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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곡관 자기동래(紫氣東來)의 전설

초약미(楚若薇)

【정견망】

노자(老子)가 중원을 떠나 서쪽 함곡관(函谷關)을 나서 곤륜(崑崙)에 오르려 했다. 관령(關令 관문의 책임자) 윤희(尹喜)가 천상(天象)을 관찰해 동방에 자기(紫氣)가 서쪽으로 몰려오는 것을 보고 장차 성인께서 관을 나서 서쪽으로 나가실 것을 알았다. 이에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 40리 길을 청소하게 하고 또한 관을 지키는 이들에게 “만약 비범하고 세속을 벗어난 수레나 옷을 입은 분 있으면 절대 관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관령 윤희는 천수(天水) 사람이다. 그의 모친이 한번은 낮잠을 자다가 천상에서 붉은 구름이 내려와 신체 주위를 감싸는 것을 보았다 이에 곧 임신했다. 윤희가 출생할 때 그의 집 마른 밭에 뜻밖에 연꽃이 활짝 피었다. 윤희가 성장한 후 눈이 신처럼 빛나고 사방에 빛을 뿌렸으며 신체가 가늘고 길어 신채가 가득했다. 두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갔으며 체격이 훤칠해서 신선의 풍모가 있었다. 윤희는 어려서부터 고대 전적(典籍) 읽기를 좋아했고 도가 수양에 관한 학문과 성수(星宿 별자리) 천상(天象)에 뛰어났다. 또 남을 즐겨 돕고 명예를 구하지 않았으며 영예나 지위를 추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주나라 조정의 대부(大夫)로 있다가 천상을 미리 알고 상서를 올려 이곳 함곡관령으로 부임할 것을 자청했다.

과연 어느 날 노자가 푸른 소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관을 지나갔다. 관을 지키는 이들이 보고하자 윤희가 기뻐하며 말했다.

“오늘에야 마침내 성인을 뵐 수 있겠구나.”

이에 조복(朝服)을 입고 나가 노자를 맞이했다. 노자를 보고는 곧 알아보았다. 그는 땅에 무릎을 꿇고 노자에게 말했다.

“간청컨대 부디 이곳에 잠시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노자가 사절하며 말했다.

“저는 단지 지위가 낮은 늙은이에 불과합니다. 함곡관 동쪽에 사는데 함곡관 서쪽에 땅이 있어서 지금 잠시 이곳에 땔감을 구하러 왔을 뿐인데 당신은 왜 저를 머물라 하십니까?”

윤희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오늘 어르신의 뛰어난 신채(神彩)와 탈속한 모습을 뵈니 바로 천하의 지존(至尊)이십니다. 어디 나무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당신께서 장차 서쪽으로 떠나실 것을 아는데 오랫동안 풍찬노숙을 하셨을 테니 부디 제가 있는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시길 바랍니다. 제 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노자가 말했다.

“내가 함곡관을 지나간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윤희가 말했다.

“작년 겨울 10월 천리성(天理星)이 서쪽으로 운행하면서 묘수(昴宿)를 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 달 초하루 동풍(東風)이 함곡관에 3차례 불어왔습니다. 동방의 진기(真氣)는 그 형상이 용사(龍蛇)와 비슷한데 서쪽으로 갔습니다. 이는 대성인(大聖人)께서 나타나실 징조입니다. 이에 반드시 성인께서 관을 지나가실 것을 알았습니다.”

노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선재(善哉)로다, 보아하니 네가 나를 아는 것 같구나. 나 역시 진작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 너는 신(神)과 통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장차 세속을 벗어나 신선이 될 것이다.”

윤희가 다시 노자에게 읍(揖)하며 말했다.

“제가 감히 어르신의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노자가 말했다.

“내 성과 이름은 아득한데 겁(劫)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다 말할 수 없노라. 지금은 성이 이(李)씨이고 자는 백양(伯陽)이며 호는 노담(老聃)이라 한다.”

노자가 중원에 있을 때 그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는데 또한 윤희의 운명 속에 마땅히 도를 얻어야 했기에 이에 잠시 관중에 머물렀다.

윤희가 노자를 관아로 맞아들여 잔치를 베풀고 대접하면서 제자의 예로 모셨다. 노자는 함곡관에서 백여 일을 머물고 내외수련의 법을 전부 윤희에게 전수해 주었다.

《사기·노자한비열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노자가 도덕을 닦으니 그 학문이 자연히 은거와 무명을 위주로 했다. 주(周)에서 거주한 지 오래되어 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떠났다. 관에 이르자 관령(關令)인 윤희가 말했다. ‘장차 은거하시려면 제게 책을 써 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노자가 상하편을 저술하니 도덕의 뜻을 오천언 말하고 떠났으니 그 후 어떻게 마쳤는지 알 수 없다.”

《역세진선체도통감(歷世眞仙體道通鑑)》에서도 윤희가 《도덕경》을 청하여 받은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데, 노자(老子)가 곧 《도(道)》와 《덕(德)》 5천 자를 저술하여 윤희에게 전해주었다. 윤희는 절을 하며 받아 기뻐하며 뛰었고, 이를 지니고 암송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도를 이룬 후에는 곧 후학들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노자가 서쪽으로 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일치된 공론이다. 하지만 도대체 서쪽 어디로 갔는지, 떠날 때 통과한 곳이 어느 ‘관문’이었는지는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국내외 노자 연구 전문가와 학자들 사이에서 노자가 글을 남긴 ‘관문’으로 현재 학계에서 비교적 인정받는 곳은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하남성 영보현 동북쪽 효산(殽山)에 위치한 함곡관(函谷關)이고,

다른 하나는 섬서성 보계시 서남쪽 대산령(大散嶺) 위에 위치한 대산관(大散關)이다.

지리적 위치로 보면 함곡관은 동주(東周)의 도읍인 낙읍(洛邑)의 서쪽에 있고, 대산관은 서주(西周)의 도읍인 풍호(豊鎬)의 서쪽에 있다.

《사기》에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물으려 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자는 동주(東周) 시기 인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유향(劉向)은 《열선전(列仙傳)》 〈노자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후에 주나라의 덕이 쇠하자 푸른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떠나 대진(大秦)으로 들어갔다. 서쪽 관을 지날 때 관령 윤희(尹喜)가 기다리다 그를 맞이하고는 진인(眞人)임을 알아보았다. 이에 강권하여 저술하게 하니 《도덕경(道德經)》 상하 두 권을 지었다.”

〈관령윤〉 편에서도 “후에 노자와 함께 유사(流沙)에서 노닐며 오랑캐를 교화했다”라고 전한다. 관중 사관(四關)은 동쪽의 함곡관(동한 이후 동관으로 대체), 서쪽의 대산관, 남쪽의 무관(武關), 북쪽의 소관(蕭關)이다.

동진(東晉)의 갈홍(葛洪)은 《포박자》에서 노자가 통과한 관문이 산관(散關)이라고 직접 명시했다. “노자가 서쪽으로 노닐다 대산관에서 관령 윤희를 만나, 윤희를 위해 《도덕경》 한 권을 지었으니 이를 《노자》라 한다.”

산관은 관중과 천촉(川蜀)을 잇는 요충지로, 진령(秦嶺)과 농산(隴山)이 나뉘는 골짜기의 북쪽 끝에 처해 있어 예로부터 병가에서 반드시 취해야 할 요지였다. 진나라 말기 유방과 한신이 ‘잔도(棧道)를 수리하는 척하며 몰래 진창(陳倉)을 건넜다’는 고사가 바로 산관을 거쳐 진창으로 나가 관중으로 진입하여 장한을 격파하고 관중을 차지한 이야기다.

삼국시대 조조 역시 산관을 거쳐 한중의 장로를 공격했다. 제갈량이 기산으로 여섯 번 나아가 북벌할 때 걸었던 길도 산관이다. 육유(陸游)는 이에 ‘철마추풍대산관(鐵馬秋風大散關 철갑을 두른 말과 가을 바람 부는 대산관)’이라는 명 구절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함곡관을 나선 것은 단지 동주의 도읍인 낙읍을 떠난 것일 뿐이다. 산관을 나선 뒤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주나라 천하를 떠나 다른 민족의 땅으로 간 것이며, 그곳에서 마침내 자취를 감추었다고 볼 수 있다.

북송의 소동파 역시 산관 옛터에서 시를 읊었다.

윤희의 집은 아직 남아 있으니,
노씨가 옛날 수레를 멈춘 곳이라.
도(道)를 물은 흔적 남아 있으니,
신선되어 떠난 옛일 아득하구나

尹生猶有宅,老氏舊停輈
問道遺蹤在,登仙往事悠

떠나기 전 노자는 윤희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떠나면 무명(無名)의 상태로 되돌아가려 한다.”

윤희가 곁에서 모시기를 간청하자 노자가 말했다.

“나는 천지 안팎을 노닐며 현명(玄冥)의 사이를 넘나든다. 사유팔극(四維八極)과 하늘 위 땅 아래 가지 않는 곳이 없거늘, 네가 어찌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

윤희가 대답했다.

“끓는 물과 불 속이라도 들어가고, 하늘 위 땅 아래라도 가겠사오며, 설령 목숨을 잃어 재가 될지언정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노자가 말했다. “네 골상(骨相)이 비록 도와 합치되어 도법(道法)을 수행하면 진인(真人)이 될 것이나, 아직 도를 배운 시간이 짧아 신통변화를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나를 따르겠느냐? 너는 더 정성껏 도법을 닦고 자연에 순응하라. 장차 도를 이룬 후에 사방을 교화하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노자는 공중으로 비상하여 오색 상서로운 구름 위에 앉았다. 사방으로 눈부신 금빛 광채를 내뿜으며 천천히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 빛이 주위의 건물을 비추었는데 색채가 찬란하고 화려했으며 한참 뒤에야 사라졌다. 윤희가 구름 위 하늘을 바라보며 두 줄기 눈물을 흘리니 이별의 아쉬움이 끝이 없었다. 그날 강물이 범람하고 산천이 진동했으며, 오색 광채가 허공을 가로질러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후 윤희는 노자가 전수한 수신(修身)의 요지에 따라 사치와 욕망을 없애고 인사(人事)를 끊었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스스로 청허(淸虛)를 지켰다. 마치 화살을 쏘는 것처럼 ‘마음은 평온하고 몸은 바르게(心平體正)’ 유지하며 자신을 다스린 지 3년 만에 도(道)를 이루었다. 노자가 전수한 책은 무엇이든 그 절묘한 뜻을 깨우쳤다.

《한서·예문지》에는 윤희가 찬술한 《관윤자(關尹子)》 9편이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소실되었다. 《장자·천하편》, 《열자·황제편》, 《여씨춘추》 등에 관윤(關尹)의 대화와 사상 단편들이 실려 있다.

《열선전전(列仙全傳)》에는 도를 얻은 후의 성황(盛況)이 기록되어 있는데, 윤희에게 옥책금문(玉冊金文)을 수여하고 문시선생(文始先生)으로 봉했으며 존위는 무상진인(無上眞人)으로 삼았다. 자색 연꽃관과 푸른 깃털 치마, 붉은 소매 옷과 화려한 무지개 옷, 비단 무늬의 황색 인끈, 아홉 빛깔의 부절을 하사했다. 24천왕(天王)의 위에 거하며 8만 선사(仙士)를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허공을 날아오르고 용이 끄는 수레를 모시게 되었으며, 그 집안의 남녀노소 200여 명도 즉시 집과 함께 하늘로 올랐다.

《여씨춘추·불이편(不二篇)》에서는 천하의 호걸 10명을 거론하며 관윤을 네 번째 자리에 두었다. “노담(老聃 노자)은 부드러움을 귀하게 여겼고, 공자(孔子)는 어짊을 귀하게 여겼으며, 묵적(墨翟)은 청렴함을, 관윤은 맑음을, 열자(列子)는 비움을, 진변(陳駢)은 가지런함을, 양생(陽生)은 자기 자신을, 손빈(孫臏)은 형세를, 왕료(王廖)는 앞섬을, 아량(兒良)은 뒤처짐을 귀하게 여겼으니 이 열 사람은 모두 천하의 호걸이다.”

원 순제(順帝) 지원(至元) 3년(1266)에 문시윤진인(文始尹眞人)으로 추가적으로 봉했고 무상태초박문문시진군(無上太初博文文始眞君)이라 하였다. 또한 도교 종파 중 하나인 ‘누관도’(樓觀道)의 조사(祖師)로 받들어졌다.

예부터 사람들은 우주의 진리를 구해왔다. 역사적으로 도가(道家) 학설이 끊임없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도(道)의 경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도와 함께 태어나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것이 곧 가장 오래된 장생불로(長生不老)의 염원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방면의 탐구가 이루어졌다. 윤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바는 이러하다. 사람이 ‘비상도(非常道)’의 도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간의 사치와 욕망을 내려놓고 청허함을 스스로 지키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하며, 인간의 도덕을 지키는 것 또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이다.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847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