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顔丹)
【정견망】
사람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이 말 자체에는 하나의 도리가 담겨 있다. 생명이 겪는 것은 결코 현재의 이번 생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상 사람 중 많은 이가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열에 여덟아홉이라며 탄식하곤 한다. 그러나 인생의 수많은 어려움이 실은 매우 비범한 의미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 어떤 사람의 사상과 언행도 자신의 미래와 갈 곳을 만들어낸다. 선한 덕(德)을 어느 정도 쌓으면 다음 생에 누릴 영화가 있거나, 한 지방의 백성이 의지하는 성황신(城隍神)과 같은 신위(神位)를 부여받을 수도 있다.
중국 역사상 성황신이 된 이는 적지 않다. 한조(漢朝)만 보더라도 기신(紀信), 팽월(彭越), 소하(蕭何), 관영(灌嬰), 장건(張騫) 등 명장이나 공신들이 있었다. 청조에 이르러 소주(蘇州) 한 고을의 성황만 해도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었다. 강희 연간 예부와 공부 상서이자 태자의 수석 강사였던 탕빈(湯斌, 자는 공백孔伯, 시호는 문정文正), 건륭 때의 병부와 이부 상서이자 태자태부였던 진홍모(陳宏謀, 자는 여자汝咨, 시호는 문공文恭), 형부우시랑이자 강소 순무였던 오단(吳壇, 자는 자정紫庭), 감찰어사와 사천안찰사를 지낸 고광욱(顧光旭, 자는 화양華陽), 그리고 가경(嘉慶) 때의 공부주사(工部主事) 진학(陳鶴, 자는 학령鶴齡) 등이다.
즉,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허망한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성황신이 될 수 있는가? 앞서 언급한 명장과 현신(賢臣) 외에 민간의 군자도 가능할까?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성황이 되었을까? 이러한 일들은 고서에 모두 기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청조(淸朝) 복건(福建) 후관현(侯官縣)에 지재(志齋) 선생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성품이 고결하고 사람됨이 후덕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청에서 염무(鹽務 소금 관련 업무)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소금 창고에 갑자기 결손이 생기자, 지재는 관청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자기 집의 재산을 모두 내놓았다. 그때부터 집안 형편이 가난해졌으나 그는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했다. 틈틈이 주매애(朱梅崖) 선생에게 글 짓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지재는 자신의 스승에게도 지극 정성이었다. 한 스승이 세상을 떠났는데 남긴 재물이 없어 사모님이 홀로 어린 자식을 키울 능력이 없었다. 지재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모자를 집으로 데려와 수년 후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핀 뒤에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건륭 기해년(1779년), 그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처음에는 선발되지 못했다. 당시 황제가 태부 주규(朱珪, 자는 석군石君, 시호는 문정文正)를 파견해 복건 향시(鄕試)를 주관하게 했다. 주규는 낙방한 답안지 중에서 지재의 글을 단번에 알아보고 그를 6위로 올렸다. 많은 이가 그 글이 너무 고박하고 평담하여 눈에 띄는 구석이 없다며 수군거렸다. 그러나 주규는 “오직 이런 글만이 고대 성현의 풍모를 체현할 수 있다”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이들은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후 예부 시험에서 지재 선생은 낙방했으나 관리 중에 그를 아끼는 이들이 있어 복건의 지방 사무를 그에게 즐겨 자문하곤 했다. 또한 그에게 강학(講學)이나 식량 창고 관리직을 맡기려 했다. 그러나 지재는 예전의 한 동창도 그 직책을 얻을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완곡히 거절했다. 그는 “나는 남에게 속한 자리를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얼마 후 다른 현의 직책에 추천되었으나 추천자가 자신의 고종이나 이종 사촌임을 알고는 다시 거절했다.
가경 원년(1796년), 황제가 효렴방정(孝廉方正)한 인물을 선발해 관직을 제수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왕(汪) 씨 성을 가진 순무가 사적인 관계를 이용해 응모한 자들을 다 제외하고 오직 지재 한 사람만을 추천했다. 지재의 현량함은 누구나 아는 바였기에 많은 사대부도 왕 대인의 결정에 찬성했다.
지재의 부모도 그에게 가기를 권했고 효심 때문에 그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부임하는 도중에 갑자기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전, 한 친구(그 역시 효렴으로 후에 지방관을 지냄)가 꿈을 꾸었는데 지재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내 수명이 이미 다했네. 예전에 고아와 과부를 돌본 공덕으로 하늘이 나를 후관현의 성황으로 임명하셨다네.”
꿈속에서 그는 지재와 함께 현의 성황묘에 갔다가 지재의 권유로 되돌아 나왔다. 후관현의 성황묘는 현청 안에 있어 일반인은 알지 못하는 곳이었다. 친구가 다음 날 깨어나 현청에 가보니 꿈에서 본 성황묘와 똑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재의 부고를 받았다.
옹정 9년, 장고(蔣杲, 자는 자준子遵, 호는 황정篁亭)가 새로 광동 염주부(廉州府) 성황이 되었다. 그는 원래 소주부 장주현(長洲縣) 사람이었다. 조상 대대로 독서인이었으며 그 역시 독서에 높은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매우 총명하여 네 살에 이미 학당에 들어가 글을 익혔다.
그때 조부 장지규(蔣之逵, 자는 운구雲九, 호는 일포佚圃)가 ‘충신효자(忠臣孝子)’ 네 글자를 가르쳐 주자 그는 평생 잊지 않고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장지규는 이 모습을 보고 아이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여겨 다시 일러주었다.
“네 고조할아버지는 명나라 정국이 혼란할 때 물러나 고향에서 어머니를 모셨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너무 울어 눈이 멀었으니 참으로 효자다. 네 고조부의 아우는 ‘갑신 변고(역주: 1644년 명청 교체기의 혼란)’ 때 온 가족 열다섯 명과 함께 순절했으니 참으로 충신이다.”
장고는 이 말을 자구마다 마음속에 새겼고, 여덟 살 때 단숨에 조상 두 분의 이야기를 담은 웅장한 《충효전(忠孝傳)》을 써냈다. 백부 장문란(蔣文瀾, 자는 가우葭友, 호는 자봉紫峰)이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열두 살 강희 연간에 장주의 양학(癢學)에 들어갔으며, 8황자의 시독관을 지낸 하탁(何焯, 자는 기첨屺瞻, 호는 다선茶仙)을 사부로 모시고 공부했다. 이후 신묘년(1711년)과 계사년(1713년)에 각각 거인과 진사에 합격했다. 관직에 나간 후 줄차게 지방관을 지내다 옹정 3년(1725년) 광동 염주 지부(知府)로 승진했다.
그는 염주에서 명망이 높아 백성들로부터 ‘염리(廉吏)’, 즉 가장 청렴한 관리라 불렸다.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옹정제의 총애를 받던 명신 이위(李衛, 자는 우계又玠, 시호는 민달敏達)가 그를 추천해 절강 해녕(海寧)의 해신묘(海神廟) 중건을 감독하게 했다. 임무 수행 중 어느 날 그는 갑자기 깨어나 차남 장원태(蔣元泰)에게 말했다. “내가 이번 달 23일이나 24일쯤 세상을 떠날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가 믿지 않았다.
23일이 되자 그는 과연 병으로 누웠다. 24일에 다시 차남을 불러 말했다.
“나는 평생 귀신에 관한 말을 하지 않았으나, 이제 징조가 있으니 오늘 밤 떠날 것이다.”
당시 곁에 있던 숙부가 어떤 징조냐고 계속 묻자 그는 한마디만 남겼다.
“제가 예전에 왜 《충효전》을 썼겠습니까. 고조부이신 장찬(蔣燦, 자는 도중)께서 정말로 충효를 겸비하셨기 때문인데, 지금 그분은 이미 불과(佛果)를 증득하셨습니다.”
그날 밤 장고는 단정히 앉은 채 서거했다. 사실 그가 병들기 전, 가족들은 꿈속에서 성대한 의장이 그를 마중 나오는 모습을 보았고 하늘의 뜻을 전하며 그를 염주의 성황직에 임명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이 죽어 신이 되는 장면은 지극히 수승(殊勝)하다. 남통주(南通州 지금의 강소성 남통南通시)에 전계방(錢桂芳)이라는 수재가 있었는데, 성품이 강개하고 정직하여 고대 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그가 마흔 몇 살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아내에게 말했다.
“내일 나는 떠나야 하오. 본주의 성황으로 부임하게 되었소.”
아내가 아쉬워하며 크게 울자 그가 위로하며 말했다.
“삶과 죽음에는 정해진 운수가 있으니 아무리 통곡해도 바꿀 수 없는 일이오.”
아내를 달랜 후 그는 방 한 칸을 깨끗이 치우고 의관을 정제한 뒤 향상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다음 날, 전임 성황신이 성대한 의장대를 이끌고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비할 데 없이 위엄 있었다. 그러나 이 광경은 그의 아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때 전계방이 앞으로 나아가 영접하며 간구했다.
“제게 일흔 살 된 노모가 계시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몇 년만 늦게 부임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성황이 대답했다.
“내가 먼저 동악대제(東嶽大帝)께 보고할 것이니, 구체적인 기간은 그분께서 결정하실 것이오.” 말을 마친 뒤 신은 사라졌다.
3년 후 전계방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만남이나 미래 향방은 이미 명명백백하게 배치되어 있는 듯하다. 다만 사람이 되어 처신하고 충효를 보전하기만 해도 불과와 신위를 얻을 기회가 있다. 세상에 살면서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 오직 몸을 닦고 덕을 쌓으며 선을 향해야만 인생은 비로소 의미와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참고자료: 《이원종화(履園叢話)》, 《북동원필록(北東園筆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8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