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춘(小陽春)
【정견망】
초문화(楚文化)를 논하자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중국 역사상 최초의 애국 시인인 굴원(屈原)과 그의 천고에 빛나는 초사(楚辭)――《이소(離騷)》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사마천은 《보임안서》에서 “서백(西伯 주문왕)은 구금당했을 때 《주역》을 엮었고, 공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쫓교난 후에 《이소》를 지었다. ……”라고 썼다. 즉, 중국 고대의 큰 뜻을 품은 이들은 흔히 대인지심(大忍之心)과 초인적인 의지 및 인내력을 갖추고 있어, 욕됨을 참고 중임을 맡으며 좌절 앞에서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오히려 역경을 분발하고 제고하는 동력으로 삼아 결국 천추에 이름을 떨치고 만대에 향기를 전했다는 뜻이다.
굴원(서기전 340년~서기전 278년)은 이름이 평(平)이고 또는 정칙(正則)이며 자는 영균(靈均)으로, 전국 시대 초나라 단양(丹陽 현재의 호북 자귀秭歸) 사람이다. 전해오는 바로는 고대 제왕인 전욱 고양씨가 초나라의 조상이며, 굴원의 가문은 바로 초나라 왕족의 한 갈래에 속한다. 굴원이 태어난 날은 마침 태세(太歲)가 인(寅)이고 정월 경인일이었다. 즉 년, 월, 일이 모두 인인데 “사람은 인(寅)에서 생겨났다”는 당시 관념에 부합했기에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평(平)’이라 짓고 자를 ‘원(原)’이라 하여 생일과 조화되게 했다. 평은 평정함으로 하늘을 상징하고, 원은 넓고 평탄한 지형으로 땅을 가리킨다. 이처럼 굴원의 이름과 자, 그리고 생진은 천지인 삼자가 합일된 깊은 함의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굴원의 일생은 숭고한 사회적 책임감과 역사적 사명감,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나라를 사랑하는 깊은 우려로 가득 찼다.
그는 인생은 짧고 여정이 총총하니 시간이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을까 두렵다고 거듭 밝히며, 사람이 세상에 온 진정한 목적은 대도(大道)를 탐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자신을 깨끗이 지키고 몸을 닦아 덕을 세워 성취를 이루는 데 있음을 강조했다.
“선(善)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니, 명예(名)는 허황되게 지어낼 수 없다”(《抽思》),
“세월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 같아 나이가 드는 것이 두렵구나”(《이소》),
“마음을 닫고 스스로 조심하여 끝내 허물을 잃지 않으며, 무사하게 덕을 잡아 천지와 나란히 하리라”(《桔頌》),
“길은 멀고도 머니 나는 위아래로 구하며 탐색하리라”, “또한 내 마음이 선하다고 여기는 바이니 비록 아홉 번 죽을지라도 오히려 후회하지 않으리라”(《이소》)라고 했다.
굴원의 일생은 초 위왕(威王), 초 회왕(懷王), 경양왕(頃襄王) 세 시기를 거쳤다. 역사가 전국 시대에 이르러 “무력으로 천하를 다투고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일통(大一統)의 추세가 나타났는데, 이는 사회 발전의 필연적인 결과이자 전체 중화민족 통일의 요구였다. 당시 전국칠웅 중 가장 강대한 나라는 진, 제, 초 세 나라였으며, 합종과 연횡의 겨루기가 매우 치열하여 마지막에 누가 승리할지는 이 세 나라의 내정과 외교의 득실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진(秦)은 상앙의 변법 이래로 국력이 부강해져 제후들을 멸하고 전국을 통일하는 제왕의 업이라는 방향으로 계획적이고 단계적으로 정치, 외교, 군사 행동을 진행했다. 그러나 “진나라가 천하를 취한 것은 의로움이 아니라 포악함이었다”(《전국책·연책2》). 병합 과정에서 상당히 잔인했는데, 조나라와의 장평(長平) 전투 당시 진의 대장 백기(白起)는 조나라 포로 40여만 명을 모두 생매장하기도 했다. 약탈성과 파괴성으로 가득 찬 병합 전쟁은 백성들에게 깊은 재난을 가져왔고 “백성들은 삶을 이어갈 수 없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전국책·진책4》).
초나라의 굴원은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강하며, 다스림과 어지러움에 밝고 사령(辭令 외교적인 응대)에 능숙했다.” 사람됨은 “바른 길로 곧게 행하며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짜내어 그 군주를 섬겼다.”(《사기·굴원열전》)
그리하여 젊은 시절 초 회왕의 총애를 받아 좌도(左徒 외교담당 고문)라는 직위에 올랐다. 굴원은 “길게 한숨 지으며 눈물을 닦으니 백성의 삶이 고단함을 슬퍼하노라”(《이소》)라고 읊으며, 초나라 내정에서는 요, 순, 우, 탕 등 성군(聖君)과 현왕(賢王)을 본받아 법도를 밝히고 어진 이를 임용하며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을 주장했고, 외교적으로는 제나라와 연합하는 합종을 통해 강한 진나라의 연횡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고대의 유명한 현신(賢臣)이었던 고요(皐陶), 이윤(伊尹) 등을 본보기로 삼아 초나라의 힘에 의지해 덕정(德政)의 방식으로 중국 전체를 통일하고자 했다.
굴원은 초나라의 통일 대업을 실현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회왕을 적극적으로 보좌하여 변법을 통해 부강을 꾀했고, 대외적으로는 제나라와 결합해 진나라에 저항할 것을 견지하여 초나라가 한때 국력이 강해지고 제후들을 떨게 하는 국면을 만들었다. 그러나 내정과 외교 면에서 굴원은 초나라의 부패한 귀족 집단과 강렬한 충돌을 일으켰고, 상관(上官)대부 등의 질투로 인해 굴원은 훗날 소인배들의 참언과 모함을 받아 초 회왕과 소원해졌다. 굴원은 좌도 직책에서 해임된 후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전임되어 왕족인 소(昭), 굴(屈), 경(景) 세 성씨의 사무를 관장하고 종묘 제사와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책임지게 되었다.
진왕(秦王)은 굴원이 좌천된 것을 보고 기회라고 여겨 장의(張儀)를 초나라에 파견해 거액으로 간신 근상(靳尚), 자란(子蘭), 정수(鄭袖 회왕이 총애하는 비) 등을 매수해 간첩으로 삼았다. 동시에 “상오의 땅 600리를 주겠다”며 회왕을 유혹해 제나라와 단교하게 했다. 회왕은 나중에야 속은 것을 알고 노발대발하여 두 차례나 진나라로 파병했으나 모두 참패했다. 이에 굴원은 명을 받들어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제나라와 초나라의 옛 우호를 다시 닦았다. 이 기간에 장의는 또 한 번 진나라에서 초나라로 와서 제초 연맹을 와해시키는 활동을 벌여 제초 연맹이 성공하지 못하게 했다. 회왕 24년, 진나라와 초나라가 황극(黃棘)에서 맹약을 맺으면서 초나라는 완전히 진나라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굴원 역시 도성인 영도(郢都)에서 쫓겨나 한북(漢北)으로 가게 되었다.
초회왕 30년, 굴원이 영도로 돌아왔으나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지 못하고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회왕은 여전히 굴원을 멀리했고, 굴원의 올바른 주장들은 끝내 실행되지 못했다. 진혜왕(秦惠王)의 이간질과 유혹 속에 어리석은 회왕은 연달아 속아 넘어가 제나라와의 동맹을 끊었고, 그 결과 병사와 장수를 잃고 땅을 빼앗겨 국세가 점점 쇠약해졌다. 진나라에서 소왕(昭王)이 즉위한 후 초나라와 통혼을 제안하며 회왕에게 만날 것을 약속하자, 굴원은 회왕이 다시는 속지 않도록 극력 만류했다. 그러나 회왕은 막내아들 자란의 부추김에 결국 가버렸고, 결과적으로 회왕은 진나라에 억류되어 3년 후 진나라에서 객사했다.
회왕의 장남 경양왕이 즉위하자 영윤(令尹 재상) 자란과 상관대부 등은 계속해서 투항 정책을 실시했고, 또 경양왕 앞에서 굴원을 모함했다. 그리하여 굴원은 다시 영도에서 쫓겨나 강남으로 유배되어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두 강 사이를 떠돌게 되었다.
경양왕 21년(서기전 278년), 진나라 장수 백기가 영도를 함락시키자 굴원은 원대한 뜻을 이루기 어렵게 되어 끝내 멱라강에 몸을 던져 나라에 보답하려던 이상을 위해 순절했다. 만약 초나라 왕이 당시에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며 굴원의 덕치 주장을 채용했더라면 아마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고, 훗날 중국을 통일한 것은 진나라가 아니라 초나라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나중에 진나라가 초나라 사람에 의해 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속제해기(續齊諧記)》와 《수서·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굴원이 음력 5월 5일에 강에 투신해 자진한 후 중국 민간에서는 이날을 단오절로 정하고 종자(粽子)를 싸고 용선 경주를 하는 풍습으로 굴원에 대한 경모의 정을 표현해왔다.
1953년, 굴원은 “세계 4대 문화 명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세계평화평의회와 전 세계 인민의 성대한 기념을 받았다. 이처럼 굴원은 죽었으나 영광스러우며 그 정신은 “천지와 더불어 수명을 함께하고 일월과 더불어 그 빛을 나란히 했다(與天地兮同壽,與日月兮齊光)”(굴원 《구가·섭강》) 하지만 당시에 일시적으로 득세했던 근상 등의 간신들은 어떠한가? “그대들의 몸과 이름은 모두 사라졌어도, 강물은 만고에 도도히 흐르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네.”(두보 《희위육절구(戲爲六絕句)》)
초사(楚辭)는 바로 초문화라는 토양 위에서 피어난 기이한 꽃이자 초문화의 휘황찬란한 성취를 대표한다. 송대의 사람 황백사(黃伯思)는 “굴원의 여러 소(騷)는 모두 초나라 말을 쓰고 초나라 소리를 내며 초나라 땅을 기록하고 초나라 사물의 이름을 붙였기에 초사라고 부를 수 있다”라고 했다.
《초사》는 중국 최초의 낭만주의 시집으로 《시경》과 더불어 나라힌 ‘풍(風)’과 ‘소(騷)’라는 두 문체를 이룬다. 《초사》가 후세에 갖는 의의는 문학적 성취뿐만 아니라 사상적 영향에 더 크게 나타난다. 특히 굴원의 대표작인 《이소》는 전체 373구, 2,490자로 이루어져 있다. 굴원은 이 화려하고 변화무쌍하며 구상이 기이하고 기백이 웅대한 장시에서 낭만적인 수법을 운용해 비할 데 없이 풍부한 창작력을 발휘했다.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가며 현실 세계, 신화 세계, 이상 세계를 융합하여 색채가 찬란하고 몽환적인 세계를 묘사했다. 또한 뜻이 높고 결백하며 강인하게 굴하지 않는 서정적 주인공의 형상을 창조했고, 초왕의 어둡고 변덕스러우며 선악을 가리지 못하고 충간을 분별하지 못함을 폭로했다. 옛 귀족들의 현능한 이를 시기하고 아첨하며 탐욕스러운 면모를 비판했고, 나라에 보답할 길이 없는 자신의 깊은 분노를 토로하며 시인의 숭고한 애국주의 정신과 차라리 옥이 깨질지언정 기와로 온전하지 않겠다는 굳은 절개를 표현했다.
《이소》는 이렇게 2천여 년 동안 수많은 중화 자녀들을 감동시키고 길러냈으며 대대로 사람들의 사상정조를 도야했다. 특히 국난이 닥치거나 국가와 민족이 위태로울 때, 혹은 정치가 암흑에 빠지거나 개인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굴원과 그의 작품을 떠올리며 그 속에서 힘을 얻곤 했다. 굴원 또한 애국자의 본보기로서 그 정신이 우리 민족 심리에 스며들어 민족 문화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 되었다.

초사――구가·동황태일도(東皇太一圖)
《이소》 외에도 굴원의 작품으로는 《구가(九歌)》, 《천문(天問)》, 《구장(九章)》, 《초혼(招魂)》 등이 있으며, 전해지는 바로는 《원유(遠遊)》, 《복거(卜居)》, 《어부(漁夫)》, 《대초(大招)》 등도 굴원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중 《구가》는 굴원이 초나라 민간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악가(樂歌)를 바탕으로 개작한 연작 시가이며, 《천문》은 고금에 보기 드문 기이한 시편으로 질문의 형식을 통해 하늘을 향해 172가지의 동서고금에 인류가 영원히 탐구해 온 화두를 던졌다. 이 세계는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왜 그러한가? 어디로 가는가?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왜 이곳에 왔는가? 이는 우주 진리를 대담하게 추구하는 시인의 정신을 보여준다.
《어부》에서는 진흙탕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않고 홀로 자신을 선하게 지키며 세속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는 굴원의 고귀한 품격을 표현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가와 못가에서 노닐며 못둑을 거닐며 읊조리는데, 얼굴빛은 초췌하고 몸은 마른 나무처럼 야위었다.
어부가 그를 보고 묻기를, “당신은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라고 하였다.
굴원이 답하기를,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구려. 이런 까닭에 내쫓김을 당하였소.”라고 하였다.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과 더불어 변해간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흐려져 있다면, 어찌하여 진흙탕을 흔들어 그 물결을 함께 일으키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다면, 어찌하여 그 술지게미를 씹고 단술을 마시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행동하여 스스로 추방을 당하셨습니까?”라고 하였다.
굴원이 답하기를, “내가 듣기로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먼지를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어찌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차라리 상수(湘水)에 뛰어들어 강물 속 물고기 배 속에서 장례를 지낼지언정, 어찌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노를 저어 떠나며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라고 하였다.
마침내 떠나가 버리니, 다시는 더불어 말하지 못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