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춘(小陽春)
【정견망】

하남 전국시대 초묘에서 출토된 금슬악무채회도(錦瑟樂舞彩繪圖)의 일부.(인터넷 사진)
“항장(項莊)이 칼춤을 추는 의도는 패공(沛公)에게 있다.” 홍문연에서 서초패왕 항우의 모사 범증은 항장에게 칼춤을 추게 하여 술자리의 흥을 돋우며, 그 틈을 타 패공(유방)을 암살하려 했다. 사실 항장이 연회석에서 칼을 뽑아 춘 춤은 한대(漢代) 초나라 악무의 일종에 속한다.
오천 년 중국 고전무용 역사상 초문화의 중요한 구성 부분인 초나라 무용은 선진(先秦) 시기 독자적인 풍격을 이루어 동주(東周) 열국(列國)에 그 명성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후세 무용 예술 발전에도 극히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초나라 사람은 신을 믿고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는 풍습이 있어, “제사 때 반드시 무격(巫覡)으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게 하여 신을 즐겁게 했다.”
초나라 사람이 무(巫)를 숭상하고 신명을 경외함에 따라 초나라 지역에는 무풍(巫風)이 성행했다. 무술(巫術) 의식에서 가무는 가장 주요한 내용이었다. 초나라 무용의 기본 형태는 근대 발굴 출토된 대량의 초나라 유물 자료를 통해 그 신운(神韻)을 엿볼 수 있다. 초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초나라 무용은 여전히 서한 무용계의 주선율이었으며, 한대 궁정 무용의 대다수는 초나라 무용 체계에 속했다.
고증에 따르면 갑골문의 ‘무(巫), 무(武), 무(舞)’는 동일한 글자였으며, 초나라 무용은 고대 무격의 제사 활동 중 무무(巫舞)에서 직접 기원했다.
《국어•초어(楚語)》에서 관역보(觀射父)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에는 백성(民 세속)과 신(神 신성)이 섞이지 않았으니, 백성 중 정신이 맑고 한결같으며 장중하고 곧은 자, 지혜가 상하의 의리에 부합하고 성스러움이 멀리까지 밝게 퍼지며 총명함이 구석구석 사무치는 자에게 신명이 강림했다. 남자일 경우 격(覡)이라 하고 여자일 경우 무(巫)라고 한다.”

옥조쌍무녀(玉雕雙舞女).(인터넷 사진)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무(巫)는 무축(巫祝)이다. 여자가 형체 없는 존재를 섬기고 춤으로써 신을 내리게 하는 자를 말한다. 사람이 두 소매를 휘저으며 춤추는 형상을 본떴다.”
글자 형태상으로 볼 때, 무(巫)의 상하 두 가로획은 천지를 대표하며 천지를 소통할 수 있는 사람, 즉 사람과 신 사이를 잇는 가교를 의미한다.
이로 보아 무(巫)의 본래 의미는 고대 제사 활동에서 천지를 소통하고 춤으로써 신을 내리게 하며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수련이 잘 된 사람을 가리킨다. 결코 오늘날 중국 전통문화가 중공에 의해 파괴된 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비하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고대 중국에서 ‘무’는 씨족의 수령이 겸임했다. 예를 들어 전설 속 대우(大禹)는 치수에 능한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무(大巫)이기도 했다. 그는 치수에 힘쓰느라 오랫동안 미끄러운 길을 다닌 탓에 걸음걸이가 시원치 않아 작은 보폭으로 조금씩 앞으로 옮겨야 했다. 이러한 대우의 발걸음은 훗날 ‘우보(禹步)’라 불리며 널리 운용되었는데, 도사가 법을 펼칠 때의 보법이자 무격이 신을 청할 때의 무보(舞步)가 되었다.

연락어렵문호(宴樂漁獵紋壺) 국부 문양.(인터넷 사진)
상주(商周) 이래 초나라에는 줄곧 무무(巫舞)가 성행했다. 한대 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초나라 남영(南郢)의 읍과 원상(沅湘) 사이의 풍속은 귀신을 믿고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여, 제사 때 반드시 노래와 음악, 북치고 춤추는 것을 지어 여러 신을 즐겁게 했다.” 무무(巫舞)는 사실상 여러 신을 칭송하고 찬미하며, 산천과 조상에게 제사 지내고 풍년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백성을 교화하고 도덕을 함양하며 귀신과 역병을 쫓는 종교 무용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무무(巫舞)는 또 민간 악무와 궁정 악무로 나뉘었는데, 초나라 궁정 악무는 민간 악무와 달리 표현 장면이 훨씬 웅장했으며 형식과 내용 또한 상당히 풍부했다.
가령 굴원의 《초혼(招魂)》에는 다음과 같은 묘사가 있다.
“맛있는 음식이 나오기 전 여악들이 늘어서네. 종과 북을 배치하고 새 노래를 짓네. 강을 건너 마름을 따고 연꽃을 들어 올리네.”
“비단옷 가늘게 입으니 곱고도 기이하네. 긴 머리 구름 같고 화려함이 찬란하네.”
“우(竽)와 슬(瑟)이 거칠게 어우러지고 북소리 둥둥 울리네. 궁정이 진동하고 격초(激楚)의 가락이 터져 나오네.”
《대초(大招)》에는 “열여섯 무용수가 이어 춤추고 시를 던지며 춤추네. 종과 경을 두드려 사람을 즐겁게 하네.”라고 적혀 있다.
또한 각지 문화 교류가 밀접해짐에 따라 초나라 궁정 악무에는 중원 각국의 악무가 광범위하게 흡수되거나 도입되었는데, 이는 초나라 악무의 큰 특징이 되었다. 《초혼》에는 “열여섯 무용수 용모 정제하고 조(趙)나라와 정(鄭)나라 춤을 추네.” “오(吳)나라 노래와 채(蔡)나라 노래가 대품(大品)을 연주하네.” “정(鄭)나라와 위(衛)나라의 요염한 놀이가 섞여 나타나네.”라고 했고, 《대초》에는 “대(代)나라와 정(鄭)나라, 위(衛)나라 음악을 차례로 연주하고 피리 불고 거문고를 켜네.”라고 했다. 각지의 악무가 동시에 공연되어 “사방에서 다투어 날아오르듯 소리의 변화가 극에 달했다”(《대초》)는 정도에 이르렀다.

채상무도(采桑舞圖, 인터넷 사진)
춘추시대 초나라 궁정 악무는 크게 문무(文舞), 무무(武舞), 우무(優舞)로 나눌 수 있다.
문무는 ‘하약(夏籥)’이라고도 한다. 《주례(周禮)》에는 ‘모무(旄舞)’, ‘우무(羽舞)’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旄)는 소꼬리를, 우(羽)는 새의 깃털을 의미한다. 초나라의 문무는 대개 종교 제사에 사용되었다. 《시경•패풍》에는 위(衛)나라 궁정의 문무가 “왼손에는 약(籥, 악기 이름)을 잡고 오른손에는 적(翟, 꿩 깃털)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초나라의 문무는 적(翟)과 불(紱, 인끈이나 장식)을 들었다.
한대 환담의 《신론(新論)》에 따르면 “초 영왕(楚靈王)은 무축의 도를 믿어 직접 깃털과 인끈을 잡고 제단 앞에서 춤을 추었다. 오나라 사람이 나라를 공격해 왔음에도 영왕은 북치고 춤추기를 태연하게 했다.”고 한다. 초 영왕의 이 ‘고무(鼓舞)’가 바로 문무다. 문무 역시 무무의 일종이나, 초 영왕이 궁중으로 들여와 직접 도구를 잡고 춤을 춘 것이다. 초 영왕이 대형 무용에서 새 깃털과 비단띠를 도구로 삼아 깃털과 인끈을 함께 잡은 것은 중원 무용과 다른 점인데, 아마도 전통 문무의 기초 위에 초나라 민간 무용의 성분을 흡수하여 형성된 새로운 문무일 것이다.

한대 초나라 악무(인터넷 사진)

초무도(楚舞圖 한대 화상석). 한 여인이 거문고를 타고 옆에서 한 여인이 소매를 치켜들고 허리를 꺾어 춤추는 전형적인 초나라 무용이다.(인터넷 사진)
초 영왕은 궁정에서 ‘태연하게 춤을 추었을’ 뿐만 아니라 ‘가는 허리(細腰)’를 좋아했다. 《한비자•이병(二柄)》에는 “초 영왕이 가는 허리를 좋아하니 나라 안에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 두목의 시에도 “낙담해서 강호에 술 싣고 다니니, 초나라 여인의 가는 허리는 손바닥 위에서 가볍구나”라는 찬탄이 있다. 중국의 화상석, 벽화 및 고대 조형 예술에는 소매를 치켜들고 허리를 꺾는 ‘교수절요(翹袖折腰)’의 무용 형상이 많이 존재하며, 한악부(漢樂府)에는 “소매를 높이 들어 춤추고 소매를 떨치며 높낮이를 맞추고, 발을 구르며 춤추고 팔을 연이어 땅을 밟는다”는 묘사가 있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가는 허리’는 인체의 미적 관념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초나라 무용에서 가는 허리와 긴 소매의 발전을 더욱 촉진했다. 초사 《대초》에는 “가는 허리와 고운 목”, “긴 소매가 얼굴을 스치네”라는 묘사가 있다.
강릉 마산 1호 초묘에서 출토된 무용수와 동물 문양의 비단 제품을 보면, 도안 속 무용수들이 쌍쌍이 소매를 뿌리며 짝을 지어 춤추고 있는데, 긴 소매를 강조한 것으로 보아 일종의 수무(袖舞, 소매춤)일 것이다.
장사 남교 황토령 전국시대 초묘에서 출토된 칠기 잔에 그려진 무녀도를 보면, 5명의 여인이 두 방에 나누어 앉아 있고 다른 6명의 여인이 두 곳에서 무용을 연습하고 있는데, 허리를 흔들고 소매를 저으며 춤추거나 허리를 굽히고 물건을 쥐고 시범을 보이는 모습이다. 전체 11명의 여인은 모두 머리를 땋아 장식하고 긴 도포에 허리띠를 매고 있어, 무녀들에게 가는 허리가 요구되었으며 무용 자세에서 긴 소매와 꺾인 허리가 강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칠기는 초나라 단체 무용의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매우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한편, 무무(武舞)란 곧 ‘상무(象舞)’로, 상주 시기 아무(雅舞)의 일종이며 대무지락(大武之樂)이라고도 불린다. 춤을 출 때 도끼와 방패를 들며, 내용은 제왕의 문치무공(文治武工)을 칭송하는 것이다. 홍문연에서 항장이 칼을 뽑아 춘 춤은 아마도 무무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초나라의 무무에 대한 기록은 《좌전(左傳)》에 처음 등장한다. 《좌전•장공 28년》에 따르면 “초나라 영윤 자원이 문부인(文夫人)을 유혹하고자 그 궁전 곁에 집을 짓고 만(萬)을 떨쳤다.”고 한다. ‘만’은 춤 이름이며 ‘진만(振萬)’은 대무지락의 별칭으로 곧 무무다. 초 문왕이 죽은 후 문왕의 동생 자원이 성왕을 옹립한 공으로 영윤이 되어 국정을 장악했다. 성왕의 어머니 문부인은 미인이었는데, 자원은 이 ‘군사 훈련’ 성격의 무무를 도발적인 무용으로 변질시켜 그녀를 유혹하려 했다. 문부인은 이를 선왕의 관례를 어기는 난륜한 행위라고 꾸짖었다.
우무(優舞)는 곧 잡예(雜藝)로, 우리나라 고대 가장 이른 시기의 연극 소품 공연 예술 형식이며 춘추시대 초나라에 이미 출현했다. 《사기•골계열전》에 따르면 초 장왕 때 맹(孟)이라는 창우(倡優 음악인)가 있었는데 ‘담소’의 기예로 풍자 비평을 하는 데 능했다. 초 장왕이 말을 아껴 비단옷을 입히고 대추를 먹였으나 말이 비대해져 병으로 죽자, 장왕은 대부의 예로 후하게 장사 지내려 했다. 신하들이 만류하자 “감히 말의 일로 간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는 명을 내렸다. 오직 우맹(優孟)만이 두려워하지 않고 “전각 문에 들어서며 하늘을 우러러 크게 통곡”하며 풍자와 비아냥을 쏟아내니 초 장왕이 즉시 깨닫고 보통 말의 예로 대우했다.
영윤 손숙오(孫叔敖)가 죽은 후 그 아들이 곤궁해지자 우맹은 “손숙오의 의관을 갖추고 손뼉을 치며 이야기를 나누어” 손숙오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초 장왕을 찾아갔다. 초 장왕은 크게 놀라 손숙오가 부활한 줄 알았다. 우맹은 손숙오의 “처자가 빈곤하여 땔감을 지고 먹고 산다”고 말하며, 초 장왕에게 청렴한 관리로서 평생 “법을 받들고 직무를 지키며 죽을 때까지 감히 그릇된 짓을 하지 않은” 손숙오의 고귀한 품성을 생각하여 그 후대를 잘 안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초 장왕은 감동하여 손숙오의 아들을 침구(寢丘)에 봉했다.
당시 창우의 공연 기예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한편으로 초나라 사람의 다채로운 정신문화 생활을 반영한다. 전국시대와 한대 초나라의 비단 그림은 귀족의 나들이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배경은 과일 숲과 과일을 따는 일꾼들이고, 중간에는 귀족이 무용을 감상하는 모습이다. 편종과 건고(建鼓)가 반주를 맡고 있으며 근경에는 용선 경주가 그려져 있다.

무용문 칠기 상의 습무도(習舞圖).(인터넷 사진)
민간의 무무든 궁정의 악무든, 초나라 무용은 무용수의 선의 아름다움과 율동미를 각별히 강조했다. 《초혼》과 《대초》 여러 곳에서 “아름다운 용모와 수려한 자태”, “긴 머리 구름 같고”, “풍만한 살집과 고운 뼈”, “용모가 빼어나고 우아함”, “가는 허리와 고운 목이 허리를 묶는 띠와 같소”, “긴 소매가 얼굴을 스치네”, “풍만한 살집과 가는 뼈, 몸매가 가냘프고 곱구나”라고 언급한 것에서 보듯, 초나라 사람은 가늘고 긴 허리의 아름다움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춤을 출 때 ‘언건(偃蹇, 높이 솟구침)’, ‘연권(連蜷, 길게 굽이침)’의 효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2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