응전하여 위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때 “갑옷 입은 적의 머리 3천 급, 검은 갑옷 5천 벌, 각궁 노(弩) 3천 1백 장을 획득했다.” 사마의는 진영으로 돌아가 다시 굳게 지켰다. 기산 쪽에서도 왕평이 남쪽 진영을 굳게 지켜 장합이 함락시키지 못했고, 사마의의 중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장합 역시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6월이 되자 촉군은 위군을 크게 이겼음에도 군량이 다했고, 한중에서는 후주 유선이 회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사실 이엄이 가짜 성지를 전한 것). 제갈량은 철수를 시작했다.

사마의가 추격을 명령하자 장합은 “군법에 돌아가는 군대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듣지 않았고 장합은 할 수 없이 추격에 나섰다. 목문(木門 지금의 감숙 서화현西和縣 동남)에 이르렀을 때, 높은 곳에 매복해 있던 촉한의 군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 장합의 오른쪽 무릎을 맞혔고 장합은 부상이 깊어 사망했다.

알고 보니 이엄(후에 이평으로 개명)은 장마로 제때 군량을 보내지 못하자 책임을 면하기 위해 거짓 성지를 만들어 제갈량을 철수시킨 것이다. 이 사실이 밝혀진 뒤, 제갈량은 법기를 엄정히 세우기 위해 그를 서민으로 강등시켰다. 4차 북벌 당시 제갈량은 ‘유마(流馬)’라는 운송 도구를 설계했다.

제5차 북벌

건흥 12년(234년) 봄 2월, 제갈량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사곡으로 출진했다. 목우와 유마로 군량을 나르며 무공현 오장원(五丈原 지금의 섬서 미현郿縣 서남)에 진출하여 위수 남쪽에 주둔했다. 사마의 역시 군을 이끌고 위수를 건너 배수진을 치고 방어에 나섰다.

제갈량은 매번 출전할 때마다 식량이 떨어져 돌아갔기에, 이번에는 기산으로 나간 뒤 농사를 장려하고 무예를 닦으며 사곡에 창고를 지었다. 백성을 쉬게 하고 병사들을 보살피며 3년을 준비한 끝에 나선 길이었다. 제갈량은 모든 동원 가능한 병력을 이끌고 북벌에 나서는 한편, 오나라 손권에게 사신을 보내 동시에 위를 치기로 약속했다.

사마의는 여전히 교전을 피하며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썼다. 촉군과 100여 일 동안 대치하며 여러 차례 도전받았으나 사마의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사마의를 도발하기 위해 여자 옷(건괵)을 보내 위나라 장수들은 격노하게 했다. 사마의는 부하 장수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위 명제에게 표문을 올려 싸울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명제는 위위(衛尉) 신비(辛毗)를 군사(軍師)로 보내 사마의를 제지하게 했다.

강유가 제갈량에게 “신비가 왔으니 위군이 더욱 나오지 않겠군요”라고 하자, 제갈량은 이렇게 답했다. “사마의는 본래 싸울 생각이 없었네. 청전(請戰)이라는 것은 장수들에게 자신이 겁쟁이가 아님을 보여주려는 쇼일 뿐이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주의 명도 받지 않을 수 있는 법’인데, 진정 싸우고 싶었다면 스스로 결정하면 될 일이지 어찌 천 리 길에 허락을 구하겠는가?”

8월, 제갈량은 과로로 병이 깊어졌다. 이 소식이 성도에 전해지자 유선은 이복(李福)을 보내 문안하고 국가의 대계(大計)를 묻게 했다. 이복이 떠났다가 며칠 만에 돌아오자, 제갈량은 자신의 후계자를 묻기 위함임을 알고 “당신이 돌아온 뜻을 아오. 장완이 적임자요”라고 답했다. 이복이 장완 다음을 묻자 “비의가 이을 수 있소”라고 했다. 그 다음을 묻자 제갈량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 후, 제갈량은 오장원 군영에서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이 죽자 대장 강유와 양의는 그의 유언에 따라 부고를 내지 않고 군대를 정돈해 조용히 퇴각했다. 사마의가 추격해오자 양의는 군사를 돌려 위군을 향해 돌격하는 태세를 취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은 척 유인하는 것이라 의심해 서둘러 후퇴했다. 촉군이 여유롭게 사곡에 진입한 뒤에야 제갈량의 죽음을 공식으로 발표했다. 사마의가 겁을 먹고 도망친 일은 웃음거리가 되었고, 사람들은 “죽은 공명이 산 중달(仲達 사마의)을 쫓아냈다”고 말했다.

사마의는 이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으며 “내가 산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있어도, 죽은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었기 때문이오”라고 변명했다.

제갈량의 치군(治軍) 재능

촉한은 삼국 중 기반이 가장 약하고 건국도 가장 늦었다. 제갈량이 유비 부자를 보좌해 위, 오와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쉬운 성취가 아니었다.

사서에 남겨진 간략한 기록만으로도 제갈량의 치국(治國)과 치군(治軍) 재능은 고금에 대적할 사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정 전투 패배 후에도 서현의 백성 천여 가구를 무사히 한중으로 데려온 점이나, 오장원 둔전 당시 군사들이 현지 주민들과 섞여 농사를 지으면서도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한 점 등이 그러하다.

제갈량은 군대를 잘 절제시켰고 그의 군대는 ‘인자(仁者)의 군대’였다. 북벌 과정에도 촉군의 군기는 아주 엄격했다. 진수는 《제갈량전》에서 “군진이 정연하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이 분명했다… 둔전을 하여 오래 머무를 기반을 닦으니 백성들이 편안히 거주하고 군사들이 사사로이 행동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배송지주에서 인용한 《원자(袁子)》에서도 제갈량을 칭송하기를 “군사가 드나듦에 마치 손님 같았고, 길에서 약탈하지 않았으며, 땔감을 줍는 이들도 사냥을 하지 않아 마치 국내에 있는 것과 같았다”고 했다. 즉 군사들이 예절이 바르고 백성들을 약탈하지 않아 본국에 있을 때와 같았다는 의미다.

촉군은 훈련이 잘 되어 전투력이 막강했다. 진수는 “군대를 잘 다스렸다”고 했고, 원준(袁准)은 그의 군대가 “멈출 때는 산 같고 나아가고 물러남은 바람과 같았다”고 평했다.

제갈량은 병기 연구에도 정통했다. 진수는 《촉서 제갈량전》에서 “제갈량은 천성이 기교를 요하는 사고에 장점이 있어 연발의 쇠뇌를 손익한 것과 목우, 유마가 모두 그의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했다.

《송서(宋書) 은효조전(殷孝祖傳)》에 따르면 그가 만든 갑옷과 투구는 엄청난 위력의 석노(石弩)로 쏴도 뚫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가 개량한 연노는 한 번에 열 발의 화살을 쏠 수 있어 ‘신노(神弩)’라 불릴 만큼 위력이 대단했다.

《위씨춘추(魏氏春秋)》에서는 “손익연노(損益連弩)는 원융(元戎)이라 하는데, 철로 화살을 만들고 화살 길이는 8촌이며, 노 하나에서 화살 10발이 함께 발사된다”고 하였다.

《촉기(蜀記)》의 기록에 따르면, 서진(西晉) 초기 진남장군(鎭南將軍) 유홍(劉弘)이 제갈량이 개량한 이 연노를 찬양하며, “신묘한 노의 공효가 어찌 이리 정묘한가!”라고 말하였다.

제갈량은 진법(陣法)에도 정통했다. 진수는 “제갈량이 병법을 미루어 넓혀서 팔진도(八陣圖)를 만들었는데 모두 그 핵심을 얻었다”고 했다. 서진의 장수 유홍은 “그대의 팔진도를 헤아려 보니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제갈량 자신도 “팔진이 완성되었으니 앞으로 군대를 운용함에 거의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촉이 멸망한 후, 진 무제(武帝)는 진협(陳勰)에게 제갈량의 진법과 용병(用兵) 및 의복(倚伏 매복하거나 위장하는 전술)의 법을 전수받게 했다. 원준(袁准)은 “제갈량이 행군할 때 이르는 곳마다 영루(營壘), 우물과 아궁이, 뒷간, 울타리, 보루 등이 모두 먹줄을 친 듯 규격에 맞았으며, 한 달을 행군하다 떠나도 처음 도착했을 때와 같았다”고 칭송했다.

제갈량이 사후 군대가 퇴각한 뒤, 사마의가 촉군이 머물던 영루를 순시한 후 제갈량을 가리켜 “천하의 기재(奇才)”라고 감탄했다.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16/6/2/n795754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