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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재대략(雄才大略), 천고일제 한무제전 (8)

【한무제전】 8: 화하를 통일하고 사방에 위엄 떨쳐

에포크타임스 문화소조

위로는 진시황과 함께 ‘진황한무(秦皇漢武)’라 병칭되고, 아래로는 당태종과 더불어 ‘한당성세(漢唐盛世)’를 공동 창조한 천고일제(千古一帝) 한무제. (요우쯔/에포크타임스)

한무제는 북으로 흉노를 정벌하고 서역(西域)을 소통시키는 한편, 남부와 서남부 및 동북부의 강역도 개척하여 무제 후기에 이르러 한의 영토를 극도로 넓혔다. 당시 서한(西漢)의 강역은 서북으로는 오늘날의 신장과 감숙 지역을 포함했고, 서남으로는 지금의 운남 고리공산(高黎貢山)과 애뢰산(哀牢山)까지 닿았으며, 남으로는 복건과 해남 등에 이르렀고, 동북 방향의 판도는 한반도 북부에서 바다까지 확장되었다. 국지적인 축소를 제외하면 이러한 강역은 서한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한무제는 한 왕조의 영토를 개척하는 방면에서 가장 큰 공헌을 세웠다.

양월(兩越)의 통일

『한서·식화지』에서는 “무제는 문경의 치로 쌓인 부를 바탕으로 호(胡)와 월(越)의 폐해에 분노했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호’란 북방 소수민족인 흉노를, ‘월’이란 ‘백월(百越)’이라고도 쓰며 장강 중하류 이남 지역에 분포하던 고대 민족을 가리킨다. 춘추시대 월왕 구천의 ‘와신상담’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서한 시기 월족은 주로 지금의 광동·광서 일대의 남월국(南越國)과 복건·절강·강서 일부의 동월국(東越國)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동월은 다시 민월국(閩越國)과 동구국(東甌國)으로 나뉘어 모두 한조의 책봉을 받고 있었다.

무제 시기 흉노가 날뛰는 가운데 백월인들은 한에 의지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정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건원 3년(기원전 138년), 민월국이 동구국을 포위하자 무제는 군대를 보내 구원했다. 동구인들은 민월이 다시 쳐들어올까 두려워 장강과 회하 사이 지역으로 이주했고 점차 한족과 융화되었다.

건원 4년, 민월왕 영(郢)이 남월을 공격하자 남월왕 조호(趙胡)가 한무제에게 “두 나라 모두 대한의 번신(藩臣)이니 사사로이 싸울 수 없다”며 조처를 요구했다. 무제는 남월왕이 충의롭다 여겨 민월을 정벌했고, 이때 민월왕의 동생 여선(餘善)이 형을 죽이고 항복했다. 무제는 민월국을 유지하되 새 왕을 세워 요왕(繇王)이라 칭했다.

남월왕은 감사의 표시로 태자 조영제(趙嬰齊)를 장안으로 보내 한의 제도를 배우게 하고 반역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조영제는 장안에서 규(樛)씨 성을 가진 한족 여인과 결혼해 아들 조흥(趙興)을 낳았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남월왕이 병이 위중해지자 조영제는 고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에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한무제에게 상서를 올려 규(樛)씨를 왕후로, 조흥을 태자로 세워줄 것을 청했고 한무제는 이 요청을 승낙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조영제는 폭군이었기에 한무제는 여러 차례 사신을 남월국에 보내 완곡하게 조영제가 장안에 와서 한무제를 알현하도록 권유했다. 조영제는 수도로 들어간 후 한무제가 내지 제후들의 사례에 비추어 한나라의 법령을 집행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병을 핑계로 장안에 가는 것을 피하고, 아들 조차공(趙次公)만을 장안으로 보내 시위(侍衛)를 서게 했다.

원정 2년(기원전 115년), 조영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태자인 조흥이 왕위를 계승했고 규씨가 왕태후가 되었다. 이때 한무제는 북방의 흉노를 기본적으로 평정하고 남월을 대한(大漢)의 판도에 편입시키려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사신을 남월에 파견했는데, 원래 한나라 사람이었던 규씨와 남월왕은 권고를 받아들여 한의 제후가 되는데 동의하고 한과 남월 사이의 변방 관문을 철폐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남월 승상 여가(呂嘉)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여가는 남월에서 삼대에 걸쳐 조정을 섬긴 노신으로 지위가 매우 높았다. 그는 한에 귀속되는 것을 극력 반대했으며, 심지어 반란을 일으켜 왕태후와 남월왕을 살해했다.

이에 한무제는 남월을 치기로 결심하고 원정 5년(기원전 112년)에 군사 2천 명을 파병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다시 10만 대군을 파견하여 다섯 길로 나누어 남월을 공격했고, 1년 만에 여가의 난을 평정했다. 그 후 한무제는 남월국에 담이(儋耳), 주애(珠崖), 남해(南海), 창오(蒼梧), 욱림(旭林), 교지(交趾) 등 9군을 설치했는데, 오늘날의 광동, 광서, 해남 및 베트남 북부 지역을 포함한다. 그중 담이와 주애 2군은 오늘날의 해남도에 있으며, 이로써 남월은 모두 한나라 판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여가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민월의 종실인 여선(餘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공로가 민월의 요왕(繇王)보다 크고 국민도 많이 귀순해오자 사사로이 자립해서 왕이 되었다. 한무제는 이 소식을 듣고 여선을 위해 군사를 대대적으로 일으킬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안무(安撫)를 위주로 그를 동월왕에 봉하고 요왕과 병립하게 했다.

하지만 이미 동월왕이 된 여선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여가가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탁하여 공동으로 한 천자에게 대항했다. 여선은 한무제에게 상서를 올려 군사 8천 명을 이끌고 거짓으로 한 수군을 따라 여가를 치겠다고 청했다. 한군이 게양(揭陽)에 도착하자 여선은 바다에 큰 바람이 분다는 핑계로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으며, 여가에게 정보를 누설했다. 한군이 번우(番禹)를 함락시킬 때까지도 여선의 군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한의 장수 양복(楊仆)은 승세를 타고 민월을 평정하길 청했으나, 한무제는 한의 군사와 말이 피로한 점을 고려하여 허락하지 않고 대기하라고만 명령했다. 그런데 여선은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원정 6년(기원전 111년), 여선이 먼저 한나라 장수를 공격하자 한무제는 마침내 네 갈래 대군에 명령해 민월을 압박하게 했다. 전쟁의 승패가 엇갈리던 중 월연후(越衍侯) 오양(吳陽)이 여선에게 투항을 권유했으나 실패하자 700명을 이끌고 의거를 일으켰다. 그는 요왕 등과 모의해 현재 한군이 많고 강한데 여선이 주동자이니, 그를 죽이고 한에 귀순하면 죄를 묻는 것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여선은 내란 중에 살해되었고 동월도 평정되었다.

전쟁 후 한무제는 요왕을 한조의 제후왕으로 강등시키고 다른 장수들에게는 공에 따라 상을 내렸다. 민월국 처리에 대해 한무제는 민월 땅이 험준하여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우며 월인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킨다고 여겨, 대부분의 민월인을 강회(江淮 장강과 회하) 사이로 이주시키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현지는 거의 무인 지대가 되었으며 회계군(會稽郡)의 관할에 귀속되었다. 이로써 무제의 남방 확장은 끝났으며 한나라 남부의 강역을 다시 확립하고 드높은 천위(天威)를 과시했다.

서남이(西南夷) 개척

무지하며 자부심만 강한 사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 ‘야랑자대’(夜郎自大)가 유명한데, 이 고사는 《사기·서남이열전》에서 유래했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한무제는 신독(身毒, 오늘날의 인도)으로 통하는 통로를 찾기 위해 사신을 보내 오늘날 운남에 위치한 전국(滇國)에 이르게 했다. 그 기간에 전왕(滇王)이 한 사신에게 “한나라와 우리 중 누가 더 큰가?”라고 물었다. 나중에 한나라 사신이 오늘날 귀주에 위치한 야랑국을 지날 때 야랑후(夜郎侯)도 같은 질문을 했다. 당시 야랑국은 서남쪽에서 비교적 큰 나라로 국력이 부유하고 병사가 강했다. 한나라 사신은 한나라가 야랑국 수십 개보다 더 크고 국력이 매우 성대하며 인민의 생활이 풍족하다고 말했다. 야랑후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상림부》 등 유명한 대부(大賦)를 썼을 뿐만 아니라 한무제를 도와 서남쪽 길을 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림은 명나라 구영의 《상림도》 부분으로 대북 국립고궁박물원 소장.(공유 영역)

그렇다면 서남이는 어디를 말하는가? 진한(秦漢) 시대 서남이는 주로 오늘날의 사천, 귀주, 운남 일대의 소수 민족 지역을 가리킨다. 서남이라는 방위는 파촉(巴蜀)을 기준으로 제기된 것인데, 야랑과 북(僰) 등 파촉 이남을 남이(南夷)라 불렀고 공(邛), 작(筰), 염(冉), 방(駹) 등 파촉 서쪽을 서이(西夷)라 불렀다. 진시황은 사천 지역에 군현을 설치한 적이 있었지만 한 초기에 조정은 서남이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한무제 즉위 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남 지역을 개통하기 시작했다.

서역을 개통한 것과 비슷하게 한무제가 서남이를 개척한 최초의 목적은 남월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서였다. 건원 6년(기원전 135년), 민월국의 여선이 국왕 영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한 후 한나라의 총사령관 왕회(王恢)는 번양령(番陽令) 당몽(唐蒙)에게 남월을 깨우쳐 한조의 출병 의도를 설명하게 했다. 남월 사람들은 촉군에서 생산된 구기자장(枸醬)를 내놓아 당몽을 대접하며 “이 장은 서북쪽 장가강(牂柯江)에서 운반해온 것인데, 장가강은 너비가 수 리에 달하며 번우성 아래로 흐른다”라고 일러주었다.

당몽은 장안으로 돌아온 후 촉군의 상인들에게 물었다. 상인들은 “촉군에서만 구기자 소스가 나는데 현지인들이 대개 몰래 야랑에 가져가 판다. 야랑은 장가강에 바짝 붙어 있고 강폭이 수백 보나 되어 충분히 배를 띄울 수 있다. 남월은 재물로 야랑을 자기네 쪽으로 귀속시키려 하지만, 그들의 세력이 서쪽 동사(同師)까지 닿으면서도 야랑을 신하처럼 부리지는 못했다”라고 말했다.

당몽은 이에 한무제에게 상서를 올려 야랑국을 통해 배를 타고 장가강을 따라 내려가면 남월을 제압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한무제는 당몽의 주장에 동의하여 그에게 군사 천 명을 이끌게 하고 풍성한 하사품을 들려 보내 야랑후에게 이해관계를 설명하게 했다. 결국 야랑후는 당몽의 맹약(盟約)을 받아들였다. 당몽이 장안에 돌아와 한무제에게 보고하자, 무제는 야랑을 건위군(犍爲郡)으로 삼고 동시에 파, 촉 두 군의 병사들을 동원해 북(僰 오늘날 사천 의빈)에서 장가강에 이르는 도로를 닦게 했다. 공사의 난도가 매우 높아 파촉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이에 한무제는 특사를 보내 당몽을 꾸짖고 현지 백성들을 안무했다. 이 특사가 바로 서한의 유명한 대문장가 사마상여였다.

사마상여라고 하면 누구나 그의 문재(文才)가 뛰어나 내놓는 것마다 명문장임을 알고 있다. 그가 쓴 한부(漢賦)는 한대에 가장 성취가 높은 문학 형식이 되었다. 그와 탁문군(卓文君)의 사랑 전설도 후세에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한무제 시대에 그의 또 다른 큰 공헌은 한무제를 보좌하여 서남쪽 길을 여는 것을 도운 일이다.

원광 5년(기원전 130년), 촉군의 재주꾼 사마상여는 고향인 촉 땅으로 돌아와 향민들이 한나라가 서남이를 개척하는 의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잇따라 《유파촉격(喻巴蜀檄)-파촉을 일깨우는 격문》과 《난촉부로(難蜀父老)–촉 부로들을 논박함》 두 편의 글을 써서 백성들을 일깨웠다. 그중 《난촉부로》는 문답 형식을 빌려 사신의 입을 통해 파촉, 서남이와 중원의 상호 관계를 서술하고 촉 땅 백성들의 부담에 대해 동정과 위로를 표했다. 오늘날 읽어보아도 우리는 그 문장 속에서 “문장이 밝고 비유가 넓어 큰 설득력이 있음(文曉而喻博,有移檄之骨焉)”(《문심조룡》)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사마상여가 장안으로 돌아온 후 공(邛)과 작(筰) 부족의 수령들이 남이처럼 한나라의 하사품을 받기를 원하며 귀순을 요청해왔다. 한무제가 사마상여의 의견을 묻자 그는 “서이 지역은 촉 땅과 가깝고 진나라 때 이미 군현을 설치했으니 지금 다시 개통한다면 반드시 남이보다 수월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한무제가 이에 찬동해 그를 중랑장으로 봉하고 부절(符節)을 들려 서이로 파견했다. 사마상여의 사행 규모는 매우 성대했는데, 네 명의 부사가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재물을 서이의 여러 군장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후 그는 촉군으로 돌아갔고 태수가 직접 교외까지 나와 영접했다. 사마상여의 장인 탁왕손(卓王孫)과 다른 명사들도 그를 찾아와 인사했다. 탁왕손은 사위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상당한 재산을 그에게 증여했다.

사마상여의 이번 사행을 통해 서이 각국이 한에 신속(臣屬 신하게 되어 복종)했다. 한무제는 매우 기뻐하며 그 일대에 10여 개의 현을 신설하여 모두 촉군 관할로 삼았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가 북쪽으로 흉노를 치느라 바쁠 때 한무제도 잠시 서남이 개척 과정을 늦추고 도로 공사를 중단했으며 신설한 현의 일부를 취소하기도 했다. 투항했던 야랑국은 점차 남월에 의지하기 시작했고 공, 작 등 부족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원수 3년(기원전 120년), 흉노에 대한 공격이 일단락되자 한무제는 서남이 개척을 재개했다.

원정 6년(기원전 111년) 남월도 모두 한나라 판도에 들어왔고, 야랑후는 조정에 들어와 한무제에게 복종의 뜻을 표하여 ‘야랑왕’으로 봉해졌다. 한나라는 나아가 야랑 지역을 전부 통제하게 되었다.

이어 한나라 군대가 공, 작 등의 부족을 평정하려 하자 이들 부족은 매우 두려워하며 모두 복종하기를 원했고 한나라 관리를 배치해달라고 요청했다. 한무제는 네 개 군을 설치해 공족의 도읍에 월수군(粵嶲郡)으로, 작의 도읍 침려군(沈黎郡)으로, 염방(冉駹)을 문산군(文山郡)으로, 광한 서쪽 백마를 무도군(武都郡)으로 삼았다.

동시에 한무제는 전왕(滇王)의 투항을 권유하려 했으나 전국(滇國)의 연맹 부족인 노침(勞浸)과 미막(靡莫)의 반대에 부딪혔다. 한나라는 원봉 2년(기원전 109년) 노침과 미막을 쳐서 멸망시켰고 그제야 전왕은 온 나라를 이끌고 복종하며 관리를 두고 조정에 입조하기를 청했다. 이에 한무제는 전국(滇國) 경내에 익주군(치소는 오늘날 운남 진녕현 동쪽)을 설치하고 전왕의 인신(印信)을 하사하여 그가 계속해서 백성을 다스리게 했다.

이로써 한조는 서남이 지역을 기본적으로 통치 범위에 포함시켰으며, 한조의 서남쪽 경계가 오늘날 운남의 고리공산과 애뢰산 라인까지 확장되었다. 양월(兩越)과 서남이의 평정은 한조의 판도를 넓히는 동시에 이들 지역과 화하(華夏)의 경제적, 문화적 유대를 강화하고 촉진했으며 각 민족은 더욱 융합되었다.

동쪽으로 조선 평정하다

조선은 전국 시대부터 중국의 속지(屬地)였는데 서한 초기에 이르러 조정은 조선이 멀어 방어하기 어렵다고 여겨 조선을 연(燕)나라 관할에 포함시켰다. 나중에 연왕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 지역으로 달아나자,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천여 명을 모아 한반도로 들어갔다. 위만은 조선왕 기준(箕准)의 예우를 받아 박사로 제수되어 규(圭)를 하사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 서부의 사방 백 리 땅을 봉토로 받았다. 기준의 목적은 위만이 자신을 도와 한나라를 마주한 서부 국경을 지켜주기를 바란 것이다.

기원전 195년 위만조선이 세워지기 전 한반도.(공유 영역)

그러나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위만은 봉지를 이용해 한 유민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여 자신의 정치, 경제적 힘을 축적했다. 날개가 풍성해진 후 그는 도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자립하여 왕이 되었으며 국호는 그대로 조선이라 칭했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위씨조선(衛氏朝鮮)’이라 부른다. 이때 위씨는 조선 반도 북부 지역을 통제하며 서한의 연나라 땅과 이웃하게 되었다.

당시 한은 초기 안정을 되찾던 중이라 여전히 휴양생식(休養生息)과 무위이치(無爲而治)의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요동태수는 승인을 받아 조선 국왕 위만과 능동적으로 약속을 맺었다. 위만은 한나라의 번속(藩屬) 외신(外臣)이 되어 한을 위해 요새 밖을 보위하여 한 국경이 침범받지 않게 하며, 요새 밖 각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한 천자를 알현하는 것과 각 나라가 한조와 통상하는 것을 중간에서 가로막지 않기로 했다. 그 보답으로 한은 위만에게 병력과 물자 지원을 약속했다.

이런 약속이 생기자 위만은 계속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여 인근의 작은 나라들을 잇달아 정복했다. 위만이 장악한 강역은 면적이 가장 클 때 수천 리에 달했다.

위만의 왕위가 손자 위우거(衛右渠)에게 전해졌을 때, 실력이 날로 두터워진 위씨조선은 한조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다. 우거는 한과 통상하고 조공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진번(眞蕃) 등 작은 나라들이 한과 외교를 하는 것도 방해했다. 그러나 우거가 생각지도 못한 점은 그가 상대하는 한무제가 더 이상 황로(黃老) 정책을 실행하지 않고 대일통(大一統)의 과정을 시작했다는 점이며, 이는 그의 최종 운명을 결정지었다.

원봉 2년(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위씨조선과의 번속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사절인 섭하(涉河)를 조선에 보내 우거에게 한조에 대한 비우호적 정책을 바꿀 것을 권유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섭하는 사행의 결과가 없는 것에 몹시 화가 나서 귀국 도중 자신을 국경 밖까지 배웅하던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죽이고 상황을 한무제에게 급히 보고했다. 이에 한무제는 섭하를 요동군의 도위(都尉)로 임명했다. 우거는 이런 처사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습격해 섭하를 죽였는데, 이것이 한무제가 조선에 군사를 일으킨 도화선이 되었다.

같은 해 한무제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仆)에게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 조선으로 가게 했고, 좌장군 순체(荀彘)는 요동군에서 군사를 이끌고 육로로 출발하여 연합하여 조선을 공격하게 했다. 위우거는 즉시 군사를 조련하여 험요한 위치에 주둔하며 편안히 적을 기다리는 이일대로(以逸待勞)의 전술을 썼다. 양복의 수군이 먼저 조선의 열구(列口 오늘날 대동강 부근)에 도착하여 순체의 육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수군을 이끌고 왕검성(고조선의 도성)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동시에 순체의 육군도 고조선 서부의 대군을 만났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두 갈래 대군이 출정에서 불리해지자 한무제는 다시 위산(衛山)을 사신으로 보내 위우거를 타이르게 했다. 압박을 느낀 위우거는 항복하기를 원한다고 표시하며 태자를 한 조정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게 하고 대량의 군량과 말을 바쳤다. 그러나 태자가 군사 만 명을 이끌고 한으로 갈 때, 사신 위산과 장군 순체가 태자에게 음모가 있다고 의심하여 그의 군사가 무기를 휴대하지 못하게 요구했다. 태자는 사신과 장군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의심하여 군사를 이끌고 왕검성으로 돌아가버렸다.

한무제는 이에 매우 화가 나서 조선에 있는 두 길의 대군에게 왕검성을 계속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한군이 다시 압박해오는 상황에서 조선 내부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했다. 조선왕 위우거가 화친을 주장하는 신하들에게 살해당했고 왕검성은 함락되어 위씨조선은 이로써 멸망했다.

그 후 한무제는 현도, 낙랑, 임둔, 진번 네 개의 군을 설치했으며 관할 경계는 남쪽으로 오늘날의 한강 유역에 이르렀다.

한무제 시기에는 북쪽으로 흉노를 치고 동쪽으로 조선을 병합했으며 남쪽으로 백월을 주살하고 서북쪽으로 총령을 넘고 서남쪽으로 운남 귀주와 통했으며 대완을 정복하여 중화의 강역 판도를 확립했다. 한무제는 서한 왕조의 가장 전성기이자 번영기를 개창했으며, 역사상 진황한무(秦皇漢武)라는 표현은 바로 그의 위대한 공적을 설명해준다. 사상 유례가 없었던 서한 제국의 성황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사람들을 동경하게 한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8/12/n1144876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