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년—280년)
심연(心緣)
【정견망】
인덕(仁德)과 관용으로 조조에 맞서 한실(漢室)을 부흥시킨 유비
조조(曹操)가 북방을 쟁탈할 즈음, 당세(當世)의 또 다른 영웅 유비(劉備)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의 굴기를 중심으로 천고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차례로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 유비의 신분과 기이한 관상
유비는 자가 현덕(玄德)이고 탁군(涿郡)[지금의 하북성 탁현(涿縣)] 사람으로 한 황실의 먼 후손이자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서로 의지하며 짚신을 팔고 돗자리를 짜서 생계를 유지했다. 정사 《삼국지(三國志)》 기록에 따르면, 유비의 집 동남쪽 모퉁이에 5장(丈) 남짓한 높이의 수풀이 우거진 뽕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마차의 덮개(華蓋)처럼 무성했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은 이 나무가 범상치 않으니 틀림없이 귀인이 태어날 징조라고 여겼다.
유비는 어릴 적 친척 아이들과 나무 아래에서 놀 때 “내 반드시 이 깃털 장식 덮개가 달린 마차를 타리라”라고 말했다. 유비가 15세가 되었을 때, 친척인 유덕연(劉德然), 요서 출신의 공손찬(公孫瓚)과 함께 구강태수(九江太守) 노식(盧植)을 스승으로 모셨다. 유덕연의 아버지는 유비를 자주 재정적으로 도와주며 그를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여겼다.
역사서의 묘사에 따르면 유비는 키가 7척 5촌에 달했고, 귀가 커서 어깨에 닿을 정도였으며 용모가 매우 기이했다. 그는 평소 말수가 적고 기쁨과 슬픔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으나, 아랫사람에게 매우 인자하고 성격이 호탕해 천하의 호걸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했다. 남다른 기개와 깊은 인의(仁義), 너그러움을 지녔기에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그와 사귀기를 원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이들이 바로 의형제를 맺은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다.
* 도원결의(桃園三結義)
동한(東漢) 말기, 황건군(黃巾軍)이 기의(起義)하면서 천하가 대란에 휩싸였다. 난세 속에서 영웅들이 대거 배출되는 법이다. 큰 뜻을 품었던 유비 역시 재능을 펼치고자 고향에서 용사들을 모집했다. 이때 삼국시대의 충의(忠義)를 대표하는 영웅인 관우와 장비가 거대한 역사 무대에 오르게 된다.
관우는 자가 운장(雲長)이고, 하동(河東) 해현(解縣) 사람으로 현지의 악덕 토호를 죽이고 머나먼 탁군으로 도피해 있었다. 역사서에서는 그를 “키가 9척이고 수염 길이가 2척에 달했으며, 얼굴은 잘 익은 대추 빛깔 같고 입술은 연지를 바른 듯했다. 붉은 봉황의 눈(丹鳳眼)에 누운 누에 모양의 눈썹(臥蠶眉)을 지녀 당당한 풍채와 위엄이 넘쳐흘렀다”라고 기록했다.
한편 장비는 자가 익덕(翼德)[통상 익덕으로 표기], 유비와 동향 사람으로 본래 술을 팔고 돼지를 잡는 백정이었으나 오직 천하의 호걸들과 결교하는 것을 좋아했다. 역사서에는 “키가 8척에 표범의 머리와 고리 같은 눈(豹頭環眼), 제비 턱과 호랑이 수염(燕頷虎須)을 가졌으며 목소리는 거대한 천둥 같고 기세는 달리는 말 같았다”라고 전한다.
의롭고 인덕(仁德)이 높은 유비와 관우, 장비 세 사람은 처음 만났으나 마치 오래된 친구 같았기에 성이 다른 형제의 인연을 맺기로 했다. 세 사람은 향을 피우고 맹세했다.
“유비, 관우, 장비가 비록 성은 다르오나 이미 형제가 되었으니, 마음과 힘을 합쳐 곤경에 처한 이를 구하고 위태로운 이를 도우며, 위로는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합니다.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나, 오직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죽기를 원합니다. 황천후토(皇天后土)시여 이 마음을 굽어살피소서. 의리를 저버리고 은혜를 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베리라!”
셋 중 유비가 나이가 많아 형이 되었고, 관우가 그다음이었으며, 장비가 막내가 되었다. 이때가 마침 3월이라 복사꽃이 만발했으니, 이를 세간에서 ‘세사람의 도원결의(桃園結義)’라 부른다.
이 한 번의 절은 삼국의 역사 전체를 충의와 의로운 담력으로 가득 채웠으며, 후세에 수많은 심금을 울리는 충의의 이야기를 남겨 사람들로 하여금 ‘의(義)’의 깊은 내포를 이해하게 했다.
세 사람은 결의한 후 고향의 용사 300여 명을 모아 황건 기의 진압에 참여했다. 공을 세운 유비는 안희현(安喜縣)의 현위(縣尉)가 되었다. 이후 독우(督郵)[지방관을 감찰하는 관직]가 시찰을 나왔을 때 유비가 알현을 청했으나 독우는 뇌물을 요구했다. 장비가 크게 분노하여 독우를 나무에 묶어놓고 채찍으로 200대를 때렸다. 이에 유비는 관직을 버리고 관인을 걸어둔 채 관우, 장비와 함께 공손찬에게 몸을 의탁했다.
인의를 행하며 두각을 나타낸 유비
공손찬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유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하고, 청주자사(青州刺史)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冀州牧) 원소(袁紹)를 방어하게 했으며, 유비는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얼마 후 유비는 평원현(平原縣)의 현령이 되었고, 이후 평원상(平原相)을 지냈다.
당시 유평(劉平)이라는 사람이 평소 유비를 가볍게 여겨 자객을 보내 유비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자객은 평소 유비의 어진 훌륭한 인품에 감동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실정을 고백했다. 이 일화는 유비가 평소 얼마나 인덕이 깊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무렵 북방의 조조가 서주(徐州)를 공격하자, 서주목 도겸(陶謙)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전해와 유비는 군대를 보내 포위를 풀었다. 당시 유비의 병력은 1,000여 명과 일부 호족 기병(胡騎), 그리고 수천 명의 굶주린 백성이 전부였다. 유비가 서주에 도착하자 도겸은 유비의 됨됨이에 경복하여 그에게 군사 4,000명을 내주었다. 이에 유비는 전해를 떠나 도겸에게 귀순했다. 도겸은 상소를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고 소패(小沛)에 주둔하게 했다.
얼마 후 도겸이 위독해졌다. 그는 심복인 미축(糜竺)에게 오직 유비만이 서주를 보전할 수 있다고 유언했다. 도겸이 사망하자 미축은 서주 백성들을 이끌고 유비를 옹립하려 했으나, 유비는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하비(下邳)의 진등(陳登)과 북해상(北海相) 공융(孔融)의 권유를 받은 후에야 유비는 서주를 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원술(袁術)이 군대를 보내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우이(盱眙)와 회양(淮陽)에서 이를 막아냈다.
유비와 원술이 수개월 동안 대치하는 사이, 여포(呂布)는 유비가 서주를 비운 틈과 수장 조표(曹豹)가 모반한 기회를 틈타 서주를 점령하고 유비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이후 유비는 여포와 화친했고, 여포는 그의 처자식을 돌려보냈다. 유비는 소패로 돌아와 군사 만여 명을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포는 유비가 자신에게 위협이 될까 우려하여 다시 군대를 보내 유비를 공격했다. 유비는 패배해 조조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유비를 당대의 영웅으로 여겨,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오늘날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使君 유비)과 나 조조뿐이오”라고 말했다. 조조는 유비를 매우 예우하며 그를 예주목(豫州牧)에 봉했다.
이후 유비는 조조의 도움을 받아 여포를 멸했다. 조조는 상소를 올려 유비를 좌장군(左將軍)에 봉했다. 그 기간에 원술이 음란하고 방탕하여 자립하지 못하고 서주를 거쳐 원소에게 의탁하려 하자, 조조는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원술을 기습하게 했다. 원술은 퇴각했다가 얼마 후 병사했다. 유비는 조조의 장수들을 허도(許都)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와 가솔들을 돌보았다.
유비가 허창(許昌)에 있을 때, 헌제(獻帝)의 외숙부인 거기장군(車騎將軍) 동승(董承)이 조조를 처단하라는 황제의 밀조인 의대조(衣帶詔)를 받았다. 동승은 조조가 어린 군주를 능멸하니 실로 가증스럽다며 유비 등을 불러 모아 한실 부흥을 몰래 모의했다. 유비가 원술을 공격하러 간 사이 음모가 탄로 났고, 조조는 동승 등을 처형했다. 이로 인해 유비는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조조는 서주자사 차주(車冑)에게 밀명을 내려 기회를 보아 유비를 죽이려 했으나, 이 사실이 관우에게 발각되었다. 관우와 장비는 차주를 죽이고 다시 서주를 점령했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유비를 정벌하자 유비는 패하여 홀로 원소에게 도망쳤다. 장비 또한 혼란한 군사들 속에서 유비와 길을 잃었다. 하비를 지키고 있던 관우는 유비의 처자식을 보전하기 위해 조조와 세 가지 조건을 계약한 후 항복했다.
세 가지 조건은 이러했다.
“첫째, 오직 한 황제에게 항복하는 것이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두 분 형수님께 황숙(皇叔)의 봉록을 지급해 부양할 것이며 아랫사람을 포함해 누구도 그 문앞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한다.
셋째, 유황숙의 행방을 알게 되면 천 리 만 리를 가리지 않고 즉시 떠날 것이다.”
관우의 재능을 흠모하던 조조는 주저 없이 이를 수락했다.
*관우의 충의와 신의를 지켜 인심을 얻은 조조
관우가 조조에게 귀순한 후, 조조는 관우를 붙잡아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그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금은보화와 미녀, 심지어 자신이 아끼던 적토마(赤兔馬)까지 선물했다. 그러나 관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조조의 부하 장료(張遼)에게 말했다.
“조공(曹公 조조)이 나를 두텁게 대우해 줌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유 장군(유비)에게 큰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배반할 수 없소. 나는 결국 이곳에 머물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조공에게 공을 세워 보답한 후에 떠날 것이오.”(《삼국지》).
조조는 이 말을 전해 듣고 관우를 의리를 중시하는 인물이라 여기며 크게 감탄했다.
충의로운 관우는 조조의 두터운 대접에 보답하기 위해 백마(白馬) 전투에서 원소의 대장 안량(顏良)과 문추(文醜)를 베었고, 조조는 그 공으로 그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
조조의 진영에 있으면서도 관우는 늘 유비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유비가 원소의 군중에 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조조가 하사한 보물들을 봉인해 두고 편지를 남겨 작별을 고한 뒤 유비를 찾아 떠났다. 조조의 부하들이 관우를 쫓아가 붙잡으려 하자 조조가 가로막으며 말했다.
“내가 이미 전에 허락했거늘, 어찌 신의를 잃을 수 있겠는가!”
나아가 장수 장료에게 말하기를, “운장(雲長 관우)이 재물을 봉하고 관인을 걸어두었으니 재물로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작록(爵祿)으로 그의 뜻을 바꿀 수 없구나. 이 같은 사람을 내가 깊이 존경하노라. 그가 가버린 지 멀지 않았을 터이니, 내가 내친김에 배웅하며 노자와 전포(戰袍)를 선물해 훗날의 기념으로 삼게 하겠노라”라고 했다. 이후 관우가 다섯 개의 관문을 지나며 조조의 장수 여섯 명을 베었음에도(오관참육장), 조조는 자기가 이미 공언한 바를 어길 수 없다는 이유로 부하들이 추격하는 것을 막았다.
이 무렵 유비는 관도대전(官渡之戰)에서 원소가 패하자 형주(荊州)로 가서 유표(劉表)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관우는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형주에 도착해 마침내 형제가 상봉했다. 한 성채를 점거하고 있던 장비 역시 유비의 소식을 듣고 형주로 찾아왔다. 형제 세 사람이 다시 모인 것은 차마 ‘의(義)’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비가 유표에게 투항하자, 유표는 처음에는 그를 상빈(上賓)의 예로 대접하고 군사를 더해 주어 신야(新野)에 주둔하게 했다. 형주의 호걸들은 평소 유비가 인의(仁義)롭고 너그럽다는 명성을 들었기에 그에게 귀순하는 이가 많았다. 이에 유표는 유비가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여 은밀히 경계하기 시작했다.
* 인의의 유비가 삼고초려하고 제갈량이 삼분천하를 예언
유비가 두각을 나타내기는 했으나 자주 남의 밑에 얹혀살았기에 자신의 뜻을 실현할 길이 없었다. 그에게는 관우, 장비 같은 호랑이 같은 장수들이 있었으나, 자신을 도와 계책을 세워줄 모신(謀臣)이 부족함을 깊이 절감했다. 207년, 유비가 신야에 주둔하고 있을 때 모사 서서(徐庶)가 은거 중인 기재 제갈량(諸葛亮)을 추천했다. 이에 유비가 친히 융중(隆中)[현재의 호북성 양양(襄陽) 서쪽]으로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니, 이것이 바로 천고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은 ‘삼고초려(三顧茅廬)’다.
유비는 두 번째로 와룡장(臥龍莊)을 찾아갔다가 제갈량을 만나지 못하자 편지 한 통을 남겼다. 편지에서 유비는 자신이 “높은 명성을 사모한 지 오래되었다”라며 “두 번이나 찾아뵈었으나 만나지 못하고 헛되이 돌아가니 그 시름과 아쉬움이 어떠하겠습니까”라는 간절한 성의를 표했다. 평생의 뜻을 간략히 서술한 후, 유비는 제갈량이 출산(出山)하여 자신을 보좌해 “강태공(呂望)의 큰 재능을 펼치고 장자방(子房)의 원대한 지략을 베풀어 주기”를 희망했으며, 자신은 “목욕재계한 후에 다시 찾아뵙겠다”라고 적어 어진 인재를 갈구하는 마음을 절절히 나타냈다.
황숙의 신분으로 이토록 예우를 다해 현자를 대했으니, 인의를 극진히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은 바로 유비의 이런 정성어린 마음에 감동하여 출산하여 유비를 도와 천하를 도모하기로 동의했다.
제갈량(181년~234년)은 자가 공명(孔明), 도호는 와룡선생(臥龍先生)이며, 낭야군(琅琊郡) 양도인(陽都人)[지금의 산동성 기수현(沂水縣)]이다. 소년 시절 부모를 여의고 숙부를 따라 형주로 피난 와 남양(南陽) 융중에 은거하며 몸소 밭을 갈았다. 평소 자신을 관중(管仲), 악의(樂毅)에 견주었으며, 〈양보음(梁父吟)〉을 부르기를 좋아했고 방덕공(龐德公), 방통(龐統), 사마휘(司馬徽), 황승언(黃承彥), 석광원(石廣元), 최주평(崔州平), 서서 등 명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위엄 있고 훌륭했으며,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시세에 독특한 견해를 지니고 있어 많은 이들이 그를 비범한 인물로 보았고 그의 지모 또한 널리 공인되어 있었다.
유비의 요청에 응해 세상에 나오면서 제갈량은 마치 예언가처럼 융중에서 천하의 형세를 분석하고 유비가 어떻게 패업을 이룰 수 있는지 설명하며, 향후 천하가 반드시 셋으로 나뉠 것(三分天下)을 예언했다. 그는 조조는 땅이 넓고 인구가 많으며 “황제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니 참으로 그와 대적해 다툴 수 없다”라고 했다. 손권(孫權)은 강동(江東)을 차지하고 있어 “나라가 험하고 백성들이 따르며 현능한 이들이 등용되고 있으니 원조를 받을 동맹으로 삼아야지 도모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반면 유표와 유장(劉璋)은 나약하므로 그들을 대체해 형주와 익주(益州)를 근거지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런 다음 서쪽으로 융족(戎族)과 화합하고 남쪽으로 이월(夷越)을 어루만지며, 대외적으로는 손권과 손을 잡고 대내적으로는 정치를 닦았다가 기회가 오면 두 갈래 대군으로 북벌을 감행해 마침내 전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출산(出山)에 동의했음에도 제갈량은 세속의 인물이 아니었기에 인간 세상의 명리를 극히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동생 제갈균(諸葛均)에게 당부했다.
“내가 유황숙의 삼고의 은혜를 입었으니 나가지 않을 수 없구나. 너는 여기서 몸소 밭을 갈며 농토를 황폐하게 하지 말아라. 내가 공을 이루는 날, 즉시 돌아와 은거하리라.”
훗날 제갈량이 임종하기 전 후주 유선(劉禪)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이르기를 “신(臣)의 성도(成都) 집에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밭 15경(頃)이 있어 자손들의 의식은 스스로 넉넉합니다. 신이 외부의 관직을 맡아서는 따로 융통한 바 없이 몸에 걸치는 의식은 모두 관록에 의지했으니 별도로 재산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신이 죽는 날 내부에 남은 비단이 없고 외부에 남은 재산이 없게 하여 폐하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제갈량의 흉금이었다. 그가 출산하여 유비를 보좌한 것은 공명이나 이익을 탐하거나 남들 앞에 귀하게 보여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천의(天意)의 안배에 순응하여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비범한 지혜는 삼국의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나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깊은 찬탄을 자아내고 있다.
* 제갈량이 유비를 보좌하니 천하를 다투기 시작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후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했다. 제갈량의 뛰어난 군사 지략(運籌帷幄) 속에서 유비는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고 손권과 연합해 조조에게 대항하며 천하를 통일하라는 제갈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운 발전을 시작했다.
208년 8월, 조조가 하후돈(夏侯惇)과 우금(于禁)을 보내 서주(徐州)를 공격하자 유표는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적을 맞게 했다. 양측은 박망(博望)에서 조우했다. 유비는 제갈량의 계책을 써서 화공(火攻)으로 조조 군대를 대파했다.
그해 12월, 조조가 북쪽으로 오환(烏丸)을 정벌하러 가자 유비는 유표에게 허도를 기습하자고 권했으나 유표는 채택하지 못했다. 조조가 군대를 돌린 후 다시 서주로 대군을 보내려 할 때 유표가 위독해져 유비를 불러 보좌할 일을 상의했다. 유비가 막 번성(樊城)에 도착했을 때 유표는 이미 사망하고 차남인 유종(劉琮)이 자립해 조조에게 항복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취하라고 권했으나, 유비는 “내가 차마 그러지 못하겠소”라고 답했다. 과연 인의로운 인물이었다.
조조가 곧 당도한다는 소식에 유종의 측근들과 백성들 대다수가 유비를 따라 형주를 떠나 강릉(江陵)으로 후퇴하기를 원했다. 당양(當陽)에 이르렀을 때 따르는 백성이 이미 10여 만 명에 달했고, 군수물자를 실은 수레가 수천 대라 하루에 겨우 10여 리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유비는 관우에게 배 수백 척을 주어 강릉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떤 이가 유비에게 말했다. “속히 행군하여 강릉을 보전해야 합니다. 지금 따르는 백성이 저토록 많으니 만약 조조의 대군이 들이닥치면 어찌 저항하겠습니까?”
유비가 말하기를 “무릇 큰일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오(夫濟大事必以人爲本).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순해 오는데 내 어찌 차마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 인덕과 인의가 이와 같았기에 천하의 호걸들이 귀부했던 것임을 믿을 수 있다!
조조는 유비가 강릉을 점거할까 우려하여 군대에 군수물자를 놓아두고 가벼운 무장으로 양양에 도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비가 이미 지나갔다는 말을 듣고 조조는 친히 정예 기병 5,000명을 이끌고 추격하여, 하루 낮 하룻밤 동안 300여 리를 달려 당양 장판(長阪)에서 유비를 따라잡았다.
* 조운이 단기필마로 아두를 구하고, 장비가 담력으로 조조 군대를 물리쳐
조조의 대군이 장판파에 들이닥치자 중과부적이었던 유비는 처자식과 백성들을 버려둔 채 도주할 수밖에 없었고, 장비에게 기병 20기를 주어 후방을 차단하게 했다. 의로운 담력을 지닌 장비는 추격군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를 끊고 다리 난간에 서서 창을 가로쥔 채 소리쳤다. “내가 바로 장익덕이다! 와서 나와 함께 죽기를 결판내자!” 조조의 군사 중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고, 이 덕분에 유비 일행은 무사히 위험을 벗어났다.
또 다른 충의의 지사 조운(趙雲)은 자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유비의 아들인 아두를 가슴에 품은 채 유비의 부인을 보호하며 사지를 탈출했다. 조운은 자가 자룡(子龍)이고, 상산(常山) 진정(真定) 사람이다. 본래 공손찬 수하의 장수였으나 훗날 유비가 자신을 알아주는 은혜에 감동해 따르며 유비의 주기(主騎)가 되었다.
당양 전투는 유비가 백성들을 차마 버리지 못해 결국 패배로 이어졌다. 조조는 수많은 군수품과 포로를 획득했다. 유비는 강하(江夏)에 주둔하고 있던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에게 도망쳐 몸을 의탁한 후 반구(樊口)[현재의 호북성 악성(鄂城) 서북쪽]에 진주했다. 유비는 오직 강동의 손권과 연합해야만 조조를 막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