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운
【정견망】

주유. (천외객 / 에포크타임스 합성도)
건안 13년 12월, 조조는 10여 만 대군을 이끌고 장강을 따라 도도하게 내려오니 기세가 장엄했다. 이에 맞서 장강 동쪽의 손권·유비 연합군은 전력을 다해 신중히 경계하며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주유와 유비
손권의 결단 후 주유는 3만 대군을 이끌고 배를 타고 장강을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번구(樊口)에 주둔하며 소식을 기다리던 유비는 장강 위로 대군이 오는 것을 보고 마침내 안도했다.
그는 사람을 보내 주유를 내려오게 하여 위로하려 했으나 주유는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군사 임무를 맡아 직수(職守)를 함부로 떠날 수 없으니, 장군께서 이리로 오신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유비가 관우, 장비에게 말했다. “주유가 나를 배로 불러 만자고 하네. 이미 오후(吳侯 손권)와 동맹을 맺었으니 주유를 보지 않는 것은 동맹의 예의에 어긋나네.” 그리하여 유비는 작은 배를 타고 직접 주유를 만나러 갔다.
유비가 주유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는 조조와 맞서야 하니 반드시 계획을 잘 세워야 합니다. 병사가 얼마나 됩니까?”
주유가 답했다.
“3만입니다.”
유비가 “너무 적습니다”라고 하자 주유는 “이것으로 충분하니 장군께서는 내가 조조군을 대파하는 것을 지켜보십시오!”라고 했다.
유비가 노숙도 불러 함께 논의하려 했으나 주유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마음대로 결정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고, 자경(子敬 노숙) 또한 군무가 바쁩니다. 자경을 보시려면 따로 만나십시오![1]”
주유의 군 통솔이 냉정하고 엄격하며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조절하는 모습에 유비는 내심 크게 감탄했다. 마침내 유비는 마음을 정하고 주유와 합력해 조조에 맞서기로 했다.
너른 도량으로 군사를 지휘
조조에 맞서기 위해 병마와 전략, 유비와의 협력 외에도 주유에게 가장 큰 시험은 수많은 신구 장수들을 통솔하는 일이었다. 이 세기의 대전에는 손견 시절의 노장 황개, 정보, 한당 및 손책 시절의 맹장 능통, 주태, 여범 등이 참여했다. 또한 나중에 합류한 대장 감녕, 여몽 등도 있었다.
삼국 시기 전장(戰場)이었던 ‘망강정(望江亭)’의 소개에 따르면 주유가 어떻게 완곡하고 유머러스하게 노장 황개의 도움을 이끌어냈는지 묘사되어 있다.
황개(黃蓋)는 동오에서 세 주인을 모신 원로로 젊어서부터 손견을 따라 천하를 누비며 기틀을 다지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해지는 바로는 적벽대전 전 주유가 황개와 바둑을 두며 매번 ‘졸(卒)’을 내주어 황개가 다 먹게 했다고 한다. 황개가 의아해하자 주유는 무력하게 말했다. “나에게 부릴 ‘장(將)’이 없구려!” 황개는 그 뜻을 바로 알아차리고 스스로 자원하여[3] 대전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 노장 중 정보(程普)가 나이가 가장 많았는데, 정보는 적선하기를 좋아하고 사대부와 교유하기를 즐겼으나 유독 우아하면서도 통솔력이 뛰어난 주유에게 불손하게 굴며 업신여기는 언행을 자주 했다. 그러나 주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일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적벽 교전
건안 13년 12월, 조조의 대군이 물결을 따라 내려왔으나 파구(巴丘)에 이르러 대규모 전염병이 돌았다. 수전에 익숙지 않은 대군이 적벽에 이르렀을 때, 반대편에서 주유가 3만 수군을, 유비가 2,000 정예병 및 관우, 장비의 만 명 대군을 이끌고 도도하게 몰려왔다.
첫 교전에서 조조군은 북안의 오림(烏林)으로 패해 물러났고 주유의 군대는 남안의 적벽에 주둔했다. 주유와 유비는 남안에 진을 치고 조조군과 대치했다. 이때 황개가 조조의 전함들이 머리와 꼬리를 이어 배열된 것을 보고 화공(火攻)을 제안했다.
주유는 기름을 바른 마른 풀을 가득 실은 수십 척의 전함을 준비하고 천으로 덮었다. 또 공격용 작은 배들을 준비해 전함 뒤에 묶었다. 황개는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 식량 배를 이끌고 투항하겠다고 속였다. 황개는 약속한 대로 깃발을 꽂고 전선을 향해 나아갔다.
처음 조조군은 투항하는 배인 줄 알고 갑판에 서서 구경했다. 200척 거리에서 황개가 명령을 내려 장졸들이 탄 작은 배들을 풀게 하고, 10척의 큰 배에 동시에 불을 붙여 돌진시켰다. 불배들이 조조의 수군을 직격했다. 이때 동남풍이 갑자기 강하게 불어 불길이 순식간에 번졌고 해안의 진영까지 옮겨붙으니 조조군은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2].
이때 주유가 정예 장수들을 이끌고 뒤따르며 북을 울리니 강면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어 절벽을 붉게 물들였고 조조군은 대패했다.
《삼국연의》에서는 황개의 고육계, 채모를 이용한 반간계, 감택의 투항서 전달 등 거짓 투항을 위한 여러 설정을 넣었으나 정사 《삼국지》와 대조해 보면 소설가의 허구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조는 왜 황개의 투항을 믿었을까? 역사는 명확한 답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는 이전에도 장수, 허유, 원담, 고간, 유종 등의 투항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인 바 있다. 그에 비하면 《삼국연의》가 오히려 속임수가 많고 교활한 심보를 많이 심어둔 셈이다.
화용도(華容道)
조조는 패배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남은 배들을 스스로 불태우고 화용도를 통해 강릉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길이 진흙탕이고 바람이 거세 행군이 어려웠다. 사람들에게 볏짚을 등에 지고 진흙길에 깔게 하여 겨우 말을 통과시켰다. 육상 작전을 맡은 유비의 군대는 추격이 늦어 잡지 못했다.
《호북통지》에 따르면 주유는 전투 후 술을 마시며 공을 자축했다. 그는 칼을 뽑아 춤을 추며 이렇게 노래했다.
“적벽에 임했네
조공(曹公 조조)을 패퇴시키고,
한실(漢室)을 안녕케 함이여
강동을 정하였네.
이 산수는 천고에 칭송되리니,
두 글자를 새겨 전공을 기록하노라.”
노래를 마치고 주유는 칼끝으로 절벽에 ‘적벽(赤壁)’ 두 글자를 깊이 새겼다. 지금까지도 적벽 절벽에는 기세 넘치는 그 두 글자가 남아 있다.
당대 시인 이백(李白)은 이곳을 유람하며 《적벽가송별(赤壁歌送別)》이란 유명한 시를 남겨 당시의 장렬한 장면을 노래했다.
두 용이 전쟁으로 자웅을 겨룰 때
적벽의 누선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네.
거센 불길 하늘에 닿아 운해를 비추니
주유(周瑜)가 이곳에서 조공(曹公)을 물리쳤네.
공신 황개
황개는 화공 계책은 적벽 대전에서 신묘한 효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혼전 중에 황개는 흘러온 화살에 맞아 차가운 강물에 빠졌고, 오군(吳軍)에 의해 구조되었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해 변기 위에 방치되었다. 황개가 사력을 다해 한당의 이름을 부르자 한당이 그 목소리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낭패한 황개의 모습을 보고 한당은 눈물을 흘리며 옷을 갈아입혔고 마침내 황개는 목숨을 건졌다[4].
전투 후 손권은 논공행상으로 황개가 군사를 조련하던 태평호(太平湖)를 그에게 하사했고, 그 이름은 ‘황개호(黃蓋湖)’가 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5].
사실 적벽 대전 때 후방의 손권도 동쪽 전장에서 거병하여 합비를 포위하고, 장소를 보내 구강을 치게 함으로써 조조의 후환이 되었다. 그는 한 달 넘게 합비를 공략하다 조조가 장희(張喜)를 보내 구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했다.
병법과 기계(奇計)에 능한 조조가 적벽에서 대패한 것은 모두의 예상을 깬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시 너무나 많은 ‘우연’이 겹쳐 대전의 결말을 만들었다. 배송지가 말했듯 “역병이 돌아 조조군의 기세가 꺾였고 남풍이 불어 화공에 유리했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6].”
강릉 전투
적벽 전투에서 승리한 후 주유와 정보는 강릉(江陵)으로 진격해 북방을 공략하려 했다. 이때 유비가 주유와 합공을 제안했다. 유비는 주유에게 2,000명을 빌려주면 후방에서 조인(曹仁)을 협공하겠다고 했고, 대신 맹장 장비를 주유에게 보내 성을 공격하게 하되 장비에게 1,000명을 더 붙여달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주유는 3,000명을 내주어야 했으나 의심 없이 허락했다.
그러나 조인은 용맹했다. 강릉성의 병력이 적었음에도 완강히 저항하니 실로 경계할 만한 상대였다. 양측은 1년 가까이 대치했다.
그동안 주유는 감녕의 건의에 따라 서쪽의 이릉(吏陵)을 먼저 공략해 강릉을 취하려 했으나 조조군에게 포위되었다. 이에 다시 여몽의 계책을 따라 능통을 남겨 강릉을 견제하게 하고 스스로 절반의 병력을 이끌어 감녕을 구출했다.
주유는 묘책을 써서 300명에게 높은 나무로 험한 산길을 끊게 했다. 조조군이 주유의 공격에 패해 산길로 도망치다 장애물을 만나자 말을 버리고 도망갔다. 주유의 군대는 그 말들을 노획하며 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주유는 이 전투에서 직접 말을 타고 전진하다 화살이 오른쪽 가슴에 박히는 중상을 입어 철수해야 했다. 조인이 주유가 누워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공격해오자, 주유는 통증을 참고 말에 올라 군영을 순찰하며 사기를 북돋웠고 조인은 결국 퇴각했다.
강릉 전투는 고난의 연속이었고 이 과정에 정보가 여러 번 주유와 다투었다. 전황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주유는 정보의 무례함에 시종일관 겸허하게 대하며 맞서지 않았다.
사후에 정보는 주유의 인내와 너그러움에 깊이 감동하여 반성했다. 나중에 그는 “주공근과 사귀는 것은 향긋한 술을 마시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취해버린다”라고 술회했다[7]. 당시 사람들은 바다처럼 넓은 주유의 도량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주석
[1] 《삼국지》 <선주전> 인용 《강표전》: 유비가 노숙의 말대로 번구에 머물렀다. 주유의 배가 오자 유비가 마중했는데 주유는 “군무가 바빠 내릴 수 없으니 장군께서 오십시오”라 했다. 유비가 관우, 장비에게 “주유가 나를 부르니 동맹의 예의상 가야겠다”며 배에 올랐다. 주유가 3만 명으로 충분하다 하자 유비는 놀라면서도 의구심을 가졌다. 유비가 노숙을 보려 하자 주유는 따로 만나라고 하며 거절했다.
[2] 《삼국지》 <오서 주유전>: 황개가 화공을 제안해 몽충 투함 수십 척에 짚과 기름을 싣고 투항을 위장해 접근했다. 바람이 강해 불길이 진영까지 번졌고 조조군은 대패했다.
[3] 인터넷 블로그: [삼국 유적 탐방] 적벽 대전의 승부처, 망강정(望江亭)에 깃든 황개의 충절
망강정은 삼국 적벽 고전장 풍경구 내 적벽산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 안에서 장강 건너편을 멀리 바라보면, 당시에 조조의 26만 부대(部隊)가 주둔했던 곳인 우림채(烏林寨)를 볼 수 있다. 적벽산은 마치 예리한 칼 한 자루가 강 심장부를 곧게 찌르는 듯한 형세로, 조조의 진영을 관망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다. 이곳은 물러나면 지킬 수 있고 나아가면 공격할 수 있어, 당시 적벽 대전에서 손권과 유비 연합군이 지세(地勢)의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게 했다.
망강정은 황개가 당시에 조조의 진영을 관망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황개는 동오(東吳)의 삼조원로(三朝元老)로, 일찍이 손견을 따라 천하를 누비며 손씨 기업(基業)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동오에서 누구나 그를 중시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적벽 대전 중에 주유가 황개와 함께 장기를 두었는데, 주유가 졸을 하나씩 놓을 때마다 황개가 하나씩 잡아먹었다. 황개가 매우 놀라자 주유는 짐짓 난처한 체하며 “내게 쓸 만한 장수가 없구나”라고 말했다. 황개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전투에 자원했다.
이에 황개는 적벽 대전에서 과연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 줄기 불길로 조조군을 태워 하늘과 해를 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조조는 황급히 도망쳤다. 이 큰 불은 손유 연합군이 최종적인 승리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걸음이 되었다. 이후 손권은 공로를 논하여 상을 내리며, 황개가 병사를 훈련하던 태평호(太平湖)를 황개에게 하사하고 이름을 ‘황개호(黃蓋湖)’로 고쳐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4] 《오서(吳書)》에 이르기를: “적벽의 전투에서 황개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다. 당시 날씨가 추웠는데 물에 빠진 그를 오나라 군인이 건져냈으나, 그가 황개인 줄 모르고 측상(廁牀, 화장실 안의 평상) 위에 두었다. 황개가 스스로 힘을 내어 한 번의 소리로 한당(韓當)을 부르니, 한당이 이를 듣고 ‘이것은 공복(公覆, 황개의 자)의 목소리다’라고 말했다. 한당이 그를 향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옷을 갈아입혀 주었고, 드디어 살아날 수 있었다.”
[5] 《호북통지(湖北通志)》:
“귀호(龜湖)는 현 서남쪽 30리에 있으며 목구(睦口)에서 대강(大江)으로 통하고, 황개호는 현 서남쪽 80리에 있으며 포절현(蒲折縣) 및 호남 악주부(岳州府) 임상현(臨湘縣)의 경계에 나뉘어 속하며 석두청강구(石頭淸江口)에서 장강으로 통한다. 전해지기로는 손권이 적벽의 전공을 논하며 이 호수를 황개에게 하사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였다.”
[6] 《삼국지·순욱순유가후전제십(三國志‧荀彧荀攸賈詡傳第十)》 배송지(裴松之)의 주석에 이르기를: “적벽의 패배에 대해서는 대개 운수(運數)가 있었다. 실로 질병이 크게 번져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놓았고, 남쪽에서 불어오는 훈풍(凱風)이 불길이 타오르는 형세를 이루게 했기 때문이다. 하늘이 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니 어찌 사람의 일이겠는가?“
[7]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기를: “정보(程普)는 자기가 나이가 많은 것을 내세워 자주 주유를 능멸하고 모욕했다. 주유는 자신을 굽혀 사람을 포용하며 끝내 따지지 않았다. 정보는 나중에 스스로 존경하고 복중해 그를 중히 여기며 사람들에게 고하기를, ‘주공근(周公瑾, 주유의 자)과 사귀는 것은 마치 향기롭고 진한 술을 마시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취하게 된다’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의 겸양으로 사람을 복종시킴이 이와 같음에 감복했다.” (주유전)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b5/24/12/12/n14389756.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