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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하고 강직했던 우겸과 시든 당체 꽃

초약미

【정견망】

우겸(于謙, 1398년~1457년)은 자가 정익(廷益)이고 절강 전당 사람이다. 명조(明朝) 명신으로 관직이 소보(少保)에 이르러 흔히 우소보(于少保)라 불렸으며, 민족의 영웅이다.

토목보의 변 이후 영종이 포로로 잡히자, 성왕(郕王) 주기옥(朱祁鈺)이 감국(監國)을 맡았고 우겸은 병부상서로 발탁되었다. 우겸은 천도 논의를 강력히 배척하며 북경을 고수하자고 했고, 여러 대신과 함께 성왕에게 즉위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군무를 총독해 북경 성 아래까지 들이닥친 오이라트 기병을 격퇴함으로써, 생사의 기로에 섰던 명조(明朝)의 위기 순간을 넘기고 안정을 되찾게 했다. 또한 오이라트 수령 에센이 화친을 제의하게 하여 영종이 돌아올 수 있게 했다.

천순(天順) 원년 ‘탈문의 변[奪門之變]’이 일어난 후 억울하게 살해당했다. 훗날 정통제의 아들인 헌종(憲宗 성화제) 때 관직이 복구되고 제사를 받았고, 효종 홍치(弘治) 2년에 ‘숙민(肅湣)’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신종 때는 ‘충숙(忠肅)’으로 시호를 고쳤다. 우겸은 악비, 장황언(張煌言 남명의 마지막 충신)과 함께 ‘서호삼걸(西湖三傑)’로 불린다.

우겸은 일생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했고,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폐단을 없앴다. 위급한 순간에는 의연히 사직의 안위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명사·우겸전》의 찬(贊)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겸이 순무(巡撫)로 있을 때 명성과 업적이 뚜렷했으니, 세상을 경륜하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국난을 당해서는 병사를 정돈하고 요새를 굳건히 했다. 경제(景帝)가 마음을 다해 신임하니 우겸 역시 나라를 걱정하며 집안일을 잊었고, 몸은 안위에 매여 있었으나 뜻은 종묘사직에 두었으니 그 공이 위대하도다. 탈문의 변이 일어나 화가 갑자기 닥쳤으나… 우겸의 충심과 의로운 열정은 일월과 빛을 다툴 만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우겸은 예닐곱 살 때부터 이미 매우 총명했다. 글을 읽으면 한 번 보고도 바로 외웠고, 입을 열면 모두 대구(對句)가 되었다. 하루는 문 앞을 산책하다가 많은 사람이 한 스님을 에워싸고 관상을 보는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 구경했다. 그 스님은 우겸이 막힘없이 대답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골격이 비범하고 입만 열면 문장을 이루니, 훗날 시대를 구하는 재상(救時宰相)이 되겠구나.”

청 강희 12년(1673년)에 완성된 《서호가화고금유적(西湖佳話古今遺蹟)》의 묘사에 따르면, 우겸이 하루는 관제묘를 지나다 자신의 공명과 사업을 알고 싶어 했는데, 그날 밤 과연 관제(關帝)가 꿈에 나타나 알려주었다.

“너의 공명과 부귀, 평생의 일은 오직 큰형수에게 물어보라. 그녀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다음 날 급히 집으로 돌아가 큰형수에게 물었다.

큰형수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 벼슬할 생각을 하시다니요. 정 벼슬이 하고 싶으시면 제 말에 노여워 하지 마세요. 8, 9품의 낮은 관직은 차례가 아닐 것이니, 그저 1, 2품이 주워 하세요.”

우겸은 마음속으로 무척 기뻐하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관직인지요?”

큰형수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저 거인(舉人)이 되고 진사가 되어, 어사가 되고 시랑(侍郞)이 되고 상서(尙書) 각로(閣老)가 되는 것뿐이지요. 이 천살(天殺)아,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려 하느냐?”

우겸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기뻐했으며, 당시에는 ‘천살’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깊이 생각지 못했다. 훗날 처형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꿈의 징조가 영험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역주: 원래 여기서 형수가 말한 ‘천살(天殺)’이란 의미는 ‘망할 녀석’ 정도의 욕인데 뜻밖에 천기를 담고 있다]

영락(永樂) 12년(1414년), 우겸의 나이 겨우 열일곱 살이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그가 석회 가마 앞에 가서 석회를 굽는 모습을 보았다. 시퍼렇고 검은 산돌더미가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서 타오르더니 모두 하얀 석회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아, 청백한 인간상을 추구하며 가루가 되어 부서질지언정 고결한 절개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유명한 영물시 《석회음(石灰吟)》을 지었다.

천 번 만 번 망치질하고 정으로 쪼아 깊은 산에서 나왔으니,
뜨거운 불길에 온몸이 타는 고통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노라.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진대도 전혀 두렵지 않으니,
오직 인간 세상에 나의 청백(淸白)을 남기고 싶을 뿐이라네.

千錘萬鑿出深山
烈火焚燒若等閑
粉骨碎身渾不怕
要留淸白在人間

영락 19년(1421년), 우겸은 마침내 진사에 합격했다.

선덕(宣德) 원년(1426년), 우겸은 어사(御史)로 임명되었다. 황제 앞에서 대답할 때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언어는 유창했다. 도어사 고좌(顧佐)는 부하들에게 매우 엄격했으나 유독 우겸에게는 정중했는데, 우겸의 재능이 자신보다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후 발생한 한 사건이 우겸이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되었다.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던 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의 반란이었다. 그는 예전에 적통 다툼에서 패해 처벌받고 안락주(安樂州 지금의 산동 혜민惠民)로 유배되었으나 실패를 불평하며, 선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다시 ‘정난(靖難)’의 고사를 재현하려 선덕 원년 8월에 모반을 일으켰다.

명 선종 주첨기(朱瞻基)가 친정(親征)하자 주고후는 성 밖으로 나와 항복했다. 선종을 수행했던 우겸은 대중 앞에서 그의 죄를 낱낱이 꾸짖었는데, 그 기세가 의롭고 엄정하며 목소리와 안색이 매서웠다. 주고후는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며 죽을죄를 지었다고 고했다. 선종은 이때부터 우겸을 매우 아끼게 되었다.

이후 강서(江西) 안찰사로 있을 때 수백 건의 억울한 사건을 해결했다. 선덕 6년(1431년), 선종은 우겸이 큰 임무를 맡을 수 있음을 알고 친히 그의 이름을 적어 이부(吏部)에 건네주며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郎)으로 파격 승진시켜 하남과 산서 순무를 맡겼다. 이 순무 생활은 19년이나 이어졌다. 이 기간에 그는 ‘위엄과 은혜를 널리 베풀어’ 민심을 크게 얻었고, 태행산에 숨어 있던 도적들까지 사라졌다.

《속장서(續藏書)》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조서를 받들어 입경하여 나랏일을 의논하게 되었을 때 떠나기 전 부하들이 특산물이라도 좀 가져가라고 권했다. 우겸은 웃으며 자신의 두 소매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에게는 오직 맑은 바람뿐이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담은 《입경(入京)》이라는 시 한 수를 지었다.

비단 수건, 버섯, 그리고 향 따위는
본래 백성들이 써야 할 것인데 도리어 재앙이 되었구나.
두 소매에 맑은 바람만 가득 넣고 황제께 문안드리러 가니,
마을 사람들 사이에 구설에 오르는 일만은 면하겠지.

絹帕蘑菇與線香
本資民用反爲殃
清風兩袖朝天去
免得閭閻話短長

선덕 3년(1428년) 2월, 태어난 지 백일이 갓 지난 주기진(朱祁鎭)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손(孫)귀비 소생이었기에 훗날 발생할지 모를 적서 차별 논쟁을 피하고자, 선종은 호(胡)황후를 폐위시키고 손귀비를 황후로 세웠다.

선덕 10년(1435년) 정월 초삼일 선종이 붕어하자, 겨우 여덟 살이었던 주기진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명 영종(英宗)이다. 태황태후 장씨가 섭정을 맡았다.

정통 6년(1441년), 영종이 정식으로 친정을 시작했다. 이듬해(1442년) 태황태후가 붕어하고, 4대 왕조를 보필하며 ‘인선의 치’를 일구었던 유명한 대신 ‘삼양(三楊, 양사기, 양영, 양부)’이 정통 11년에 이르러 모두 세상을 떠나자 환관 왕진(王振)이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그의 당여가 천하에 가득하여 백관들이 눈치를 보았으니, 이것이 명나라 역사상 첫 번째 환관 전횡이었다.

정통 14년 7월 17일, 영종은 이부상서 왕직(王直) 등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진과 함께 50여 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다. 황제는 동생인 성왕 주기옥에게 북경을 지키게 했다. 말은 친정이었으나 군무에 관련된 큰일은 모두 감군 태관인 왕진이 결정했고, 장수들은 곳곳에서 왕진의 제약을 받았다. 군사를 모르는 왕진의 지휘 실책이 이어지며 명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회군 도중에도 길을 돌아가며 시기를 놓쳤고, 결국 토목보에서 전군이 전멸하고 영종은 포로로 잡혀갔다.

이 소식 북경에 전해지자 태후는 백관을 소집해 상의하여 주견심(朱見深)을 황태자로 세우고 성왕 주기옥이 보정(輔政)하게 했다. 우겸은 병부상서로서 군무를 총독하며 북경성을 지키며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명사·우겸전》에 따르면 우겸 등 대신들의 강력한 요구로 성왕이 대통을 이어 경제(景帝)로 즉위했다. 우겸은 당시 “신 등은 참으로 국가를 걱정하는 것이지 사사로운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비록 나랏일이 급박한 상황이었으나 이는 명나라의 황위 계승 제도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훗날 ‘형제간의 우애’가 시드는 복선이 되었다.

경제는 우겸을 매우 신임하여 그가 상소하는 일은 들어주지 않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우겸이 너무 전횡하며 6부의 일에 간섭한다는 어사들의 탄핵이 이어졌으나, 경제가 이를 모두 물리쳤기에 우겸은 자신의 계획을 실천할 수 있었다. 우겸의 성격은 매우 강직하여 답답한 일을 만나면 늘 가슴을 두드리며 탄식했다. “이 한 줄기 뜨거운 피를 뜻한바 어디에 뿌릴 것인가!”

그가 남송의 재상 문천상(文天祥) 초상화에 쓴 제사에도 이런 내함이 담겨 있다.

“국가를 위해 몸을 잊고
살신성인하여 의를 취했네.
기개는 환우를 삼키고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켰으니

차라리 올곧게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살지 않으리.”

殉國忘身,舍生取義。
氣吞寰宇,誠感天地。……
寧正而斃,弗苟而全。

사실 우겸은 자신의 개성에 대해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소상자찬(小像自贊)’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눈은 비록 밝으나 기미를 보지 못하고, 배는 비록 크나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네. 외모는 출중하지 못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하기에 부족하도다. 성격은 비록 편벽되나 그 정만은 진실하니, 보배로 여기는 것은 명예로운 절개요 중히 여기는 것은 군주와 어버이로다.”

우겸이 처한 시대를 보면 그는 남송, 원, 명조에 전성기를 누린 정주이학(程朱理學)의 영향을 받았다. 바로 그의 시 《독역(讀易)》에서 읊은 것과 같았다.

“태극은 본래 형체가 없고
음양은 서로 사라지고 자라네…
염계(濂溪)는 미세한 이치를 논했고
강절(康節)은 광대한 수(數)를 추론했네.
정주가 전의(傳義)를 서술하니
명백하여 홀황(惚恍)하지 않도다”

여기서 ‘염계’란 《애련설》의 저자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키며, 그는 《태극도설》과 《통서》를 지어 송명 이학의 시조로 존경받는다. ‘정주’란 정이와 주희를 말하며, 그들이 발전시킨 정주이학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근본적으로 극단적인 대립 관계로 보았는데, 정주이학은 청나라 중엽 이후 점차 몰락했다.

우겸은 두 소매에 맑은 바람만 담은 청백리였고, 욕심이 없기에 강직했으며 사직의 안위를 위해 사사로운 욕심이 조금도 없었다.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져도 전혀 두렵지 않다”라며 살신성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천리에 합당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중용(中庸)’의 참뜻이 중정(中正)과 중화(中和)에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용의 덕은 지극하도다! 백성 가운데 이를 지키는 이가 드문 지 오래되었구나” (《논어·옹야》). 중용의 불편부당(不偏不倚)과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덕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제갈량은 《심서·장강(將剛)》에서 “순전히 강하기만 하면 그 형세는 반드시 망할 것이요, 부드럽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아야 도(道)의 상도에 합치된다”라고 했다.

당체(棠棣)에 대해 말하자면, 옛날에는 당체(唐棣) 또는 상체(常棣)라 불렀고 지금은 욱리(鬱李, 산앵두)라 부르는 장미과 벚나무 속 관목이다. 당체의 꽃은 흰색과 분홍색이 있는데 두세 송이가 한데 모여 핀다. 《시경·소아》 ‘상체’는 형제간의 우애를 노래한 시편이다.

“상체의 꽃이여,
꽃받침이 화려하게 빛나는구나.
지금 살아 있는 이들 중
형제만 한 이 없도다.”

《시 모서(毛序)》에서는 주공(周公)이 주나라 초기에 평정된 ‘관채의 화’를 보고 형제간에 서로를 해친 것을 안타까워하며 지었다고 한다.

“상체는 형제를 연향하는 시다. 관숙과 채숙이 도를 잃은 것을 가련히 여겨 상체를 지었다.”

경태 원년(1450년), 병부시랑 우겸은 적을 막아내는 데 성공해 오이라트와 화친을 맺었다. 경제는 영종을 북경으로 맞이하여 남궁에 머물게 하고 태상황으로 존봉했다.

경태 3년(1452년) 5월, 경제는 원래 태자 주견심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외아들 주견제(朱見濟)를 새 태자로 세웠다. 이때 왕 황후가 간하기를 “폐하께서 감국으로부터 등극하신 것만도 다행한 일인데, 만년(萬年) 후에는 대통을 조카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하물며 저위(儲位)가 이미 정해져 천하에 공포되었는데 어찌 가볍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노한 경제는 결국 황후를 주견제의 생모인 항비(杭妃)로 바꿨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할 수 있으나 세상일은 알 수 없는 법, 경태 4년(1453년) 11월 황태자 주견제가 요절했다. 주기옥은 이제 아들이 없었음에도 저위를 다시 돌려주지 않았다.

탈문의 변은 경태 8년(1457년) 정월, 마침 경제의 병이 위중할 때 일어났다. 석형(石亨), 서유정(徐有貞) 등이 병사를 이끌고 남궁의 문을 부수고 태상황 주기진을 복위시켰다. 이후 우겸은 화를 당했고, 경제와 항황후는 차례로 병이 깊어 세상을 떠났다.

《명사·우겸전》에 따르면 “황태후는 처음에 우겸이 죽은 줄 몰랐다가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 탄식하며 슬퍼했다. 영종 역시 이를 후회했다”라고 한다.

나중에 조석의 변(曹石之變)이 일어나기 전 이현(李賢)의 일침을 듣고서야 영종은 깨달았다. “경제가 일어나지 못했다면 군신들이 마땅히 상소를 올려 폐하를 복위시켰을 것입니다. 이는 명분이 바르고 이치에 순탄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어찌 ‘탈문(奪門)’까지 했겠습니까? 만약 일이 누설되었다면 저들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폐하를 어떤 처지에 두었겠습니까? 저들은 폐하를 빌미로 부귀를 도모했을 뿐이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사직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청조의 곡응태(穀應泰)는 《명사기사본말》 제35권에서 이렇게 논평했다.

“‘탈문’이라는 두 글자로 인해 영종이 시작을 바르게 하지 못했고 경제는 끝을 바르게 맺지 못했다. 제위를 주고받는 즈음에 형제가 모두 도를 잃었다… 홀로 애석한 것은 우겸이니, 사직에 군주가 없던 날에 백 번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았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우겸의 공은 사직에 있으니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대명제국이 200년이나 더 이어질 수 있었겠는가?”

사실 이 단락 역사에 대해 유백온(劉伯溫)은 《소병가(燒餅歌)》에서 이미 예시한 바 있다.

“실책한 공신들이 감히 간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가로 막으니 주상이 넋을 잃는구나.
나라를 누르는 상서로운 구름은 7년 동안 길게 이어지고,
오랑캐는 감히 현량을 해치지 못하네.
금룡(金龍)을 전송하여 옛것을 회복하니,
구름이 걷히고 해와 달이 변방을 비추도다.”

앞의 두 구절은 토목의 변을 말하며, ‘나라를 누르는 상서로운 구름은 7년 동안 길게 이어지고’는 경제의 재위 기간이 겨우 7년임을 의미한다. 영종의 복위 또한 그 속에 담겨 있다. 대본은 이미 짜여 있었고, 연기 중의 즉흥적인 발휘는 단지 다른 판본의 세부 사항을 보충할 뿐이다.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니니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겸은 ‘유시강화상찬(劉侍講畫像贊)’에서 다음과 같이 ‘빙옥(氷玉)’ 정신을 찬양했다.

무쇠와 돌 같은 간장에
얼음과 옥 같은 정신.
사물 밖으로 초탈하여
한 점 먼지도 묻지 않네

鐵石肝腸,冰玉精神。
超然物表,不涴一塵

순자는 《권학(勸學)》 편에서 “청색은 쪽(藍)에서 취했으나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만들었으나 물보다 더 차갑다”라고 했다. 또한 “배와 노를 빌리는 자는 물에 능해서가 아니라 강하를 건너기 위해서다. 군자는 나면서부터 본성은 다르지 않으나 사물을 잘 빌려 쓸 뿐이다”라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섭씨 4도의 물이 부피가 가장 작으며, 얼음이 어는 과정은 부피가 스스로 팽창하는 과정이다. 얼음은 비록 물보다 차갑지만 딱딱하고 부러지기 쉽다. 이것은 중화(中和)에서 벗어난 문화적 지향이 사람의 사상 관념에 끼친 은연중의 영향이기도 하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물을 잘 빌려 쓸 뿐’이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정의 올바름과 치우치지 않음을 소홀히 하는 것은 중용이라는 전통 가치에서 덕을 지키는 도(道)를 배격하는 것이며, 결국 사람의 복분과 미래에 모종의 불리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역사는 한 부의 가장 좋은 교과서다. 하지만 그것을 정면(正面)으로 읽느냐 부면(負面)으로 읽느냐에 따라 승화하는지 아니면 미끄러져 내려가는지 두 가지 완전히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