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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인황(聖祖仁皇)——강희대제 전기 10

【강희대제】 근보의 치수와 강희제의 남순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강희제는 친정 이래로 황하 치수를 위해 밤낮으로 마음을 썼으며, 심지어 이를 조운(漕運)과 함께 궁중 기둥에 써 붙여 집권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로 삼았다. 그림은 강옹건 성세를 창건한 강희대제. (에포크타임스 제작)

황하 물은 하늘에서 내려와 도도히 흐르며 양전(良田)을 적셔 문명을 잉태하는 동시에, 빈번한 범람과 제방 붕괴, 물길의 변화로 백성에게 심중한 재난을 안겨주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농업으로 입국하였기에 황하의 안정은 식량, 조운, 재정 등 민생에 직결된 대사였으며, 이에 치수는 역대 군주들의 시정에서 중점 과제가 되었다.

2,000여 년 전, 성왕(聖王) 대우(大禹)는 13년 동안 치수를 하며 세 번이나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고, 비바람을 무릅쓴 끝에 마침내 사나운 홍수를 잠재울 수 있었다. 청조 초기에 이르러 성조(聖祖) 강희제 역시 황하를 다스리기 위해 전문 인재를 발굴하고 현지를 고찰하며 40여 년간 노심초사한 끝에, 마침내 20여 년간 강물이 평온히 흐르게 하는 탁월한 공적을 실현했다.

역사상 황하는 몇 차례 큰 물길의 변화가 있었다. 남송 시기, 송인(宋人)들이 금군(金軍)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황하 제방을 턴 이후 황하가 남쪽으로 흘러 회하(淮河)의 물길을 빼앗아 바다로 들어가게 했다. 이후 700여 년 동안 황하는 남쪽에서 안정적인 물길을 형성하지 못하고 자주 제방이 터져 넘치며 수해가 끊이지 않았다. 명조 때 치수(治水)의 명신 반계순(潘季馴) 등의 노력으로 황하는 하남 동남쪽에서 서주(徐州)에 이르는 주하도(主河道 황하의 주물길)가 기본적으로 형성했다.

청 초기에는 전란으로 인해 황하의 물길이 오랫동안 수리되지 않아 수해가 다시 기승을 부렸다. 강희제는 친정 이래로 치수를 위해 밤낮으로 마음을 썼으며, 심지어 이를 조운과 함께 궁중 기둥에 써 붙여 집권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로 삼았다. 그렇다면 강희제의 치수 과정과 이념은 어떠했을까?

치수 전문 인재 발탁

“하도(河道) 총독은 관계가 중대하므로 반드시 치수 경험이 풍부한 관원을 선택해야만 이 직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 운남도어사 육조번(陸祚蕃)

치수의 명신 근보(靳輔)와 모사 진황(陳潢)은 함께 기나긴 치수의 여정을 펼쳤다. 그림은 청 왕휘(王翬) 등이 그린 《강희남순도권(康熙南巡圖卷)》 부분. (공유 영역)

황하는 매년 막대한 양의 진흙과 모래를 싣고 아래로 흘러 하류 하도(河道)에 퇴적시키며 지면보다 수 미터 높은 ‘지상하(地上河)’를 형성한다. 매년 우기가 되면 황하는 제방이 터져 수해를 일으키기 매우 쉬우므로 오랫동안 인공적으로 제방을 쌓아 물을 가두어 왔다. 청조 시기 황하의 수해는 주로 홍택호(洪澤湖) 동쪽의 청구(淸口)에 집중되었다. 청구는 황하가 회하(淮河)가 만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대운하가 남북으로 통하는 교통의 허브였다. 회하의 기세가 약해 자주 황하가 역류하자 두 강이 함께 운하로 쏟아져 들어와 범람하면서 재앙이 되었다.

수해가 발생하면 청구 부근의 회안(淮安), 양주(揚州) 소속 7개 주현(州縣)이 직격탄을 맞았으며 하남, 안휘, 강소, 산동 등지가 모두 피해를 입었고, 매년 400만 석에 달하는 조운 식량 운송도 영향을 받았다. 수해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강희 15년(1676년), 황하의 수해가 다시 일어나자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평정하는 동시에 황하와 회하를 전면적으로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는 관원들을 남쪽 회양(淮揚)으로 보내 하천 공사를 시찰하고 각 처의 제방을 어떻게 수선할지 살피게 하며, “반드시 일로영일(一勞永逸, 한 번의 수고로 영원히 편안함)의 계책을 세우라”[1]고 하여 철저히 치수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표명했다.

당시 조정에는 치수 전문 기구가 있었는데, 최고 장관이 정2품 하도총독(河道總督)으로 줄여서 ‘총하(總河)’라 불렀으며 그 소속 군대를 ‘하표(河標)’라 했다. 하도총독은 조운총독과 함께 지방의 8개 총독에 맞먹는 관직으로 권한과 책임이 대단히 컸다. 강희제 역시 총하의 임명을 매우 중시했는데, 이 직책은 근보, 우성룡(于成龍), 장붕핵(張鵬翮) 등 명신들이 차례로 맡았으며 그중 공헌이 가장 큰 이는 단연 근보였다.

근보는 경전을 깊이 공부했으며 국사원(國史院)에서 순치(順治) 조의 실록 수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내각학사(內閣學士)를 거쳐 안휘(安徽) 순무를 지내며 정적이 매우 현저했다. 그가 처음부터 수리(水利)에 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안휘 순무 재임 시절, 어느 날 한단(邯鄲)의 여옹사(呂翁祠)를 지나다 우연히 벽에 적힌 시 한 수를 읽게 되었다.

“부귀영화 오십 년 흐르니,
한바탕 꿈이라도 풍류로다.
이제 한단 길에서 쇠락해졌으니,
선생께 베개나 빌리려 하네.”[2]

富貴榮華五十秋
縱然一夢也風流
而今落拓邯鄲道
要與先生借枕頭

먹물 자국이 채 마르지 않아 작가가 아직 멀리 가지 않은 상태였다. 근보는 시 속에서 재능을 품고도 때를 만나지 못한 분개함을 읽어내고 이 사람의 비범함을 느껴 사람을 보내 사방으로 찾게 한 끝에 마침내 이 시를 쓴 작가를 찾아냈다. 그는 전당(錢塘)의 기인(奇人)으로 이름은 진황(陳潢)이었다. 그는 평생 과거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천문지리와 수리하거(水利河渠)를 연구하는 데 열중했으며 특히 치수의 도리에 정통했다. 근보는 그를 보자마자 지기(知己)로 삼고 자신의 막료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강희 16년(1677년), 근보는 강소(江蘇)에 부임해 진황과 함께 기나긴 치수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들은 두 달여 동안 하도를 따라 실정을 살피고 백성들을 방문했으며, 역대 치수 서적을 샅샅이 뒤져 전인들의 경험을 총괄했다.

이에 근보는 반계순의 ‘제방을 쌓아 물을 가두고 그 물의 힘으로 모래를 씻어낸다(築堤束水, 以水攻沙)’는 전략을 계승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잇따라 《경리하공팔소(經理河工八疏)》와 《경진경리하공팔소(敬陳經理河工八疏)》를 올렸다. 여기서 팔소란 여덟 통의 상소문이라는 뜻이다. 근보는 하도와 운도(運道 조운의 길)를 하나의 전체로 보아 홍수 방지, 재해 감소, 항행에 유리한 전방위적 치수 방안을 제정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주요 사고방식은 제방을 높이 쌓고, 하도를 준설하며, 강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고, 완만한 경사면을 축조해, 터진 제방을 막는 등의 방식을 통해 ‘축청쇄황(蓄淸刷黃)’, 즉 회하의 맑은 물 수위를 높여 황하 하도에 쌓인 진흙과 모래를 씻어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황하가 운하에 끼치는 간섭을 줄이고 황하와 회하가 바다로 나가는 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몇 차례의 조정 회의 끝에 강희제는 근보에게 하천 공사의 전권을 맡기기로 결정하고 250여 만 냥을 투입하여 3년 기한 내에 완공하도록 했다. 강희 17년부터 근보와 진황은 황하, 회하, 운하 세 큰 강에서 치수 방안을 실시했으며 근보는 직접 현장에 나가 공사 운영을 지휘했다.

3년 동안 근보는 부하들과 수많은 백성을 이끌고 황하의 물을 바다로 인도하는 공사를 마쳤으며 청구(淸口) 공사, 고가언(高家堰) 공사, 청수담(靑水潭) 공사, 귀인제(歸仁堤) 공사 및 조하(皂河) 공사 등을 완수했다.

첫 번째 남순

“황하가 여러 번 제방이 터져 오랫동안 백성에게 해가 되었다. 짐이 직접 그곳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제방 공사를 시찰하려 한다.” —— 강희제

강희제는 더 나은 치수 방법을 찾기 위해 직접 하천 공사를 시찰하기로 하고 처음으로 남순을 단행했다. 그림은 청 왕휘 등이 그린 《강희남순도권》 부분. (공유 영역)

근보는 성실히 일했으나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풍파가 있는 법이라, 치수 마지막 2년 동안 홍수가 계속되어 기한 내에 공사를 완료되지 못했고 몇 군데 하도가 다시 터졌다. 그러자 근보와 견해가 달랐던 많은 조정 신료는 이를 빌미로 그를 공격하며 치수 효과를 의심하고 근보 등을 파직하여 문책할 것을 주장했다. 강희제는 근보가 치수를 위해 애쓴 노고를 헤아려 여전히 그에게 황하 수리를 감독하게 하며 죄를 지고 공을 세우도록 명했다.

강희 21년(1682년), 강희제는 관원들을 현장에 보내 공사를 시찰하게 하고 근보를 조정 회의에 참석시켰다. 그는 시찰 관원들과 격렬하게 논쟁했으며 양측은 팽팽히 맞섰다. 근보는 현재 치수 공사가 대체로 완료되었으며 아직 소가도(蕭家渡)를 수리해야 하니 22년에 완공하겠다고 상소했다. 그 후 그는 다시 몇 군데 제방을 수리하여 전체 홍수 방지 체계를 완비할 것을 제안했다. 강희제는 그의 건의를 모두 받아들였으며 그의 총하 직무를 복구시켰다.

강희 23년, 삼번과 대만이 평정되어 중원이 마침내 통일되었다. 강희제는 더 나은 치수 방법을 찾기 위해 직접 하천 공사를 시찰하기로 하고 처음으로 남순을 단행했다. 9월, 강희제는 산동을 순행한 후 근보의 수행 하에 남쪽으로 향하여 숙천(宿遷), 도원현(桃源縣 지금의 사양泗陽)을 거치며 황하 북안의 하천 공사를 시찰했다.

순시 전에는 강희제도 치수 임무가 번중하고 어려운 줄은 알았으나 직접 현장에 가본 적이 없어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양안 제방의 실제 상황을 전면적으로 파악하지 못했었다. 이번 남순은 소중한 현지 시찰 경험을 가져다주었으며, 강희제는 하천 관리들과 공사를 논의할 때 더욱 독자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는 근보에게 세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첫째, 소가도(蕭家渡), 구리강(九裏岡), 최가진(崔家鎮) 등 일곱 곳은 모두 수해가 심한 곳이니 제방을 수시로 보강해야 한다.

둘째, 운하의 우환은 여전히 황하에 있으니 양안의 제방을 반드시 견고히 하여 파손을 막아야 한다.

셋째, 감수패(減水壩 하천의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댐)는 일시적인 재난 완화일 뿐이며 치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황하 물이 순조롭게 동쪽으로 내려가게 보장하는 것이니 그래야 진정으로 ‘한번 고생으로 영원히 편안할’ 수 있다.[3]

강희제는 현장의 하천 인부들이 밤낮과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강가에서 노고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크게 안쓰러워했다. 그는 오랫동안 발길을 떼지 못하고 직접 다가가 위로했다. 그 후 그는 근보에게 특별히 당부하기를, 탐관오리가 공금을 횡령하는 현상을 반드시 근절하고 모든 일꾼이 조정의 보조와 위무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라고 했다.

이후 강희제는 청하(淸河 지금의 회음)의 천비갑(天妃閘)에 이르렀고 다시 운하를 따라 남하하여 고우호(高郵湖)에 도달했으며 마지막으로 소주(蘇州)와 남경에 도착했다. 그는 농가와 논밭이 홍수에 잠긴 것을 보고 측은지심이 생겨 곁에 있던 양강(兩江)총독 왕신명(王新命)에게 말했다. “그대는 지방 대관이니 온갖 방법을 강구해 하도를 준설하고 백성을 구제해야 짐이 백성을 가련히 여기는 뜻에 부합할 것이오.”[4]

어가(御駕)는 계속 소주와 남경으로 남순을 이어갔고 약 한 달간의 순행 여정을 마쳤다. 돌아오는 길에도 강희제는 쉬지 않고 다시 천비갑에 올라 부근의 제방 공사를 시찰했으며, 산동을 지날 때 공자 묘에 참배한 후에야 경성으로 돌아왔다.

첫 번째 남순이 끝난 후 강희제는 근보의 치수 성적을 매우 찬양하며 조속히 완공할 것을 격려했다. 동시에 두 가지 조치를 내렸는데, 하나는 감수패를 통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하(下河, 운하 동쪽의 하천들을 통칭함)가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를 파는 것이었다.

남순 기간에 작은 일화가 하나 있었다. 강희제가 근보를 데리고 시찰할 때 독특한 안목으로 근보에게 물었다. “그대 곁에는 분명 고금에 박학한 인재가 있어 그대를 보좌하고 있을 것이오.”[5] 근보는 즉시 치수의 천재 진황을 추천하여 그가 배알을 받게 했다. 진황은 가히 근보의 군사(軍師)라 할 만했으며, 치수에 관한 모든 일은 진황이 계책을 내어 황제가 괄목상대할 만한 성적을 낸 것이었다.

두 번째 남순

“치수의 도리는 물의 성질에 순응하여 다스리는 데 있으니 그래야 성공하기 쉽다.” —— 강희제

두 번째 남순 도중 강희제는 직접 치수의 공적을 남긴 대우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림은 청 사수(謝遂) 《방당인대우치수도(仿唐人大禹治水圖)》 부분. (공유 영역)

강희제는 남순 후 두 가지 결정을 내려 지방관 우성룡에게 처리를 맡겼다. 여기서 설명하자면, 강희조에는 ‘대(大)우성룡’과 ‘소(小)우성룡’의 구별이 있는데, 청렴하기로 이름난 두 명신의 이름이 같다. 여기서 말하는 황하 치수에 참여한 우성룡은 ‘소우성룡’이다.

하지만 경험이 풍부한 근보는 반대 의사를 표했는데, 입해구(入海口)의 지세가 낮아 하하(下河)를 소통시키는 것이 고인 물을 내보내는 데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높은 제방을 쌓아 강물을 가득 채워 해수가 역류하는 것을 막고 강물이 세차게 바다로 들어가도록 보장하자고 제안했다.

비록 근보의 견해가 옳았으나 불행히도 조정의 당쟁에 휘말려 강희 27년(1688년) 파직되었다. 그리고 그가 이전에 세운 치수 성적도 조정 신료들의 공격을 받았다. 진황은 부호들의 이익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옥에 갇혔고 호송되는 길에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강희 31년이 되어서야 진황은 신원(伸寃)되었다. 그가 평생 바친 치수의 정수는 사람들이 편찬한 《하방술요(河防述要)》라는 책으로 남겨져 후세에 계속 도움을 주었다.

근보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28년 정월, 강희제는 근보와 우성룡 등을 데리고 두 번째 남순 여정을 시작했다. 이번 순행에서 강희제는 중하(中河)를 순시하는 것을 위주로 하며 관리들의 다스림과 민정도 함께 살폈다. 그는 하도를 따라 절강 소흥까지 가서 직접 치수의 공적을 남긴 대우에게 제를 올린 후에야 경성으로 돌아왔으니 70일이 걸렸다.

이른바 중하란 근보가 축조한 것으로 낙마호, 숙천, 도원에서 청하 중가장(仲家莊) 출구에 이르는, 황하와 평행한 인공 수로를 말한다. 대운하는 원래 이 구간에서 황하의 물길을 빌려 썼는데 황하에 수해가 많아지자 강희제가 중하를 파서 황하의 위험을 피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고찰 후 여러 대신은 거의 이견 없이 중하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들은 “중하는 황하의 180리에 달하는 위험한 하도를 피하게 해주어 제멋대로 흐르던 강물이 어느 정도 통제되고 민전도 침수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중하가 원래 황하와 너무 가까워 하도를 넓히기에는 적합하지 않다”[6]고 여겼다.

강희제는 다시 사람들과 중하 수선 문제를 반복해서 논의했으며, 마지막으로 후임 총하 왕신명에게 중하의 사후 공사에 유의하여 언제 어디서든 정비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원래 강희제는 하하도 직접 보려 했으나 가는 길이 험해 그만두고 대신 천비갑, 칠리갑 일대 공사를 다시 시찰했다. 이전에 강희제는 천비갑을 ‘초패(草壩)’로 바꾸고 따로 두 개의 갑문을 두어 물의 기세를 나누라고 지시했었다. 이번에 그는 하도가 평온하고 배들이 순조롭게 왕래하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두 번째 남순을 통해 강희제는 현지 백성과 치수 인부들이 모두 근보를 잊지 못하고 고마워하는 것을 보았고, 치수의 어려움과 근보의 노고 및 공적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의 관직과 품계를 회복시키고 치수 총고문을 맡으라는 명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희제는 다시 그를 총하에 임명했다. 다시 일어선 이 치수 전문가는 비록 몸이 쇠약하고 병이 들었음에도 여전히 직접 공사를 감독하다 마침내 현지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0세였다. 강희제는 매우 비통해하며 그를 두터이 장사 지내게 하고 ‘문양(文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근보 이후 후임 총하는 우성룡이었다. 강희제는 그에게 이전에 근보를 모함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조사하라고 당부했으며 근보의 방식대로 계속 치수할 것을 명했다. 근보 이후 강희조에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치수 인재가 다시는 없었다.

강희제는 박학다식한 데다 현지 시찰의 경험까지 더해지자 점차 자신이 치수 전문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중의 치수 방안과 결정은 모두 강희제가 주도하게 되었다. 여러 하천 관리들은 모두 근보의 치수 방략을 계승하며 강희제의 뜻에 따라 일을 수행했다.

주석:
[1] 《강희조실록》 권62: 강희 15년 10월 신미 조.
[2][5] 《희조신어》 권4.
[3] 《강희조실록》 권116: 강희 23년 10월 신해 조.
[4] 《강희조실록》 권116: 강희 23년 10월 계축 조.
[6] 《강희조실록》 권139: 강희 28년 3월 을해 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5/28/n1214378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