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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미혹의 안개를 건너다

초약미

【정견망】

서복(徐福)이 동쪽으로 바다를 건넌 전설은 진시황이 장생불로를 위해 방사(方士) 서복을 바다로 보내 신선을 찾아오게 한 것에서 기원하여,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진시황은 왜 장생불로약을 찾으려 했을까? 그 발단이 된 사건이 하나 있다.

당시 서역의 대완국(大宛國)에는 사고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도로에 즐비했다. 그런데 어떤 새들이 풀을 물어다 죽은 이의 얼굴을 덮어주자 즉시 부활하는 것이었다. 관부(官府)에서 이 일을 진시황에게 보고하자, 진시황은 사람을 보내 그 풀을 가지고 은거 중인 귀곡선생(鬼谷先生)에게 가르침을 구하게 했다. 귀곡선생은 그 풀이 동해 조주(祖洲)에 있는 불사초로, 경전(瓊田)에서 자라며 양신지(養神芝)라고도 부른다고 답했다. 잎은 고채(菰菜)와 같으며 한 뿌리로 천 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시황은 이 말을 듣고 서복에게 동남동녀 각 3천 명을 데리고 누선(樓船)을 타고 바다로 나가 찾게 했다.

《사기》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서복이 바다를 건넌 일을 기록한 사적이다. 2000여 년 전, 사마천은 《사기》에서 몇 마디 글로 서복의 일생을 개괄했으나, 후세에 풀리지 않는 천고의 미스터리를 남겼다. 《사기・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진시황 28년(기원전 219년), “제나라 사람 서불(徐巿) 등이 상소하여 바다 가운데 봉래, 방장, 영주라는 세 신산(神山)이 있는데 신선이 살고 있다고 말하며, 목욕재계하고 동남동녀와 함께 찾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서불을 보내 동남동녀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선연(仙緣)이 닿지 않았는지 서불은 이번 출해에서 선산을 찾지 못했다.

여기에 나오는 “서불”이 바로 서복이며, 제나라 땅 낭야(琅琊 지금의 강소성 공유贛榆) 사람으로 진나라 때 유명한 방사였다. 그는 박학다식하여 의학, 천문, 항해 등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동정하고 돕기를 좋아해 해안가 민중들 사이에서 명망이 매우 높았다. 또한 서복이 귀곡선생의 마지막 제자로 벽곡, 기공, 신선 수행을 배웠으며 무술에도 능통했다는 전설도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온 시기는 진시황이 즉위할 전후이자 이사(李斯)가 재상으로 있던 시기였다.

진시황 37년(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낭야로 동쪽 순행을 나갔을 때 서복은 진시황에게 봉래의 약을 얻을 수 있으나 바다에 커다란 교룡이 있어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교룡을 상대할 사수(射手)를 증파해달라고 요청하자 진시황은 이를 허락하고 사수를 보내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쏘아 죽였다. 그리하여 서복은 다시 “동남동녀 각 3천 명”과 “백공(百工)”, 궁수들을 거느리고 “오곡 종자”를 지참해 바다로 나갔다.

진시황은 서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붕어했으며, 《사기》에는 서복이 바다로 나갔다는 언급은 있으나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이나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이 없다. 그렇다면 서복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서복의 동도 행방에 대한 《사기》의 기록은 《회남형산열전》에서 볼 수 있는데, “서복이 평원광택(平原廣澤)을 얻어 머물며 왕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평원광택이 어디인지 구체적인 위치는 확정할 수 없다. 서복이 왕이 되었다는 그곳은 대체 어디일까?

오대 후주(後周 951~960년) 시기 제주(濟州 지금의 산동 하택) 개원사(開元寺)의 승려 의초(義楚)가 저술한 《의초육첩·성곽·일본》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일본국은 왜국이라고도 하며 동해 가운데 있다. 진나라 때 서복이 동남동녀 500명씩을 데리고 이 나라에 머물렀다. 지금 사람이나 물건이 장안과 같고… 또 동북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후지(富士)라는 산이 있는데 봉래라고도 한다… 서복이 이곳에 머물며 봉래라 불렀고, 지금까지 자손들이 모두 하타(秦) 씨라 한다.” 이것이 중국 고문헌에서 서복의 동도를 일본과 연결시킨 최초의 기록이다.

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의초의 일본에 관한 기술은 중국에 온 일본 고승 관보(寬輔)가 전한 소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의초에게는 일본 다이고 천황 시대의 승려 친구인 관보(법호 홍순대사, 927년 중국 도착)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초육첩》 이후 송나라 구양수의 시 《일본도가(日本刀歌)》에서 “그 선조 서복이 진나라 백성을 속여 불로초를 캐러가 머물다 아이들이 노인이 되었네. 백공과 오곡 종자와 함께 사니 지금까지 기물이 모두 정교하다네”라고 서복을 다시 언급하면서 서복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설이 확정되었다.

일본에서 “서복이 바다에 나가 신선을 찾은” 이야기를 가장 먼저 기록한 것은 11세기 일본 황족 미나모토노 다카쿠니가 편집한 《금석물어(今昔物語)》이지만, 책에는 “서복이 일본에 도착했다”는 언급은 없다. 분명 이 책은 당나라 이전의 중국 문헌을 소재로 삼았을 것이며, 당시 중국 문헌에도 서복의 일본 도착은 제기되지 않았다. 일본 남조의 대신 기타바타케 치카후사가 1339년 출간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 이르러서야 서복이 신선을 찾은 종착지가 일본임이 명확히 기록되었다. 이 책은 “진시황이 신선이 되고자 장생불로약을 일본에서 구했다. 일본은 그 나라의 오제삼왕(五帝三王)이 남긴 책을 얻고자 했고 시황이 이를 모두 보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일본이 서복 전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 사례다.

일본 사가(佐賀)현의 긴류 신사(金立神社)에는 곡물신, 수신(水神)과 함께 서복 세 존의 신상이 모셔져 있는데 서복을 주신(主神)으로 받든다. 신사에는 사가시의 중점 문화재인 견본담채 “서복도해연기도(徐福渡海緣起圖 서복이 바다를 건넌 이야기)”가 보존되어 있다. 그림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중 한 부분이 바로 서복이 상륙하는 장면이다. 따라서 이곳은 서복이 상륙한 곳으로 전해진다. 서복은 만년에 긴류산에 은거하며 스스로를 “북산의 늙은이”라 불렀는데, 어느 날 꿈에 샘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이튿날 실제로 온천을 파냈다. 이 샘물은 수질이 맑고 미네랄이 풍부하여 피부병과 화상에 특효가 있어 “학령의 샘(鶴靈之泉)”이라 불렸으며 현재 일본의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사가현과 후쿠오카현 경계의 모로도미초에도 “서복 상륙지” 석비가 서 있고 인근에 “서복이 손을 씻은 우물”도 있다. 이 외에도 일본 곳곳에는 서복을 모시는 사당이 많다.

《열선전전》과 《태평광기》의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개원 연간에 한 독서인이 괴병에 걸려 몸 절반이 마르고 검게 변했는데 어의들도 병명을 알지 못했다. 이에 서생은 가족들에게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터이니 바다에 신선이 있다는 말을 따라 선방(仙方)이나 구해 보겠다”라며 등주(登州)에서 바다로 나갔다.

서생과 하인 두 사람이 열흘 남짓 표류하다 한 외딴섬에 도착하니 수백 명의 사람이 누군가에게 조배(朝拜)를 올리고 있었다. 해변에서 약을 씻던 부인에게 누구냐고 묻자, 부인은 무리 가운데 흰 머리 노인을 가리키며 “저분이 서군(徐君)이시다”라고 했다. 서생이 서군이 누구냐 묻자 부인은 “진시황 때 선약을 구하러 바다로 나간 서복을 모르는가? 그분이 바로 서복이다”라고 답했다.

조배객들이 흩어진 뒤 서생이 서복을 뵙고 병을 고쳐달라 청하자, 서복은 “그대는 죽을 병에 걸렸으나 내가 살려주겠다”라며 밥 한 그릇을 내주었다. 서생이 몇 숟가락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가득 찼고, 이어 준 술도 아주 작은 잔이었으나 조금 마시자마자 취해 잠들었다. 이튿날 서복이 검은 약알 몇 개를 주어 먹게 하니 검은 물을 몇 되나 쏟아낸 뒤 병이 나았다. 서생은 이곳에 머물기를 청했다.

서복은 “그대는 인간 세상에 관위(官位)가 있는 몸이라 이곳에 머무는 것이 적절치 않다. 곧 동풍이 불어 그대들을 보내줄 것이니 돌아갈 길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노란 약 한 주머니를 주었다. “이 약은 만병을 통치하니 병든 이를 만나면 한 숟가락만 먹여도 나을 것이다”라고 했다. 서생이 등주로 돌아와 약을 궁중에 바치니 당 현종이 병자들에게 먹였고 과연 즉시 완쾌되었다.

《태평광기》에는 촉 땅의 심희(沈羲)가 도를 얻어 신선이 될 때, 태상노군이 서복을 사자로 파견하여 백호거(白虎車)를 타고 오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용차(龍車)를 탄 도세군 사마생(司馬生), 백록차(白鹿車)를 탄 시랑 박연지(薄延之)와 함께 인간 세상에 내려와 심희를 영접해 간 것이다. 사람들은 그제야 서복이 이미 득도하여 신선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신기루’ 사진이나 영상이 많이 촬영되고 있다. 2023년 5월 2일, 노산 관광지의 한 관광객이 우연히 구름 속에 우뚝 솟은 고층 건물과 금빛 서광이 비치는 장관을 촬영했다. 이틀 뒤인 4일 오전에도 안휘성 방부에서 호수 위에 떠 있는 “천궁(天宮)”의 기경이 포착되었다.

북송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도 등주 바다 위에 궁전, 정자, 성벽은 물론 움직이는 인마(人馬)와 의장대까지 나타난다는 신기루 관련 기록이 있다.

현대 과학은 이를 빛의 굴절 현상이라고 설명하지만 실험으로 완벽히 검증된 바 없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양자역학의 평행우주 가설처럼, 신기루는 어쩌면 다른 공간의 정경이 우연히 시공간을 뚫고 세상에 드러난 것이 아닐까? 현대의 “자연 발생”이라는 용어는 과학으로 설명 못 할 때 사용하는 만능 치트키와 다름없다.

당대 백거이의 《장한가》에는 “문득 바다 위에 선산이 있다 하니, 산은 허무하고 아스라한 사이에 있네. 영롱한 누각 위로 오색 구름 피어나고 그 속에 아름다운 선녀들 많다네”라는 구절이 있다. 물리학자들만 과학의 이름으로 온갖 가설을 세울 수 있는 것인가? 오늘날 인류에게는 옛사람과 같은 지혜와 풍부한 상상력이 정말 사라진 것일까.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847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