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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순후해서 주머니를 털어 남을 도왔다

안단(顏丹)

【정견망 2026년 03월 22일】

성어 중에 ‘경낭상조(傾囊相助)’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자신의 주머니를 털거나 자신이 몸에 지닌 모든 돈을 꺼내 남을 돕는다는 뜻이다. 이 돈은 심지어 자신의 전 재산일 가능성도 높다.

오늘날 경낭상조는 극히 보기 드문 일이며 만약 어쩌다 발생하더라도 구경꾼들에게 바보 취급을 당할 것이다. 사회 전체의 도덕은 이미 전제정권에 의해 공격받고 파괴되었으며 시비의 가치는 폭정에 의해 왜곡되고 뒤바뀌어 사람 마음이 교활하고 냉담하며 복잡해졌다. 비록 예전에도 사람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인심불고(人心不古)’라는 성어가 나왔으나 중공(中共)에 의해 짓밟히고 망가진 오늘날 인심은 그보다도 훨씬 미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는 고인(古人)이 대체 얼마나 무사(無私)하고 순후(淳厚)했는지는 청조(淸朝)의 두 평범한 사람을 통해 살펴보자.

건륭 55년 천진(天津)에 서북산(徐北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 소금 장사를 하다가 나중에 가세가 기울어 형편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어느 해 섣달그믐 그는 빚을 피하려고 어느 작은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갑자기 처참한 곡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지니고 있던 촛불을 켜고 다가가 보니 한 몰락한 선비였다. 그가 거듭 캐묻자 그 선비는 빚이 많아 죽으려 한다고 털어놓았다.

서북산은 “나는 원래 장사를 하던 사람이라 빚이 많았던 적이 있었으나 지금 여전히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비님은 왜 이토록 절망하십니까?”라고 위로했다. 그러면서 “빚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묻자 “이백 금(二百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서북산은 자기에게 돈이 좀 있다는 생각이 들어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보니 마침 이백 금이었다. 이에 그는 아무 말 없이 돈주머니를 그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이름도 남기지 않았고 차용증을 써서 갚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은 거듭 절하며 사례하고 은인과 작별했다.

십 년이 흘러 서북산은 여전히 청빈하게 살았으나 장성한 아들들은 모두 출중했다. 장남과 차남은 문무를 겸비하여 모두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나중에는 셋째 아들과 손자 하나도 과거에 합격했다. 자손들이 관직에서 이처럼 번성하는 모습을 보며 서북산은 만관(萬貫)의 재산을 가진 것보다 마음이 더 든든하고 위안이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가경(嘉慶) 연간 금릉(金陵)성에 진석거(陳石渠)라는 수재(秀才)가 있었다. 그는 사람됨이 단정하고 언행이 신중했다. 젊은 시절 훈장을 지냈는데 가정이 가난하여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다. 수십 년 동안 힘들게 모아 이백 금을 저축했다.

가경 19년 그 지역에 기근이 들었다. 거리에는 쌀 한 되의 가격이 천 전(千錢)에 육박했다. 백성들은 밥을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당시 진 수재는 나이가 쉰을 넘었는데 어렵게 모은 이백 금을 꺼내 자식들에게 말했다.

“이것은 내가 수십 년간 절약하며 모은 저축으로 임종 전에 너희에게 나눠주려 했으나 흉년을 만날 줄은 몰랐다. 지금 쌀값이 폭등하여 가난한 향친(鄕親)들이 배를 채우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만약 너희가 원한다면 내 말대로 이 돈으로 쌀을 사다가 더 낮은 가격으로 빈민들에게 팔아라. 너희가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하지 않겠다.”

자식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내놓은 이백 금으로 쌀을 사서 집 대문 앞에 임시 쌀 가판대를 차렸다. 몇몇 자식들이 교대로 지켰는데 낯선 얼굴이나 내력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판매를 거절했다. 쌀을 사러 온 빈민들에게도 제한을 두어 일 인당 몇 승(升)만 살 수 있게 했다. 쌀을 팔아 번 돈은 다시 쌀을 사는 데 썼고 또다시 저가로 팔았다. 이렇게 진씨 집안 자식들은 정성을 다해 아버지의 숙원을 이루었으며 그 귀한 이백 금으로 많은 사람을 살려냈다.

사실 이백 금이 거액은 아닐 수도 있으나 진 옹(翁)에게는 평생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것이었다. 부자의 관대함과 비교하면 이것이 더욱 귀하고 어렵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단 한 번의 선행으로 진씨 가문 자손들에게 비단결 같은 앞날을 가져다주었다. 진 옹의 두 아들은 모두 가경 24년에 진사에 급제했고 손자들도 모두 학업에 성취를 이루었다.

참고자료: 《북동원필록(北東園筆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