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춘
【정견망】
공자는 일생 동안 인정(仁政)과 도덕을 제창했고, 안회[顏回 자는 자연(子淵), 혹은 안연(顏淵)으로 불리며 또 안자(顏子)라 존칭하기도 함]는 스승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아 의심치 않고 믿었으며, 사부를 존중하고 도를 중히 여겨 평생토록 받들어 행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소정묘가 노나라에 있을 때 공자와 명성이 나란히 했다. 공자의 문하가 세 번 가득 찼다 세 번 비었으나(三盈三虛), 오직 안연만이 떠나지 않았으니 안연만이 홀로 공자가 성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소정묘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대부로, ‘소정’은 주나라에서 설비한 관직명이며 소정은 ‘관직을 성씨로 삼은 것’이고 묘는 이름이다. 노자의 도가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은 공자가 처한 시대에는 제자백가가 출현하여 서로 다투는 국면이 나타났다. 공자가 사학을 세워 유가(儒家) 학설을 널리 알리는 것과 동시에, 소정묘도 사학을 열어 법가(法家) 사상을 선전하며 공자의 문하와 제자를 다투었다.
소정묘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능했기에, 신념이 확고하지 못한 공자의 문하생들이 여러 차례 공자의 곁을 떠나게 했다. 이로 인해 공자의 제자가 가득 찼다 비었다 하기를 세 차례나 반복했다(三盈三虛). 그러나 오직 안회 한 사람만은 그에게 동요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자를 따르며 한 걸음도 떠난 적이 없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안회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대세를 따라 소정묘의 문하로 가서 그의 학문을 받지 않는가?”
안회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하루를 사부로 모셨으면 평생을 아버지로 여겨야 합니다. 하물며 사부님의 학문은 천명(天命)을 따르고 인덕(仁德)을 제창하며 사람들에게 정도(正道)를 보여주시니, 제가 배우기에 충분합니다. 어찌 떠날 수 있겠습니까?!”
노정공(魯定公) 11년(기원전 499년), 공자는 노나라 대사구(大司寇)로 승진하여 상국(相國)의 직무를 대행하게 되었는데, 부임한 지 7일 만에 소정묘를 처형하고 사흘 동안 시신을 대중에 공개하니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자들의 의구심에 대해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정묘에게는 ‘마음이 통달했으나 험악하거, 행실이 치우쳤으나 견고함, 말이 거짓되나 변론에 능하거, 추악한 것을 많이 기억하면서 박식하고, 그릇된 것을 따르면서도 윤택한’ 등 다섯 가지 악행이 있다. 사람이 이 ‘오악(五惡)’ 중 하나만 있어도 ‘군자의 처형’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데, 소정묘는 오악을 몸에 겸비한 ‘소인배 중의 효웅’으로서 대중을 현혹해 ‘정치를 어지럽히는’ 능력이 있으니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가 소정묘를 처형한 일은 비록 《순자》, 《사기》, 《설원》 및 《공자가어》 등의 문헌에 고루 기록되어 있으나, 송나라 대유 주희로부터 시작하여 이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5.4’ 신문화운동 시기에 소정묘 처형 사건은 과거의 ‘성인이 간신을 다스린 일’에서 ‘공자의 오점’ 방향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문학혁명 ‘비림비공(批林批孔)’ 시기에는 소정묘가 중공에 의해 법가 혁신 인물로 미화되었고, 처형 사건은 공구(孔丘)의 중요한 죄목으로 간주되어 소정묘 처형의 진실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른바 현행 반혁명분자로 몰리기도 했다.
‘삼영삼허(三盈三虛)’의 고사는 옛사람 안회의 신념이 굳건하고 사부를 존중하고 도를 중히 여기며, 용기 있게 진리를 견지하고 이익의 유혹에 미혹되지 않는 고귀한 품격을 잘 보여준다.
이 외에도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 안회는 줄곧 고난을 함께하며 떠나지 않고 공자의 곁을 지켰으니, 후세에 불멸의 사부 존경의 전형을 세웠다.
공자가 일찍이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경에 처해 7일간 양식이 끊겼을 때, 공자를 수행하던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동요하며 마치 막다른 길에 다다라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듯 느꼈다. 그러나 오직 안회만이 초심을 바꾸지 않고 매일 ‘문밖에서 나물을 올리는 예’를 견지하며 사부님에 대한 존경과 변치 않는 마음을 표시했다.
공자는 제자들이 자신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 모두에게 물었다.
“왜 이곳에서 곤경에 처했는가, 나의 주장이 틀렸다고 여기느냐?”
그러자 자로가 대답하기를, “사부님의 도가 채택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인(仁)과 지(智)의 방면에서 아직 부족함이 있어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기 때입니다”라고 했다.
자공은 대답하기를, “사부님의 이론이 너무 고매하여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니 마땅히 기준을 낮추어 세속의 요구에 부합해야 비로소 채택해 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자로와 자공의 대답에 모두 만족하지 않고 안회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자 안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부님의 도가 이미 세간의 최고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예악이 붕괴되고 도덕이 타락한 속세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부님께서는 온 힘을 다해 이를 추진하시어 인덕의 마음으로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고 계십니다. 비록 저지를 당하고 시기를 사서 세상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못하나, 이것이 사부님의 도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어쩌면 이로 인해 도의 무한한 귀중함이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정도를 굳게 지켜 흔들리지 않는 것은 오직 정인군자(正人君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정도를 수양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치욕이나, 우리가 정도를 전파했음에도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치욕입니다.”
공자는 듣고 나서 매우 흔연해하며 말했다. “안회가 이와 같은 견식을 가졌으니 참으로 좋구나! 지란(芝蘭)은 깊은 숲에서 자라나 사람이 없다고 하여 향기를 풍기지 않는 것이 아니며, 군자는 도를 닦고 덕을 세움에 곤궁하다고 하여 절개를 바꾸지 않는다.”
안회가 난관에 임해서도 그 덕을 잃지 않고 공자를 따라 천하에 의를 행한 정신은 지극히 감탄스럽다. 2천여 년 이래 ‘석채(釋菜)’는 사부를 존경하는 예우로서 고대 중화 대지에서 성행해 왔으며 후세에 전해졌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안회는 덕행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72현의 으뜸으로 꼽히게 되었다. 한나라 이후 역대 왕조에서 끊임없이 시호를 추가로 올렸으며, 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도 안회를 가장 높이 배향(配享)한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79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