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顔丹)
【정견망】
현대 사회에 불임 부부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불임만 치료하는 전문 병원과 전문 클리닉도 많아졌다. 그러나 많은 젊은 부부가 수년 동안 치료를 받아도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불임이 근본적으로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모든 고난과 질병, 불행의 근원은 사람이 악을 행하여 쌓은 업력(業力)이며, 여기에는 전세(前世)의 것도 있고 금생(今生)의 것도 있다.
아래에 예로 드는 청조(淸朝)의 두 인물은 모두 쉰 살이 넘도록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전반생이 지나고 나서 그들은 갑자기 귀한 아들을 얻는 기쁨을 누렸다. 의사나 약을 찾지 않았던 그들이 어떻게 이를 이룰 수 있었을까? 아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청 가경(嘉慶) 연간 진유악[秦維嶽, 자는 근동(覲東), 호는 효봉(曉峰)]이라는 명신이 있었다. 그는 감숙(甘肅) 난주(蘭州) 사람으로 건륭(乾隆) 55년(1790년)에 진사에 급제한 후 한림원 서길사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그를 매우 중히 여겨 무영전(武英殿)에서 도찰원(都察院)으로 옮기게 했고, 이후 호북(湖北)의 염무(鹽務 소금관련 업부)와 향시(鄕試)를 관리하게 했다. 그는 관리로서 청렴했고 치적이 탁월했다. 평생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저축한 돈을 모두 내놓아 서원을 설립하고 품행과 재학을 겸비한 제자들을 많이 양성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의 아버지가 관직이 높은 아들 덕분에 조정의 봉상을 받은 것으로 보였으나, 아들이 운을 얻고 복을 누리게 한 것은 덕행이 높은 그의 아버지였다. 진(秦)옹은 어릴 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성인이 되기 전부터 타향에서 생계를 꾸렸는데, 나중에 한 순무(巡撫)를 만나 그의 인품을 높게 평가받아 집안일을 돕게 되었다. 수년 후 진옹은 자기 사업을 하게 되었고 형편도 점점 풍족해졌다.
다만 나이 마흔이 넘도록 아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매일 집에서 반성하며 수만 금의 가산을 누구에게 남겨주어야 할지 탄식했다. 그는 거액의 은자를 가지고 북경으로 가서 관직을 사려 했으나, 문득 다시 생각했다. “관직 사회는 마치 연극 무대와 같아서 네가 노래를 마치면 내가 등장하니, 한참 소란을 피워도 실질적인 일은 몇 가지 하지 못한다.”
이때 그는 고향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잇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 무료 학당을 세워 아이들에게 글을 읽고 이치를 깨달을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가지고 있던 은자로 북경에서 대량의 서적을 구입해 수레에 실어 고향으로 운반했다.
고향의 학당은 곧 완공되었고, 그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직접 학당에 가서 아이들에게 종이와 붓 등을 나누어주며 열심히 공부하도록 격려했다. 동시에 자신의 저축을 내놓아 ‘인당(仁堂)’을 열고 빈곤한 가정에 의복, 약물, 관 등 일상에 필요한 물품을 무료로 제공했다. 다른 어려움이 있으면 세심하고 주도면밀하게 도움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옹의 아내는 연달아 아들 둘을 낳았다. 그 중 장남이 바로 진유악이며, 차남은 거인(擧人)이 된 후 산서(山西) 모처에서 지현(知縣)을 지냈다. 진옹은 말년에 손자들까지 관직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20년 동안 천륜의 즐거움을 누리다가 90여 세가 되어서야 세상을 떠났다.
소주부(蘇州府) 장주현(長洲縣)의 장(蔣)씨 가문에서도 의사(義士)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장유성[蔣維城, 자는 공표(公表)]으로, 국자감 입학 선발 시험에서 1등을 해서 조정으로부터 학정(學政) 직을 수여받았다. 그는 위인이 두터웠고 평소에도 베풀기를 좋아했다. 강희(康熙) 2년(1663년), 그 지역에 기근이 들자 그는 동생 장덕준[蔣德埈 자는 공손(公遜)]과 함께 마을에 죽 공장을 차려 이재민들에게 무료로 죽을 나누어 주었다. 매일 필요한 곡식이 50석에 달했으나 그는 가산을 다 털어서라도 지역 백성들을 굶기지 않으려 했다. 결국 그는 많은 사람을 살려냈다.
장유성의 선행은 일시적인 기분이 아니었으며, 재난이 지난 후에도 남을 돕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그는 많은 명사와 의사들을 사귀었다. 장유성의 제안으로 그들은 각자 수백 무(畝)의 토지를 기부해 육영당(育嬰堂)을 창립하고 버려진 아기들을 거두어 길렀다.
그러나 예순 살이 될 때까지 장유성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당시 그는 혼자 동정(洞庭) 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산을 내려올 때마다 태호(太湖) 가에서 사흘씩 머물며 어부들에게서 물속 생물들을 사서 방생했다. 나중에 그의 아내가 두 명의 첩을 얻어 그를 돌보게 했다. 5년 동안 그들은 장유성에게 아들 다섯을 낳아주었다. 그는 동생과 우애가 매우 깊었는데, 동생의 아들이 일찍 죽은 것을 알고 자신의 아들 하나를 동생의 양자로 보냈다. 수년 후 형제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고향 사람들은 이 두 의사를 기념하기 위해 현지에 이장선생사(二蔣先生祠)를 세웠다.
참고자료: 《이원총화(履園叢話)》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