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연(了緣)
【정견망】
오공이 신철(神鐵)을 얻고 마음먹은 대로 쓸 수 있게 되니 매우 즐거웠다. 하지만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라, 보배를 가졌으니 옷차림이 너무 초라해서는 안 된다며 보배에 걸맞은 갑옷을 내놓으라고 용왕에게 요구했다.
두 주인을 번거롭지 않게 한다는 핑계를 대며, 주지 않으면 문을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정말이지 수시로 팽창하는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이 원숭이를 내보낼 수 없었다. 용왕은 정말 내줄 것이 없어 구원병을 불렀고, 사해 용왕이 모두 모였다. 원숭이가 입을 놀려 고사양의 물건을 요구하며 격이 낮으면 안 된다고 하니 누가 기꺼이 주겠는가. 노여움이 일어나 군사를 동원해 잡으려 했다.
그러자 용왕이 말했다.
“잡겠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 쇠몽둥이는 살짝만 스쳐도 죽고 부딪히면 망하며, 닿기만 해도 살이 터지고 스치기만 해도 근육을 다칩니다.”
이 여의금고봉은 신령한 병기이자 날카로운 무기로 위력이 대단하다. 양끝에 금테가 둘려 있는 것은 나중에 오공이 머리에 쓰는 금고(金箍)와 성질이 같다. 모두 본심(本心)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금고는 도대체 무엇을 비유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규칙이다. 사람의 마음을 단속하는 도덕관념이다.
깊게 말하면 법칙이며 우주의 법칙, 즉 우주 특성인 진선인(眞善忍)이다. 속담에 규거(規矩)가 없으면 원을 그릴 수 없다는 말처럼, 오공의 첫 번째 사부는 하늘을 날고 땅으로 꺼지는 재주만 가르쳤지 사람 되는 법은 가르치지 않았다. 사실 오공이 산에 들어가 십여 년을 수련하면서도 조사(祖師)를 본 적이 몇 번 없었다. 어렵사리 한 번 만나도 조사는 함축적인 점화(點化) 몇 마디나 구결을 가르쳐 줄 뿐 그 뒤로는 상관하지 않고 오공 스스로 깨닫게 내버려 두었다. 이는 사부가 문 안으로 이끌 뿐, 수행은 개인에게 달렸다는 말과 부합한다.
감히 묻건대 독자 여러분은 어디서 도(道)를 보았는가? 이를 통해 보건대 오공의 수련은 위에서 아래로 닦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공교롭게도 우리 대법제자의 수련도 위에서 아래로 닦는 것이다. 제자가 입문하자마자 얻는 것은 우주 대법 《전법륜》이며, 연마하는 다섯 가지 공법과 사부님께서 내려주신 기제(機制)는 모두 우주의 진선인(真善忍) 특성과 연결되어 있다. 즉 우리 수련의 기점은 직접 우주 정법(正法)이란 반(盤)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것은 가장 고층차의 우주 불법(佛法)이다. 고층차의 법이 있으니 남은 것은 심성(心性)을 닦는 일이다. 심성이 그 한 층에 도달하면 경지도 그 층차로 승화할 수 있다. 법이 있으니 그대로 해내야만 비로소 수련이다. 진정으로 수련하기만 하면 어찌 공(功)이 자라지 않음을 걱정하겠는가?
그래서 사부님께서는 “나의 뿌리는 모두 우주에 박혀 있으므로 누가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다면 곧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면, 그는 곧 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전법륜》)라고 말씀하셨다.
생각해보면 사부님께서 하신 매 한마디 말씀은 다 화살로 과녁을 쏘듯이 아주 분명한 목적이 있다. 법공부와 수련을 한 지 이렇게 여러 해가 되었고 박해 속에서 오늘날까지 걸어온 제자들은,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사람을 구하는 사명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법리(法理)를 검증했으며 자신이 수련해낸 것을 얼마나 바르게 깨닫고 커다란 위덕(威德)을 세웠는가.
사부님께서 이 박해를 역이용하여 제자들을 단련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박해 속에서 구세력에 의해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 모든 사람마음(人心)과 집착이 폭로되고 심리적 감당 한계를 넘어 거의 붕괴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도 사부님과 법을 믿을 수 있는지 보기 위함임을 깨달았다. 사악에 타협하기를 거절하고 생사를 내려놓으며 원망 없이 선념(善念)을 견지하고 사명을 이행하며, 매번 사람의 한계를 돌파할 때마다 정념(正念)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신(神)의 에너지를 성취하여 천지를 뒤바꾸고 바르지 않은 모든 요소를 바로잡을 수 있다. 사람의 것을 제거함으로써 본성을 깨닫고 지혜를 열어 사람을 구하는 과정에 운용하며 신적(神跡)을 창조하고 신(神)의 것을 닦아내는 것이다.
제자가 법공부를 함과 동시에 머리에는 금고가 씌워진다. 배운 것을 실제로 운용해야 비로소 수련이며, 해내는 과정이 곧 법을 얻는 과정이다. 대법 수련에는 계율이 없으며 오직 진선인 표준에 따라 행할 뿐이다. 이 기준은 머리에만 씌워진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도 새겨져 대법제자의 행위 준칙이 된다. 심법(心法)의 단속이 있어야만 신처럼 지혜가 열린다.
어떤 법리는 너무 투명하지면 나도 써낼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정말 하려고 들면 나의 이 신필(神筆)이 망가질 것 같다. 때로는 나 혼자 방 안에서 겉도는 글을 쓰며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을 쳐서 마장(魔障)을 타파하지 못한다고 자책하기도 한다.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이지만 세상에 내놓으면 중생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정말 수련이 끝나지 않는 한 번뇌는 있는 법이다. 현재 나의 번뇌는 내가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대충 만들어진 문장을 보기 싫어 작가로서의 동기가 없고 소극적이며 나태해진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힌 이 문제는 이미 심각한 집착이며, 구하는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행하되 구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나는 마땅히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임해 좋은 글을 써서 서쪽 여행의 진전이 빨라지게 해야 한다. 마음을 닦는 것은 서둘러야지 마장을 키워 놓으면 나중에 없애기 힘들다. 질질 끄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 생각을 시원하게 써내지 못하고 항상 겉도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유쾌하지 않은 것 역시 사람마음이니 제거해야 한다.
요컨대 위에서 아래로 닦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체득은, 사람마음이 정신(正信)의 단속을 받으면 집착이 모두 서서히 걸러진다는 점이다. 심사(心思)가 조금만 치우쳐도 번거로움이 오는데, 안으로 찾기만 하면 즉시 제때 분별해낼 수 있다. 그래서 사부님께서는 처음에 우리를 아주 높이 밀어 올리시고 직접 우주대법을 말씀해 주셨다. 마음속에 법이 있으면 층층의 금고(金箍 금테두리)가 씌워진 것이다. 먼저 고층차의 법리를 알고 나서 사람마음을 단속해 신인합일(神人合一)에 도달하고 우주 각 층의 표준에 부합하게 된다. 그 후 착실한 수련 중에 폭로되는 집착은 위에서 아래로 닦으며 물질의 껍데기를 깨뜨리는 과정이다.
아! 이렇게 쓰려니 정말 답답하다. 마음속으로는 아주 명백하고 사유가 명석한데 겨우 이런 피상적인 것만 쓸 수 있으니 스스로 무능함이 느껴진다. 찻주전자에 만두를 삶듯 배 안에는 가득 차 있는데 말로는 나오지 않는 이 기분을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너무 답답해서 크게 한바탕 울고 싶을 때도 있다.
비록 가장 힘든 시기를 걸어왔지만 해야 할 일은 여전히 잘해내야 한다. 다행히 서쪽 여행이 있어 법리를 형상화하여 표현할 수 있다. 마치 션윈(神韻)이 무용으로 역사와 미래를 연기하여 수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과 같다. 나 역시 글로 법리를 생동감 있게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나 자신을 직접 치는 것은 시원하겠지만 대다수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글을 좀 더 대중적으로 써야 하는데 나에게 부족한 것은 인내심이고, 깊이 말하면 자비심이다. 용량을 키워야 한다. 우리 모두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이니,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더 큰 자비만이 모든 굽이진 길을 포용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이 대목은 오공의 두 번째 사부인 당승(唐僧)이 아주 잘 연기했다. 당승 자신은 사명에 대한 굳건한 믿음 외에는 뭐 특별한 점이 없고 더욱이 재주도 없다. 하늘을 찌르는 재주를 가진 오공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신불(神佛)의 세력을 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두 사람의 협력은 오공을 매우 답답하게 했다. 당승은 오공에게 사람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 외에 규칙으로 그를 단속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취경인 자신이 아직 진경(眞經)을 얻어 닦지 못했으니 더 높은 것을 오공에게 줄 수 없었다. 이는 오공을 아주 짜증 나게 했고 사부를 얕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보리조사가 이미 주었으니 오공은 고층 법리를 알고 재주를 얻었지만, 본심을 유지할 심법의 단속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승이 보충 수업을 하러 온 것이다. 우선 도덕 이념으로 원숭이의 요동치는 마음을 묶어두었다.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 각지의 요괴들이 이미 목을 빼고 기다리며 자기 구역에서 솥에 불을 지피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오공이 마귀를 굴복시키지 못하면 얻어맞게 되고,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맞아야 한다. 결국 고고한 머리를 숙여 외부의 도움을 청하고 구원병을 부르게 된다. 정념이 부족하면 다치는 것은 늘 육신이다. 이 육체라는 범태(凡胎)는 그렇게 용련(熔煉)되어야만 정념을 녹여 넣을 수 있고 층층이 사람의 물질 껍데기를 깨뜨릴 수 있다. 역전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문제를 찾아야 한다. 육신범태의 세속적 관념으로 선천 성인(聖人)의 마성(魔性)을 단속하려니 협력이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이 서쪽 여행이 길은 멀고도 멀다.
박해 초기 법을 실증하기 위해 나갔던 그 거침없는 기세와 사부님께서 밀어주셨던 용맹정진을 생각해보라. 정말 하늘도 땅도 두렵지 않았고 어떤 생사관(生死關)도 감히 뚫지 못할 것이 없었다. 다시 지금의 어느 정도 완화된 환경 속에서 나태해진 모습을 보며, 위에서 아래로 닦는 내함(內涵)을 생각해야 한다. 물질 껍데기가 표면으로 올수록 현실과 가까워지는데, 개인의 이익은 성벽 귀퉁이보다 더 두꺼워 조금만 내려놓으려 해도 살이 떨리듯 아프다. 관관(關關)마다 다 실제 상황이기 때문이다. 말법(末法)의 최후에 이르러 다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내려놓지 못하면 가짜이고 버리지 못하면 육신을 벗어나기 어렵다. 껍질을 벗고 신(神)이 되려면 먼저 사람의 껍질을 다 버려야 한다. 입으로는 버린다고 말하면서 손에는 꽉 쥐고 있지는 않은가. 마지막 취사선택의 순간에 어느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보아야 하는데 바로 이런 현실이다.
집착을 버림에 누락이 없어야 한다! 모든 집착은 다 누락이고 모든 사람마음은 다 함정이다.최후까지 수련했는데 마음속에 온통 구멍이 가득하고 곳곳이 다 함정이라면 인간세상은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심성으로 어떻게 원만할 것인가. 20여 년 동안 함정을 밟아왔는데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깊이 생각해보면 정말 두렵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9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