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전】 5: 변방의 우환을 평정하고 흉노를 공격
에포크타임스 문화소조

위로는 진시황과 함께 ‘진황한무(秦皇漢武)’라 병칭되고, 아래로는 당태종과 더불어 ‘한당성세(漢唐盛世)’를 공동 창조한 천고일제(千古一帝) 한무제. (요우쯔/에포크타임스)
한무제 유철(劉徹)에서 ‘무제(武帝)’는 그의 시호이며 정식 시호는 ‘효무황제(孝武皇帝)’다. 후대 사람들은 대개 ‘효’를 생략하고 ‘한무제’라 부르는데, 이는 아마도 한무제의 혁혁한 무공에 대한 숭상과 기념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고대의 시법(諡法)에서는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땅을 넓혀 영토를 개척한 자에게 ‘무(武)’라는 시호를 쓸 수 있다”고 보았다. 역사상 유명한 ‘무’ 시호의 군주로는 주무왕(周武王), 위무제(魏武帝 조조) 등이 있는데, 그들은 대개 개국 황제로서 말 위에서 천하를 얻고 정예병과 용맹한 장수를 이끌며 강역을 개척하여 군사사상 휘황찬란한 공적을 세웠다.
한무제는 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였으나, 한의 국경 위협은 건국 이래 시종일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서한 초년 무위이치(無爲而治)란 집정(執政) 이념 아래 역대 군신들은 변방 문제에 대해 타협적이고 방임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무제에 이르러서야 한초에 축적된 거대한 부를 계승하고 사해(四海)를 수복하겠다는 웅지를 품어, 국가 주변에서 일련의 군사 및 외교 활동을 통해 변방의 환란을 평정하고 강역을 개척하는 목표를 실현했다. 그리하여 대일통(大一統)의 세계적인 다민족 제국을 건립하고 대한제국(大漢帝國)의 국위를 사해에 떨쳤다.
따라서 ‘무(武)’는 한무제의 일생을 개괄하는 성취로서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지난 편에서 우리는 한무제 시대의 두 명장 위청과 곽거병을 소개했다.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을 가진 한무제에 의해 이 두 사람이 중용되었기에, 서한 왕조는 마침내 건국 이래 최대의 변방 환란을 평정했으며, 역사적으로 공인된 한무제의 천고에 빛나는 공적을 이룩했다. 그것은 바로 북방에 웅거하며 한조(漢朝) 백성을 수시로 침범하던 흉노를 격퇴하여 북부 변방을 안정시킨 것이다.

흉노에 대항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 한무제(漢武帝)는 병제를 개혁하고 기병의 발전을 강화했다. 그림은 명대(明代) 사람이 그린 《출경도(出警圖)》의 일부로 대만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공유 영역)
흉노의 화(禍)
이번 편부터 한무제가 흉노를 평정한 전후 과정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흉노는 북방 소수민족의 한 갈래로, 한 이전에는 호(胡), 귀방(鬼方), 산융(山戎), 험윤(獫狁) 등으로도 불렸다. 『사기』에 따르면 흉노의 조상은 하후씨(夏後氏)의 후예로 화하 민족과 혈연관계가 있다고 한다. 진조(秦朝) 때 흉노는 대장군 몽염에게 패해 막북으로 도망쳐 10여 년간 감히 남하하지 못했다.
진조가 멸망한 후 흉노는 초한전쟁의 틈을 타 다시 굴기하여 중국의 서북부, 북부, 동북부의 광대한 지역을 다시 장악했다. 한 왕조가 건립된 후 탐욕스럽고 잔인한 흉노는 서한 변경에 거대한 위협이 되었다. 조조(晁錯)는 『언병사소(言兵事疏)』에서 “오랑캐(胡盧 흉노)가 자주 변방에 들어오는데, 작게 들어오면 작은 이익을 얻고 크게 들어오면 큰 이익을 얻습니다”, “성을 공격하고 읍을 도살하며 가축과 재산을 약탈합니다”, “관리와 군졸을 죽이는 큰 도적입니다”라고 했다.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고조 유방은 기원전 201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북벌에 나섰으나 실패로 끝났고,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 밤낮을 포위당했다가 선우의 부인인 연지에게 뇌물을 주고서야 겨우 탈출했다. 이후 한고조는 화친 정책을 채택하여 비단과 식량 등을 보내며 침입을 줄이려 했다. 이후의 한 황제들도 이 정책을 고수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흉노는 자주 화친 약속을 어기고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나 화친 정책은 한 왕조에 휴양생식(修養生息)의 기회를 주었다. 한무제 시기에 이르러 국가는 풍요로운 모습이 되었고 국고는 충만해졌으며 백성의 삶은 부유해졌으니, 이는 한무제 시기 흉노 반격의 튼튼한 물질적 기초가 되었다.
한무제는 즉위 전부터 흉노의 폭행을 끊임없이 들었기에 즉위 후 세력을 비축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군사적으로 한무제는 병제를 개혁하고 기병의 발전을 강화했다. 이전의 서한 병종은 주로 차병(車兵), 보병(步兵), 궁노병(弓弩兵), 기병(騎兵), 수군(水軍) 등이었으나 위협적인 흉노는 대개 기병이었다. 한무제는 흉노를 이기려면 기병 대 기병으로 맞서야 하며, 한조의 기병은 군마가 우수하고 기사가 용맹하며 무기가 정예하고 훈련이 잘 되어야 하며 통수권자가 뛰어나야 함을 깨달았다.
한무제는 이를 하나하나 실천했다. 우선 관청에서 기르는 말을 45만 필로 확충하는 동시에 충성스럽고 용맹하며 기사에 능한 용사들을 선발하여 두 갈래의 정예 시위군을 조직했으니, 하나는 ‘기문랑(期門郎)’이요 하나는 ‘우림기(羽林騎)’였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천자가 친위군을 보유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한무제는 또한 도성의 상비군인 ‘북군(北軍)’의 역량을 대폭 확충하고 ‘팔교위(屯騎, 步兵, 越騎, 長水, 胡騎, 射聲, 虎賁, 中壘)’를 창설했는데, 그중 절반이 기병이었다. 기병에게 정교한 무기를 주기 위해 황실 무기 창고인 무고(武庫)에 명령하여 철검(鐵劍), 철도(鐵刀), 철모(鐵矛), 철극(鐵戟), 철갑(鐵甲)과 노(弩)를 대량 생산하게 했다. 당시 한군 기병의 주력 무기는 강한 노와 긴 극(戟), 그리고 전도(戰刀 전투용 칼)였다.
경노(勁弩) 즉 ‘동노기(銅弩機)’는 진의 노와 마찬가지로 위력이 막강한 원사(遠射) 무기였다. 그중 ‘대황(大黃)’이라 불리는 강노(强弩)는 더욱 대단하여, 역사상 유명한 ‘비장군(飛將軍)’ 이광(李廣)이 이것으로 흉노 장수 여러 명을 쏘아 맞혔다. 긴 극(長戟)은 한군 병사들의 주력 장병기였다. 한무제는 신속하게 용맹한 기병 군단을 구축했고, 적절한 시기만을 기다려 흉노에 대한 반격을 가할 준비를 마쳤다.

흉노에 대해 전쟁을 할 것인지 화친을 할 것인지에 관한 결책에 대해 한무제는 자주 조정에서 정의(廷議)를 전개했다. 그림은 작자 미상의 《복수제천책(福壽齊天冊).가우사진(嘉祐四眞)》 일부다. (공유 영역)
대전(大戰) 전야
한무제(漢武帝) 시기 한(漢) 흉노 관계는 대략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화친에서 전쟁으로 넘어가는 기획기다. 즉위 초기에 한무제는 흉노의 배신행위에 대해 매우 분개하여 군대를 휘둘러 토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했다. 첫째, 국가에 새로 천자가 붕어하여 정권이 안정되지 않았고, 둘째, 한나라와 흉노 조정 내부에 화친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모두 높았으며, 셋째, 출병 거동이 무위정치(無爲政治)의 이념에 위배되어 한무제가 자주 두태후(竇太後)의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건원(建元) 6년(기원전 135년), 흉노(匈奴)가 화친을 청해오자 한무제(漢武帝)는 대신들을 소집해 상의했는데 조정에서 주전론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국가 외교 사무를 관장하는 대행령(大行令) 왕회(王恢)는 흉노가 수시로 변화하고 성정이 잔혹하니 군대를 일으켜 토벌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어사대부(御史大夫) 한안국(韓安國)이 극력 반대하며 말하기를, 흉노인은 새처럼 옮겨 다니며 사는데 만약 한나라 군대가 수천 리를 치달아 그들을 공격한다면 인마가 피폐해져 너무 위험하니 화친이 더 온당하다고 했다. 다른 대신들도 모두 화친에 찬동했다.
따라서 《사기‧흉노열전》에서는 한무제가 화친의 맹약을 계속 천명하고 흉노인을 후하게 대접하며 관시(關市) 무역을 소통시키고 물자를 풍부하게 공급했다고 전한다. 이에 흉노는 선우 이하가 모두 한나라와 친하게 지내길 원해 장성(長城) 아래를 자주 오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겉모습일 뿐이었고 한무제는 잠시 은인(隱忍)했을 뿐이며 실제로는 흉노에 반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했다. 앞서 언급한 군대 발전이나 장건(張騫)을 서역(西域)에 사절로 파견한 것 등이 그러한 예다.
2년 후인 원광 2년(기원전133년), 마읍현의 부유한 상인 섭일(聶壹)이 흉노의 침범을 걱정하여 왕회를 통해 황제에게 제안하기를, 흉노를 이익으로 유인하여 궤멸시키자고 했다. 한무제는 다시 조정에서 정의(廷議)를 전개했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鑒)》에는 두 파벌 대신들 사이의 격렬한 쟁론이 기재되어 있다.
한안국(韓安國)은 여전히 화친을 강력히 주장하며 말했다.
“한고조(漢高祖)께서 포위되어 7일간 식량이 끊겼을 때도 포위를 푼 후 여전히 천하를 중히 여겨 흉노와 화친하셨고, 5대 제왕을 거치는 동안 국가가 모두 화친의 이익을 입었습니다.”
왕회(王恢)가 반박했다.
“고조께서 보복하지 않으신 것은 천하의 안녕을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천하는 이미 안녕치 못하며, 접경지역에서 여러 차례 경보가 울리고 군인과 백성의 사상도 참중(慘重)합니다.”
한안국이 말했다.
“한나라 군대가 장거리를 이동하여 적진 깊숙이 들어가면 물자 운송이 곤란하므로 작전 난도가 극히 높으니 군대를 내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왕회도 날카롭게 맞섰다.
“흉노를 공격할 때 적을 접경지로 유인하여 기병(奇兵)으로 복격(伏擊)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주화파가 더는 할 말이 없게 되자, 한무제(漢武帝)는 흉노에 대한 정책을 화친에서 전쟁으로 정식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한무제는 호군장군(護軍將軍) 한안국, 장둔장군(將屯將軍) 왕회, 효기장군(驍騎將軍) 이광(李廣) 등 6인에게 군사 30만을 통솔하게 하여 적을 유인해 공격하는 계획을 집행하게 했다. 섭일(聶壹)이 내응하여 당시의 군신선우(軍臣單于)를 속여 유인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마읍의 모략(馬邑之謀)’다. 섭일은 자신이 마읍령(馬邑令)과 승(丞)을 죽이고 성을 바쳐 흉노에 투항할 것이니 성안의 재물은 모두 흉노인의 것이라고 말했다. 군신선우는 이를 사실로 믿고 행동 시간을 약속했다. 약속 당일 섭일은 성벽에 머리 몇 개를 걸어두고 성 북쪽에 가축 떼를 흩어 놓았으며, 동시에 30만 한나라 군대를 성 밖에 매복시켰다.
군신선우가 10만 기병을 이끌고 마읍에 도착했을 때 가축들을 보고 의심이 생겨 근처의 안문위사(雁門尉史)를 사로잡아 심문했고, 한나라 군대가 매복했다는 정보를 얻었다. 흉노인은 즉시 당황하며 퇴각했고 한나라 군대가 소식을 듣고 추격했을 때 흉노 병사들은 이미 멀리 달아나 버려 ‘마읍지모’는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주전파였던 왕회는 본래 흉노의 치중(輜重)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정작 전투에 임해서는 감히 출격하지 못했고 결국 죄를 두려워하여 자살했다.
이후 수십 년간 유지되던 한흉(漢匈)의 평화 관계는 철저히 파열되었고 화친은 단절되었다. 흉노가 여러 차례 한나라 접경을 침범하자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던 한무제는 흉노에게 정면 돌파의 일격을 가하며 십수 년에 걸친 한·흉 전쟁을 시작했다.

왕쌍관(王雙寬)이 그린 《백위영웅방(百位英雄榜)》 위청(衛青). (왕쌍관 제공)
처음 예봉을 드러내다(初露鋒芒)
4년의 시간이 흘러 원광(元光) 4년(기원전 129년)이 되자, 흉노가 다시 대거 한조를 침범하여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張家口) 일대까지 깊숙이 들어왔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불을 지르고 살육과 약탈을 일삼아 한 백성들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화급을 알리는 수많은 상소문들이 연달아 한무제(漢武帝)의 손에 전해졌다. 크게 진노한 한무제는 곁에 있던 근시(近侍)들에게 “짐이 막 흉노를 토벌하려던 참인데, 그들이 제 발로 찾아왔구나!”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때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던 한무제는 마침내 흉노와 승부를 가릴 시기를 맞이했다. 게다가 그는 이미 불세출의 군사 기재인 위청(衛青)을 얻어 흉노를 평정하려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위청은 평양공주(平陽公主)의 기노(騎奴 말을 타고 주인을 수행하는 노비)였으나, 누나 위자부(衛子夫)가 입궁하여 총애를 받게 되자 그로 인해 한무제의 주목을 받아 천자의 근신(近臣)이 되었다. 하지만 한무제가 위청을 발탁한 것은 단순히 이것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성품이 겸손하며 신중하며 행사가 과감한 점을 높게 샀기 때문이다. 대전(大戰)을 치르기 전 위청은 건장감(建章監), 시중(侍中), 태중대부(太中大夫)를 역임하며 한무제 곁에서 정무를 배웠고 깊은 신뢰를 얻었다.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한무제는 즉시 위청, 공손하(公孫賀), 공손오(公孫敖), 이광(李廣)을 불러 그들을 출정 장군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번 전략적 의도, 즉 병력을 나눠 돌격하는 책략을 채택하여 변경 요새에서 흉노인들을 징벌하고 대한(大漢)의 군위(軍威)를 맛보게 할 것임을 명시했다. 다만 한의 군대는 적진 깊숙이 들어가지 말고, 충분한 준비를 마친 후에 큰 타격을 가하게 했다. 네 명의 장군은 각기 1만 명의 인마(人馬)를 거느리고 변경으로 달려갔는데, 이는 한군(漢軍)이 조직한 최초의 대규모 반격 전쟁이었다.
이 네 명의 장군 중 위청과 공손오는 모두 파격적으로 발탁된 인물들로, 이전에는 실전 경험이 없었다. 공손오는 본래 한무제의 기랑(騎郎)이었으나 위청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한무제의 중용을 받았다. 한무제가 두 신참을 기용하자 백관들의 의구심이 많았다. 그러나 한무제는 위청이 이번 전역(戰役)에서 거둘 전과가 명장 이광보다 못하지 않을 것임을 굳게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장군(車騎將軍)을 맡은 위청은 상곡(上谷, 지금의 하북 회래)에서 출발하여 예정된 방안에 얽매이지 않고 흉노인들이 매년 조상과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정치 문화의 중심지 용성(龍城, 지금의 내몽골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일대)을 직격하여, 미처 대비하지 못한 흉노인 7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나머지 세 길의 대군 중 공손하는 공 없이 돌아왔고, 공손오는 흉노와 교전하다 기병 7천 명을 잃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나중에 속전(贖錢)을 내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 가장 기대를 모았던 이광 장군은 흉노의 매복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다가 요행히 탈출해 돌아왔으나 역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한편으로 한무제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직접 발탁한 위청이 거둔 승리는 흉노인에게 가한 심대한 타격이었기에 한무제는 매우 흔쾌해하며 즉시 위청을 관내후(關內侯)에 봉했다. 위청은 가히 용맹이 삼군에 으뜸이라 할 만했으며 단번에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기원전 128년), 흉노인들은 광적으로 보복하며 한조 변방 수비대를 급습해 요서(遼西)태수를 죽이고 어양(漁陽, 지금의 북경 밀운 서남)을 침범했다. 한무제는 다시 흉노를 겨냥한 전역을 발동하기로 결정했다. 이번에 한무제는 위청을 더욱 중용하여 그에게 3만 명의 정예 기병을 맡겨 안문(雁門) 북쪽으로 나가게 하여 병력을 집중시켜 흉노 군대를 섬멸하도록 했다. 동시에 장군 이식(李息)에게 군사를 이끌고 흉노를 견제하게 하여 위청의 작전을 협력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기대에 부응하여 흉노 수천 명을 살상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안문 전투는 한무제가 흉노에 반격한 이래 거둔 최초의 진정한 승리였으며, 조정이 위아래로 크게 고무되었다.
이 기간에 이광 또한 흉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는 다시 소환되어 우북평(右北平, 지금의 요녕 능원 서남) 태수가 되었는데, 일찍이 활을 빼앗아 흉노 기병을 쏘아 죽임에 백발백중이었다. 흉노인들은 그를 “비장군(飛將軍)”이라 존칭하며 몇 년 동안 그의 주둔지를 감히 범하지 못했다.

막남 전투의 승리는 삭방(朔方) 요지를 더욱 공고히 했고, 수도 장안에 대한 흉노의 직접적인 위협을 완전히 제거했다. 그림은 명대(明代) 사람이 그린 《출경도(出경圖)》의 일부이며 대만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공유 영역)
오르도스 수복
흉노를 징벌한 후 한무제는 본래 정치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7년), 흉노가 상곡(上谷 지금의 하북 회래 동남)과 어양 등지를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 1,0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했다. 흉노의 재침범에 한무제는 더 큰 규모로 군사를 일으켜 흉노에 반격하고 변방의 근심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흉노가 빠르게 이동하는 특징을 고려하여 한무제는 허허실실 전략을 채택했다. 그는 위청과 이식을 파견해 대군으로 두 번째 반격을 가하게 하여 흉노가 점거하고 있던 하투(河套 오르도스) 지역을 공격했다. 이곳은 옛날에 “하남지(河南地)”라 불렸는데, 수도인 장안과 가까워 흉노 기병이 하루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어 한조에 매우 위협적이었다.
위청은 대군을 이끌고 황하를 따라 서진하여 하투 및 그 남쪽 지역을 점거하고 있던 흉노 누번왕(樓煩王)과 백양왕(白羊王)의 부대를 급습했다. 흉노인 5,000여 명을 섬멸하고 소와 양 백만 마리를 노획하며 마침내 “하남지”를 수복했다. 한무제는 즉시 대신 주부언(主父偃)의 건의를 받아들여 “하남지”에 삭방군(朔方郡)과 오원군(五原郡)을 설치하고 삭방성을 쌓아 내지의 백성 10만여 명을 옮겨 둔전하게 했다. 또한 그는 진시황 때 몽염(蒙恬)이 쌓았던 성새(城塞)를 수축하게 하여 경계선을 다시 음산산맥(陰山山脈) 일선으로 회복시켰다.
한무제의 “하남지” 수복은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지닌다. 황하의 변방 방어를 강화함으로써 장안에 대한 위협을 해소했을 뿐만 아니라, 한 군대가 흉노에 반격할 수 있는 기지를 구축했다. 실제로 한무제의 거동은 흉노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군신선우는 이 소식을 듣고 병으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다가 이듬해(기원전 126년) 세상을 떠났고, 그의 동생인 이치사(伊稚斜)가 즉위했다. 새 선우는 하남이라는 전략 요지를 잃은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삭방, 안문, 정양(定襄) 일대를 반복적으로 습격하며 하남 지역을 되찾으려 시도했다.
한무제는 본래 반격하려 했으나 마침 황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효도를 다하기 위해 한무제는 분노를 억누르고 군대를 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치사 선우는 한조(漢朝)에 교전할 충분한 군사력이 없다고 오해하여 산서 북부와 내몽골 남부 일대를 공격해 점령하고, 더 큰 규모의 공격을 준비했다. 원삭 4년(기원전 125년), 흉노 이치사는 9만 기병을 동원해 세 길로 나누어 대군(代郡, 지금의 하북 경내), 정양(定襄 지금의 내몽골 경내), 상군(上郡, 지금의 섬서 경내)을 공격했고, 흉노의 우현왕(右賢王)도 틈을 타 삭방성을 공격하니 한조 북부 변경 곳곳에서 급보가 전해졌다. 한 군대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여전히 손실이 컸고 수천 명의 인구가 끌려갔다.
연달아 올라오는 보고를 마주하며 한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대신들과의 회의에서 “호인(胡人) 방어에서 멸망으로”라는 전략 목표를 제시했다. 한무제는 단순한 방어만으로는 화근을 제거하기 어렵고, 흉노를 멸하지 않으면 백 년 동안 해를 끼칠 것이나 화근을 뽑아버리면 만대(萬代)에 복이 될 것이니, 설령 전국의 힘을 다 쏟더라도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한무제의 기개는 한조 장졸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이듬해(기원전 124년) 봄, 한무제는 막남(漠南) 전투를 발동했다. 탁월한 군사 재능을 가진 위청이 통수(統帥)로 임명되어 여섯 장군과 10만 정예 기병을 이끌고 북쪽으로 흉노를 공격했다. 한 길은 장군 이식(李息)이 이끌고 우북평(지금의 내몽골 영성 서남)으로 출병하여 선우와 좌현왕을 견제하며 위청 주력의 행동을 보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위청은 한 무리의 인마를 이끌고 삭방에서 나가 막남으로 들어가 흉노 우현왕의 주둔지를 급습했다. 우현왕은 한나라 군대가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해 다급히 수백 명의 친병(親兵) 호위 하에 도망쳤고, 비왕(裨王, 흉노의 소왕) 10여 명과 흉노인 1만 5천 명, 가축 백만 마리가 모두 위청의 전리품이 되었다.
막남의 승전보가 도성에 전해지자 한무제는 매우 기뻐하며 위청을 대장군(大將軍)에 봉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봉읍 외에 다시 8,000호를 봉하고 그의 세 아들도 후(侯)에 봉했다. 이러한 포상은 한 건국 이래 한초의 명재상 소하(蕭何)만이 받았던 것이다. 위청은 오히려 겸손하게 사양하며, 이 모든 것이 여러 장졸이 사선을 넘나들며 세운 공로라고 말했다.
사실 덕과 재능을 겸비한 위청은 그러한 포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위청은 군대를 다스림에 호령이 엄명했고 부하들을 아꼈다. 전투 임박 시 공격할 때 그는 반드시 몸소 앞장섰으며, 포상을 받으면 한푼도 남기지 않고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행군 도중 영채를 세울 때도 병사들이 휴식을 취한 후에야 자신도 쉬었으며, 급류를 만났을 때도 병사들이 모두 안전하게 건넌 후에야 비로소 자신도 건넜다. 그리하여 장졸들은 모두 위청을 따라 출정하기를 원했다. 위청은 가히 하늘이 한무제에게 내린 충의(忠義)의 장령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또한 한무제의 지인(識人)과 용인(用人)의 밝음과도 떼어놓을 수 없다.
막남 전투의 승리는 삭방 요지를 더욱 공고히 했고, 수도 장안에 대한 흉노의 직접적인 위협을 완전히 제거했으며, 흉노의 좌우 양 부대를 절단하여 한군(漢軍)이 분할 통치하기 용이하게 만들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8/10/n11444677.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