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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대의지인(大義之人) — 제갈량

여일(如一)

【정견망】

‘의(義)’를 말하면 많은 이들이 《삼국연의》를 떠올리는데, 특히 도원에서 유비, 장비와 결의를 맺은 후 ‘의기가 하늘을 찌른(義薄雲天)’ 관우를 떠올린다.

조조는 관우를 자기 사람으로 포섭하기 위해 그를 포위하고도 죽이지 않고 투항을 권했다. 이에 관우는 산에서 주둔하며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중 하나가 유비의 소식을 들으면 즉시 떠날 것이며 이를 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귀순 후 조조가 많은 금은보화를 내렸으나 관우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봉인해 두었다. 또 관우와 두 형수 사이의 윤리를 어지럽히려 조조가 한 방에 거처하게 하자, 관우는 밤새 문밖에서 촛불을 밝히고 《춘추》를 읽으며 항렬과 윤리를 어기지 않았으며 매일 두 형수에게 안부를 물었다. 유비의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관인을 걸어두고 황금을 봉한 채 형수들을 데리고 오관을 돌파하며 여섯 장수의 목을 베었다. 훗날 적벽대전 중 화용도에서 의리로 조조를 놓아준 일도 유명하다.

관우는 이를 통해 ‘의’의 행위와 언행, 내함을 충분히 보여주었고, 후인들은 이 때문에 그를 ‘재신(財神)’으로 받들기까지 했다. 제갈량이 출산하기 전까지 관우는 확실히 ‘의’를 연기한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책 전체를 통찰해 보면 관우를 진정한 대의지인(大義之人)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발견되는데, 바로 ‘유종의 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출사한 후 한동안 관우의 표현은 규범에 맞았으나, 촉한 건국 후 관우는 자부심과 오만함, 관용이 부족해 결국 계책에 빠져 맥성에서 전사했다. 그러므로 ‘의’의 내함을 완벽히 풀어낸다는 면에서 관우는 온전한 주인공이라 하기 어렵고 진정한 대의지인이라 불리기에는 부족하다.

션윈예술단(神韻藝術團) 공연 중 〈초선차전(草船借箭)〉이라는 무용 프로그램이 있다. 제갈량이 등장하여 보여주는 몇 가지 무용 동작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유약한 서생’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뜨린다. 그때 나는 ‘이야말로 진정한 제갈량의 이미지이며, 진정한 대의지인의 이미지’라고 느꼈다.

《삼국연의》에선 제갈량의 외모를 “키가 8척이요, 얼굴은 관옥 같으며, 머리에는 윤건을 쓰고 몸에는 학창의를 입어 풍채가 신선과 같았다”고 묘사했다. 또 다른 사료에는 “키가 8척(약 184cm)에 용모가 매우 위엄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절친인 서서는 제갈량의 재능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저를 그와 비교하는 것은 둔마(駑馬)를 기린(麒麟)에 비하고, 까마귀를 봉황에 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스스로 관중과 악의에 비유하나, 제가 보기엔 관중과 악의도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는 세상을 다스릴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를 가졌으니 천하에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제갈량은 유약한 서생으로 각인되어 주인공으로서의 진정한 내함이 크게 약화되었다.

노신(魯迅)은 “제갈량의 지혜를 묘사한 것이 요괴에 가깝게 그렸다”고 평가했고 여기에 중공 두목 모택동이 노신을 추앙하자 대륙 지식인들은 제갈량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어도 감히 표현하지 못했다. 생존을 위해 부화뇌동하거나 이익을 위해 단장취의(斷章取義) 하는 식으로 제갈량을 추악하게 만들고 왜곡해 중공 당문화(黨文化)에 영합해 왔다.

필자가 제갈량을 진정한 대의지인이라 부르는 한 가지 원인은 그가 ‘처음이 있고 끝이 있었기(有始有終)’ 때문이다. 유비의 삼고초려에 감동해 출사한 후 그가 보여준 모든 정치, 군사, 통치 능력은 대의(大義)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박망파의 화공(火攻)으로 첫 번째 공을 세운 것부터 신야를 불태우고, 동오의 선비들과 설전하고, 지혜로 주유를 격발하고, 초선차전, 차동풍, 화용도에 관우를 보내 조조를 놓아주고, 주유가 세 번 화나게 하며, 지혜롭게 노숙의 제안을 거부하고, 계책으로 마초를 거두기까지, 그리고 촉한 건국 후 맹획을 일곱 번 잡았다 풀어주고, 백제성의 탁고, 육출기산(六出祁山), 강유를 거두고, 출사표, 목우와 유마, 연노, 오장원에서의 죽음 및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은’ 일까지 모두 그러하다.

《삼국지평화》에 따르면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후 사마의가 제갈량의 영채를 보고 “천하의 기재(奇才)로다!”라며 감탄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날 밤 광풍이 불며 신인(神人)이 나타나 “군사(軍師)의 명으로 서신을 전하러 왔다”고 했다.

사마의가 받아서 보니 “내가 죽어도 한의 천명은 아직 30년이 남았으니, 만약 한이 망하면 위도 멸하고 오가 그 뒤를 따를 것이다. 그대의 가문이 천하를 통일할 것이나, 만약 미혹되어 망령되이 움직이면 화가 그대에게 미칠 것이다”라는 취지가 담겨 있었다.

사마의가 서신을 보고 따르지 않으려 하자 신인이 크게 꾸짖었고, 사마의는 “군사의 명을 따르겠습니다”리고 대답한 뒤 꿈에서 깼다. 때문에 사마의는 변방을 지키기만 할 뿐 한과 다투지 않고 조정으로 돌아갔다. 즉, 제갈량이 죽어서도 꿈에 나타나 사마의에게 경고하며 촉한을 30년 더 보전한 것이다.

제갈량은 자신이 《출사표》에서 말한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고, 죽은 뒤에야 멈춘다(鞠躬盡瘁, 死而後已)”는 말을 실천한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제갈량이 한 모든 일은 유비의 삼고초려 은의(恩義)와 백제성 탁고(托孤)란 중임을 갚기 위한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이 ‘의’란 한 글자를 위해 국궁진췌하며 자신의 모든 힘을 바쳤다.

제갈량을 진정한 대의지인이라 부르는 또 하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유비가 삼고초려한 은의에 보답하는 것이나 진실한 의미는 바로 제갈량이 인류에게 ‘의(義)’의 문화를 남기기 위해 ‘국궁진췌’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점술과 병법에 능했고 돌로 팔괘진을 펼쳐 10만 대군에 필적하게 하는 등 보통 사람의 능력을 훨씬 초월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군사(軍師)였다. 그런 그가 어찌 하늘의 뜻(天意)를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매번 전쟁의 승패는 이미 하늘이 정한 것이었기에 제갈량은 하늘의 뜻에 따라 병력을 배치했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망할 때가 아니었기에 관우를 화용도에 배치했고, 사마의 부자의 명이 다하지 않았기에 큰비가 내려 불을 끄게 했으며, 가정을 잃어야 했기에 마속을 보냈다. 위연의 반골 기질을 알면서도 곁에 두어 결국 등불이 꺼지게 함으로써 자신의 수명 연장이 하늘의 뜻이 아님을 보여주는 등등.

이 명작을 ‘의(義)’를 중심으로 깊이 읽어보면, 제갈량이 ‘의’란 이런 문화를 남기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국궁진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감히 한 걸음도 어긋나지 않게 걸으며 ‘의’의 다양한 표현과 깊은 함의를 남겼다.

만약 이러한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면 이 명작에 대해 수많은 의문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대륙의 수많은 강연과 저작들이 《삼국연의》를 해설하지만, 모두 마음속의 의문을 털어내지 못한다.

중공의 당 문화적 사고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으로는 결코 진정한 지견을 얻을 수 없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8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