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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문화 탐구: 노자와 도(道)의 비밀을 풀다 (중)

소양춘(小陽春)

【정견망】

《노자》의 초기 판본이 줄곧 옛 초(楚)나라 지역에서 발견되는 점, 노자묘(老子廟)의 수많은 유적이 초나라의 옛 땅인 안휘(安徽) 와양(渦陽)에서 발견되는 점, 그리고 주(周)나라 왕실의 왕자 조(朝)가 옛 신하들과 함께 전적을 가지고 초나라로 도망치자 노담(老聃)이 실직의 책임을 지고 왕궁을 떠나 초나라 등지로 은거한 점 등을 보면 노자의 도(道)가 초나라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과연 초나라 문화의 정수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노자와 그의 ‘도(道)’는 대체 어떤 것인가? 노자는 왜 ‘도’를 전했는가? 노자가 전한 ‘도’는 다른 도와 무엇이 다른가? 지난 수천 년 동안 이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노자를 연구한 방대한 저술은 땀을 흘릴 만큼 많고 수레에 가득 찰 정도로 무수히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안개 속에서 꽃을 보듯 막연하거나 우물 안 개구리식의 견해를 면치 못했다.

하남 곽점(郭店) 초묘(楚墓) 죽간(竹簡) 《노자》

그렇다면 노자라는 인물은 도대체 철학가, 사상가인가 아니면 정치인, 현학가(玄學家)인가. 도교에서 존숭하는 신인가 아니면 평범한 속인인가? 《도덕경》이라는 책은 도대체 소박한 변증법으로 가득 찬 철학 저작인가 아니면 수신입명(修身立命)을 위한 종교 경전인가? 무궁한 지혜를 포함한 과학 기술 대작인가 아니면 치국안방(治國安邦)의 정치 방략인가? 오늘날 중국인의 시각으로 본다면 노자도 당시 정치를 하고 있었던 것인가? 아래에서 먼저 동서고금의 인인(仁人) 지사들이 노자라는 인물과 그 행적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노자는 중국 고대의 위대한 철학가이자 사상가이며 도가 학파의 창시자로 공인받고 있다. 세계 문화 명인이자 세계 100대 역사 명인 중 한 명이다. 도교에서 노자는 도조(道祖)로 존봉된다.

노자가 지은 《도덕경》은 《도덕진경(道德眞經)》, 《노자》, 《오천언(五千言)》,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이라고도 불린다. 우리가 현재 보는 《도덕경》은 전국시대 한비자(韓非子)가 《주서(周書)》라고 불렀고, 진대(秦代) 《여씨춘추(呂氏春秋)·주(注)》에서는 《상지경(上至經)》이라 불렀으며, 한(漢)나라 때는 곧바로 《노자》라 불렀다. 《사기(史記)》에 이르러서야 노자가 상하편으로 책을 지어 도덕의 뜻을 말하였다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 경제(景帝)는 황자(黃子)와 노자의 의례를 중시하여 자(子)를 경(經)으로 고쳤고, 양웅(揚雄)의 《한지(漢志)·촉왕본기(蜀王本紀)》에서는 노자가 관윤(關尹) 희(喜)를 위해 《도덕경》을 지었다고 했으며, 《변양로자명(邊讓老子銘)》에서는 강박을 받아 도덕의 경전을 남겼다고 전한다.

그러다 당대(唐代)에 이르러 당 태종은 스스로 노자 이이(李耳)의 후손이라 여겼고, 당 고종은 《도덕경》을 상경(上經)으로 존칭했다. 이때부터 노자가 도덕의 뜻을 말한 상하편은 《도덕경》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와 사람들은 흔히 《도덕경》을 철학 저작으로 간주하여 비판적으로 배우거나 소위 연구라는 것을 하고 있다.

노자는 도교에서 도조(道祖 도의 시조)로 받들어진다. 동한 말 장릉(張陵)이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창시하면서 노자는 지고한 삼청존신(三清尊神) 중 하나인 도덕천존(道德天尊)의 18번째 화신으로 존칭되었으며,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고도 불렸다. 《노자오천문》을 도가의 중요한 경전으로 삼고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을 지어 수련(修煉)의 관점에서 《노자오천문》을 해석했는데, 이때부터 도가의 기본 경전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현대에 《도덕경》을 종교적 의미의 도교와 철학적 의미의 도가 학설로 귀속시키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열선전》부터 노자를 신선(神仙)의 반열에 올리기 시작했다. 동한(東漢) 시기 성도(成都) 사람 왕부(王阜)는 《노자성모비(老子聖母碑)》를 지어 노자와 도(道)를 하나로 합치고 노자를 천지를 화생(化生)시킨 신령으로 보았다. 이는 도가 창세설(創世說)의 효시가 되었다. 동한 환제(桓帝) 때 환제가 직접 노자에게 제사를 지내며 노자를 선도(仙道)의 조상으로 삼았다. 당대 황제들은 노자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로 존봉했고, 송대에는 태상노군혼원상덕황제(太上老君混元上德皇帝)라는 호를 가봉했다. 도가에서의 존칭은 ‘태상노군’이며 ‘혼원황제(混元皇帝)’라고도 존칭된다.

중국 고대 한, 당, 송, 명, 청 등 왕조에서 도(道)가 밝은 군주들은 모두 노자의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치국안방의 이념으로 삼았으며, 도를 얻은 자가 민심을 얻고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도리를 깊이 이해했다. 그리하여 이들 왕조에서는 모두 태평성세(太平盛世)가 나타났다. 예컨대 서한(西漢) 초기 문제와 경제는 도가 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정치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며 생업에 종사하게 하니 역사에서는 이를 문경의 치(文景之治)라 한다.

당대에 때 돌궐이 변방에서 소란을 피우자 당 태종은 노자의 말을 인용해 대신들에게 “군대란 상서롭지 못한 도구이며 군자의 도구가 아니니 어쩔 수 없이 사용할 뿐 담박함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평화적인 협상 방식으로 전쟁을 해소했다. 당조(唐朝)는 도(道)로 나라를 다스려, 함이 없으되 하지 않음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태종 정관(貞觀) 4년에는 전국에 사형수가 단 29명이었고, 정관 22년에는 전국에 사형수가 2명뿐이었다.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고 밤에도 대문을 잠그지 않는 국면이 나타났다. 당대 정관의 치와 개원(開元)의 치는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태평성세를 열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직접 《도덕경서(道德經序)》를 지어 “이 경전은 만물의 지극한 뿌리요 왕의 스승이며 신민의 지극한 보배이지 금단술(金丹術)이 아니다”라고 했다. 당시 천하가 갓 평정되어 백성은 완고하고 관리는 폐단이 많아 아침에 10명이 처형되어도 저녁에 다시 100명이 위험을 무릅쓰고 죄를 지었다. 주원장은 노자의 《도덕경》 중 “백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찌 죽음으로써 그들을 두렵게 하겠는가”라는 대목에서 깨달음을 얻어 극형을 폐지했다.

중국 역사가 2000여 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역대 통치자들이 유가 학설과 노자의 도를 교대로 사용한 것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비록 이것이 노자의 본의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외국어로 출판되 《노자(老子)》

노자는 중국의 것이자 또한 세계의 것이다. 만경(萬經)의 왕이라 불리는 이 신비로운 보전 《도덕경(道德經)》은 《역경》, 《논어》와 함께 중국인에게 가장 심오한 영향을 미친 3대 사상 대작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중국 고대의 철학, 과학, 정치, 종교 등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일찍이 세계 역사 문화 유산의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일찍이 당 정관(貞觀) 21년(서기 647년), 당 태종은 현장(玄奘)과 도사 성현영(成玄英)에게 명하여 《도덕경》을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해 인도로 전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도덕경》 번역의 시작이었다. 당 개원(開元) 23년(서기 735년)에는 당 현종이 직접 《노자》에 주석을 달았다. 일본 사신이 《노자경》과 노자 천존상(天尊像)을 받아 귀국하면서 일본 사회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부터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등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오면서 《노자》라는 책이 유럽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17, 18세기 유럽 철학계에는 노자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817년 프랑스 학자 줄리앙이 영향력 있는 프랑스어판 《도덕경》 번역본을 출판했고, 레뮈자는 1823년 《노자전》을 지어 노자를 진정한 철학가이자 식견 있는 윤리사이며 뛰어난 신학자이자 형이상학자라고 칭송했다. 그의 풍격이 플라톤만큼 숭고하며 도(道)의 개념은 그리스의 로고스와 대등하다고 평가했다.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이미 《도덕경》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독일 철학자 헤겔, 니체, 하이데거와 대문호 톨스토이도 노자를 매우 추앙했다. 평생 중국을 연구하며 중국 문화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영국 과학자 조셉 니덤은 중국 문화가 거대한 나무와 같다면 그 뿌리는 도가(道家)에 있다고 말했다. 조셉 니덤은 중국을 연구할수록 중국 문화에서 노자와 도가가 차지하는 중요한 지위를 인식하게 되었고, 노자 학설의 정당성을 더욱 확신하며 점점 노자가 말한 대로 실천했다. 그는 말년에 스스로를 ‘명예(名譽) 도가’, ‘십숙도인(十宿道人)’이라 칭하기도 했다.

오늘날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조용히 노자 열풍이 일고 있다. 《도덕경》은 이미 20여 종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까지 확인된 각종 외국어판 《도덕경》 문헌은 1,000여 종에 달한다. 유네스코 통계에 따르면 《도덕경》은 《성경》 이외에 외국어로 번역된 발행량이 가장 많은 문화 명저다. 진정으로 만국이 거듭 번역하며 몰려드는 국면이 형성된 것이다. 1987년 뉴욕타임스는 노자를 고금 10대 작가의 으뜸으로 선정했다. 1988년 미국의 전 대통령 레이건은 국정연설에서 《도덕경》의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는 명언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도덕경》은 해외 학자들에게 지극한 보배로 여겨진다. 많은 노벨상 수상자와 유명 과학자들은 자신의 과학적 발견을 동양 성인인 노자의 계시 덕분으로 돌렸다. 현대 전자계산기의 이진법은 노자의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으며 이는 삼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는다”라는 구절과 “만물은 음을 등에 지고 양을 품으며 충기로써 조화를 이룬다”라는 말, 그리고 《역경》 계사 중 “그러므로 역에는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낳으며 사상은 팔괘를 낳고 팔괘는 길흉을 정하며 길흉은 대업을 낳는다”라는 구절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일본 학자 유카와 히데키는 “2,000여 년 전에 이미 노자가 미래 인류 문명이 도달할 상태를 예견했다”고 말했다. 미국 학자 카프라는 도가의 철리(哲理)와 고에너지 물리학 현상의 놀라운 일치성을 발견했다.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책상에 놓여 있던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도 독일어판 《도덕경》이었다.

사실 노자는 각자(覺者)이며 중대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온 분이다. 그는 《도덕경》의 서두에서 사람들에게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상도(常道)가 아니요, 이름을 이름 붙일 수 있으면 상명(常名)이 아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주었다. 즉, 노자가 전한 도는 상도(常道 평범한 도)가 아니며 일반적인 도가 아니라 선천 대도(大道), 즉 초상(超常)적인 도라는 뜻이다. 보통의 도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서 사람마다 도를 대하는 태도도 다르니, “상사(上士)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고, 중사(中士)는 도를 들으면 있는 듯 없는 듯 여기며, 하사(下士)는 도를 들으면 크게 웃나니, 웃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 부족하다”고 했다.

왜 도를 전했는가? 노자는 “도(道)를 잃은 후에 덕(德)이 나오고, 덕을 잃은 후에 인(仁)이 나오며, 인을 잃은 후에 의(義)가 나오고, 의를 잃은 후에 예(禮)가 나온다”고 했다. 그러므로 “대도(大道)가 폐해지니 인의(仁義)가 있게 되었다”고 했다. 노자는 사회가 발전하고 인류의 물질적 부가 풍요로워짐에 따라 점차 사람들 사이에 사욕(私慾)과 명리에 대한 추구가 생겨나고, 이로 인해 인간 본래의 선천적이고 선량하며 순진한 본성을 잃게 된다고 보았다. 즉, 인류 도덕의 타락이 인, 의, 예, 지, 신의 출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역사상 두 성인인 노자와 공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노자는 출세간(出世間)의 도(道)인 수련 방법을 말하며 상사가 수련을 통해 반본귀진(返本歸眞)하여 인류 선천의 선량한 본성으로 돌아가 진인(眞人), 즉 진짜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면 공자는 입세간(入世間)의 도인 사람 되는 도리를 말하며 중사에게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 규범을 가르침으로써 인류의 도덕을 유지하고 사회의 안정을 보존하여, 이번 인류의 마지막에 진짜 대법(大法) 대도를 전하기 위한 길을 닦는 것이 목적이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80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