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王舍微)
【정견망】
흉금을 터놓고 천륜(天倫)을 말해보자. 이것은 생명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시각인가! 이에 개연히 탄식하기를, “덧없는 인생은 꿈과 같으니, 기쁨을 누림이 그 얼마나 되겠는가? 옛사람이 촛불을 잡고 밤에 논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었도다”라고 했다.
이 ‘시선(詩仙·이백)’은 ‘황제의 금을 하사받고 조정에서 물러난 일(賜金放還)’, 야랑(夜郎)으로의 유배 등 인생의 좌절을 겪은 후, 《의고12수(擬古十二首)》라는 시에서 고금의 무수한 이들이 공통으로 품었던 비탄을 터뜨렸다.
“산 자는 지나가는 나그네이요,
죽은 자는 돌아가는 사람이네.
천지는 하나의 여관과 같으니,
만고의 먼지가 되어 함께 슬퍼하노라.”
生者爲過客
死者爲歸人
天地一逆旅
同悲萬古塵
천지는 마치 나그네를 맞이하고 보내는 하나의 여관과 같아서, 인생은 잠시 기탁한 것이니 결국에는 만고의 먼지로 화하고 만다.
“달 속의 토끼는 부질없이 약을 찧고,
부상(扶桑)은 이미 땔나무가 되었네.”
月兔空搗藥
扶桑已成薪
이 시는 생명을 우주 시공의 차원 아래에 두고 관조하여 의경(意境)이 아득히 멀며, 생명의 본질에 대한 영원한 사색을 남겼다.
“사는 날이 백 년이 채 안 되거늘,
늘 천 년의 근심을 품고 사네. ……
신선 왕자교[1]는,
기약하여 나란히 하기 어렵도다.”
(《소명선집·권29》)
살아생전에 전설 속의 신선 왕자교처럼 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삼생유행(三生有幸)’이라는 성어가 있는데, 이는 과거 여러 세상(多世) 동안 닦아온 복분(福份)을 뜻한다. 이른바 삼생이란 불가에서 전생(前生), 금생(今生), 내생(來生)을 가리킨다. 즉, 인생이란 결코 단지 이번 한 세상의 총총한 나그네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돌아가 먼지로 화하는 것은 오직 이번 한 세상의 겉모습인 육신일 뿐이고, 내재된 진정한 나(주원신·主元神)는 도리어 여전히 천지 사이에서 윤회전세(輪回轉世)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북송 시기 소식(蘇軾)의 《동파집(東坡集)》(권2)에는 《승원택전(僧圓澤傳)》이 실려 있는데, 당나라 낙양 혜림사의 승려 원택의 전세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다. 항주 서호 연화봉 동쪽 기슭에는 삼생석(三生石)이 있어 ‘서호 16유적’ 중 하나로 꼽히는데, 그 위에는 전서로 ‘삼생석’이라 새겨져 있고 《당원택화상삼생석적(唐圓澤和尚三生石跡)》 비문이 있다.
원택은 속가의 친구인 이원(李源)과 함께 배를 타고 촉 땅에 있는 청성산, 아미산으로 유람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남포(南浦)에 정박했을 때 원택은 이원에게, 자신은 곧 세상을 떠나 임신한 지 3년이 되어 물동이를 지고 물을 긷는 부인 왕씨(王氏)의 아이로 투태(投胎)할 것이니, 13년 후 추석 달밤에 항주 천축사 밖에서 만나자고 기약했다.
그해가 되자 이원은 낙양에서 오지(吳地)로 향해 그해의 약속을 찾아갔다. 약속 장소에 이르러 갈홍천(葛洪川) 가에서 한 목동이 소의 뿔을 두드리며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삼생석 위의 옛 정혼이여,
달을 감상하고 바람을 읊조리던 일은 논하지 말라.
전생과 후생의 일이 아득하고 아득하니,
인연을 이야기하려다 도리어 애가 끊어질까 두렵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적지 않은 전세 기억의 기록과 실제 사례들이 존재한다. 이로 보아, 인생의 나그네 같은 처지 역시 결코 단지 한 평생 한 세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전생에 쌓은 복덕(福德)이 다음 세상의 복분을 결정한다. 나그네길 같은 인생 속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은 반반씩 섞여 있고 화와 복은 서로 기대어 있으며, 생생세세(生生世世) 쌓인 업력(業力) 또한 갚아야 한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덕(德)과 업(業)의 많고 적음에 따라, 왕왕 세간에서 서로 다른 경계와 품덕의 표현을 나타내게 되며, 선악 인과(善惡因果)는 인생의 조우와 미래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남송 시기 왕응린(王應麟)이 짓고 청나라 왕상(王相)이 주해한 《삼자경훈고(三字經訓詁)》의 첫머리에 “사람이 태어날 때 성품은 본래 선하다(人之初,性本善)”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가르침을 세우는 시초이자 발단이 되는 시작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처음 태어남에 근본 하여 말한 것이다. 하늘이 생육한 것을 사람이라 이르고, 하늘이 부여한 것을 성품이라 이른다. 태어날 때 받은 올바른 본성을 선(善)이라 일컫는다. 사람이 태어난 처음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사람의 성품은 모두 선하다’ 하였으니,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빙이(秉彝)’라는 어휘는 사람의 마음이 지켜야 할 상도(常道)를 뜻한다. 예컨대 《시경·대아·증민》에서 이르기를 “백성이 상도를 지켜 지니니,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도다(民之秉彝,好是懿德”라고 한 바와 같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論)’을 제기했다.
“사람의 성품이 선한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사람은 선하지 않음이 없고, 물은 아래로 흘러가지 않음이 없다. (《맹자·고산상》)”
이는 사람의 본성이 선량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반면 순자는 ‘성악설(性惡論)’을 제기했다.
“사람의 성품은 악하니, 그 선한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순자·성악제이십삼》)”
이는 역사상 오랜 시간 동안 논쟁을 일으켰다. 실제로 인성은 본래 선(善)과 악(惡)의 양면을 모두 지니고 있으니, 선한 일면은 불성(佛性)으로 나타나고 악한 일면은 마성(魔性)으로 나타난다. 바로 천지라는 여관 같은 고난 속에서 사람이 도덕을 제고하는 길로 걸어갈 수 있으며 불성을 충실히 하고 마성을 제거할 수 있다. 반대로 사람이 만약 식색성야(食色性也·먹고 밝히는 인간의 본능)라는 겉모습의 욕망을 방종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명리를 추구하며 싸우고 다툰다면, 그것은 곧 타락과 도덕의 추락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덕을 아는 자가 드물구나(知德者鮮矣)”(《논어·위령공》)라고 하였으니, 이는 진정으로 도덕을 이해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다는 뜻이다.
“인생은 나그네길과 같고,
나 또한 지나가는 행인이로다.”
人生如逆旅
我亦是行人
(소동파 《임강선·송전목부》)
수천 년의 인류 역사는 마치 긴 밤과 같아서 갈 길은 멀고도 험난하지만(路漫漫其修遠), 유구한 세월의 기다림 속에서 선을 지켜 옮기지 않고(守善不移) 선악을 똑똑히 분별하는 자는, 바야흐로 새벽의 여명과 휘황찬란한 내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주해
[1] 한대 유향이 찬한 《열선전(列仙傳)》에서 나옴.
[역주: 왕자교는 주 영왕(靈王)의 태자인 희진(姬晉)이라고 한다. 피리 부는 것을 즐기며, 봉황의 소리를 흉내내곤 했다. 도사인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고고산에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다. 위진 남북조 이후 적송자(赤松子)와 함께 고대 신선의 대표로 여겨져 시문이나 회화에 자주 등장한다. 조조나 이백, 소동파 등의 시에도 자주 등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