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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수련 이야기: 서칙(徐則)

이장흥(李長興)

【정견망】

서칙(徐則)은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람이다. 그는 어릴 때 성품이 매우 우아하고 조용했고 청심과욕(淸心寡欲)하여 나쁜 기호가 없었다. 나중에 주홍정(周弘正)을 사부로 모시고 《주역》, 《노자》, 《장자》에 정통했는데, 그가 발표한 견해와 평론은 모두 매우 독특하고 정묘하여 도시와 마을마다 이름이 났다.

서칙은 일찍이 “‘이름’이란 ‘실제’의 겉모습일 뿐인데, 내가 어찌 헛된 이름만 가질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그리하여 내심 은거할 생각을 품고 지팡이를 짚으며 진운산(縉雲山)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의 제자와 후학 수백 명이 온 힘을 다해 계속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으나, 그는 사양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서칙은 결혼하지 않았고 항상 두건을 쓰고 거친 베옷을 입었다. 남조 진대(陳代) 태건(太建) 연간에 소환에 응해 지진관(至真觀)에 잠시 머물렀으나, 한 달 뒤 이곳을 작별하고 천태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음식을 끊고 진성(眞性)을 수양하며 오직 솔씨와 백출(白朮)만 먹었다. 엄동설한의 극심한 추위에도 솜옷을 입거나 이불을 덮지 않았다. 태부 서릉(徐陵)이 비석을 세워 그를 찬양했다.

처음 서칙이 진운산에 있을 때, 태극진인(太極真人) 서군(徐君)이 그를 찾아와 말하기를 “그대가 여든 살이 넘으면 왕의 사부(師)가 될 것이며, 그 후에 도를 얻어 신선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진왕(晉王) 양광(楊廣 훗날 양제)이 양주(揚州)를 통치할 때 서칙의 명성을 듣고 직접 편지를 써서 그를 불렀는데, 말씨가 매우 간절하고 겸손했다.

서칙은 문인들에게 “내 올해 나이 여덟하나인데 진왕이 나를 부르니, 서군이 말한 바가 과연 응험하였구나”라고 말하고는 양주로 향했다.

진왕 양광이 그에게 도법을 전수받고자 청했으나, 서칙은 시일이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그 후 어느 날 밤, 서칙은 시종에게 향불을 가져오게 하여 평소 입궐할 때처럼 정제하고 기다리다 오경(五更)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그 시신은 부드러워 살아있을 때와 같았으며, 수십 일간 안치했어도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진왕은 다음과 같이 글을 내렸다.

“천태산의 참된 은사 동해 사람 서 선생은 청허(淸虛)하게 사셨으니 가히 종사(宗師)라 일컬을 만하다. 담박하고 고요함으로 큰 덕을 이루어 만물과 나란히 하고 세속 밖으로 초탈하여 품행을 닦고 천명을 즐기셨다. 짚신을 신고 부들 옷을 걸치며 솔씨와 백출을 먹으며 영산(靈山)에서 50여 년간 은거했다. 그는 탁월하고 초범(超凡)하니 신선과 같은 인재로다. 천 자 높이와 만 길 깊이로도 그 도술의 경계를 헤아릴 수 없다. 내가 그의 도풍(道風)을 경모하여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산을 나오시길 청했으니, 신기한 도법을 얻어 좋은 인연을 이루길 바랐다. 뜻밖에 서 선생이 이곳에 온 지 열흘도 안 되어 속세를 싫어하여 우화(羽化)해 떠나시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영부(靈府)로 들어가셨다. 그 육신이 부드럽고 안색이 변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경서에서 말하는 ‘시해지선(屍解地仙)’이로다. 비록 내가 그를 사부님으로 모시지는 못했으나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니, 비록 그가 떠난 것을 잊으려 해도 내심 슬픔이 가시지 않는다. 장례 비용은 필요한 만큼 보장하여 공급하라. 그의 영혼은 이미 신선이 되어 떠났고 오직 지팡이와 신발만 남았으니 풍속에 따라 장사 지내라. 마땅히 사자를 보내 그를 천태산으로 돌려보내 안장하게 하라.”

이때 강도(江都)에서 천태산으로 가는 길에 많은 행인이 서칙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스스로 산림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 살던 곳에 이르러 경서와 도법을 꺼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또 사람을 시켜 방 하나를 청소하게 하며 말하기를 “만약 손님이 오면 마땅히 이곳으로 모셔라”라고 했다. 그러고는 석교를 건너 떠나갔는데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서칙의 영구가 도착하자 제자들은 그제야 그가 이미 우화등선했음을 알게 되었으니, 향년 82세였다. 진왕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기이하게 여겨 장례용 비단 천 단을 하사하고, 화공을 보내 그의 초상을 그리게 했으며 유변(柳抃)에게 명하여 찬문을 짓게 했다.

(내용은 《북사(北史)·최곽서칙장문후열전(崔廓徐則張文詡列傳)제칠십육》에 보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