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연(了緣)
【정견망】
한편, 오공이 갑옷과 투구 등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보물을 얻어 돌아오니, 원숭이 무리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기개를 보고는 단번에 위상이 올라갔음을 알았다. 손오공은 무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보물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지 않을 수 없었으며, 끊임없이 치솟는 환희심을 표출하니 일순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오공이 과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말 좋은 보배였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을 본받는(法天像地) 신통을 부려 길어지라고 하자, 금고봉이 하늘과 땅을 관통할 만큼 길어져 위로는 33천(天)에 닿고 아래로는 18층 지옥에 이르러 무변한 위력과 끝없는 현묘함을 드러냈다. 호랑이, 표범, 늑대 등 온 산의 괴물들과 72동의 요괴왕들이 모두 겁에 질려 머리를 조아리고 벌벌 떨며 넋이 나갔다. 오공이 신통을 거두고 순식간에 보배를 자그마한 바늘로 변하게 하여 귀속에 감추니, 진정 마음먹은 대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각 동의 요괴 왕들이 당황하며 모두 와서 축하를 건네니 그 위압감이 대단했다. 사해팔방이 굴복하지 않기 어려웠고, 이에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봉하니 비로소 왕의 자태가 나타났다. 또한 일곱 명의 의형제를 맺었는데, 이런저런 요괴들과 마(魔)와 가까이 지내니 심성이 좀 무너지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능력이 커지면 건드리는 요소가 깊어지고 위협이 따르며, 빚쟁이들이 활약하기 마련이다. 이때 나타나지 않으면 언제 나타나겠는가?
오공이 하산해서 돌아와 혼세마왕을 때려죽인 것은 단지 그 마왕이 자신의 영토를 침범하고 원숭이 자손들을 가로채며 해를 끼쳤기 때문에 화근임을 알았을 뿐이다. 해를 끼치지 않은 각로의 요괴왕들이 굴복한 것은 그의 주먹이 매서웠기 때문이지, 그들이 좋은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원숭이의 각종 집착에 부합했을 뿐이다. 마성이 싹터 끌어들인 것들은 모두 유유상종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닦는 인연의 시작이다.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지 않으면 잇따르는 사심(私心)과 잡념(雜念)은 비 온 뒤의 잡초처럼 순식간에 온 세상을 뒤덮을 것이고, 그 후에 닦아야 할 것들이 생긴다.
이 고층차의 법을 얻는 것은 마치 말벌 집을 건드리는 것과 같아서, 빚을 받으려는 뭇마들이 떼로 몰려와 결판을 내려 한다. 착실한 수련중에서 제위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쭉정이(水貨)가 되고, 그 상태가 오래되면 자신의 정념(正念)마저 잠기게 되어 닦고 닦아도 여전히 속인으로 남는다. 어떤 말들은 본래 이렇게 일찍 공개적으로 하고 싶지 않았으나, 수련의 엄숙함을 고려해 한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세 가지 일을 잘함과 동시에 연공(煉功)을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 된다.
내가 알기로 정진하는 많은 동수들이 대법 항목을 하느라 매일 너무 바빠 연공할 시간조차 없다고 한다. 제한된 시간 내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므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 이것을 하면 저것을 못 하는 상황을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시간이 부족할 때 어떤 이들은 연공을 포기하는 쪽을 택하여 매일 다섯 가지 공법을 한 번씩 다 연마하지 못하는데, 사실 이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우리가 왜 세 가지 일을 잘하려고 하는지 생각해보라. 그것은 마음을 닦고 공을 자라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사람을 구하는 것은 단지 원한의 인연을 선해(善解)하는 것인데 선해한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덕(德)을 공으로 연화하는 과정이 있어야 인과(因果) 중의 부면(負面) 요소를 걸러내 정화하고, 이를 덕으로 전환해 공기둥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 연화(演化) 기제가 바로 다섯 가지 공법 안에 있다.
성명쌍수(性命雙修) 공법에서 심성은 공이 자라는 관건이고, 연공은 그 관건적인 한걸음을 육신의 전화(轉化)로 착실히 정착시키는 것이다. 신신합일(身神合一)을 원한다면 닦음(修)과 연마(煉)를 동시에 해야 한다. 신체가 고에너지 물질로 전화되어 대체되려면 반드시 연공을 중시해야 하며 보조 수단이라고 해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수련(修煉)이란 두 글자 중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공의 연화가 없고 인과가 많이 쌓이면 온갖 잡다한 요소가 작용하게 된다. 부지불식간에 감정을 조종당해 사상업(思想業)이 형성되고 초심을 어지럽히게 된다. 지난 글에서 내가 늘어놓은 불평처럼 번뇌는 모두 이런 요소들로 인해 생겨난다. 그러나 연공을 하고 발정념을 하면 해결될 사심과 잡념임에도 나를 나태하게 만들 수 있다. 연공을 하려 할 때마다 온갖 핑계가 생겨 미적거리게 되는데, 갑자기 이런저런 일이 생각나거나 몇 분만 쉬었다가 하자는 식이다. 조금만 망설이면 시간을 놓치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허비하게 된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는 속인 중의 아이 엄마가 내게 하소연하던 것과 비슷하다. 갓 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저녁에 숙제하라고만 하면 목마르다, 배고프다,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가렵다며 온갖 핑계를 대고 최대한 뭉개는 식이다. 때리고 욕해도 안 통하니 엄마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다. 헤헤, 잠시 자신을 비웃어 보겠다.
우리가 게으름을 피우고 나태해지며 미루는 증상에 걸렸을 때, 사부님께서 제자를 보시는 마음은 분명 유쾌하지 않으실 것이다. 못난 제자의 얼굴 가죽이 두꺼운 것을 어찌하겠는가! 사부님께서 수시로 방할(棒喝)해 주시던 시절이 그립지만, 내가 진정으로 성숙해졌을 때는 스스로 서게 하신다. 방할을 구하는 것도 집착이며,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행히 나는 가끔 게으름을 피울 뿐 책임감이 어깨에 있고 끊임없이 짐을 더하고 있으니, 정신을 차리면 그래도 꽤 추진력이 있다.
연공을 엄숙하게 대하지 않은 주된 이유는 요행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평소 걷거나 앉거나 누워 있거나 마음만 고요히 하면 입정(入定)할 수 있고, 잠을 잘 때도 아주 깊이 정에 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체의 모든 세포가 에너지 물질로 가득 차서 떠받쳐지는 느낌이 들고, 신체 주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운행하는 에너지장은 방대하여 우주와 융합된다. 특히 니환궁(泥丸宮)의 에너지는 바다처럼 깊어 마치 우주의 핵심 같고, 순환해 들어오는 고에너지 물질이 끊임없이 심층으로 확충된다.
사람은 현재 대뇌의 구조가 우주와 유사하다는 것만 알 뿐, 대뇌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층의 우주를 포함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경락이란 피모(皮毛)에 불과하며, 대뇌 심층에 얼마나 많은 층의 경락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위로 닦아 올라가기만 하면 사부님의 “대법은 창세주의 지혜이다”(《논어》)라는 말씀에 부합한다.
우리가 평소 법공부를 하는 것은 바로 창세주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창세주의 지혜를 머릿속에 담고 사유 속에 녹여낸다면, 그것이 바로 우주를 머릿속에 담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쁘게도 사람은 신(神)이 만든 것으로 신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다. 그래서 대뇌의 구조는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우주의 축소판이며 우주 구조와 똑같은 연통기[連通器 서로 연결해서 통하게 하는 것]가 있다. 다만 속인으로 있을 때는 육신의 칠정육욕과 각종 관념, 그리고 삼계의 물질에 의해 층층이 봉인되어 있을 뿐이다. 그 봉인을 풀 계기는 모두 원신(元神)이 지니고 있으며, 수련을 통해 각성한 본성은 스스로 봉인을 뚫고 신의 모습을 찾아갈 것이다.
대뇌라는 이 연통기는 원신과 융합되어 점차 고에너지 물질로 대체되는데, 이는 우주와 연결됨을 의미한다. 대뇌 심층의 맥락은 끊임없이 운행하는 에너지의 충격 속에서 심층 우주의 경계면을 계속해서 뚫고 나갈 것이다. 아래로 뚫고 나가는 것 역시 위로 닦는 것으로, 거시에서 미시까지 끊임없이 개지개혜(開智開慧)하고 불성(佛性)을 충실히 하여 신의 책임을 감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닦는 것은 우주대법이며, 수련 성취하는 것은 우주, 즉 우리의 세계다.
그렇다면 항상 입정(入定) 상태에 처해 심신합일(心神合一)의 효과는 법 속에 융합된 것이며, 우주 법칙은 자동으로 운행되고 에너지의 관통 또한 무변하여 끝없이 생생불식(生生不息)할 것이다. 의식도 에너지의 바다속으로 녹아들어가고 원신 역시 천지를 본받아 위력이 무궁해질 것이다. 보라! 오직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매 순간 사람이 공을 연마하지 않아도 공이 사람을 연마하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다섯 가지 공법을 그리 중시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언제든 입정할 수 있으니 가부좌를 틀고 입정하는 것이 그리 귀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사소한 핑계로 연공을 포기하곤 했다.
그 결과 나의 본체는 잘 전화되지 못했다. 신체의 민감도가 좀 높다고 해서 연공을 대신할 수는 없다. 사실 감각이 느껴지든 전혀 느껴지지 않든 공의 연화 원리는 똑같다. 누구도 누구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구나 나는 이것을 공능(功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지하는 것도 사람의 본능일 뿐이니, 조금 느낌이 있다고 해서 공능과 연관 짓지 마라. 그것은 자신의 지능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우주의 지혜가 모두 이미 머릿속에 담겨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고 빠뜨리는 것이 없는 우주대법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셨다.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는 오성(悟性)과 심성에 달렸을 뿐 사부님께서는 정말 편애하는 마음이 없으시다. 나는 지금까지 사부님을 직접 뵌 적도 없고 사부님께서 내게 법을 한 마디 더 말씀해 주신 적도 없다. 내가 볼 수 있는 경문은 여러분과 똑같고, 심지어 법공부와 연공의 표면적인 형식 면에서는 대다수 동수들보다 정진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성에 있어서 나는 겸손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오성만 좋다고 잘 닦는 것은 아니며 관건은 어느 단계까지 해내느냐에 있다.
내 생각에 비록 표면적인 형식에서는 내가 한 것이 충분히 정진하지 못했을지라도, 늘 중생을 마음에 두고 머릿속에 우주대법을 담고 있으니, 마음이 자연히 우주와 마찬가지로 호한하고 무변하다. 사부님께서는 “사람이 이 정에서 뛰쳐나왔다면 누구도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며, 속인의 마음은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慈悲(츠뻬이)이며, 더욱 고상한 것이다.”(《전법륜》)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마음속에 정과 사랑만 가득하다면 그 마음은 온화한 고향일 뿐 중생은커녕 다른 누구도 담을 수 없다. 만약 친척을 중생의 일원으로 본다면 분별심이 적을수록 마음의 용량은 커지고 세계 또한 갈수록 더 무변무제(無邊無際)해질 것이다.
법을 배웠으나 법을 얻지 못한 이나 법을 많이 얻지 못한 이는 그저 형식만 따랐을 뿐 마음으로 닦지 않은 것이다. 사람마음이라 먼저 뛰쳐나와 비워야만 중생을 담을 수 있다. 당신이 일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는 식의 진한 사랑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다면 중생을 어디에 두겠는가. 그러면서 수련을 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진정으로 마음을 쓰려면 먼저 명리정(名利情)을 내려놓아야 한다. 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람과 신(神) 양쪽을 모두 놓지 않으려는 것이며, 진짜로 수련하지 않으면 결과는 도태뿐이다. 만약 진정으로 매일 24시간 중생을 마음에 둘 수 있는데도 오성이 좋지 않다고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화를 억지 부리지 말라고 할 것이다!
공능을 다시 말하자면, 창세주의 지혜인 불법신통(佛法神通)을 두고 삿된 길로 빠져 공능에 집착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문제가 생긴 사람들을 보면 대개 스스로 열려서 수련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닫혀서 수련하는 사람은 다른 공간 요소의 오도(誤導)가 없으므로 오성 면에서 오히려 우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마음이 분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열려서 수련한다는 것은 다른 공간의 통로에 틈이 생겨 미지의 것을 조금 엿볼 수 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탐측하려 해도 알 수 없는 그런 미지의 험악이 통로를 타고 몸과 마음에 침투해 사람의 심지(心志)를 미혹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 공짜란 없다. 열려서 수련하는 이들이 더 닦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지의 것을 엿보면서 사심과 잡념을 조금이라도 더하면, 구세력은 그 통로를 따라 가상과 패괴한 물질을 되돌려 보내 사람 마음의 집착을 팽창시켜 사람을 망치려 하니 참으로 방비하기 어렵다.
닫혀서 수련하는 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다른 공간의 통로도 봉쇄되어 있어 구세력이 손을 쓰려 해도 범위가 제한적이다. 오히려 안전 계수가 더 높다. 구세력이 무언가를 강요하려 해도 열려 있는 통로만큼 편리하지 않다. 다 닫혀 있으니 오히려 보장이 하나 더 있는 셈이다. 그러니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라 누구를 본보기로 삼을 필요는 없다. 잘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거울로 삼되 자신의 요소와 조건에 결합하여 자신의 지혜로 연화시켜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마치 책을 읽는 것과 같아서 백가(百家)의 장점을 모아 자신의 장점으로 융합해야지, 누군가의 부속물이 되어 자아를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얻은 것은 우주대법이기에 평소 배운 법을 융회 관통하고 심성을 같이 제고한다면 사유 속에서 전식(全息 홀로그램) 우주를 형성할 수 있다. 그렇다! 수련인의 사상은 전식 우주가 될 수 있다. 심성에서 생겨난 공기둥의 에너지는 우주의 지극히 높은 점과 연결되어 자비의 에너지 원천이 될 수 있고, 지혜롭게 정신(正神)의 에너지를 동원해 정법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법신통(佛法神通)이 아닌가? 그런 하찮은 공능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정념을 한 번 내보내면 천군만마를 막아낼 수 있고, 요사스러운 악을 쓸어버리는 데는 순간이면 족하다.
사부님께서 우리더러 발정념으로 악을 제거하라고 하신 것은, 제자더러 불법신통을 운용하여 에너지를 동원해 바르지 못한 모든 요소를 바로잡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다. 단지 자신이 수련해낸 에너지뿐만 아니라 우주 에너지도 마찬가지로 급을 뛰어넘어 동원할 수 있다. 오직 자비심이 제 위치에 도달하기만 하면 법 중의 에너지는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공능은 결코 비교 대상이 안 된다. 수련인은 우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만 장래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개인의 장점은 전식 우주 속의 한 줄기 에너지 파동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수련인은 자신을 얕보지 말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우주의 모든 지혜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다 말씀하셨고 조금도 남김없이 우리에게 다 주셨다. 단지 한 줄기 에너지 파동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 마라. 정법제자의 기연은 홀로 일면(一面)을 관장하는 불·도·신(佛道神)이 되는 것이다. 장차 중생에게 설법할 때 설하는 것도 자신의 수련 과정일 텐데, 관건적인 부분에서 막혀서 “잠시만,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올께”라고 말할 것인가. 자신의 것을 내놓지 못하면서 어찌 원만을 논할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설하신 법과 내려주신 수련 기제는 모두 같으며 편애하는 마음이 없으시다. 다만 어느 단계까지 닦느냐는 오성, 심성, 그리고 집행력에 달렸다. 결국 해내는 것이 수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성과 심성은 괜찮은 편이지만 집행력이 좀 차하다. 그래서 안으론 어느 정도 닦였으나 표면의 물질 껍데기를 돌파하는 데는 좀 둔하다. 입정하면 나의 모든 세포가 고에너지 물질로 떠받쳐지고 우주 에너지가 순환왕복하지만, 겉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 선만 남은 느낌이다. 이 공간의 육체 형상을 유지하는 이 선이 고에너지 물질을 몸 안에 가두어 표면으로 뚫고 나오지 못하게 한다. 딱 이 한 끝 차이로 육신이 속인과 다를 바 없으니 억울하지 않은가! 마치 시험에서 59.9점을 맞은 것과 같다. 0.1점이 모자라 낙제한 것인데, 차라리 점수가 많이 모자라면 포기라도 하겠지만 조금 차이로 안 되니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정법의 마지막 시기인 오늘날, 진수제자(真修弟子) 대다수가 나와 비슷할 것이다. 물질 껍데기를 조금만 더 돌파하면 합격하여 법정인간(法正人間) 시기로 들어갈 수 있다. 물론 합격이 원만은 아니다. 단지 신기원으로 들어갈 자격일 뿐이며, 다음 단계야말로 심성 원만의 진정한 연마가 될 것이다.
법정인간의 서막은 이미 올랐다. 다만 대다수 제자가 이 서막을 연 것이 션윈(神韻)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 자꾸 늦춰지고 끊임없이 늦춰지는 가운데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노년 제자들이다. 박해 전 청년 제자들은 이제 노년이 되었고, 당시 노년이었던 동수들은 얼마나 남았겠는가? 환경을 잃은 그들은 젊은 제자들의 도움 없이 집안 속인들에게 제한받고 있다. 전족을 한 어떤 할머니 동수는 아는 글자도 많지 않은데, 단체 환경을 잃어 대법 수련에서 떨어져 나가 육신을 잃기도 한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박해를 누가 가늠해 보았는가.
그래서 나는 연공의 중요성을 미리 강조하고자 한다. 일을 하는 것은 일을 하는 것이고 수련은 수련이다. 일하느라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연공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연공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음식을 먹고 소화하지 못해 식체에 걸린 것과 같다. 이 한 생각의 차이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요 몇 년간 나는 누가 정법 시간을 지연시키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적어도 내 책임은 아니다. 내가 정진하면 구세력도 무서워한다.
여러 원인을 찾았지만 늘 겉도는 느낌이었고 관건적인 부분을 생각지 못했다. 그러다 션윈을 생각하며 깨달았다. 션윈 순회공연은 전 세계에서 법정인간의 서막을 열고 있지만, 신전(神傳) 문화의 발원지인 중국대륙에는 아직 오지 못하고 있다. 이 문을 여는 방식은 제자들의 마음과 신념 속에 있는데, 사부님과 법을 믿고 행하는 집행력의 강도가 아직 부족한 것이다. 대륙 동수들이 션윈 순회공연을 중시했는가? 션윈이 대륙에 올 수 있음을 진정으로 굳게 믿었는가? 보라, 바로 요만한 차이의 정념이 일어나지 않고 원력(願力)이 부족하여 법정인간의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제자들은 기다릴 수 있지만, 노년 동수들은 수명 연장의 고비에 직면할 것이고 조금만 방심해도 육신이 위험해질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육신을 지니고 원만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진정으로 신(神)이 되는 관건이다! 늘 산속의 사람 모양 바위처럼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고층 생명의 순환과 대응하는데 저층이 오염되면 상층도 침식되어 결국 여전히 성주괴멸(成住壞滅)해야 하지 않겠는가? 육신을 수련 성취해 가져가는 것은 가장 저층의 대응하는 돌을 가져가는 것과 같고, 삼계에 박힌 뿌리를 뽑아내는 것이기에 구우주의 요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신우주에 진입해 생명의 순환 체계가 동일한 경지에서 끊임없이 순환하고 왕복하는 것이야말로 불파불멸(不破不滅)의 관건이다. 설령 육신을 가져갈 필요가 없는 이들도 마찬가지인데, 가령 나중에 무형의 신으로 성취될 나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쉬운 것은 아는 게 많아지니 집착이 자라나는데, 어차피 육신이 필요 없으니 전화가 잘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것 역시 연공을 중시하지 않은 원인 중 하나다.
지금에와서야 나는 깨달았다. 육신을 가져가지 않는다고 해서 육신을 신체(神體)로 수련 성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육신의 잡질이 너무 많으면 홍화(虹化)할 수 없고, 그때 가서는 육신을 가져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날아오를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된다. 구우주의 아주 작은 잡질 하나가 신을 아래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하다. 그때 가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생각해보니 아주 많은 집착이 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었이다. 다행히 그래도 보완할 시간이 남아 있으니 오직 순서에 따라 연공하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다.
옛말에 사람이 부지런하면 땅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육신을 잘 전화하지 못한 이들이나 심지어 병업(病業)의 가상이 나타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원인은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연공을 중시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것이고,
둘째는 겉으로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나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즉 연공 자세는 그럴싸하지만 마음은 어디론가 떠나 있으니, 누가 연마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연공은 신신(身神)이 합일(合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심신(心神)이 합일해야 한다. 이 두 가지 ‘합일’에서 원인을 찾아보라. 찾아낸다면 제고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9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