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약미
【정견망】
중국 역사상 전설적인 한 인물이 있으니, 그의 일생은 신비로운 색채로 가득하다. 그는 천자의 혈육도 아니고 조정 중신도 아니었으나, 《사기》에 그에 관한 편이 있고 《한서》에는 그를 위한 단독 열전이 실려 있다. 그의 사부(辭賦)는 한대(漢代)에 《초사》에 수록되었다가 나중에 또 주희의 《초사집주》에서 삭제되기도 했다. 그는 기발한 간언으로 큰 상을 받기도 했지만, 대전 위에서 소변을 보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담하용이(談何容易, 말하기가 어찌 그리 쉬우랴)’는 그가 처음 만든 말이며, 《열선전》에서는 그를 신선으로 분류했다. 그의 작품은 《한위육조백삼가집(漢魏六朝百三家集)》에 수록되어 후세에 서한의 문학가이자 사부가(辭賦家)로 불린다.
그가 바로 한무제 시기 박학다식하고 달변가였던 동방삭(東方朔)이다. 그는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며 의리가 정밀하고 언변이 독특하여 문채와 풍격에서 독보적인 일가를 이루었다. 사마천과 반고는 모두 그를 ‘골계(滑稽)의 영웅(雄)’이라 일컬었다.
《사기》와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동방삭의 자는 만천(曼倩)이며 평원(平原) 염차(厭次 오늘날의 산동성 빈주濱州 혜민현惠民縣) 사람이다. 그의 자천서(自薦書)에는 “나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과 형수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동명기(洞冥記)》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장이(張夷)는 200세에도 학처럼 맑은 모습이었고, 어머니 전(田) 씨는 동방삭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다고 한다. 이웃집 어머니가 그를 거두었는데 마침 동이 트고 있어 성을 ‘동방(東方)’이라 지었다. 그는 세 살 때 길을 잃었다가 몇 달 뒤 돌아왔는데, 다시 사라졌다가 일 년 뒤에 나타났다. 어디에 갔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자니(紫泥)의 바다에 갔다가 옷이 더러워져 우천(虞泉)에서 빨래를 하고 왔습니다. 아침에 가서 점심때 왔는데 어찌 일 년이 지났다 하십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토록 신비로운 인물답게 그의 등장 또한 비범했습니다. 한무제 즉위 초, 천하의 현량방정(賢良方正) 하고 재능 있는 자를 모집하자 동방삭은 공거부(公車府)에 무려 3천 개의 목간(木간)으로 된 자천서를 올렸다. 두 사람이 간신히 들어 올릴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으며, 무제는 두 달에 걸쳐 이를 읽고 그를 기재(奇才)라 칭찬하며 곁에 두었다.
동방삭은 자천서에 이렇게 썼다. “열세 살에 글을 읽기 시작해 3년 만에 충분히 익혔고, 열다섯에 검술을, 열여섯에 《시경》과 《상서》를 배워 22만 자를 숙독했습니다. 열아홉에 병법을 배워 군사 부리는 법을 알았으니 총 44만 자를 익혔습니다. 지금 스물두 살에 키는 9척 3촌이며 눈은 진주처럼 밝고 치아는 조개처럼 희고 고릅니다. 용맹함은 맹분(孟賁)과 같고, 민첩함은 경기(慶忌) 같으며, 청렴함은 포숙아와 같고, 신의는 미생(尾生)과 같습니다. 이 정도면 가히 천자의 대신이 될 만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맹분(孟賁)은 전국시대 위나라의 용사로, 힘이 매우 장사여서 “물속을 갈 때는 교룡을 피하지 않고, 육지를 갈 때는 호랑이와 이리를 피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慶忌)는 춘추시대 오왕 요의 아들로 공자 경기라고도 불렸으며, 만 명을 당해낼 용맹함이 있고 달리는 속도가 맹수처럼 빨랐다. 포숙(鮑叔)은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인 포숙아(鮑叔牙)를 말하는데, 관중은 그의 청렴하고 결백한 성품을 높게 평가했다.
‘미생지신(尾生抱柱, 미생이 다리 기둥을 안다)’은 하나의 성어다. 전해지는 바로는 미생이 한 여인과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여인은 오지 않고 물이 불어났으나 떠나지 않고 다리 기둥을 안고 죽었다”고 한다. 사마천은 미생의 신의를 찬양하며 ‘신의가 미생과 같다’고 평했다. 미생이 기둥을 안고 죽은 다리는 섬서성의 남교(藍橋)라고 전해지며, 후대 사람들은 미생을 절개 있는 사랑의 상징으로 여겼다.
무제는 이 글을 읽고 찬탄을 마지않으며 기재(奇才)라 칭찬하고는, 그에게 대조공거서(待詔公車署)로 나중에는 대조금마문(待詔金馬門)에 명했다. 이때부터 동방삭은 한무제 곁의 시신(侍臣)이 되어 박학다식하고 변재(辯才)가 뛰어나며 해학적인 유머로 가득한 모시는 삶을 시작했다. 그는 자주 무제를 곁에서 모셨다. 무제가 여러 차례 그를 가까이 불러 대화를 나누면 매우 즐거워했다. 무제는 종종 그에게 어전에서 식사를 내렸는데, 그는 남은 고기를 모두 품속에 넣어 가져가는 바람에 옷이 다 더러워지곤 했다.
《한서》에 기록되기를, 무제가 점술에 능한 술사들에게 물건 맞히기 게임인 석복(射覆)을 시켰다. 소반 아래에 도마뱀을 덮어두고 무엇인지 맞히게 했는데 아무도 맞히지 못했다. 동방삭이 나서서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역(易)》을 배웠으니 제가 무엇인지 맞혀보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시초(蓍草)를 늘어놓아 여러 괘상을 만든 뒤 답했다. “용이라 하기엔 뿔이 없고 뱀이라 하기엔 발이 있으며, 기어 다닐 때는 느릿느릿하고 눈길은 고요히 응시하며 담벼락을 잘 타니, 이것은 도마뱀(壁虎) 아니면 장수도마뱀(蜥蜴)입니다.” 무제는 “맞았다”고 하며 그에게 비단을 하사했다. 또 다른 물건을 맞히게 했는데 매번 맞히니 다시 여러 번 비단을 내렸다.
당시 무제를 자주 모시던 광대 곽사인(郭舍人)이 말했다. “동방삭은 너무 오만합니다. 그저 요행히 맞힌 것일 뿐 실질적인 술수는 없습니다. 동방삭에게 다시 맞히게 하여 만약 맞히면 저를 채찍으로 백 대 때리시고, 맞히지 못하면 비단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고는 나무에 자란 기생식물을 소반 아래 덮어두고 동방삭에게 맞히게 했다.
동방삭이 “구수(寠藪, 똬리)입니다”라고 답했다. 곽사인은 “동방삭이 맞히지 못할 줄 정말 알았습니다”라고 비웃었다. 그러자 동방삭이 말했다. “생고기를 회(膾)라 하고 말린 고기를 포(脯)라 하며, 나무에 붙어 있으면 기생(寄生)이라 하고 소반 아래 덮어두면 구수(寠藪)라고 하는 법입니다.” 무제는 황문령(黃門令 궁궐 내 사무를 담당하는 관직)에게 명하여 곽사인을 채찍질하게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동방삭은 상시랑(常侍郎)으로 승진했다.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건원(建元) 3년, 한무제가 18세 때 자주 시위들과 평복을 하고 사냥을 나갔는데 말이 농민의 곡식을 밟아 망가뜨리곤 했다. 후에 수왕(壽王)이 사냥 전용 공원인 상림원(上林苑)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동방삭이 간언했다. “초나라 영왕이 장화대(章華臺)를 지으니 백성이 흩어졌고, 진나라가 아방궁을 지으니 천하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한무제는 당시 동방삭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동방삭이 천상의 변화를 관찰하는 법인 《태계육부(泰階六符)》를 올린 공으로 그를 태중대부(太中大夫) 급사중(給事中)으로 봉하고 황금 백 근을 하사했다. 그러나 상림원은 결국 조성되었다. 나중에 동방삭은 술에 취해 전각 위에서 소변을 보았다는 이유로 대불경죄로 탄핵당했고, 무제는 조서를 내려 그를 평민으로 강등시켜 환관 집무처에서 대기하게 했다. 이후 무제에게 올린 음양의 이치에 대한 대화 덕분에 중랑(中郎)으로 복직되고 비단 백 필을 받았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건장궁 후각에 고라니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이 나타났다. 소식이 궁궐에 전해지자 무제가 직접 보러 갔다. 신하들에게 무슨 동물인지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에 조서를 내려 동방삭을 불렀다. 동방삭이 말했다. “저는 이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다만 저에게 좋은 술과 밥을 내려 배불리 먹게 해주시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제가 허락했다. 술과 밥을 먹은 뒤 동방삭이 또 말했다.
“어느 곳에 나라 땅과 어장, 갈대밭이 몇 경(頃) 있는데 폐하께서 그것을 제게 주셔야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제가 다시 허락했다.
그러자 동방삭이 설명했다. “이 동물은 추아(騶牙)라고 합니다. 치아가 앞뒤가 똑같고 크기가 고르며 송곳니가 없어서 추아라 부릅니다. 추아가 나타난 것은 머지않아 먼 곳에서 귀순해올 징조입니다.” 약 1년 뒤, 흉노의 혼야왕이 과연 십만 명을 이끌고 한조(漢朝)에 귀순했다. 무제는 다시 동방삭에게 많은 재물을 상으로 주었다.
동방삭은 하사받은 돈과 비단으로 장안성 안의 젊고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대개 아내로 맞이한 지 1년 정도면 버리고 다시 새 장가를 들었다. 어떤 신하들은 그를 ‘광인(狂人)’이라 불렀다. 하루는 동방삭이 전각을 지나가는데 낭관들이 그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선생을 광인이라 생각합니다.”
동방삭이 답했다.
“나 같은 사람은 조정에서 세상을 피하는 것이고, 옛사람들은 깊은 산속에서 세상을 피했을 뿐이다. 즉 세속 중에 은거하여 금마문에서 세상을 피하는 것이다.”
여기서 금마문이란 장안 미앙궁 환관 집무처의 대문 옆에 구리로 만든 말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동방삭은 일찍이 친구에게 “천하에 나 동방삭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고 오직 태왕공(太王公)만이 나를 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동방삭이 죽은 후 무제는 천문 역법에 정통한 태왕공을 불러 물었다.
“그대가 동방삭을 아는가?”
태왕공이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자 무제가 다시 물었다.
“하늘의 별들이 다 제자리에 있는가?”
태왕공이 답했다.
“모든 별이 다 있으나 오직 목성(木星)만이 18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이제 다시 나타났습니다.”
무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동방삭이 내 곁에 18년 동안 있었는데, 내가 그가 바로 목성인 줄 몰랐구나!”
동방삭은 언변이 뛰어나고 문장이 화려했다. 《한서·예문지》의 기록에 따르면 동방삭의 작품은 총 20편인데, 현재는 3편만이 온전히 남아 있다. 유향이 엮은 《초사》에 실린 〈칠간(七諫)〉과 〈답객난(答客難)〉, 그리고 〈비유선생론(非有先生論)〉이다. ‘담하용이(談何容易, 말하기가 어찌 쉽겠는가)’라는 고사는 바로 이 〈비유선생론〉에서 유래했다. 이 문장에서 그는 네 번이나 ‘담하용이’를 연달아 사용해 신하가 간언하는 일의 어려움과 충성스러운 직언의 슬픔을 토로했다. 〈답객난〉에서는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살피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水至清則無魚, 人至察則無徒)”는 속담을 만들어냈다.
유향은 동방삭이 해학적이고 변재가 뛰어나지만 주관을 지키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양웅의 평가는 “해학에 응함은 광대 같고, 궁함이 없음은 지혜롭고, 바르게 간함은 곧으며, 덕을 더럽힘은 은둔한 듯하다”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시구에서 동방삭을 꽤 높게 평가했다.
“재주 많아 헤아릴 수 없고
석복 또한 절륜하네.
담론은 가장 기괴하고
입을 열면 신과 같네
·········
금옥은 본래 빛나고 맑으니
진흙과 모래가 어찌 가리겠는가.
때때로 군주를 깨우치니
한 조정 신하들을 놀라게 하네.”
《동방삭계자서(東方朔誡子書)–동방삭이 아들에게 주는 경계의 글》에서 동방삭은 이렇게 가르쳤다. “밝은 사람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 중()보다 높은 가치는 없으니 여유롭고 한가롭게 도(道)를 따르거라.”
여기서 그가 말한 ‘중(中)’과 ‘도(道)’는 ‘은거하며 세상을 희롱함’과 ‘배불리 먹고 편안히 소요함’이라는 임기응변의 처세의 도를 뜻하며, 유교의 중용이나 정통 도리 또는 정도(正道)가 아니다. 그가 〈답객난〉 끝부분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그가 권변(權變)을 알지 못함을 밝히기에 충분하며, 결국 대도(大道)에 미혹된 것이다”라고 한 것도 권변과 통달을 대도로 여겼음을 뜻한다. 이를 통해 볼 때 그가 마음속에 품은 도는 궁중에 은거하며 ‘바보인처럼 지내는’ 생존의 도였다.
지혜로워 올바름을 지키며 흔들리지 않으니, 세상 기풍이 날로 나빠지는 조류 속에서 미끄러져 내려가지 않기가 어찌 말처럼 쉽겠는가?
원문위치: https://big5.zhengjian.org/node/284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