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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췌진(2):”진(秦)은 2세 만에 망한다”는 《춘추》의 암호는 왜 천년 동안 아무도 풀지 못했을까?

왕사미(王舍微)

【정견망】

진(秦)나라는 원래 주(周)나라의 한 제후국이었다. 진왕 정(政 훗날의 진시황)이 즉위한 후, 진왕 정 11년(기원전 236년)부터 26년(기원전 221년)까지 15년 동안 선후로 한, 조, 위, 연, 초, 제의 관동 6국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화하 통일을 완성했다. 이후 북쪽으로 흉노를 치고 남쪽으로 백월(百越)을 정벌하며 중국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열었다.

당대 시인 이백(李白)은 역사를 노래한 영사시 《고풍·진왕소육합(秦王掃六合)》에서 진시황이 6국을 쓸어버리고 천하를 휩쓸며 팔황(八荒)을 병탄하던 웅장한 기풍을 표현했다.

진나라 왕이 천지사방을 쓸어버리고
범처럼 노려보니 얼마나 웅위한가
칼을 휘둘러 뜬구름을 베니
제후들이 모두 서쪽으로 오더라
명철한 판단은 신의 계시를 받은 것이요
뛰어난 지략은 뭇 인재를 능가하나니
병장기를 거두어 쇠동상을 주조하고
함곡관은 동쪽문을 여네
회계령에 공적을 새기고
멀리 낭야대를 바라보나니

秦王掃六合,虎視何雄哉!
揮劍決浮雲,諸侯盡西來。
明斷自天啟,大略駕群才。
收兵鑄金人,函穀正東開。
銘功會稽嶺,騁望琅琊台。

《사기·진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왕 정이 즉위한 지 26년에 처음으로 천하를 합병해 36군으로 삼고 시황제라 칭했다”고 한다. 진시황은 황제 제도 및 삼공구경(三公九卿)으로 대표되는 중앙 관제를 창설했고, 봉건제를 폐지하는 대신 군현제를 실시했으며, 수레의 궤도를 같게 하고 글자를 통일하며 윤리를 고르게 하는 한편 도량형을 통일했다. 이로써 중국 중앙집권 왕조의 통치 기초를 닦았기에 “백 대의 왕조가 모두 진의 법제를 행했다”고 일컬어진다. 진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이래 500년 동안 이어진 제후 할거 국면을 종식시키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다민족이 융합된 중앙집권 국가가 되었다.

중국 상고시대에는 삼황오제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하, 은상(殷商), 주의 삼왕(三王) 시대가 있었다. 진시황 영정(贏政)은 삼황의 황(皇)과 오제의 제(帝)라는 호칭을 합쳐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해 천하를 소유한 자의 존호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 높고 높은 자리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숭고한 지위와 지고한 권력을 주로 체감하지만, 이 존호의 이면에는 유구하고 깊은 내함이 담겨 있다.

반고 등이 저술한 《백호통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제왕(帝王)이란 무엇인가? 호칭이다. 호칭은 공적(功)의 표현이니, 공명의 덕을 나타내고 신하와 백성에게 호령하는 것이다. 덕이 천지에 부합하는 자를 제(帝)라 칭하고, 인의가 부합하는 자를 왕(王)이라 칭하여 우열을 나눈다. ……황(皇)은 군주이며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다. 하늘의 총화이자 아름답고 위대함의 명칭이니, 시대가 질박했기에 이를 총괄한 것이다. 황이라 부르는 것은 그 빛남을 아무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번거롭게 하거나 한 선비를 괴롭혀 천하를 수고롭게 하는 자는 황이 될 수 없으며, 필부(匹夫) 필부(匹婦)를 괴롭히지 않기에 황이라 한다. 그러므로 황금을 산에 버리고 주옥을 연못에 던지며, 바위와 동굴에 거처하고 가죽 옷을 입으며 샘물을 마시고 이슬을 머금으니, 허무하고 요곽(寥廓)해 천지의 신령과 통한다.”

이를 풀이하면, “제”와 “왕”은 도덕 방면에서 정도의 높고 낮음이 구별되는데, 전자는 덕이 천지에 합치되어 하늘을 본받고, 후자는 인의를 받들어 땅을 본받는다는 것이다. “황”은 성스러운 덕을 상징하며 천상과 세간의 만사만물을 모드 다스리고 널리 비춘다. “황이란 빛나는 것이다. 성스러운 덕이 찬란하여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한대 채옹의 《독단·권상》).” 그 시대 사람들은 담박하고 허무하며 기도가 웅혼하여 신령과 통했다. 《관자·병법》에서는 “일(一 도)에 밝은 자가 황(皇)이고, 도를 살피는 자가 제(帝)이며, 덕에 통하는 자가 왕(王)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로 보아 그 경계만을 논한다면 다음과 같다.

“황”이란 도(道) 속에 있기에 천하라는 개념이 없으며 만물을 빛내고 대도(大道)가 평탄하여 곳곳이 통한다.

“제”의 경계에는 도와 덕이 있고 천하라는 개념은 있으나 천하를 소유하여 앉아 있다는 관념은 없다.

“왕” 자의 세 가로획은 각각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를 대표하며, 가운데의 세로획은 이 셋을 관통함을 대표한다. 즉 천도, 지도, 인도의 법칙을 통달하여 천명을 받아 왕이 되어 천하를 소유하고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皇帝)”라는 함의 속에는 성스러운 덕이 널리 비추고, 덕을 우러러 귀부하며, 천지가 총괄적으로 연결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천고일제(千古一帝) 진시황이 세운 중국 역사상 최초의 중앙집권 통일 왕조는, 진시황 사후 단 3년 만에 농민 봉기로 인해 2세 만에 망했으며 겨우 14년(기원전 221년~기원전 207년)간 존재했다.

후세에 진나라가 멸망한 원인에 대한 논의가 많았는데, 한대 가의(賈誼)는 《과진론(過秦論)》에서 “인의(人意)를 베풀지 않고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달라진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합병하는 자는 속임수와 힘을 높게 치지만, 안위(安危)를 도모하는 자는 순응과 권도를 귀하게 여기니, 이는 취하는 법과 지키는 법이 다름을 말한다”고 했다. 즉 6국을 합병할 때는 속임수과 무력에 의지하지만,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릴 때는 인의와 권변(權變)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천하를 얻는 방법과 지키는 방법은 같을 수 없다.

《사기·역생육가열전》에는 육가가 한고조 유방에게 간언하며 말한 “역취순수(逆取順守 역으로 취하고 순으로 지킴)”의 이치가 기록되어 있다.

“탕왕과 무왕은 거꾸로 취했으나 순리로써 지켰으며,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을 병용한 것이 장구한 방책이었습니다. 옛적 오왕 부차와 지백은 무력을 극도로 사용하다 망했으며, 진나라는 형법을 임용하고 바꾸지 않다가 결국 황실이 멸망했습니다. 만약 진나라가 천하를 병탄한 후 인의를 시행하고 선성(先聖)을 본받았다면 폐하께서 어찌 천하를 얻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대략적인 뜻은, 탕왕과 무왕이 제후의 신분으로 무력을 써서 제위를 얻은 것은 군신의 도에 어긋나므로 “역취(逆取)”라 하고, 즉위 후 무력을 거두고 문치를 닦으며 선성을 본받고 인의를 행하여 정도에 합치되었으므로 “순수(順守)”라 한다는 것이다. 진나라는 엄격한 형벌과 가혹한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고치지 않아 결국 멸망했다. 만약 진나라가 천하 통일 후 인의를 베풀었다면 어찌 한의 천하가 되었겠는가?

이 글에서는 또한 유방이 천하를 얻는 과정에 대해 “한왕이 파촉에서 일어나 천하를 채찍질하고 제후들을 겁박하여 마침내 항우를 베고 멸했다. 5년 사이에 해내(海內)가 평정되었으니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늘이 세워주신 것이다”라고 논술했다. 이 모든 것은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바로 하늘의 뜻이 성취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시황이 세상을 덮는 공적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하늘이 그를 성공하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은 역취로 천하를 얻는 과정에서 제도(帝道)나 왕도(王道)가 아닌 상앙의 부국강병술을 채용했는데, 이는 춘추오패의 패도(覇道)보다도 근시안적인 강도(強道)였다.

《사기·상군열전》에는 상앙(商鞅)이 진효공(秦孝公)을 만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제도(帝道)를 말하자 효공이 졸았고, 왕도(王道)를 말하자 효공의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패도(覇道)를 말하자 효공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다시 강병술을 말하자 효공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이 돗자리 앞으로 나가는 줄도 몰랐다. 며칠 동안 이야기해도 싫증 내지 않았다”고 묘사될 만큼 매우 의기투합했다. 며칠을 이야기해도 만족하지 못했다. 이에 상군이 “그렇다면 은나라나 주나라의 덕에 비기기는 어렵겠구나”라고 탄식한다.

이로써 법가(法家) 사상을 추진한 상앙의 마음속에도 명백함이 있었으나, 군주의 요구에 따라 인의로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걷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앞에는 상군이 있고 뒤에는 이사(李斯)가 있었기에, 진나라가 걸어온 정벌과 역취의 길은 무거운 죄업을 쌓았으며 동시에 천하 통일 후에는 방향을 돌리기 어렵게 만들었다. 역사라는 큰 연극 속의 진시황 역시 천의가 안배한 이 대본을 바꾸기 어려웠고, 바다 위에 신선이 사는 산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서불을 보내 동남동녀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게” 했을 뿐이다.

역사상 조대(朝代)의 흥망성쇠는 인간 세상의 반리(反理)가 주도하므로 진은 무력으로 천하를 역취할 수는 있었지만, 동시에 우주의 특성이 모든 것을 제약하고 균형을 잡고 있어 업력윤보와 인과의 법칙에 부합해야 한다. 진나라가 신속히 망한 것은 천의의 안배이며, 그 배경에는 더 원대한 의도와 더 큰 역사적 연원이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 동주(東周) 시대는 다시 춘추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476년)와 전국시대(기원전 475년~기원전 221년)로 나뉜다. 주천자와 그 제후들의 정치적 권위가 동요하고 쇠락한 것은 오히려 중화문화의 번영과 발전이라는 보기 드문 시기를 형성했다. 제자백가와 각종 학설, 사상이 잇따라 출현하여 후세를 위해 풍부한 사상과 문화의 보물창고를 쌓았으니, 노자와 공자가 바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실제로 공자가 지은 《춘추》의 해설 속에서 “대일통(大一統)”의 함의를 통찰할 수 있는데, 진이 왜 2세 만에 망했는지 그 심층적인 원인을 탐구해 낼 수 있다.

오늘날 《춘추》를 말하면 흔히 유일하게 전해 내려온 노나라 《춘추》를 가리키는데, 이는 공자가 노나라 사관이 편찬한 사서를 바탕으로 개정해 엮은 것이다. 노 은공(隱公) 원년(기원전 722년)부터 노 애공(哀公) 14년(기원전 481년)까지의 242년간의 역사를 기록했으며 이 시기를 “춘추시대”라 부른다. 한대(漢代)에 이르러 오경의 하나로 존숭되었다. 또한 그 내용을 해설한 《좌전》, 《공양전》, 《곡량전》이 파생되어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병칭한다.

“대일통”이라는 제안은 《공양전》에서 《춘추》의 시작인 은공 원년 “춘왕정월(春王正月)” 네 글자의 첫 구절에 대한 주석에서 처음 나왔다.

“원년 봄, 왕의 정월이다. 원년이란 무엇인가? 군주의 시작되는 해이다. 봄이란 무엇인가? 한 해의 시작이다. 왕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문왕(文王)을 말한다. 어찌하여 왕을 먼저 말하고 정월을 나중에 말했는가? 왕의 정월이기 때문이다. 왜 왕의 정월이라 했는가? 대일통(大一統)을 말함이다.”

《춘추공양전주소(春秋公羊傳注疏)》에서는 “대일통”에 대해 더 상세히 설명했다.

“통(通)이란 시작이며, 총괄하여 잇는다는 말이다. 무릇 왕(王)이란 처음 천명을 받아 제도를 고치고 천하에 정사를 펴고 가르침을 베푸는데, 공후(公侯)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산천으로부터 초목곤충에 이르기까지 정월에 하나하나 매이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므로 정교(政敎)의 시작이라 한다.”

《곡량전》 주석에서는 “《춘추》는 의(義)를 귀하게 여기고 은혜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도(道)를 믿고 사(邪)를 믿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대일통”의 함의는 봄의 시작, 만물의 시작, 정교(正敎)의 시작이며, 또한 “도가 하나를 낳는다”에 부합하는 바른 시작이지, 오늘날 이해하는 판도의 “대통일”이란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면 “정사를 펴고 가르침을 베푸는 것”은 누가 하는가? 옛 삼황 시대에는 성스러운 덕이 널리 비추었고, 오제 시대에는 덕이 천지와 합치되었다. 그때는 정사를 펴고 가르침을 베푼다는 다스림의 개념이 없었으며, 인도하고 이끄는 것으로 충분했다. 삼왕 이후, 특히 동주 이후의 춘추전국시대에는 예악(禮樂)이 붕괴된 것이 이미 매우 뚜렷해졌고, 군왕 “대일통(大一統)”의 영향력은 점차 쇠퇴했다. 인류 사회의 도덕 수준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인류의 도덕 수준을 유지할 것인가? 인류의 도덕은 어떻게 되돌아 올라가고 반본귀진(返本歸真)할 것인가?

이런 역사의 전환점에서 노자와 공자가 나타났다.

노자는 말했다.

“그러므로 도(道)를 잃은 뒤에 덕(德)이 있고, 덕을 잃은 뒤에 인(仁)이 있으며, 인을 잃은 뒤에 의(義)가 있고, 의를 잃은 뒤에 예(禮)가 있다.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짊어지고 양을 안으며, 충기로써 조화를 이룬다(《도덕경》).”

인류의 도덕이 전체적으로 하락한 후 “예악이 붕괴”된 상태에서 군주의 “대일통” 모델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웠고, 법가(法家)의 다스림 방식은 인류의 도덕 제고에 이롭지 않았다. 하늘이 안배한 것은 정교분리(政敎分離)의 모델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차원에서는 군주가 정사를 펴고, 문화 차원에서는 공자의 도가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노자의 출세간(出世間)의 도나 나중에 전해진 불교는 사람들에게 반본귀진의 문화적 지향을 남겨주는 역할을 했으며, 동시에 수련할 수 있는 사람을 되돌아 올라가게 했다.

인류의 발전과 역사적 변천은 대부분 반리(反理)가 주도하므로, 후세 군왕의 통치와 정사 속에서도 매 순간 도(道)에 합치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는 인류 도덕이 하락한 후의 경지가 그러하기 때문이며, 곧 “하나가 둘을 낳는” 상태로 진입한 것이다.

세상의 바른 이치[正理]가 군왕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은 인류 문화와 도덕관의 지속성과 안정에 더욱 유리하다. 중국 역사에서 한 초기 “문경(文景)의 치” 시기 황로지술(黃老之術)의 과도기를 거친 후, 한무제 때부터 공자의 도가 계속 존숭되어 이 중덕향도(重德向道 덕을 중시하고 도를 지향)의 학설이 교육의 주체가 되도록 다져놓았다.

조대가 어떻게 바뀌든, 심지어 이민족이 침입한 후의 조대에서도 이는 변하지 않았다. 《한서·동중서전》에서 동중서가 한무제에게 제안한 기록은 “공씨의 학설을 미루어 밝히고 백가를 내치[推明孔氏,抑黜百家]”라는 것이었다. 훗날 20세기 초 신문화운동 시기에 공자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첫 번째 인물인 이백사(易白沙 1886년~1921년)는, 1915년 9월 진독수(陳獨秀)가 주편한 《청년잡지》(제2권부터 《신청년》으로 개명) 창간호에서 처음으로 “백가를 몰아내고 유술만을 독존[罷黜百家,獨尊儒術]”라는 말을 내뱉어 전통 도덕을 배척하는 구호가 되게 했다. 5년 후 이백사 역시 이상이 깨지자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이로 보아 진조(秦朝)의 속전속결 망국 뒤에 숨겨진 심층적 원인은 이러하다. “대일통”의 삼황오제 시대는 이미 과거가 되었고, 이원화된 정교(政敎)의 시작이 역사적 전환 후의 필연이 되었으나, 진나라가 추진한 “법을 숭상하고 형벌만을 앞세우는” 법가 사상의 역사적 관성은 그로 하여금 이 천추만대에 관계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기 어렵게 했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중앙집권 체제 구축과 “문자 통합”이란 문화적 준비를 마친 후 급속히 막을 내린 것이다.

5천 년 중국 역사와 문화적 안배는 모두 “만조(萬祖) 세상에 내려오고 천불(千佛) 속세에 임하는” 인류 말겁 시기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우담바라 꽃의 상서로움이 나타날 때, 그것은 세상을 구하는 정법(正法)이 이미 인간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있음을 뜻하며, 5천 년 중화 문명의 찬란한 한 장면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줄곧 얼음과 눈이 엄동설한으로 엉겨 붙어 있었는데,
봄을 되돌려 보낸 그 힘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向來冰雪嚴凝地
力斡春回竟是誰

(역주: 남송 육유의 시 《낙매(落梅)》 중 일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5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