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제갈량과 낙산대불(樂山大佛). (공유 영역, 에포크타임스 합성)
《신승전(神僧傳)》이란 고적에 이러한 일이 기재되어 있다. 서기 746년, 당시 몹시 빛나던 위(韋)씨 가문에 사내아이가 하나 태어나 이름을 위고(韋皋)라 지었다.
위고가 태어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집안에서 승재(僧齋)를 열어 많은 고승을 초청해 아기의 복을 빌었다. 이때 한 이름 모를 인도 승려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찾아와 갓난아기인 위고를 보더니 “헤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별고 없었는가?”라고 물었다. 갓난아기가 그의 말을 알아듣는 듯 그를 보고 활짝 웃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위고 어머니의 거듭된 물음에 그 승려는 위고가 바로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의 전생(轉生)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대대로 장수를 배출하는 집안에 태어났으며, 나중에 촉(蜀) 땅의 원수가 되어 그곳을 비호할 것이라고 했다.
이후 위고의 성장 과정은 과연 그 인도 승려의 말과 부합했다.
위고는 재학(才學 재주와 학문)이 남달랐고 명문가 출신이라 벼슬길도 순탄했다. 그러나 그가 한창 뜻을 얻었을 때 병변(兵變)이 일어났다. 서기 783년, 회서(淮西)절도사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키자 덕종(德宗)은 요령언(姚令言)에게 진압 병력을 이끌고 구원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요령언이 5천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에 도착했으나, 당시 날씨가 몹시 춥고 병사들은 지치고 배가 고픈 상태였다. 경조윤(京兆尹) 왕상(王翔)이 거친 밥을 주자 경원(涇原)의 병사들이 보상이 너무 적음에 불만을 품고 병변을 일으켜 장안성을 점령했다. 난병(亂兵)들은 당시 장안에 있던 전(前) 봉상농우(鳳翔隴右)절도사 주자(朱泚)를 진황제(秦皇帝)로 추대했고, 덕종은 황급히 봉천(지금의 섬서陝西 건현乾縣)으로 피신했다.
당시 농주(隴州 지금의 섬서 농현隴縣)에 있었던 위고는 지모를 발휘해 전세를 역전시켰고, 덕종 황제가 장안으로 돌아오게 했다. 이 공으로 좌금오위(左金吾衛)장군에 올랐고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이후 그는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에 봉해져 봉강대리(封疆大吏)가 되었으며, 촉 땅의 수호자로서 화려한 정벌 전쟁의 생애를 시작했다.
파촉 땅을 안정시키다
당나라 역사를 아는 이라면 검남서천절도사가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님을 알 것이다. 촉 땅은 백성들이 풍속이 강하고 사나운데, 소수민족이 많을 뿐만 아니라, 남쪽에는 남조(南詔)가 있고 서쪽에는 토번(吐蕃)이 있었다. 현종 천보(天寶) 전쟁 시기 당군과 남조의 전쟁에서 무려 18만 정예군이 이 땅에서 몰살당한 적도 있었다.
위고가 있는 곳에서 인근인 운남 한 곳의 소수민족만 해도 수십만이었고, 토번은 침략할 때 종종 이들을 앞세웠기에 당군에게는 매우 큰 압박이었다.
중국의 전술은 지혜와 용맹의 싸움을 중시한다. 위고는 단지 싸움만 아는 무장이 아니었다. 그는 부임 후 검남 지역을 위협하는 적들을 신속히 분석해 각기 다른 대응 방식을 세웠고 성과를 거두었다.
덕종 정원(貞元) 15년, 제국 서남방에는 위고로 대표되는 대당(大唐)과 남조가 연합해 토번에 대항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변경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으나, 위고의 영도 하에 패배하는 쪽은 언제나 토번이었다.
단속적으로 이어지던 전쟁은 정원 17년에 이르러 마침내 큰 전쟁으로 번졌다. 위고는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군대를 열 갈래로 나누어 토번의 심장부로 대거 진격했다. 분산된 군대는 각개격파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작부터 토번과 아랍 압바스 왕조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 대규모 전쟁은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졌다. 10월에 이르러 위고는 토번군 16만을 격파하고 7곳의 성과 군진(軍鎮) 5곳을 함락시켰다. 이어 유주(維州)를 공격하며 토번의 구원병을 하나하나 격파했다. 이에 토번의 찬보(贊普 왕에 해당)가 제국 서북방을 공격하던 군대를 불러들여 구원하게 했고, 결국 유주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이 결전에서 위고는 적을 깊숙이 유인하는 계책을 써서 10만 적군 중 절반 이상을 섬멸하고 적의 총지휘관인 논망열(論莽熱)을 사로잡았다.
위고는 촉 땅에 21년간 머물며 총 48만의 토번군을 격파했고 절도(節度), 도독(都督), 성주(城主), 농관(籠官 성을 닫고 저항하는 관리) 등 1,500명을 사로잡거나 처단했다. 또한 소와 양 25만 마리, 병기 630만 점을 노획했다.
위고와 동시대 무장 중 그를 능가할 자가 거의 없었다. 위고는 전쟁뿐만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능했다. 촉 땅을 매우 잘 다스려 위고가 죽은 후 촉 사람들은 그의 초상화만 봐도 절을 하며 제사를 지냈을 정도였다. 또한 태자(훗날의 순종)를 보필해 보위에 오르게 했으며 나중에 남강군왕(南康郡王)에 봉해졌다.
천고에 불후할 위대한 일
위고는 문(文)으로 나라를 평안케 하고 무(武)로 나라를 안정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서(詩書)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정통한 전재(全才)였다. 그러나 그가 행한 천고에 불후할 일은 관직 생활에만 있지 않았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만난 인도 승려의 일화에서 보듯 위고는 불교와 인연이 깊었으며, 평생 신심 있게 불법을 숭상했다. 그가 한 가장 어렵고 또 소중한 일은 바로 낙산대불(樂山大佛) 건립을 완공했다는 점이다.
낙산대불은 현종 개원 초년(서기 713년)에 착공되었다. 건립 이유는 고대 낙산은 세 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라 물살이 매우 험해 배가 자주 뒤집혔기 때문이었다. 여름 홍수 때면 강물이 산벽을 들이받아 배가 부서지고 사람이 죽는 비극이 잦았다. 해통(海通) 선사가 물살을 다스리기 위해 인력과 물자를 모아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대불(大佛) 건립 소식이 퍼지자 원근의 유능한 장인들이 다투어 능운산(凌雲山)으로 모여들었다. 공사가 시작되던 날 수천 개의 망치가 바위를 치는 소리와 함성이 하늘을 찔러 천고에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했다. 전설에 따르면 강바닥 깊은 곳에서 풍랑을 일으키던 물속 괴물들도 겁에 질려 물 밖으로 튀어나와 황급히 도망쳤다고 한다. 대불의 윤곽이 드러날수록 세 강이 만나는 곳은 점차 평온해졌다.
하지만 대불이 어깨 부분까지 만들어졌을 때 해통 선사가 입적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몇 년 후 검남서천절도사 장구겸경(章仇兼瓊)의 기부를 받아, 해통의 제자가 장인들을 이끌고 대불을 계속 조성했다. 그러나 무릎 부분까지 조성했을 때 장구겸경이 호부상서로 이직하며 공사는 다시 멈추었다.
40년 후 위고가 재물을 기부해 낙산대불 건립을 이어갔다. 이처럼 3대(代)에 걸친 장인들이 90년의 시간을 들인 끝에 서기 803년, 낙산대불이 마침내 완공되었다. 위고는 《가주 능운사 대미륵석상기(嘉州凌雲寺大彌勒石像記)》를 지어 대불 조성의 시말을 기록으로 남겼다.
낙산대불은 총 높이가 71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 불상이며, 세계 2위인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대불보다 18미터나 더 높다. 이 미륵불 좌상은 두 손을 무릎에 얹고 발로는 연꽃을 밟은 채, 동쪽으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자비로운 모습으로 중생을 보살피고 있다.
그러나 위고가 이 위대한 공정을 최종적으로 완성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드물며, 그가 본래 제갈량의 전생이었다는 사실은 더욱 알려지지 않았다.
(NTV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17/9/23/n9662974.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