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춘(小陽春)
【정견망】
현대 초문화 연구에서 노자(老子)는 보통 초문화의 걸출한 대표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하지만 서한 시대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한 이래 2,000여 년 동안 노자가 실존 인물인지,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고향이 어디인지, 성명은 무엇인지, 저서의 진위는 어떠한지에 대해 정론이 없었다. 그 사람과 행적에 대해 설왕설래가 이어지며 천고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사기•노자한비열전》에 따르면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厲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며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史)였다”고 한다. 이로써 노자가 초나라 사람임을 단정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노자의 고향에 관한 논쟁은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남(河南) 녹읍(鹿邑)설, 안휘(安徽) 와양(渦陽)설, 호북(湖北) 수주(隨州)설, 호북 형문(荊門)설 등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록이 있다.
첫째는 “혹자가 말하기를 노래자(老萊子) 역시 초나라 사람으로 책 15편을 지어 도가(道家)의 쓰임에 대해 말했으며 공자(孔子)와 동시대 인물이다”라고 한 것이다.
둘째는 “공자가 죽은 지 129년 후에 주나라 태사(太史) 담(儋)이 진(秦) 헌공(獻公)을 만나 이르기를 처음에 진나라와 주나라가 합쳐졌다가 500년 만에 떨어졌고, 떨어진 지 70년 만에 패왕(霸王)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혹자는 담이 곧 노자라고도 하고 혹자는 아니라고도 하여 세상에서 그 그러함을 아는 이가 없다. 노자는 은군자(隱君子)였다.”
이외에 사마천은 《사기•중니제자열전》에서도 “공자가 엄히 섬긴 분은 주나라에서는 노자이고 초나라에서는 노래자였다”라고 말했다.
이상 세 가지 기록은 고금의 무수한 쟁론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먼저 《노자》가 노담의 저작이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북위(北魏)의 최호(崔浩)였으며, 이후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노자》가 노담의 저작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또한 노담, 이이(李耳), 노래자, 태사 담이 결코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노자의 생졸 연대에 대해서도 확실한 기재가 없다.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160여 세 혹은 200여 세를 살았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도를 닦아 수명을 길렀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덕을 닦았으며 그 학문은 스스로 은둔하여 이름을 없애는 것을 힘썼다. 주나라에 오래 머물다 주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떠났다. 함곡관에 이르자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장차 은거하려 하시니 강제로라도 저를 위해 책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노자는 상하 편의 책을 지어 도덕의 뜻을 5,000여 자로 말하고 떠났으며 그 종적을 아는 이가 없다.”

한대(漢代) 벽화 공자(중앙)가 노자에게 도를 묻는 그림
현재 학계에서는 《사기》의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담에게 예(禮)를 물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노자가 공자보다 20세 연상이며 그 태어난 해가 대략 서기전 571년경일 것으로 추측한다. 반면 《열선전(列仙傳)》에는 노자가 은(殷)나라 때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교 전적들인 당말 두광정(杜光庭)의 《도덕진경광성의(道德眞經廣聖義)》, 북송(北宋) 가선상(賈善翔)의 《유룡전(猶龍傳)》, 남송(南宋) 사수호(謝守灝)의 《혼원성기(混元聖紀)》 등에서는 모두 노자가 은나라 제22대 왕 무정(武丁) 9년 경진년 2월 15일 묘시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노자의 생사 수수께끼를 풀고자 한다면 리훙쯔(李洪志) 대사님의 《베이징 국제교류회설법》 중 다음 단락을 보기 바란다.
“나는 또 여러분에게 아주 큰 천기(天機) 하나를 말해 주겠다. 이 일을 이전에 내가 말한 적이 있다. 하늘의 부처, 예를 들어 당신들이 알고 있는 여래, 보살은 사실 모두 하나가 아니다. 대략 10년 혹은 10년을 초과하지 않고 하나씩 바꿔야 했다. 지금의 아미타불도 가장 초기의 그가 아니고, 관음보살 역시 가장 초기의 그가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인류 삼계는 대단히 복잡하고, 그들은 또 삼계와 너무 가깝게 있어 아래의 좋지 못한 것들이 그들을 직접 교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 보살이 사람을 제도하는데, 사람은 부처와 보살에게 영향을 주기가 쉽다. 만약 그들이 장기간 제도한다면 그들은 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이 공간은 대략 10년을 전후하여 그들을 하나씩 바꾼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세계에서는 아주 긴 시간이다. 더욱 큰 공간 속의 구체적인 공간의 시간은 오히려 아주 빠른데, 10년이면 일부 공간에서는 이미 수만 년의 시간이 흐른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 속에서는 부처, 보살을 오래 머물게 할 수 없다. 하늘에는 규정이 있다. 일정한 층차 속에서 무슨 신이든지 일정한 시기가 되면 모두 바꾼다. 목적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과거에 인간세상의 일부 기록 중에도 이런 기록이 있는데 단지 사람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를 뿐이다. 여러분은 관음보살이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역사상 부동한 기록이 있다. 예컨대 남해관음보살이라는 보살이 있는데, 묘장왕(妙莊王)의 딸이 관음보살로 수련 성취되었다고 하고, 또 인도의 쌍마동자(雙馬童子)가 관음보살로 수련 성취되었다는 등등등등은 모두 진짜인데, 단지 동일한 생명이 아닐 뿐이다. ‘관음보살’이란 장엄하고 수승(殊勝)하며 大慈悲(따츠뻬이)한 각자의 원시(原始)형상과 변하지 않는 慈悲(츠뻬이)의 명호(名號)이다. 매 번마다 관음보살 하나가 수련하여 올라갈 때, 그녀는 지상에서 그녀의 장래에 자신을 이어나갈 사람을 선택하는데, 그 사람을 도와 그녀 자신과 똑같은 慈悲(츠뻬이)를 닦게 한다. 역시 그렇게 높은 층차이고, 그렇게 큰 위덕이며, 그렇게 큰 고생을 겪을 수 있고 그렇게 큰 위력이 있을 수 있다. 그 사람이 원만을 이뤘을 때, 그녀는 그녀를 제도해 올라와 자신을 대체하게끔 했다. 매 한 불ㆍ도ㆍ신은 모두 이렇다. 과거에 이는 가장 비밀스런 천기(天機)였는데, 오늘 당신들에게 말해 주었다.”(《베이징 국제교류회 설법》)
따라서 신통(神通)이 있는 사람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노자는 상삼황(上三皇) 시기에는 현중법사(玄中法師)였고, 하삼황(下三皇) 시기에는 금궐대군(金闕帝君), 복희씨(伏羲氏) 시기에는 울화자(鬱華子), 신농씨(神農氏) 시기에는 구령노자(九靈老子), 축융(祝融) 시기에는 광수자(廣壽子), 황제(黃帝) 시기에는 광성자(廣成子), 전욱(顓頊) 시기에는 적정자(赤精子), 제곡(帝嚳) 시기에는 녹도자(祿圖子), 요(堯) 임금 시기에는 무성자(務成子), 순(舜) 임금 시기에는 윤수자(尹壽子), 우(禹) 임금 시기에는 진행자(眞行子), 은상(殷商) 시기에는 석즉자(錫則子), 주(周) 문왕(文王) 시기에는 수장사(守藏史)였다. 월(越)나라에서는 범려(範蠡)였고 제(齊)나라에서는 치이자(鴟夷子), 오(吳)나라에서는 도주공(陶朱公)이었다.
즉 노자는 서로 다른 역사 시기에 서로 다른 지점에서 모두 전생(轉生)했다. 그래서 명성이 자자한 역사학자 사마천조차 노담, 이이, 노래자, 태사 담이 도대체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 대륙에서 벌어지는 유명인의 고향에 관한 논쟁은 실상 최근 몇 년 사이 중공의 무신론, 진화론, 유물론 등 당 문화가 민중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후 나타난 현상이다. 수명이 다해가는 중공이 집권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전통문화를 회복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투자 유치와 경제 발전을 꾀하며, 이를 통해 스스로 수혈하고 기운을 북돋아 연명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유치한 일부 항목들은 선진국과 지역에서 이미 도태된 고오염, 고에너지 소비, 저부가가치 업종들이다. 이는 대량의 농토를 침범하고 생태 자원 환경을 파괴하며 후손의 생존 발전 공간을 희생시킨 대가로 얻은 것이다.
이처럼 닭을 죽여 계란을 취하는 방식의 지속 불가능한 발전 모델은 노자의 천인합일(天人合一) 관점과 완전히 상반된다. 하물며 폭력적인 강제 철거와 환경 오염으로 유발된 집단적 저항 사건들은 도리어 중공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 되고 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808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