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약미
【정견망】
장생불로(長生不老)는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갈망하는 꿈이다. 봉래(蓬萊)의 선적(仙跡)은 진시황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전국 시대에 이미 해상 선산(仙山)에 관한 전설이 있었다.
《산해경·해내북경》에는 “봉래산은 바다 가운데 있고, 대인(大人)들의 시장이 바다 가운데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기·봉선서》에도 “제 위왕, 선왕, 연소왕(燕昭王) 때부터 사람을 바다로 보내 봉래, 방장, 영주를 찾게 했는데, 이 삼신산은 발해 가운데 있다고 전해진다”라고 했습니다. 제나라와 연나라 땅은 발해와 접해 있어, 전해 내려오길 봉래가 바로 발해 가운데에 있다고 하여 제위왕, 제선왕, 연소왕 등 몇몇 군주들이 이미 진시황보다 한발 앞서 신선을 찾는 길 위에서 기나긴 탐색을 시작했다.
《열자·탕문》에는 바다 가운데 다섯 개의 선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대여(岱輿), 둘째는 원교(員嶠), 셋째는 방호(方壺), 넷째는 영주(瀛洲), 다섯째가 봉래(蓬萊)”로, 봉래는 그중 하나일 뿐이다. “그 산의 높낮이와 둘레가 3만 리이며 그 정상의 평평한 곳이 9만 리이고 산과 산 사이의 거리가 7만 리”인데, 산 위의 누대(樓台)는 모두 금은주옥(金銀珠玉)으로 지어졌고 날짐승과 길짐승은 모두 순백색이며, 주옥 보석 나무의 꽃과 열매를 먹으면 사람을 장생불로하게 할 수 있다. 그곳을 왕래하는 이들은 모두 신선으로, 공중을 날아다니는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선산은 ‘항상 조수와 물결을 따라 오르내리며 잠시도 멈춰 있지 않기에’, 천제(天帝)가 해신(海神)에게 명해 거대한 자라(巨鰲)로 하여금 선산을 받들게 했습니다. 거대한 자라의 등도 산을 짊어지기에 그리 안정적이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용백국(龍伯國)의 거인이 나타나 자라를 낚아가 버렸고, 다섯 선산 중 대여와 원교는 바다에 가라앉았으며 오직 세 개의 선산만 남았으나 이 역시 떠다니며 정처가 없다”
동진의 왕가(王嘉)는 《습유기(拾遺記)》에서 봉래의 구조가 호(壺) 모양이라고 기록했는데, 호는 상대적으로 폐쇄된 세계이며 호 속에 별천지가 있다는 뜻이다. 《후한서》에는 비장방(費長房)이 약을 파는 한 노인을 보았는데, 호리병 하나를 걸어두었다가 노인이 밤이 되면 호리병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비장방이 보고는 내심 경이롭게 여겼다. 이튿날 찾아가 인사를 하자 노인은 비장방을 호리병 속 세계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오직 옥당(玉堂)이 엄숙하고 화려하며, 맛좋은 술과 안주가 그 속에 가득한 것을 보고 함께 마시기를 마치고 나왔다”고 하니, 원래 이 호리병은 작아 보여도 그 안에는 별천지가 있었던 것이다.
봉래를 봉호(蓬壺)라 부르는 것은 그 내부가 별유동천(別有洞天)이며 스스로의 운행 기제가 있어 외부인은 알 수 없음을 말한다. 호리병은 마치 한 층의 우주 공간과 같고, 호리병의 입구는 두 층의 우주 공간을 잇는 비밀 통로가 된다. 분명한 것은 일반인은 봉래산에 들어가기 어려우며, 어쩌면 봉래산 해면에 나타나는 신기루가 바로 다른 공간의 현현일지 모른다.
또 봉래의 신선이 속세에 온 적도 있는데, 예를 들어 유명한 안기생(安期生)은 본명이 정안기(鄭安期)이며 갈홍의 《신선전》에 여러 번 등장한다. 사람들은 그를 천세옹(千歲翁)이라 불렀으며 외단(外丹)을 닦아 득도했다. 항상 낭야(琅琊) 해변에서 약을 팔았는데, 현지 사람들이 죽고 새로 태어나는 동안에도 안기생만은 늙거나 죽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진시황의 귀에까지 이야기가 전해졌고, 즉시 그를 입궁시켜 수신(修身)의 도를 물었다. 안기생은 3일 밤낮을 대화한 후, 수천만 금의 가치가 있는 황금과 벽옥을 돌아보지도 않고 거절하며 글을 남기고 떠났는데, 글에 이르길 “수 년 후 봉래산에서 나를 찾으시오”라고 했다. 그리고 붉은 옥신 한 켤레를 남겨두었다. 그 후 진시황은 서복에게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딸려 거대한 선단을 파견하여 망망대해 속으로 사라지게 했으나, 역사에 겹겹의 미혹을 남겼다.
《사기》에도 안기생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봉래와 통하여 인연이 맞으면 사람을 만나고 맞지 않으면 숨었다”고 했다. 또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안기생을 만났으나 안기생의 얼굴은 늙지 않아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봉래의 신선이라 여겼다. 한무제 때 방사 이소군(李少君)은 일찍이 봉래산에 들어가 약을 캐다 신선 안기생을 만났는데, 안기생이 먹는 대추는 오이만큼 컸으며 일반인이 먹으면 장생할 수 있다고 했다.
당대(唐代) 시인 이백의 시에도 그에 관한 내용이 있다.
“결국 적옥리(赤玉履)를 남겨두고,
동쪽 봉래 길로 올랐네.
진제(秦帝 진시황)가 나를 찾았으나,
푸르른 안개뿐이로구나.”
“예전에 내가 동해 노산에서 신선 노을 먹었었지.
친히 안기생을 뵈고 참외만한 대추를 먹었네.
…
금액(金液 금단)을 얻어 구름수레에 날아오르길 기약하네.
그대를 따라 천단에 올라 신선과 함께 한가로이 떨어진 꽃이나 쓸고 싶어라.”
안기생은 진한(秦漢) 시기 연나라와 제나라 방사(方士)활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당시 방사의 활동과 방선도(方仙道)의 형성, 진시황이 여러 차례 방사를 바다로 보내 장생불로약을 구하게 한 일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당시 제왕들이 중시하고 방사들이 존숭하는 신선이자 중국 도가 사상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의 스승이 하상장인(河上丈人)으로 《노자하상공장구(老子河上公章句)》를 저술했는데, 이는 《노자하상공주(老子河上公注)》라고도 불리며 도장(道藏) 태현부(太玄部)의 핵심 경전으로 도사들이 반드시 전수받고 익혀야 할 경문으로 후세에 널리 유전(流傳)되었다.
도교에서는 안기생을 개인의 수행을 중시하는 신선으로 보며 상청파(上清派)에서 특별히 존숭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태단(太丹)의 도와 삼원(三元)의 법을 얻어 우화등선하고 학을 타고 노닐거나, 혹은 현주(玄洲) 삼현궁(三玄宮)에서 상청팔진(上清八眞)의 하나로 받들어진다. 도홍경의 《진령위업도(真靈位業圖)》에서는 제3 좌위(左位)에 나열되어 “북극진인(北極眞人)”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천정(天庭)에 머물거나 산중을 유람하거나 해상을 떠다니거나 지하에 은거하기도 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를 해상 신선이라 전한다.
동진 갈홍이 저술한 《혜중산고관우신(嵇中散孤館遇神)》에도 안기생이 일조시(日照市) 천태산(天台山)에서 수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년(紀年)에 이르길, 동해 밖에 산이 있으니 천태라 한다.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가 있고 신선이 되는 대(臺)가 있어 우인(羽人)들이 거처한다. 천태는 신령한 자라가 짊어진 산으로 해내(海內)를 떠다닌 지 몇 년인지 알 수 없다. 오직 여와가 자라 발을 잘라 사극(四極)을 세울 때 선산(仙山)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을 보고 낭야의 물가로 옮겨놓았다. 후세에 하상공 장인이 산에 올라 도를 깨닫고 제자를 가르쳐 신선으로 승천시키니 선도(仙道)가 비로소 퍼지기 시작했다. 혜강(嵇康)이라는 이가 있어 황로(黃老)를 스승으로 삼고 현학(玄學)을 숭상하며 피리와 거문고에 정통하고 음률에 밝으며 신선을 좋아했다. 그해에 천태를 유람하며 동해의 일출을 보고 선산의 빼어난 경치를 감상하며 강태공의 옛 터를 방문하고 선조(仙祖)의 흔적을 우러러보았는데, 안기 선생의 석실이 여전하고 하상공이 앉았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았다.”라고 했다.
일조 출신 장원 장행간(張行簡)도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우리 일조(日照)를 생각하면 비록 해변 구석에 치우쳐 있으나 낭야의 이름과 천태의 승경을 누리고 있으며, 태기(泰沂 태산과 기산)를 등지고 동해를 품었으며 선산(仙山)이 아득하고 강물이 가로세로 흐르니 자고로 태양신(日神)께 제사를 지내던 곳이요 황로(黃老)가 신선이 된 고장다. 하상공, 안기생, 우길(于吉), 갈현 등이 이곳에서 도를 깨닫고 제자를 가르쳤으며 진시황과 한무제가 이곳에 와서 신선을 찾고 도를 물었으니 가히 일세를 풍미했다 할 만하다.”
천태산에는 세상에 보기 드문 적석묘(積石墓)와 석실(石室)이 결합한 건축물이 있다. 산 위에는 선인대(仙人台), 선인이 거처하던 옛터, 진시황이 세운 안기사(安期祠 안기생 사당) 유적, 선인강경대(仙人講經台), 연단로, 선학대, 선인이 약을 찧던 돌절구 등의 유적이 있어 하상공이 도를 깨닫고 안기생이 신선이 된 곳임을 보여준다. 산에는 곡양간(曲陽澗)이 있고 그 안에는 곡양샘이 있는데, 삼국 시대 신선 우길이 도를 얻어 신선이 된 곳이다.
안기생의 선적(仙跡)은 해상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퍼져 있다. 《가씨설림(賈氏說林)》의 기록에 따르면 하남에서 어떤 사람이 그의 대추를 얻었는데 3일 동안 삶아야 비로소 익었고 그 향기가 10리까지 퍼졌으며, 죽은 자를 살리고 병자를 일으키며 건강한 사람이 먹으면 백일하에 승천할 수 있다고 했다. 《군국지(郡國志)》에는 그가 마명생(馬鳴生)에게 금액신단(金液神丹)을 전수한 곳이 호남 구의산 위의 기봉(紀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쪽으로 광주에도 안기생의 선적이 있습니다. 《영표록이(嶺表錄異)》에 따르면 광주 성동 포간(蒲澗)에 유적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옥석목(玉舄目)이며 그가 승천한 곳이다. 송대(宋代)부터 광주 사람들은 정안기(鄭安期)가 승천한 날(7월 25일)에 포간을 유람하는 풍습이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승천한 곳을 비승대(飛升台)라 불렀고 그가 수행하던 곳에 창포관(菖蒲觀)과 포간사(蒲澗寺 이미 사라짐)를 지었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승천한 곳(즉 지금의 운암)에 “정선사(鄭仙祠)”를 지었으며, 태원 10년(서기 385년) 동진 시기 광주자사 나우(羅友)가 매년 음력 7월 25일을 “정선탄(鄭仙誕 정안기 신선 탄생일)”으로 정했다.
일부 지방지(地方志)의 기록에 따르면 안기생은 일찍이 주산(舟山) 도화도(桃花島)에 와서 은거했다. 송조(宋朝)의 《건도사명도경(乾道四明圖經)》에서는 안기생이 술을 좋아하여 취하면 먹물을 돌 위에 뿌렸는데, 먹물이 튀어 나간 모양이 복숭아꽃 같았으며 이 복숭아꽃 무늬가 돌의 천연 문양처럼 되었다고 하는데, 도화도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오늘날 도화도에는 해발 540미터의 주산군도 제일봉인 안기봉이 있고 섬 안에는 안기연단동(安期煉丹洞)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안기생은 마지막에 절강 천태산에서 우화등선하여 학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 오늘날 천태산에는 선학대가 있는데 대 위의 화강암에는 선학이 남긴 거대한 발자국이 있다.
이 외에도 안기생에 관한 기록은 매우 많다. 예컨대 《사기·악의전(樂毅傳)》에는 어떤 이가 안기생에게 장생의 도를 묻자 안기생이 세상을 벗어날 비결을 일러주길 “선도(仙道)는 멀리 있지 않고 몸 가까이에 있으니, 생각도 없고 함도 없으며 뱉지도 들이마시지도 말라. 그 하나가 내면에 충만하면 장생하여 승천할 것이다. 네 생각이 겹겹이 쌓여 네 삶을 수고롭게 하지 말라[仙道不遠,近到諸身,無思無為,不吐不納,其一充於內而長生飛升矣。勿使汝思慮重重,勞爾之生也。]”고 하였다.
안기생은 제자도 많이 길렀다. 사마천은 《사기·악의전》에서 “악거공(樂巨公 악의)은 황제와 노자를 배웠는데 그 본사(本師)는 하상장인이라 하였다. 하상장인은 안기생을 가르쳤고 안기생은 모흡공(毛翕公)을 가르쳤다”고 기록했다.
안기생의 제자로는 임치 사람 이소군(李少君), 마명생(馬明生), 왕노(王老) 등이 있다.
《열선전》에는 “왕노라는 이가 있 노여생(魯女生), 봉군달(封君達)과 벗이 되어 명산을 다니며 도를 찾다가 동악(東岳)에서 흰 사슴을 탄 신선과 시녀 열 명 정도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만났는데, 스스로 안기생이라 칭하며 태식존진일(胎息存眞一)의 비결을 가르쳐주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다.
남송 사수호(謝守灝)가 편찬한 《혼원성기(混元聖紀)》에는 안기생이 나중에 마명생에게 도를 전했고 마명생은 다시 음창생(陰長生)에게 전했다고 한다. 《신선전》에 따르면 마명생은 임치 사람으로 본래 성은 화(和) 씨이고 자는 군현(君賢)이다. 젊어서 도적에게 부상당해 길에서 신인(神人)을 만나 약으로 구제받아 살아났다. 이에 안기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천하를 유람하며 고초를 겪은 끝에 《태청신단경(太清神丹經)》을 전수 받았다. 산에 들어가 수련하여 약이 완성되자 반 제를 복용하고 지선(地仙)이 되었다. 구주(九州)를 500여 년간 돌아다니다 백일승천(白日升天)했다.
안기생이 방선도(方仙道)를 개창한 계시는 평범한 사람도 수련을 통해 선약(仙藥)을 먹고 선단(仙丹)을 복용하면 장생불로할 수 있다는 것으로, 평범한 이들이 고해(苦海)를 벗어나 우화등선할 수 있는 길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남송 육유(陸游)의 시 《장가행(長歌行)》에는 “인생 살에서 안기생처럼 되지 못한다면, 취해 동해에 들어가 고래를 타고 다니리”라고 읊었다. 역사의 서로 다른 시기마다 사람을 제도하는 다양한 방법이 세상에 전해지니 인연 있는 사람은 자연히 진경(真經)을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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