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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췌진 (3): 소무의 드높은 절개가 주는 계시

왕사미

【정견망】

서한 초기 이래로 북방의 흉노가 끊임없이 남침해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문경(文景)의 치’를 거치며 휴양생식한 후 한은 나날이 부강해졌고, 한무제에 이르러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흉노에 군사를 보냈다. 몇 차례 큰 전역을 거치며 흉노의 힘은 점차 약해졌고 북방의 위협은 기본적으로 해소되었다. 한 조정이 끊임없이 흉노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양측은 여러 차례 사절을 교환하며 서로를 암중 탐지했다.

흉노는 곽길(郭吉), 노충국(路充國) 등 한 사절단 10여 인을 억류했고, 한 역시 찾아온 흉노 사절을 맞대응 차원에서 사시을 억류했다. 천한(天漢) 원년(기원전 100년), 차제후 선우가 막 즉위하여 한의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한 천자는 나의 어른뻘이다”라고 했다(《한서·이광소건전》). 또한 “억류했던 한 사신 노충국 등을 모두 돌려보냈다. 무제가 그 의로움을 가상히 여겨 소무(蘇武)를 중랑장으로 삼아 절(節)을 들려, 한에 억류되어 있던 흉노 사신들을 돌려보내게 하고 아울러 선우에게 두터운 예물을 주어 그 선의에 답하게 했다.”

이에 “소무는 부중랑장 장승(張勝) 및 상혜(常惠) 등 모집한 군사와 척후병 100여 명과 함께” 많은 재물을 가지고 당당하게 대막(大漠)을 향해 출발했다.

소무의 이번 사신행은 마침 한·흉노 관계가 개선되고 갈등이 완화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소무는 단지 우호를 전달하는 평화 사절이었을 뿐, 시급히 해결해야 할 분쟁이나 전란의 문제는 없었다. 소무가 지닌 부절(符節)은 천자가 사신에게 내린 신표로, 한절(漢節) 또는 모절(旄節)이라고도 부르며 권위의 상징이었다. 보통 대나무로 대를 만드는데 길이는 8척이며, 대 끝에는 세 층의 야크 꼬리털을 매달았다. 《설문해자》에서는 “모(氂)는 야크의 꼬리다”라고 했고, 단옥재는 주석에서 “야크의 꼬리를 모라 하고, 모를 달아 깃발로 만든 것을 모(旄)라 한다”고 했다.

소무의 사행은 본래 즐겁고 순조로웠고, 선우도 막 사신을 보내 소무 일행을 한으로 호송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풍파가 갑자기 닥쳐왔다. 소무 일행이 흉노에 도착했을 때, 마침 구왕(緱王)과 장수(長水) 사람 우상(虞常) 등이 흉노 내부에서 모반을 꾀하여 선우의 어머니 연지를 납치해 한으로 돌아가려 했다. 우상은 한나라에 있을 때 부사 장승과 평소 교분이 있었기에 사전에 장승의 허락을 받아두었다. 그러나 일이 치밀하지 못해 선우의 자제들이 군사를 내어 교전했고, 구왕 등은 전사하고 우상은 사로잡혔다.

선우는 위율(衛律)을 파견해 소무를 소환해 심문하게 했다. 소무는 상혜에게 “절개를 굽혀 사명을 욕되게 한다면 비록 살아남은들 무슨 면목으로 한으로 돌아가겠는가!”라고 하며 패도를 뽑아 자결을 시도했다. 위율이 크게 놀라 급히 소무를 붙잡고 의사를 불러 상처를 치료했다. “선우가 그 절개를 장하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사람을 보내 소무의 안부를 물었다.”

소무의 상처는 점차 나아졌다. 선우는 우상을 심문하는 기회를 빌려 소무를 투항시키려 압박했다. 위율이 칼로 우상을 벤 후 장승을 죽이려 하자 장승은 투항을 요청했다. 위율이 다시 칼을 들어 소무를 겨누었으나 소무는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위율이 다시 말했다.

“소군(蘇君)! 나는 이전에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돌아왔으나 다행히 큰 은혜를 입어 왕으로 봉해졌고, 수만 대중을 거느리며 말과 가축이 산을 덮을 정도로 이와 같은 부귀를 누리고 있소이다. 소군이 오늘 투항하면 내일 당장 이처럼 될 것이오. 공연히 몸을 들판의 풀거름으로 만든들 누가 알아주겠소!”

소무가 오늘 투항하면 내일 바로 자신과 같은 부귀를 누리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헛되이 죽어 풀의 비료가 될 뿐인데 누가 기억해주겠느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소무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엄숙하게 위율을 꾸짖으며 말했다.

“남월이 한의 사신을 죽였다가 도륙되어 9군이 되었고, 대완왕이 한의 사신을 죽였다가 머리가 북궐에 걸렸으며, 조선이 한의 사신을 죽였다가 즉시 주멸당했다. 오직 흉노만이 아직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그대는 내가 투항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양국이 서로 공격하게 하려 하니, 흉노의 화는 나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이 소식을 들은 선우는 더욱 소무를 투항시키고 싶어 그를 큰 구덩이에 가두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자 소무는 눈을 담요 털과 함께 삼켜 허기를 채우며 며칠을 버텼으나 죽지 않았다. 흉노는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이후 소무를 홀로 북해의 아무도 없는 곳으로 옮겨 숫양을 치게 하며, “숫양이 새끼를 낳아야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소무는 북해에 도착해 식량이 오지 않을 때는 들쥐가 저장해둔 야생 열매를 파내어 먹었다. “모절(旄節)을 손에 잡고 양을 쳤으며, 자나 깨나 손에서 놓지 않으니 절에 달린 털이 다 빠졌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무의 손에는 항상 모절이 쥐어져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절에 매단 야크 꼬리가 모두 떨어져나갔다. 상전벽해와 같은 세월 속에 어느덧 19년이 흘렀다.

마치 이백의 시에 이른 상황과 같았다.

소무는 천산 위에 있고,
전횡은 해도 가에 있네.
만 겹의 관문 끊겼으니
어느 날이 돌아갈 해인가

蘇武天山上
田橫海島邊
萬重關塞斷
何日是歸年

《소무전》은 《한서·이광소건전》에 부록처럼 실려 있으나 《한서》에서 가장 뛰어난 명편(名篇) 중 하나다. 소무가 흉노에 사신으로 가서 위협과 유혹에 맞서 절개를 굳게 지키고, 북해에서 19년 동안 양을 치며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은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반고는 사마천을 잇는 걸출한 한대(漢代) 사학자이자 문장가로, 그가 저술한 《한서》는 최초의 기전체 단대사(斷代史)로 사학 저술의 새로운 체제를 창시했다.

《후한서·반고전》에서는 반고의 서사 필법을 이렇게 평가했다.

“반고가 사건을 서술함은 격렬하거나 기이하지 않고, 억누르거나 추켜세우지 않으며, 풍부하면서도 지저분하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체계가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부지런히 읽어도 싫증 나지 않게 하니, 참으로 그 명성을 이룰 만하도다.”

여기서 격(激)은 드높임이고, 궤(詭)는 헐뜯음이며, 억(抑)은 깎아내림이고, 항(抗)은 올림을 뜻한다. 반고의 서술이 평이하고 적절하며 상세함과 간략함이 도를 얻어 조리가 명확하고 지나친 칭송이나 비방이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반고는 또한 사마천을 비판해 “자신을 죽여 인을 이루는 아름다움을 서술하지 않고, 인의(仁義)를 가볍게 여기고 절개를 지키는 일을 천하게 여김이 심하다”고 했다. 이외에도 반고는 사부(辭賦)에 능해 《양도부(兩都賦)》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소무가 북해에서 숫양을 친 이야기는 절개를 굳게 지킨 것을 체현하며, 후세에 “소무의 절개”, “소자의 절개”, “소생(蘇生)의 절개” 혹은 “한 사신의 절개”로 칭송받았다. 감숙성 민근현(民勤縣) 성 동남쪽에는 소무산이라 불리는 짙푸른 색의 토석 신산(神山)이 있다. 《진번위지(鎮番衛志)》 기록에 따르면 “소무산에 소공사(蘇公祠 소공 즉 소무의 사당)가 있는데 명태조 홍무(洪武) 초년에 그 유적을 보았으니 앞선 왕조의 제도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명 성조(成祖) 영락 7년, 진번위(鎮番衛) 진무사(鎮撫司) 이명(李名)이 성금을 모아 소무묘를 건립하고 《소무산명(蘇武山銘)》을 세웠다.

높은 산 우러러보니 돌에 새긴 모습 엄연하고,
위에는 아름다운 경치 아래에는 비천(飛泉)이 많구나.
명화(名花)는 발발하고 방초(芳草)는 면면하네.
옛 사당의 높은 나무 아래 황하가 굽이치네.
털 삼키며 눈 속에 누워 머리는 희어지고 얼굴은 늙었구나.
양은 농상으로 돌아왔건만 기러기 소식 구름가에 끊겼다네.
모절을 쥐고 잃지 않으니 백서(帛書) 전하기 어려움을 탄식하노라.
돌아온 날은 본래 화려한 장막이 아니었고, 떠날 때는 바로 한창때였네.
늙은 뼈에 오랑캐 땅 달빛 스미고, 외로운 충심 남쪽 하늘 조상하네.
백정(白亭)에 꽃다운 이름 남기고 인각(麟閣)에 공훈을 떨치니,
일생의 사업을 그 누가 앞서랴.

高山仰止,勒石儼然,上多美景,下多飛泉。
名花勃勃, 芳草綿綿。古祠高樹,黃河盤旋。
吞氈臥雪,皓首蒼顏。羊歸隴上,雁斷雲邊。
持旄節而不遺,歎帛書之難傳。
回日原非甲帳,去時乃是丁年。
老骨侵胡月,孤忠吊南天。
白亭留芳名, 麟閣表雲煙。
一生事業,誰敢爭先。

이 명문이 딱 100자이기에 《백자명》이라고도 불린다.

“어느 곳에서 가로 부는 소리 저녁 하늘에 울리나,
변방 성곽 높은 새 낭연 속에 사라지네”

何處吹笳薄暮天,塞垣高鳥沒狼煙。
(당대 두목).

“인간 세상에서 학으로 화해 삼천 년이요,
바다 위에서 양을 본 지 십구 년이라”
人間化鶴三千歲,海上看羊十九年
(송대 황정견).

한 소제가 즉위한 후 한과 흉노가 화친했다. 한 사신이 흉노에 와서 소무가 살아있음을 알고 흉노 선우에게 기러기가 서신을 전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선우가 좌우를 돌아보며 놀라며 한 사신에게 사과하며 말하기를 ‘소무 등이 정말로 살아 있다’고 했다.” 흉노가 비로소 소무의 생존을 인정하여 그는 마침내 절개를 지키며 돌아올 수 있었다.

당대(唐代) 시인 온정균(溫庭筠)은 《소무묘(蘇武廟)》라는 시를 지어 소무가 북해에서 19년 만에 마침내 한 사신을 만난 정경을 추모하며 마음속 형언할 수 없는 감개를 토로했다.

“소무는 한 사신 앞에서 넋을 잃고,
옛 사당의 높은 나무 두 가지 모두 아득하네.
구름가에 기러기 소식 끊긴 오랑캐 땅 달빛,
농상에 양 돌아오니 변방 풀엔 안개만 자욱하네.
……”

남송의 시인 육유도 《잡흥십수(雜興十首)》(그 다섯)에서 “뛰어난 소자경은, 담요 털 씹으며 한의 절개 지켰다네(殊勝蘇子卿,餐氈持漢節)”라는 구절을 남겼다.

[역주: 자경은 소무의 자(字)이니 소자경은 소무를 가리킨다]

소무가 19년 동안 양을 치며 굳세게 절개를 지키고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으며 모절을 들고 돌아온 휘황한 사적은, 천년 역사의 강물을 가로지르는 서사시가 되어 모절의 고산(高山)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소무의 절개에는 어떤 전통적 가치가 담겨 있는가?

소무는 한조(漢朝) 천자의 사신이었으며 그가 지닌 모절(旄節)은 천자의 위엄을 선포하는 것이었기에, 소무가 지킨 것은 한 조정의 절개이지 단지 개인의 기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위율이 불러 심문하려 할 때 소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절개를 굽혀 사명을 욕되게 함”이었고, 이어서 “패도를 당겨 스스로 찌른 것”이다. 이로 보아 소무는 절개를 지키는 것을 생명보다 중하게 여겼으니 죽음인들 어찌 두려워했겠는가?

이로 인해 선우의 경외를 얻어 “선우가 그 절개를 장하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사람을 보내 문안하게” 된 것이다. 그 후로는 더 이상 소무를 심문하지 않았다. 나중에 흉노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소무를 굴복시키려 했을 때, 소무가 직면한 것은 살아남는 것 자체가 고통인 극한의 시련이었다.

첫 번째 관문은 굶주림의 시련으로 “눈을 갉아 먹으며 담요 털과 함께 삼킨 것”이었고,

두 번째 관문은 북해에어 양을 기르는 장기적인 곤경으로, 돌아갈 기약 없는 절망과 홀로 남겨진 황량함이었다.

소무는 이 모든 것을 견뎌냈으며 한결같이 절개를 지켰다. “한절(漢節 한 사신의 모절)을 지팡이 삼아 양을 치고 자나 깨나 손에 쥐었으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사명을 잊지 않았다.

소무의 높은 절개는 원래 한의 사람이었다 투항한 위율, 이릉과는 전혀 다른 인생 태도를 보여준다. 이릉이 와서 투항을 권하며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은데 어찌 이토록 오래 스스로 고생하시오?”라고 했다. 또한 천위(天威 선우의 위엄)는 헤아리기 어려우니 “안위(安危)를 알 수 없는데 자경(소무의 자)은 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시는가?”라고 했다.

즉 누구를 위해 절개를 지키는 것이며 그럴 가치가 있느냐는 뜻이고, 차라리 때맞춰 즐거움을 누리는 게 낫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이릉의 생명에 대한 이해가 인생 백 년에 국한되어 육체의 껍데기를 생명의 전부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진정한 생명은 사실 사람의 원신(元神)이며 생생세세 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소무는 생명의 당당함을 체현했으며 현세의 고락(苦樂)에 개의치 않았고, 타인이나 사후의 명예를 위해 절개를 지킨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사명에 대한 책임감과 사람으로서의 호연지기가 시킨 일이었으며, 자신의 굳센 인내로 충의의 내함을 보여주었다.

《대대례기·증자대효(曾子大孝)》에 이르기를 “의(義)란 이에 합당한 것이요, 충(忠)이란 이를 가운데 두는 것이다”라고 했다. 가운데(中)란 곧 바르고 곧으며 마음을 바르게 놓아 치우치지 않고 충성스럽고 순수한 것이다.

《설문해자》에서는 “중(中)은 안이다”라고 했고, 단옥재 주석에서는 “중이란 밖과 구별되는 말이요, 치우침과 구별되는 말이며, 또한 합당하다는 말이다”라고 했다. 즉 “중”과 뜻이 같은 “충(忠)”의 원래 함의는 안을 향하는 것이며, 한 개인이 내면적으로 자신에게 요구하는 합당함이자 중용이란 함의가 담겨 있다. 여기서 “합당함”은 타협이 아니라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객 예양이 몸에 옻칠을 하고 숯을 삼키며 주인의 원수를 갚은 것을 충(忠)이라 여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충에서 빗나간 것으로 곡해가 심하다. 현대인들이 “우충(愚忠 어리석은 충)”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사실 이런 빗나간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런 고통 속에서도 소무의 내면은 탄탄하고 평화로웠으며, 격앙된 감정이나 민족적 원한 없이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담담히 마주했다. 절개를 온전히 하겠다고 굶어 죽지도 않았고, 근심과 고통 때문에 쓰러지지도 않았다. 북해에서 양을 키우던 7년째 되던 해에 선우의 동생 어간왕(於靬王)이 북해로 사냥을 왔다. 소무가 그를 위해 사냥 그물을 엮어주고 활을 교정해주자 어간왕은 그를 매우 아껴 의복을 공급하고 말과 가축, 천막 등을 주었다. 아마 이 시기에 소무는 흉노 여인과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3년 후 어간왕이 죽자 그 여인은 아들과 함께 다른 이들과 떠나갔다. 그해 겨울 정령인(丁令人 정녕은 북방의 다른 유목민족)이 소무의 우양을 훔쳐 가자 소무는 다시 곤궁에 빠졌다. 이처럼 전통 가치관의 처세 표현은 중정(中正)하고 평화로운 것이지, 당문화에서 선전하는 “계급의 원수나 민족적인 증오”과 같은 “계급 투쟁”식의 극단적인 표현과는 전혀 다르다.

“한때 큰 절개를 온전히 하니, 천고에 맑은 자취 우러러보네”

(一時全大節,千古仰清塵) [송대 이치(李廌)]

수천 년간 소무의 절개는 중화 전통 가치가 현현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렇다면 도덕이 급속히 하락하는 말겁의 인류 사회에 소무의 이야기는 어떤 계시를 주는가?

명조의 유백온은 《추배도》에서 말겁의 해가 바로 “선과 악이 분명히 나뉘는” 때라고 예시했다. 세인을 구도하는 대법제자들이 겪는 고난은 소무가 양을 친 것보다 훨씬 심각하여, “중생은 여전히 믿지 않고 욕하며 비방하고 하늘을 가리며 땅을 쓰는데, 믿는 자는 도리어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는다.”

하지만

“뜰 안의 기이한 꽃 봄엔 주인이 있으니,
밤새 비바람 친들 근심할 것 없네.
……
천하에 절로 태평한 날이 오리니,
사해를 집으로 삼으니 누가 주인이고 손님인가”
(송대 소강절).

“세상일이란 한차례 커다란 꿈이거늘,
인생에 몇 번이나 가을을 맞을까?
……
밝은 달은 구름에 자주 가리니,
중추절에 누구와 함께 외로운 빛을 함께하랴”
(송대 소동파).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0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