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王舍微)
【정견망】
중국 역사상 《열자(列子)·역명(力命)》에서 유래한 성어로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친구 사이의 우정과 진정한 정을 형용하는 데 쓰이며, 동시에 관중(管仲, 이름은 이오)과 포숙아(鮑叔牙)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게 했다. 두 사람 중 관중의 명성은 포숙아보다 훨씬 큰데, 그는 중국 역사상 유명한 정치가이자 개혁가로 제환공(齊桓公)을 보좌해 “제후를 아홉 번 규합하여 천하를 바로잡았다(九合諸侯,一匡天下)” [1]. 그리하여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가 되게 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춘추 제1 재상’이라 불렸다.
포숙아에 대해서 사마천은 《사기·관안열전(管晏列傳)》에서 관중(기원전 725년—기원전 645년)의 말을 인용했다. “내가 당초 곤궁했을 때 일찍이 포숙과 장사를 하며 이익을 나눌 때 내 몫을 더 많이 가졌으나, 포숙은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았으니 내가 몹시 가난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포숙을 위해 일을 꾀하다가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으나,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았으니 그것이 시운이 좋지 않았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세 번 벼슬길에 올랐다가 세 번 군주에게 쫓겨났으나, 포숙은 나를 못난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니 그것이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세 번 전쟁에 나갔다가 세 번 도망쳤으나,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니 나에게 봉양해야 할 어머니가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포숙아는 타인이 관중을 비방하는 것에 직면하여 이렇게 해소해 주었다.
“사람에게는 원래 기회를 만날 때와 만나지 못할 때가 있는 법이니, 만약 관중으로 하여금 그 때를 만나게 한다면 반드시 백에 하나도 실수함이 없을 것이다.” [2]
관중이 이를 듣고 감개무량하여 말하기를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자(鮑子)로다”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사마천의 붓 끝에 담긴 ‘관포지교’다. 비록 관중을 서사의 주인공으로 삼았으나, 관중의 내력을 간단히 소개한 후 곧 붓을 포숙아에게로 옮겼다. 사마천이 전달하고자 한 의미는 바로 포숙아가 없었다면 관중도 없었다는 것이다.
제양공이 스승을 세워 여러 아들들을 보좌하게 할 때, 관중은 노나라 여인이 낳은 큰 아들 공자 규(糾)를 보좌했고 포숙아는 거(莒)나라 여인이 낳은 차자 소백(小白)을 보좌했다. 관이오(管夷吾 관중)가 포숙아에게 말하기를 “임금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훗날 후계를 고른다면 규 아니면 소백일 것이오. 나와 그대가 각각 한 사람씩 보좌합시다. 만약 후계자로 즉위하는 날에는 서로 추천해주기로 합시다”라고 하니 숙아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2]
[역주: 동주 열국지에서는 공자 규와 소백을 양공의 두 아들로 보는데 실제는 제희공의 큰 아들이 양공이고 공자 규와 공자 소백(환공)과 형제 사이다. 여기서는 일단 원문 저자의 뜻을 존중해 제양공으로 번역한다.]
훗날 포숙아는 제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공자 소백을 보호하여 거나라(지금의 산동성 거현)으로 망명했고, 관중은 공자 규를 도와 노나라로 망명했다. 기원전 685년 제나라 대부 연칭(連稱)과 관지보(管至父)가 제양공을 시해하고 그 사촌 동생인 공손무지(公孫無知)를 세워 즉위시켰다. 하지만 두 달 만에 제나라 대신 옹름(雍廩)이 군주 무지와 대부 연칭을 죽였다. 국내에 임금이 없게 되자 공자 규와 공자 소백이 모두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하려 했다.
관중은 병사를 거느리고 거나라에서 제나라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고, 관중이 쏜 화살 한 대가 소백의 허리띠 갈고리를 맞혔다. 소백은 혀를 깨물어 피를 토하며 죽은 체 땅에 쓰러졌고, 관중은 사람을 시켜 노나라에 승전보를 보냈다. 소백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나라로 돌아갔으며, 고혜(高傒)가 공자 소백을 맞아 임치(臨淄)로 돌아와 즉위하니 이가 곧 환공(桓公)이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 제16회에는 포숙아가 관중을 천거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한편 제환공은 자신을 세워준 공에 보답하기 위해 고(高)씨와 국(國)씨 등 대를 이은 대신들에게 모두 채읍을 더해주었다. 포숙아를 상경(上卿 재상)으로 삼아 국정을 맡기고자 하니, 포숙아가 말했다.
“주상께서 신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춥고 배고프지 않게 해주신다면 그것이 주상의 넉넉한 베품입니다! 그러나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환공이 말했다.
“과인이 경을 잘 알고 있으니 경은 사양하지 마시오.”
하지만 포숙아가 말했다.
“이른바 저를 아신다는 것은 조심스럽고 경건하며 예절을 따르고 법을 지킬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직분을 갖춘 신하의 일이지 국가를 다스릴 재능은 아닙니다. 무릇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안으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를 어루만지며, 공훈을 왕실에 더하고 은택을 제후들에게 베풀어 나라가 태산 같은 안정을 누리고 군주께서 끝없는 복을 누리게 하며, 공적이 금석에 새겨지고 이름이 천추에 퍼지게 해야 합니다. 이는 제왕을 돕는 보좌역의 임무인데 신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그러자 환공이 자기도 모르게 기쁜 기색을 띠었다.]
여기서 상경(上卿)은 곧 재상을 의미한다. 포숙아의 자기 인식은 매우 명확했다. “조심스럽고 경건하며 예절을 따르고 법을 지킬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악이 무너진’ 시기의 재상으로서 반리(反理)가 주도하는 난세의 정벌(征伐) 속에 깊이 빠져들면 인의(仁義)와 예법(禮法)의 도덕적 준칙을 완전히 준수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관중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빈곤할 때의 관포지교는 사실상 모두 포숙아의 후덕한 베풂이었다. 또한 각자 모시는 공자를 도와 귀국하여 즉위하는 과정에서 관중은 굳이 쓸데없는 짓을 하여 공자 소백에게 화살 한 대를 쏠 필요가 있었는가? 자신의 성공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좋은 친구의 성공 가도를 파괴하는 것조차 불사한 것은 아닌가. 이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심태를 드러낸다. 당초 관중이 누가 성공하든 “서로 추천하자”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이 점을 포숙아는 확실히 실천하여 온갖 방법을 다해 관중의 생명을 구하고 그를 재상으로 추천했다.
제환공이 관중에게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며 군대를 강하게 하는 도리를 묻자 관중이 대답했다.
“국가를 안정되고 부강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민심을 얻어야 합니다. 민심을 얻으려면 마땅히 백성을 아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군주가 백성을 아끼면 백성은 자연히 국가를 위해 힘을 쓰고자 할 것입니다.“
제환공은 관중의 이 부국강병과 치국칭패(治國稱霸)의 도리를 매우 감탄하며 감상했다. 그리하여 그를 파격적으로 상경(上卿)에 임명했다. 또 존경하는 의미로 ‘중부(仲父)’라 불렸다. 관중은 40년간 집권하며 형세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여 종주(宗周)의 제도를 개선하고, 제나라를 사향(士鄉) 15개, 공상향(工商鄉) 6개, 도비(都鄙) 5개로 두어 관리들을 나누어 세워 관리하게 했으며, 세제를 개혁하고 농업을 발전시키고 산과 바다의 이익을 통제했다. “부국강병”의 목적에서 출발하여 적극적으로 환공을 도와 내정을 개혁하고 서민 중에서 어진 인재를 선발하니 제나라의 국력은 갈수록 강해졌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주왕실을 받들고 이민족을 물리침)”의 깃발 아래 관중은 제환공을 보좌하여 제후를 아홉 번 규합하고 천하를 바로잡아 춘추시대 제일의 패주가 되었으며, 《관자(管子)》 86편을 저술했다.
예부터 지금까지 관중의 평가는 늘 칭찬과 비난이 엇갈리는 논쟁이 존재해 왔다. 흔히 인덕(仁德)과 사공(事功), 대기(大器)와 소기(小器), 사덕(私德)과 정덕(政德) 등 여러 차원에서 평가하는데, 의견이 분분함과 동시에 어떤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사실 근본적인 차이는 전통적인 가치 차원의 평가와 역사적 작용 차원의 판단을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있다. 역사 발전의 천상(天象) 배경 하에서 모든 사람은 역사 변천과 진화 속의 참여자일 수 있다.
사람에게는 선과 악 두 방면의 품성이 공존하기 때문에 세간의 이치(反理)가 주도하는 사회 활동 중에는 인성 중 마성(魔性)의 일면이 때로 유발되어 작용을 일으키고 특정 역사적 사건을 참여하거나 추진한다. 이는 마치 무대극 속의 배역이 대본의 줄거리에 따라 펼쳐지는 연기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에 인애(仁愛)의 마음을 굳게 지키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가치 척도이자 판단 기준이며, 사람의 복덕 및 미래의 승격 혹은 하락에 영향을 주는 의의가 있는 곳이다.
《논어·헌문(憲問)》에서 자로(子路)가 관중을 인자(仁者)라 칭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을 때, 공자는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고 단지 역사적 작용 차원에서 “여기인(如其仁)”이라 했으니, 그 의미는 이것이 그의 인(仁)이라는 뜻이다.
【자로가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일 때 소홀(召忽)은 따라 죽었으나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어질지(仁) 못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말했다.
“환공이 무력을 쓰지 않고 제후들을 아홉 번 규합한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누가 그의 인만 하겠느냐! 누가 그의 인만 하겠느냐!”】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은 ‘인자(仁者)’와 ‘인공(仁功)’으로 나누어 각각 평가하게 되었다. 《주자어류(朱子語類)》(권33/논어15)에서는 이런 “널리 베풀어 대중을 구제하는” 사공(事功)을 가리켜 ‘인의 공(仁之功)’이라 칭했다.
【”인은 이치로 말하면 상하에 통하는지요(仁以理言,通乎上下)”라고 물이니, 주자가 답하기를 “한 가지 일의 인(仁)도 인이고 전체의 인도 인이며, 인이 한 집안에 미치는 것도 인이고 한 나라에 미치는 것도 인이며 천하에 미치는 것도 인이다. 다만 한 집안에 미치는 인은 작은 인이고 천하에 미치는 인은 큰 인이다. 공자께서 관중의 인을 칭찬하신 것 또한 인이지만, 다만 인의 공(功)일뿐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인공(仁功)’의 평가 방식은 그 기점이 이익을 척도로 삼는 것이라 온 천하가 이익을 얻으면 곧 대인(大仁)이라는 것이다. 이는 공자가 말하는 “군자는 의리에 민첩하고 소인은 이익에 민첩하다(君子喻於義,小人喻於利)”(《논어·이인》)와 명백히 부합하지 않는다.
《논어·팔일(八佾)》에서 공자는 관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관중의 그릇이 작구나!” 또 관중의 행동 상의 사치와 예를 어긴 것, 소위 삼귀(三歸), 관사불섭(官事不攝), 수새문(樹塞門) 등을 지적하며 비평하시기를 “관씨가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모르겠는가?”라고 하셨다.
주자는 《논어집주(論語集注)·팔일 제삼》에서 【그릇이 작다는 것은 그가 성현의 대학지도(大學之道)를 알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도량이 좁고 규모가 비루하고 협소해 몸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음으로써 군주를 왕도(王道)로 이끌지 못했다. …… 그러므로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치하면서 예를 범했으니 그 그릇이 작음을 알 수 있다. 대개 그릇이 크면 스스로 예를 알아 이러한 실수가 없을 것이다” 하셨으니, 이 말은 마땅히 깊이 음미해야 한다. 소씨(蘇氏)가 말하기를 “자신을 닦고 집안을 바르게 함으로부터 나라에까지 이르면 그 근본이 깊고 미치는 바가 먼데 이를 대기(大器)라 한다. 양웅(揚雄)이 이른바 ‘대기는 규구준승(規矩準繩)과 같다’고 하여 먼저 자신을 다스린 후에 남을 다스리는 자가 바로 그것이다. 관중은 삼귀와 반점(反坫)을 하고 환공은 안에 총애하는 여인이 여섯 명이나 되었으면서 천하에 패업을 이루었으니 그 근본이 본래 얕았다”라고 했다.】
이로 보건대 “몸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아[正身修德]” 예를 알고 왕도(王道)를 시행하는 것이 근본이며 “이것을 대기(大器)라 한다.” 반면 외부의 힘, 권모술수, 속임수 등을 통해 비록 천하를 제패하더라도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그밖에 ‘제완노호(齊紈魯縞)’라는 고사가 있는데, 이는 관중이 노나라를 겨냥해 사용한 계책을 설명한다. 제나라의 흰 비단인 ‘제완(齊紈)’과 노나라의 얇고 고운 비단인 ‘노호(魯縞)’는 본래 고대 제나라와 노나라에서 생산된 흰 비단을 가리킨다.
관중은 전국 관리들의 의복을 제나라 완포 대신 노나라 호포를 입게 해 호포 가격이 폭등하게 했고, 동시에 제나라 백성들에게는 호포 짜는 것을 금지하면서 노나라에 시장을 개방했다. 이 때문에 노나라 사람들은 모두 호포를 짜느라 농업 생산을 포기하게 되었다. 1년 후 제나라는 노나라의 호포 구매를 거부했고, 이때 노나라는 이미 식량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제나라에 굴복하는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이것이 관중이 경중지술(輕重之術)을 사용하여 싸우지 않고 남의 군대를 굴복시킨 사례다.
[역주: 경중술이란 국가가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직접 개입해 물가를 조절하는 외에 백성들의 세금을 올리지 않고 세금을 거두는 동시에 이웃나라에 대한 무역 압력으로 작용시킬 수 있는 일종의 거시경제 정책이다.]
《관자·경중무(輕重戊)제84》에 따르면 제환공이 초나라를 치려 했으나 초나라가 강성하여 성공하지 못할까 두려워 관중에게 방법을 물었다. 관중은 환공에게 초나라에서 살아 있는 사슴을 비싼 값에 사들이게 하고 초나라 상인들에게 사슴을 제나라에 팔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알리게 했다. 그러자 초나라 남녀들은 거의 모두 생포한 사슴을 잡느라 분주해져 농사일을 포기했다. 반면 제나라는 이미 “곡식의 6할을 저장”해 두었다. 초나라 백성들이 먹을 양식이 없게 되자 관중은 국경을 닫고 사슴과 식량 거래를 중단했다. 결과적으로 초나라 사람 중 제나라에 항복한 자가 10분의 4에 달했다. 초나라는 원기가 크게 상하여 3년 후 제나라에 굴복했다. 그 후 관중은 같은 계책을 운용하여 대(代) 나라의 여우 가죽, 형산(衡山)의 병기 등을 비싼 값에 사들이는 경제적 수단을 통해 대나라를 제압하고 형산을 병합하여 마침내 제환공을 보좌해 춘추시대 첫 패자의 꿈을 실현했다.
《주자어류》(권44/논어 26)에서 말하기를 【아부(亞夫)가 묻기를 “관중의 마음이 이미 인하지 않다면 어찌하여 인자(仁者)의 공이 있습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 만약 그 마음을 말하자면 본래 스스로 이런 공업(功業)을 이룰 수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이를 인자의 공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관중의 공 역시 이와 같다”라고 했다.】
2천 년 동안 옛사람들이 관중을 평가할 때 피할 수 없었던 문제는 ‘관중에게 인자의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뛰어난 공업을 성취했는가?’였다. 그중의 오해는 공업을 ‘인공(仁功)’과 동일시한 데서 기인했다. 춘추 첫 번째 패업은 정벌, 모략 등 반리(反理)가 주도하는 요인으로 성취된 패업(霸業)의 공업이며, 이는 역사 대본 속에 설계된 줄거리다. 관중과 제환공은 선발된 연기자였다. 그러나 패업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내보낸 불인(不仁)한 마음은 결국 개인의 업력(業力)이 되는데 또한 그 역시 감당해야 한다.
제환공 43년(서기전 643년), 제환공이 병사하자 다섯 공자가 서로 공격하느라 제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환공의 시신은 침상에 67일간 방치되어 “죽어서도 장사 지내지 못해 구더기가 문 밖으로 흘러나왔다.” 제환공이 제후들 사이에서 패권을 잡은 기간은 42년(기원전 685년부터 643년까지)에 불과했다. 훗날 환공의 아들인 제의공(齊懿公)은 관중의 작위와 봉읍을 박탈했다. 《동주열국지》 제49회에 따르면 “관씨 일족이 죄를 두려워하여 초나라로 도망가니 자손들이 마침내 초나라에서 벼슬을 했다”고 한다. 반면 포숙아는 사후에 자손들이 대대로 제나라에서 봉록을 누렸고 봉토를 받은 자가 십여 대에 이르렀으니 대부분 유명한 대부였다.
《열자·역명》에서는 힘(力)과 명(命)의 대화를 통해 인류 사회에서 어떤 요인이 주도적 작용을 하는지 설명한다.
【힘(力 능력)이 말했다. “사람의 장수와 요절, 궁하고 영달함, 귀하고 천함, 부유함과 가난함은 모두 내 힘으로 할 수 있지.”
명(命 운명)이 말했다.
“이미 명이라고 말했다면 어찌 그것을 제어하는 자가 있겠는가? 나는 곧은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가고 굽은 것은 맡겨둘 뿐이네. 그래서 스스로 장수하고 스스로 요절하며, 스스로 궁하고 스스로 영달하며, 스스로 귀해지고 스스로 천해지며, 스스로 부유해지고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일세.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 그렇지만 사는 사람을 살게 하고 죽는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남도 아니고 나도 아니며 모두 운명인 것이다. 사람의 지혜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일은 아득하여 끝이 없으나 천도(天道)가 스스로 하고, 막연하여 나눌 수 없으나 천도가 스스로 운행한다.’라고 말한다.】
《도덕경》 제18장에서는 말한다.
“대도가 폐해지니 인의가 나타났고,
지혜가 나타나니 큰 거짓이 생겼으며,
육친이 화목하지 않으니 효와 자애가 나타났고,
국가가 어지러우니 충신이 나타났다.”
大道廢,有仁義;
智慧出,有大偽;
六親不和,有孝慈;
國家昏亂,有忠臣。
소동파의 동생인 소철(蘇轍)은 《노자해(老子解)》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도가 융성할 때는 인의가 그 가운데 행해져도 백성들은 알지 못한다. 도가 폐해진 후에야 인의가 드러난다. …… 세상 사람들이 도가 만물을 넉넉하게 채워주기에 충분함을 알지 못하고 지혜를 더하니, 이에 백성들이 비로소 거짓으로 보답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형체 없는 대도(大道)가 세간에 행해질 때 인의는 자연히 그 속에 함축되어 있어, 세상 사람들은 유형의 인의를 알지 못해도 인의가 그 행동 속에 나타난다.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나 세간의 만물은 바로 도(道)가 실어준 것이요 하사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순선(純善)하고 상화(祥和)와 인애(仁愛)로 가득하여 자연에 따르고 덕을 지켜 망령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불성(佛性)의 발현이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일단 복잡해지면 이익의 득실을 따지는 쟁투심이 생기고, 각종 관념의 침해로 발생하는 각종 원한과 속임수의 긴장이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마성(魔性)의 발현이다. 이로 인해 사람은 업력을 짓게 되고 그리하여 사람의 운명 속에 고난을 더하게 만든다. 사람의 일생은 매 순간 이러한 선과 악의 선택에 직면하며, 이로 인해 승화 또는 타락이라는 서로 다른 생명의 미래 향방이 연출된다.
주석:
[1] 《論語·憲問》:“九合諸侯,不以兵車。”;《史記·管晏列傳》:“管仲既用,任政於齊,齊桓公以霸,九合諸侯,一匡天下,管仲之謀也。” 曹操《短歌行》:“九合諸侯,一匡天下。”
[2] 《東周列國志》第十五回;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85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