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
【정견망】
《한서·식화지(食貨志) 하》에 따르면 “소제(昭帝) 즉위 6년에 조서를 내려 군국(郡國)에서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의 선비를 천거하게 하고 백성의 고통과 교화의 요체를 물었다. 모두 소금, 철, 술의 전매와 균수관(均輸官)을 폐지하여 천하와 이익을 다투지 말고 검소함을 보여준 후에야 교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상홍양(桑弘羊)이 반대하며 이것은 국가의 대업으로 사방의 오랑캐를 제압하고 변방을 안정시키며 비용을 충당하는 근본이므로 폐지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승상 전천추(千秋)와 함께 술 전매를 폐지할 것을 상소했다. 상홍양은 스스로 나라를 위해 큰 이익을 일으켰다고 공로를 뽐내며 자제들을 위해 관직을 얻고자 하다가 대장군 곽광(霍光)을 원망하게 되었고, 마침내 상관걸(上官桀) 등과 모반을 꾀하다 주살당했다. 선제(宣帝), 원제(元帝), 성제(成帝), 애제(哀帝), 평제(平帝) 5대를 거치며 변경된 바가 없었다. 원제 때 일찍이 소금과 철의 전매관을 폐지했으나 3년 만에 다시 복구했다.”라고 한다.
여기에 기재된 것이 바로 2천 년 전 염철회의(鹽鐵會議) 상황이다. 한 소제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년) 6월, 두연년(杜延年)이 한 문제 시기 정책을 시행하여 절검을 제창하고 백성에게 너그럽게 대할 것을 건의하자 수보대신 곽광이 이를 채택해 “삼보(三輔)와 태상(太常)에게 명하여 현량 각 2인, 군국 문학 고제(高第) 각 1인을 천거하게 했다(《한서·소제기》).”
‘현량방정(賢良方正)’은 한대(漢代)에 부정기적으로 덕행과 학술을 겸비한 선비를 선발하던 방식으로 현량문학 또는 현량이라 불렸으며, 한대에서 가장 중시된 인재 선발 부류였다. 선발된 이들이 조정에 들어오면 황제가 직접 책문(策問)을 내고 그 표현에 따라 높고 낮은 관직을 수여했다. 이 경로를 통해 조조(晁錯), 공손홍(公孫弘), 동중서(董仲舒)와 같은 많은 명신이 배출되었다.
무제 사후 6년 뒤인 시원 6년(기원전 81년) 2월, 도성에 도착한 현량문학을 소집하여 “민간의 고통을 물었다(《염철론》 권1).” 회의에서 각지에서 온 현량문학은 상홍양과 소금·철의 관영을 포함한 경제 정책 등을 두고 격렬한 논변을 펼쳤다. 시원 6년 7월에 회의가 끝날 때까지 한쪽은 한무제 시기의 재정대신인 대농(大農)령 상홍양과 그 부하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현량문학 집단이었다. 이 경제 정책 논쟁의 핵심은 “염철 산업을 민간의 자유 경쟁에 맡길 것인가, 아니면 국영 독점을 계속할 것인가?”였다. 《염철론》은 후세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이 대논쟁을 기록하고 있다.
처음부터 현량문학은 염철 관영의 폐단을 열거했다.
(1) 백성을 다스리는 도(道)는 방탕하고 즐기는 근원을 막고 도덕을 드높이는 것에서 시작하며, 말단적인 이익을 억제하고 인의(仁義)를 널리 베풀어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야만 교화가 일어나고 풍속을 바꿀 수 있다. “삼가 듣기로 사람을 다스리는 도는 음란하고 게으른 근원을 막고 도덕의 끝을 넓히며, 말단의 이익을 누르고 인의를 열어 이익을 보이지 않게 한후에 교화가 일어날 수 있고 풍속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2) 염철을 관에서 운영하고, 주류 전매와 균수법(均輸法)은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다. 충후한 본질을 파괴하고 탐욕스럽고 비루한 풍조를 형성했다. “지금 군국에 염철, 주각(酒榷), 균수가 있어 백성과 이익을 다툽니다. 돈후하고 소박함을 흩뜨리고 탐욕스럽고 비루한 교화를 이루었습니다.”
(3) 관리가 직접 장사를 하면 간사한 상인과 결탁하게 되고, 권력을 지닌 관리와 부유한 상인이 틈을 타 물건을 쌓아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시장에 물건이 귀해지면 비싼 값에 판다. 소위 평준(平準)의 공평함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시장을 관리하면 관리가 간사함을 용납합니다. 호강한 관리와 부유한 상인이 재화와 물건을 쌓아두고 급함을 기다리며, 경박한 장사꾼과 간사한 관리가 싼값에 거두어 귀한 값에 취하니 평준의 공평함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상홍양은 답변에서 염철 관영 등의 정책을 변호했는데, 상홍양의 질문은 여기서 유래했다.
흉노가 변방을 침범하여 방어 비용이 부족했기 때문에 비로소 염철 관영, 주류 전매와 균수법을 시행하여 국가 재정 수입을 늘리고 변방 경비를 보충했다. 이제 당신들이 그것을 폐지하고자 하는데, 안으로는 국고를 비게 하고 밖으로는 변방 수비 비용을 부족하게 하여 변방을 지키는 전사들을 춥고 배고프게 한다면 국가가 무엇으로 그들에게 공급하겠는가?
“변방의 비용이 부족하므로 염철을 일으키고 주각을 설치하며 균수를 두어 재물을 늘려 변방의 비용을 도왔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이를 폐지하고자 하니, 안으로는 부고(府庫)의 저장을 비게 하고 밖으로는 수비용 재물을 결핍시켜 요새를 지키고 성에 오르는 병사들로 하여금 변방에서 굶주리고 춥게 하니, 장차 무엇으로써 그들을 봉양하겠습니까?”
《염철론》에 기재된 상홍양의 진술을 보면, 상홍양은 현량문학이 제기한 ‘인의를 베풂’, ‘교화를 일으킴’, ‘백성과 이익을 다툼’이라는 도덕적 차원의 문제를 피하고 오직 재정의 각도에서 흉노의 침입으로 국고가 비었으니 변방 경비를 보충해야 한다고 논술했다. 이로써 이 쟁론의 본질이 실제로는 전통적인 ‘의리(義利)’ 가치관의 다툼임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마치 고대에 밀이나 두부를 갈 때 쓰는 맷돌과 같아서, 돌아가는 위 맷돌은 ‘이(利)’를 대표하고 기초를 받치는 아래 맷돌은 ‘의(義)’를 대표한다. 보통 나귀를 매어 맷돌을 돌리는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상하 맷돌의 상대적 회전 방향이 반대이고 작용력의 방향이 반대여야만 맛있는 두유를 짜내고 폐기물인 비지를 걸러낼 수 있다. 이것이 인류 사회의 발전 과정과 좀 닮지 않았는가? 역사극으로 편찬된 의(義)와 리(利)의 연마 속에서 일부 사람의 도덕적 승화는 순백의 두유와 같고, 다른 일부 사람의 도덕적 타락은 부서진 비지와 같다. 이 논쟁의 양측 진술은 사실 같은 층차에 있지 않았기에 어떤 결론을 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공자는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논어·이인》).”라고 했다. 이는 공자 학설 중 후세에 영향이 큰 중요한 사상 이념이다. 그 주요 함의는 이익은 의리에 복종해야 하며 의리를 중시하고 이익을 가볍게 여겨야 한다는 것, 즉 도덕을 근본적인 가치 척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법가 사상의 선구자인 순자(荀子)는 《순자·대략》에서 “의(義)와 리(利)라는 것은 사람이 양쪽 다 가진 것이다. 비록 요순(堯舜)이라도 백성이 이익을 바라는 마음을 없앨 수 없었으나, 이익을 바라는 마음이 의리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비록 걸주(桀紂)라도 백성이 의리를 좋아하는 마음을 없앨 수 없었으나, 의리를 좋아하는 마음이 이익을 바라는 욕심을 이기지 못하게 했다. 그러므로 의리가 이익을 이기는 것을 치세(治世)라 하고, 이익이 의리를 이기는 것을 난세(亂世)라 한다. 윗사람이 의리를 중시하면 의리가 이익을 이기고, 윗사람이 이익을 중시하면 이익이 의리를 이긴다.”라고 설명했다.
즉, 백성이 이익을 좋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군주가 해야 할 일은 백성이 이익보다 의리를 더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난세와 치세의 분수령이다. 군주가 의리를 중시하느냐 이익을 중시하느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상홍양이 실시한 염철 관영 등 정책의 초심으로 볼 때, 분명 ‘이익이 의리를 이기는’ 설계에 기반하고 있다. 국고가 비어 채워야 했으므로 많은 것을 돌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상홍양의 사상과 가치관 속에서 이익을 ‘실(實)’로 보고 의리를 ‘허(虛)’로 보았음을 반영한다. 이익을 얻는 것을 능리(能吏 능력있는 관리)의 실무로 여기고, 인의(仁義)는 유생들의 헛된 논의이자 당장 조정의 급한 일에는 무용지물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것이 중국 2천 년 역사에서 상홍양 식의 인물이 계속 나타나는 원인이기도 하다.
북송 시대 왕안석(王安石)의 출현은 매우 유사한 장면을 재현했다. 그러나 조정이 이익을 중시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양의 몸에서 털을 뽑는’ 격인 ‘취렴(聚斂)’일 뿐이다. 이는 민간 산업이 커지고 확장되면서 가져오는 사회적 재원 기본판의 확대와 그에 따른 세수 증대와는 다르다. 이러한 ‘윗사람이 이익을 좋아하는’ 취렴은 확실히 사회 전체의 도덕 수준을 하락시키며 국가와 백성이 이익에서 양립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한다. 그렇다면 누가 백성을 인도하여 의리를 좋아하게 하겠는가?
역사의 발전을 보면 의리 논쟁의 출현은 인류 사회 발전 중의 도덕 수준과 관련이 있다. 삼황오제 시기에는 성스러운 덕이 널리 비추어 덕(德)이 천지와 합치되었으며 도덕으로써 하늘, 땅, 사람 및 만물을 대일통(大一統)했다. 삼왕(三王) 이후에는 점차 천하를 소유하고 천하를 다스린다는 개념이 가중되었고 정교(政教)가 분리되어 대통일된 정권 통치 상태로 들어갔으며 군왕과 백성의 이익도 분리되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교화 방면에서 유교(儒教)는 공자의 학설을 교의로 삼는데, 이는 나중에 점차 형성된 유가(儒家) 사상과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유가 사상 속에는 맹자 등 역사상 서로 다른 시기 인물들의 사상과 학설이 모여 있고, 공자 사상에 대한 서로 다른 층차의 이해와 확충 및 변이가 포함되어 있어 더욱 입세(入世)적인 특징과 지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회 역사 발전 과정에서 세간의 표현으로 볼 때 흔히 반리(反理) 주도하의 권력 의지가 더욱 강세인 듯 보이나,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이치가 존재하기에 사회와 사물의 발전과 인과(因果)는 우주 특성이 나타내는 층층의 정리(正理)에 제약을 받는다. 역사극의 역할 연기 중에서 도덕의 제고나 하락, 덕을 쌓는 것이나 업을 짓는 것이야말로 한 생명에게 가장 중요하다. 상고 시기 사람들은 도덕을 근본으로 삼았으나, 춘추전국 이후 도덕이 타락한 사람들은 고난이 훨씬 많아졌고 겉으로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쫓으며 이익을 더욱 실제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염철 관영은 일종의 국가 독점 행위로 경제의 자유로운 발전 상태를 강제로 변화시킨 것이다. 한 초기 부세(賦稅) 제도는 토지는 백성 소유였으므로 전국의 전세(田賦 농지세)는 조정 경제를 관장하는 대사농(大司農)에게 귀속되었고, 산림과 논밭 연못은 황실 소유였으므로 그 세금은 황실 경제를 관장하는 소부(少府)에 귀속되었다. 문경의 치 시기부터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전세를 30분의 1로 낮추었기에, 원래 사영(私營)이었던 염철의 상세(商稅)가 점차 전세를 추월했다.
소금 관영은 백성을 모집해 소금을 굽게 하고 관부에서 전매하는 방식을 채택했고, 철의 관영은 관부에서 철저히 독점했다. 그러나 염철 관영에도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존재했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관영 철기는 오직 생산량에만 치중하여 생산된 철기가 대부분 쓰임새가 적은 큰 농기구였기에 농민이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관영 철기는 원가가 높고 품질이 낮으며 강매와 강제 노역 등의 문제가 있었고 관영 염철의 가격은 비쌌다. 이는 공산 중국의 국영 경제 체제하에서 나타난 문제와 매우 유사하다.
인류 사회의 상태는 본래 고층 생명에 의해 안배된 것이며 각 개인의 복분(福份) 크기는 쌓은 복덕(福德)의 양에 달려 있다. 염철 관영 체제는 경제의 자유로운 발전 상태를 변화시켜 강제로 어떤 이익 구도를 획정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복분이 커서 본래 큰 재물을 모을 수 있었다면, 이는 염철 사영 상태에서는 하늘의 이런 안배가 실현될 수 있었겠지만 관영 이후에는 더는 실현될 기회가 없게 된다. 이는 고층 생명이 사회에 내린 질서 있는 안배를 어지럽힌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자유 경제의 유리한 측면인데, 겉으로는 각자의 기회가 균등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복분의 크기에 따라 천의(天意)의 질서 있는 안배를 실현할 공간이 있음을 의미한다.
한원제(漢元帝) 초원(初元) 5년(기원전 44년)에 염철관은 제(齊)나라의 삼복관(三服官), 상평창(常平倉) 등과 함께 일단 폐지되었다. 하지만 영광(永光) 3년(기원전 41년) 재정이 어려워지자 염철 관영을 복구했다. 최종적으로는 왕망 집권시기 지황(地皇) 2년(기원 21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상홍양의 생명 궤적은 염철회의 다음 해(기원전 80년)에 돌연 변했는데, 연왕(燕王) 유단(劉旦) 및 상관걸의 모반 사건에 휘말려 주살당했다. 이것을 의(義)와 리(利)의 선택이 낳은 인과로 귀결시킬 수 있을까? 의와 리란 맷돌은 지금도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으니, 고금에 그 속의 현기를 깨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2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