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약미
【정견망】
맹자(孟子)는 이름이 가(軻)이다. 전국시대 유명한 유학자로 주 열왕(周烈王) 4년에 태어나 주 난왕 26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84세였다. 본래 노나라 공족인 맹손씨의 후예였으나 후에 추(鄒 지금의 산동성 추성鄒城시) 지역에 옮겨 살았으므로 《사기·맹자순경열전》에서는 그를 추인(鄒人)이라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맹자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고생스러운 보살핌 속에 성인으로 자라났다. 맹모(孟母)는 훈육이 매우 엄격하여 ‘맹모삼천(孟母三遷)’, ‘단기교자(斷機教子)’ 등의 이야기는 천고의 미담이 되었다. 그는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의 문인에게 수학했으며, 공자보다 179년 늦게 태어났으니 대략 장자(莊子)와 동시대 인물이었다. 학업을 마친 후 그는 스스로 공자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제자를 거두고 열국을 주유하며 ‘인정(仁政)’과 ‘왕도(王道)’라는 주장을 널리 알렸다. 공자에 버금가는 유가의 종사가 되어 ‘아성(亞聖)’으로 존숭받았으며 흔히 공자와 합쳐 ‘공맹(孔孟)’이라 불리게 되었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 제후들은 모두 무력을 중시해 부국강병을 꾀하고 영토를 약탈하는 권모술수가들을 찾았다. 그러나 맹자는 선왕(先王)의 도를 지키며 세상에 아부하여 용납받기를 거부했다. 요순을 찬양하고 공자를 숭상하며 평화로운 왕도(王道)의 민본 사상을 천명하여 백성을 깨우치고 세상을 구하며 유가의 도통(道統)을 수호했다. 각국의 군주가 유가의 인의 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인정을 베풀기를 희망했다. 비록 제후들이 맹자를 예우하긴 했으나 그의 주장이 현실과 동떨어져 쓸모없다고 여겨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태사공(사마천)이 말한다. 내가 《맹자》라는 책을 읽으며 양혜왕이 ‘어떻게 내 나라를 이롭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대목에 이르면, 한 번도 책을 내려놓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말한다. ‘슬프다, 이익이란 진실로 화란(禍亂)의 시작이구나! 공자께서 이익에 대해 좀처럼 말씀하지 않으셨던 것은 근본적으로 이 죄악의 근원을 방지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일을 이익에 근거해 처리하면 원망을 많이 산다”라고 하신 것이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익을 좋아하는 폐단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오직 등문공(滕文公)만이 맹자의 정치저 주장을 실행하려 했으나, 등나라는 너무 약소하여 그의 원대한 계획을 전면적으로 실시할 능력이 없었다. 만년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가르치며 제자인 만장(萬章), 공손추(公孫丑) 등과 의(義)와 도(道)를 논하고 유가의 인의 사상을 홍양하며 《맹자》 7편을 완성했다.
당대에 한유(韓愈)가 《원도(原道)》에서 “요(堯)는 순(舜)에게 전하고, 순은 우(禹)에게, 우는 탕(湯)에게, 탕은 문왕·무왕·주공에게 전하고, 이들은 공자에게 전했으며, 공자는 맹가(孟軻)에게 전했다. 맹가가 죽자 그 전함이 끊어졌다”라고 하여 맹자를 선진(先秦) 유가 중 유일하게 공자의 ‘도통(道統)’을 이은 인물로 규정한 때부터 《맹자》의 지위는 점차 격상되었다.
북송 신종 희녕 4년(1071년) 《맹자》는 처음으로 과거 시험 과목이 되었다.
원풍 6년(1083년) 맹자는 처음으로 ‘추국공(鄒國公)’에 추봉되었고, 이듬해 공자묘에 배향되었다. 남송의 광종은 《맹자》를 유가 경전으로 승격시켜 ‘13경’에 넣었다. 주희는 《맹자》를 ‘사서(四書)’ 중 하나로 꼽았다. 이때부터 청대 말기까지 사서는 과거 시험의 필수 내용이었다. 맹자의 문장은 서술이 상세하고 기세가 웅장하며 논리가 명확하고 격앙되어 변론에 능했다.
1,600년 후, 명 태조 주원장(1328년 10월 21일~1398년 6월 24일)은 원래 이름이 주중팔(朱重八)인데, 원조 통치를 뒤엎고 1368년 명 왕조를 세워 연호를 ‘홍무(洪武)’라 했다.
《명사·예(禮)4》에 따르면 “명 태조가 강회부(江淮府)에 들어오자 가장 먼저 공자묘를 참배했다. 홍무 원년 2월, 태뢰(소, 양, 돼지)로 국학에서 공자에게 제사 지내도록 조서를 내리고 사신을 곡부(曲阜 공자의 고향)에 보내 제사지내게 했다”라고 한다. 또한 “공자는 만세(萬世) 제왕들의 스승이다”라고 하며 공자의 후손들을 우대했다.
주원장은 또 홍무 원년 맹자의 54대손 사량(思諒)을 받들어 제사하게 하고 공자, 안자, 맹자 세 집안 자손들의 요역을 면제해주었다. 주원장의 이러한 공맹 존숭은 유교를 중시하는 치국 전략에 기인한 것이었다.
《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나라를 세운 후 주원장이 백호전(白虎殿)에 갔다가 아들들이 《맹자》를 읽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대신에게 물었다.
“《맹자》 말씀의 요지는 무엇인가?”
신하가 대답했다.
“군주에게 왕도(枉道)를 행하고 인정(仁政)을 베풀며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라고 권하는 것이 요체입니다.”
주원장은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
“맹자는 오로지 인의를 말했으니, 당시에 현명한 군주가 있어 그 말을 쓸 수 있었다면 천하가 어찌 하나로 안정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홍무 5년에 반전이 일어났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주원장이 《맹자》를 읽다가 “군주가 신하 보기를 흙이나 풀같이 하면, 신하는 군주 보기를 원수같이 한다(君之視臣如土芥,則臣之視君如寇仇)”라는 등 전제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대목을 보고 크게 노했다. “신하로서 할 말이 아니다”라며 맹자의 공자묘 배향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명사·예4》에는 “홍무 5년 맹자의 배향을 중지했다가, 이듬해 황제가 ‘맹자는 이단을 변별하고 사설을 물리쳐 공자의 도를 밝혔으니 다시 배향하라’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단은 약 10개월간 지속되었다.
배향 중지 사건은 금방 지나갔으나 20여 년 후인 홍무 27년(1394년), 주원장은 대학사 유삼오(劉三吾)에게 명하여 《맹자절문(孟子節文)》을 편찬하게 했다. 《맹자》 원문 중 “어조가 지나치게 억누르거나 드높인 것 85개 조항”을 삭제하게 한 것이다. 이 85개 조항은 과거 시험 문제로 내지 못하게 하고 오직 성현의 중정(中正)한 학문만을 본보기로 삼게 했다. 이 《맹자절문》은 사회적으로 널리 유행하지는 못했다. 17년 후 영락 9년(1411년)에 이르러 《맹자》는 다시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주원장의 맹자에 대한 태도 변화의 깊은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맹자가 공자의 사상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변용했는지에서 찾아야 한다.
공자는 중국 역사상 ‘소왕(素王)’이라 불린다. 즉 왕의 지위는 없으나 왕의 도(道)를 가졌다는 뜻으로, 문화적 의미의 왕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제시한 중화문화 본연의 ‘도(道)’는 무엇인가? 《논어·이인》에 이런 대화가 있다.
공자께서 “삼(參, 증자)아, 나의 도는 하나로 꿰어져 있다(一以貫之)”라고 하셨다.
증자가 “예”라고 답했다.
공자가 나가자 다른 문인들이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증자에게 묻자, 증자는 “스승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증자가 설명한 ‘충서’가 공자가 말한 ‘일(一)’이자 ‘도’였을까?
다시 《논어·위령공》을 보면 공자는 자공에게도 “나는 하나로 꿰뚫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왜 공자는 이를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유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인(仁)’이 공자가 군자에게 요구한 최고 덕목이자 유가 도덕의 핵심임을 안다. ‘인’의 소전(小篆) 글자는 ‘사람(人)’과 ‘두(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인도(人道) 정신의 출발점이다. 후대에 인애(仁愛)와 인후(仁厚) 등의 의미가 더해져 인은 모든 덕의 총화가 되었다. 공자는 제자 자로에게 “덕을 아는 자가 드물구나”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논어·위령공》에 나오는 또 다른 대화를 살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賜, 자공의 본명)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그것을 다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자공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닙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나는 하나로써 그것을 꿰뚫고(一以貫之) 있다.'”
공자가 자공에게 묻기를 “너는 나의 학문이 많은 책을 읽어서 얻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니, 자공이 반문했다. “설마 아니란 말씀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아니다. 나는 ‘일이관지(一以貫之)’ 한다.”
여기서 또 ‘일이관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공자는 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까?
《논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仁)’이 공자가 군자를 양성하는 데 있어 가장 높게 요구한 덕목이며, 유가 도덕의 핵심 사상이자 최고 준칙임을 알고 있다.
《논어·안연》에서 제자 번지(樊遲)가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가장 간결하게 대답했다.
“번지가 인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 하셨다.”
‘인(仁)’의 소전(小篆) 글자를 보면 사람 인(人)과 두 이(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이(二)’는 갑골문이나 금문 등의 고문 체계에서 중문(重文, 겹침) 부호이므로, 인(仁)은 곧 ‘인인(人人)’ 즉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을 뜻하며 인도(人道) 정신의 현현이자 인도(人道)의 기점이다.
후세 사람들이 점차 인애(仁愛)나 인후(仁厚) 등의 도덕적 의미를 더하면서 인(仁)의 함의는 모든 덕의 총합으로 확대되었고, ‘덕(德)’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외적인 행위 방식이나 수단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예기·악기》에서 “덕이라는 것은 본성의 단서이다(德者, 性之端也)”라고 한 것은, 덕이란 인간성에서 발현되는 시초의 표현, 즉 ‘덕행’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동시에 공자는 자로(仲由)에게 덕을 아는 사람이 너무나 적음을 탄식하며 “유야, 덕을 아는 사람이 드물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논어·위령공》)
어떤 이는 공자의 사상 속에 출세(出世)와 입세(入世)가 모두 있으며, 입세 또한 출세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논어·술이편》의 기록을 통해 이러한 점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도에 뜻을 두고(志於道), 덕에 근거하며(據於德), 인에 의지하고(依於仁), 예예(藝)에서 노닌다(遊於藝).”
공자가 세운 입세의 인도(人道) 사상은 인(仁)을 핵심이자 경계로 삼는다. 동시에 공자의 사상은 형이상학적인 천도(天道)를 지향하기도 한다. 널리 대중을 사랑하는 인덕(仁德)을 갖춘 군자가 되어야 함과 동시에,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해야 한다. 즉 덕을 기초로 삼아 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니 이는 출세(出世)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사상은 일종의 섭세(涉世)적인 기조라 할 수 있다. 세상일을 겪되 세상의 먼지 속에 함몰되지 않는 것이며, 덕을 숭상하고 그릇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지 후대에 변질된 경세치용(經世致用)과는 다르다.
《주역·계사상》에서는 “형이상자를 도라 하고(形而上者謂之道), 형이하를 기라 한다(形而下者謂之器)”라고 했다. 이는 형체가 없어 볼 수 없는 것을 도(道)라 하고, 형체가 있어 볼 수 있는 것을 기(器, 그릇)라 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32대 손인 당대의 경학자이자 역학자 공영달(孔穎達)은 《주역정의》 주소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도는 형체가 없는 것의 이름이고, 형은 바탕이 있는 것의 명칭이다. 무릇 있음은 무에서 생겨나고, 형체는 도에 의해 서게 되니, 도가 먼저이고 형체가 나중이다. 도는 형체의 위에 있고 형체는 도의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형체 밖의 위쪽을 도라 하고, 형체 안의 아래쪽을 기라 한다.”
중국 문화에서 ‘도(道)’라는 글자는 매우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사실 도란 그 속의 층층의 이(理)를 뜻하는데, 서로 다른 이는 층차의 높낮이가 있으며 다른 층차의 이에 대한 인식은 심지어 완전히 상반되기도 한다. 이는 사람이 처한 경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인도의 이치와 출세간(出世間)한 후의 이치는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공자는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君子不器)” (《위정》)라고 하셨다. 황간(皇侃)은 《논어집해의소》에서 이를 풀이하기를 “이 장은 군자란 사람이 한 가지 업에만 얽매여 지키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기(器)란 쓰임이 정해진 물건이니, 배는 바다에 뜰 수 있으나 산에 오를 수 없고 수레는 땅으로 다닐 수 있으나 바다를 건널 수 없는 것과 같다. 군자는 마땅히 재능과 업이 두루 넓어야 하며 그릇처럼 하나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이는 곧 “대도는 그릇이 아니다[大道不器]”라는 뜻이다. 군자는 대도를 견지하며 크게 열고 크게 닫으며, 물에 정해진 모양이 없듯 어느 한 가지 편협한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천세계(大千世界) 속의 산천초목과 길짐승, 날짐승 등 형형색색의 만물은 형이상적인 것과 형이하적인 것 두 가지 구성에 불과하다. 형이하의 ‘기’가 인류에게 참으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긴 하나, 형이상의 초연함과 ‘성스러워 알 수 없는’ 신성(神性) 어린 내면이야말로 인류가 존재하는 핵심 의미다. 헤겔은 “형이상학이 없는 민족은 제단 없는 신전과 같다”라고 했다.
신앙은 신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며, 덕을 지키는 것은 도를 깨닫는 기초이다. 중용과 인, 의, 예, 지, 신은 모두 덕이라는 핵심에서 뻗어 나온 덕행의 방식이자 덕을 지키는 방법들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라고 했다.
《역전·계사상》에서는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낳으며,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라고 했다.
공영달은 “태극은 천지가 나누어지기 전 원기(元氣)가 뒤섞여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하니, 곧 태초(太初)이자 태일(太一)이다”라고 했다.
공자가 말한 ‘일이관지’는 마땅히 도가 낳은 ‘일(一)’에서 기원한 것이다. 공자의 섭세 사상에서 체현된 것은, 이 태초(太初)와 태일(太一)을 기점으로 하여 형이상학적 방향인 ‘도에 뜻을 두는’ 것이다. ‘자신을 닦아 남을 편안하게 함(修己安人)’은 자신을 닦은 후 인덕(仁德)이 외부로 화해 나타난 것이지, 형이하학적 방향인 ‘사람을 다스리거나’ ‘사공(事功)’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맹자는 은연중에 공자를 계승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나, 맹자 사상의 표현 방식은 ‘하나가 둘을 낳는’ 방식이었다.
가령 《맹자·고자상》에서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둘을 함께 얻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생명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義)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둘을 함께 얻을 수 없다면 생명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라고 한 것이 그러하다.
여기서 생명과 의를 두 개의 대립하는 선택지로 나누었다.
주원장을 노하게 했던 것은 《맹자·이루하》에서 맹자가 제 선왕에게 말한 다음 대목이다.
“임금이 신하를 수족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복심(腹心)처럼 여기고, 임금이 신하를 개나 말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길가는 사람처럼 여기며, 임금이 신하를 흙이나 풀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깁니다.”
또한 제 선왕이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는 것이 가합니까?”라고 묻자 맹자는 “인을 해치는 자를 도적(賊)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적(殘)이라 하며, 이런 자를 일컬어 한 사내(一夫)라 합니다. 한 사내인 주(紂)를 베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했다. (《맹자·양혜왕하》)
여기에는 모두 맹자의 입세(入世) 사상이 체현되어 있는데, 인애(仁愛)의 마음에도 조건이 있으며 상대방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닦아 경건히 함(修己以敬)’이 아니다. 표현상으로도 자신을 닦아 도를 향해 승화하는 각도가 아니라,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경세치용의 방향으로 미끄러져 내려간 것이다.
공자의 《논어》는 평이하고 착실하며 평화로우며 기운이 고르지만, 《맹자》는 넓고 방대하지만 격앙되어 있고 기운이 격렬하다는 평이 있다. 이것이 아마도 일(一)과 이(二)의 차이일 것이다.
명 말에 이르러 왕부지(1619~1692)는 “천하에는 오직 기(器)뿐이다”라고 여기며, 도는 기의 도이지 도의 기가 아니라고 보았다. 형체가 있는 사물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실체이며, 사물의 법칙은 사물 속에 있으므로 “기에 근거해야 도가 존재하고, 기를 떠나면 도는 없어진다”라고 했다. (《주역외전·대유》)
이를 통해 알 수 있다시피,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며 도덕이 하락함에 따라 유가 사상은 무형에서 유형으로, 덕을 숭상하고 그릇에 국한되지 않던 것에서 경세치용으로, 덕을 지키고 도에 뜻을 두던 것에서 입세의 사공(事功 업적)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어 왔다. 그렇다면 중국 전통문화를 바로잡고 새롭게 하며, 인류가 본연의 참모습으로 돌아가는 반본귀진(返本歸眞)의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9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