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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어진 관리 소경

이흥

【정견망】

(1)

소경(蘇瓊)은 자가 진지(珍之)이며 무강군(武強郡) 사람이다. 소경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변방에 갔다가 동형주(東荊州) 자사 조지(曹芝)를 배알했다.

조지가 농담으로 그에게 “너는 관직에 보임되고 싶으냐?”라고 물었다.

소경은 “먼저 관직을 만들고 나중에 사람을 택해 충원하는 것이지, 사람이 함부로 관직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조지는 소경의 대답에 매우 놀라워하며 그를 자기 부중의 장류참군(長流參軍)으로 삼았다.

(2) 진범을 가려내다

북제(北齊) 문양제(文襄帝) 고징(高澄)이 의동(儀同)의 명의로 관부(府)를 열고 소경을 불러 형옥참군(刑獄參軍)으로 삼았으며, 자주 그를 격려하고 위로했다. 병주(幷州)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했는데, 장류참군이 이 일을 조사했다. 강도로 의심받던 이들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모두 자백했고, 재물을 잃어버린 집에서도 이들이 바로 강도라고 단정했으나 도난당한 장물만은 찾지 못한 상태였다.

문양제는 이 사건을 소경에게 넘겨 철저히 심사하게 했다. 소경은 별도로 원경융(元景融) 등 십여 명을 조사해 장물과 증거를 찾아냈다. 문양제는 크게 웃으며 이전에 강도로 함부로 연루되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나의 어진 참군을 만나지 못했다면 하마터면 억울하게 죽을 뻔하였구나.”

(3) “청운 속으로 이끌다”

조정에서 소경을 남청하군(南淸河郡) 태수로 임명했다. 소경은 성품이 청렴하고 신중하여 사적인 일을 부탁하는 편지는 뜯어보지도 않았다. 그는 또한 백성들에게 혼례나 장례를 치를 때 절검을 숭상하고 예의를 지키라고 가르쳤다.

도연(道硏)이란 이름의 도인이 제주(濟州) 사문통(沙門統)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자산이 매우 많아 남청하군에 고리대금을 많이 놓았고 이전에는 늘 군현의 관리들에게 채무 독촉을 도와달라고 했었다.

도연이 소경을 배알하러 왔는데, 소경은 그가 온 뜻을 알아차리고 그를 만날 때마다 도법(道法)의 현묘한 이치만을 담론하며 응대가 매우 엄숙하고 공손했다. 도연은 빚 독촉 문제로 여러 번 찾아왔으나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제자가 그 연유를 묻자 도연이 말했다.

“내가 소부군(蘇府君)을 뵐 때마다 그는 바로 나를 청운(靑雲) 속으로 이끌고 가니, 어디 지상의 속된 일을 담론할 겨를이 있겠느냐?”

(4) 청렴한 태수

소경이 남청하군을 잘 다스리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그를 공경했다.

남청하군 사람 조영(趙穎)은 일찍이 낙릉군(樂陵郡) 태수를 지냈는데 팔십 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월 초에 그는 갓 익은 오이 한 쌍을 따서 몸소 소경에게 선물했다. 조영은 자신의 연령이 많음을 내세워 소경에게 받아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소경은 오이를 받아 대당(大堂)의 들보 위에 올려두고 쪼개어 먹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새로 수확한 과일을 보내려다 문에 와서 조영이 보낸 오이 두 개가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서로를 쳐다보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5) 형제가 다시 화목해지다

을보명(乙普明)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형제가 토지 문제로 다툼이 생겨 수년 동안 결말이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 증인을 구했는데 무려 백 명에 달했다. 소경은 을보명 형제를 불러놓고 그 증인들에게 말했다.

“세상에 형제는 얻기 어렵고 토지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설령 토지를 얻었다 한들 형제를 잃는다면 너희 마음이 어떻겠느냐?”라며 눈물을 흘리니 모두가 울었다.

을보명 형제는 머리를 조아리며 나가서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청했다.

십 년 동안 따로 떨어져 살던 형제는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6) “학생옥”

매년 봄철이면 소경은 유명한 유생 위기륭(衛覬隆), 태원봉(田元鳳) 등을 초청해 군 학당에서 강의하게 했다. 관리들이 공무를 처리하고 남은 한가한 시간에는 모두 글을 읽게 했다. 당시 사람들은 관아를 학생옥(學生屋 학생들의 집)이라 불렀다.

(7) 곡식을 빌려 백성을 구하다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 연간에 남청하군 내에 큰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재해를 입었고 천여 가구가 끼니를 잇지 못했다. 소경은 군 내에 양식이 있는 집안을 모두 불러 모아 몸소 그들에게 양식을 빌려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주(州)에서는 가구당 조세를 징수하려 했고, 소경이 사사로이 백성에게 양식을 빌려준 일을 조사하려 했다.

군 주부(主簿)가 소경에게 “비록 기한(飢寒)에 허덕이는 백성을 가련히 여기신 것이나, 자칫 부군께서 죄를 얻게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했다.

소경은 “나 한 사람이 죄를 얻어 천 가구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내게 무슨 원망이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조정에 표문을 올려 상황을 진술했다. 결과적으로 위에서는 조세를 징수하지 않았고 소경을 문책하지도 않았다. 수재민들은 평안히 난관을 넘겼고, 이들은 자녀들을 어루만지며 “소부군께서 너희에게 생명을 주셨다”고 말했다.

(8) 누명을 벗기다

소경은 상서삼공랑중(尙書三公郞中)으로 승진했다. 그는 사건을 심리함에 있어 최대한 공정함을 보장했기에 누명을 벗고 명예회복된 이들이 많았다. 대리시(大理寺)의 각 관청에서 사건을 처리할 때 반드시 상서성(尙書省)의 재조사사를 거치게 된 것은 소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조주(趙州), 청하(淸河), 남중(南中) 등지에서 모반 사건이 자주 보고되었는데 전후로 모두 소경에게 넘겨져 조사했고 많은 이들이 누명을 벗었다. 상서 최앙(崔昂)이 소경에게 “만약 당신이 공훈을 세우고 좋은 명성을 얻고자 한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 그런데 당신은 여러 차례 모반을 꾀한 자들의 죄명을 씻어주니 이것은 스스로 번거로움을 자초하는 것이 아니오? 어찌하여 자신의 생명을 이리도 가벼이 여기오?”라고 경고했다.

소경은 엄숙하게 말했다.

“내가 누명을 벗겨준 이들은 모두 억울한 사람들이며, 진정으로 모반을 꾀한 자는 결코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최앙이 매우 부끄러워했다.

경성 사람들이 모두 소경을 칭송하며 “판결에 의심이 없는 자는 소진지(蘇珍之 진지는 소경의 자)다”라고 했다.

(《북제서•소경열전 제38》)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