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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전】 6 개평부에서 대칸의 자리에 오르고 반역을 평정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대칸이자 쿠빌라이의 형인 뭉케가 1259년 남행(南征) 중에 급사한 것은 남송(南宋) 입장에서는 짧은 휴식 시간을 얻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우량카다이가 남쪽으로부터 광서 남녕(南寧)·계림(桂林)을 공격하여 담주(潭州, 지금의 장사長沙)를 겨누고 있었고, 쿠빌라이는 호북 악주(鄂州, 지금의 무창)를 포위 공격했으며, 뭉케는 사천(四川)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어, 남송은 이미 북·서·남 삼면에서 동시에 공격에 직면한 위태로운 국면이었기 때문이다.

남송 조정은 극심한 공황에 빠졌는데, 당시 재상 정대전(丁大全)이 전쟁 상황을 은폐하여 불만을 유발하니, 송 이종(理宗)이 그를 파면하고 가사도(賈似道)를 우승상 겸 추밀사(右丞相兼樞密使)로 급히 임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악주로 가 적을 맞이하게 했다.

가사도는 몽골 대군이 병사가 강하고 장수가 용맹한 것을 보고 악주를 고수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조정을 배신하고 몰래 사람을 보내 쿠빌라이에게 화친을 청했다. 그 후, 강회형호경략사(江淮荊湖經略使) 신분의 조벽(趙璧)이 3천 병졸의 호위를 받으며 악주성에 들어가 남송 관원들과 강화를 논의했다. 그러나 가사도는 발에 병이 있다는 핑계로 나오려 하지 않고, 다시 논의하기로 약속하고 돌아갔다.

뭉케가 세상을 떠난 후, 서·남 양로군(兩路軍)은 철수하여 뭉케의 영구(靈柩)를 호위해 북쪽으로 돌아갔다. 북쪽에 있던 쿠빌라이는 이복 동생 뫼게(末哥 툴루이의 9번째 아들)가 보내온 뭉케의 부고를 받고, 대칸 계승권을 다투기 위해 쿠릴타이에 참여하기 위해 북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자, 처음에는 자신이 명을 받들어 남정하는 중이니 “어찌 공 없이 돌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반대했다. 이에 여전히 공격 발동을 명령하여 여러 차례 승리했으나, 악주를 공격할 때는 저지당했다. 악주 전투에서 송·몽 양군이 수개월간 격렬한 전투를 벌여 쌍방의 “사망자가 아주 많았다”.

전투가 교착된 상황에서 쿠빌라이의 정처(正妻)인 차비(察必)가 다시 사람을 보내 개평(開平) 주변 동향을 쿠빌라이에게 알리며 그의 귀환을 재촉했다. 쿠빌라이는 이에 제장(諸將)과 모사들을 불러 상의했다.

학경(郝經)이 〈반사의(班師議)〉를 올려 반드시 즉시 군대를 물려야 하는 이유를 진술했다. 이유는 다섯 가지였다.

첫째, 이번 남정은 본래 부당했다. 몽골 제국은 금(金)나라를 평정한 이래 오직 진취에만 힘쓰고 정예를 기르며 시기를 기다리지 않아, 전투 기간이 오래되어 재정 소모가 거대했으나 끝내 성과가 없었다. 뭉케 대칸이 즉위한 후 본래 휴양하고 생식해야 했으나 여전히 대대적으로 용병했다. 이제 뭉케 대칸이 붕어했으니 마땅히 송과 강화하고 경사(京師)로 돌아가 황위 계승의 대사를 처리해야 하며, 만약 여전히 진군한다면 이는 나아가지 말아야 할 때 속히 나아가는 것이다.

둘째, 송을 멸할 시기가 아직 되지 않았다. 만약 송을 멸하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이내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야지, 그렇지 않고 강가에서 배회하며 시일을 지체하면 몽골군의 약점을 폭로하게 된다. 겨울과 봄이 교차할 때에 이르러 일단 역병이 유행하면 그때는 아마 군대를 돌리고 싶어도 불가능할 것이다.

셋째, 송조(宋朝)는 몽골 국내의 정국이 불안정함을 알고 있기에 투지가 배가되어 적극적으로 전쟁을 대비하고 대군을 구름처럼 모으고 있으며, 또한 훌륭한 장수(良將)가 있다.

넷째, 쿠빌라이도 북귀할 의사가 있다. 강을 건너고도 임안(臨安)으로 직행하려 하지 않는 것은 “임안은 인구가 조밀해 만약 임안에 이르면 비록 사람을 죽이지 않을지라도 백성들이 짓밟힐 것이니 차마 하지 못하겠다. 만약 하늘이 내게 주신다면 반드시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고, 만약 하늘이 주시지 않는다면 사람을 죽인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일이 급하니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다섯째, 몽골 국내 국세가 긴장되어 타차르(塔察兒) 국왕과 이단(李璮)이 또 군사를 일으켜 난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쿠빌라이가 비록 평소에 중망이 있고 많은 병력을 장악하고 있으나, 만약 아릭부케(阿裏不哥)가 선제(先帝)의 유조를 받았다고 칭하며 등극하여 정위(正位)에 오르고 중원에 조서를 내리며 강북(江北)에 사면을 행한다면, 그때는 다시 경사(京師)로 돌아가고자 해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학경은 또한 한 갈래 인마를 파견하여 뭉케 대칸의 영구를 맞이하고 대칸의 옥새를 거두며, 다시 사신을 보내 훌라구, 아릭부케, 뫼게 및 제왕(諸王)들을 카라코룸에 소집해 상을 치를 것을 건의했다.

이외에 염희헌(廉希憲)도 쿠빌라이에게 즉시 조정에 복귀해 대칸 지위를 계승함으로써 천하를 안정시킬 것을 힘써 권했다. 그는 또 당면 형세를 분석하고, 자신이 직접 가서 제왕 중 한 명인 탑차르를 설득하여 쿠빌라이를 옹립해 대칸 위에 오르게 했다. 탑차르는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 오치긴의 손자로, 동도제왕(東道諸王) 중에서 큰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쿠빌라이의 정처인 차비가 다시 사람을 보내 개평(開平) 주변의 동향을 쿠빌라이에게 알리며 그에게 북쪽으로 돌아올 것을 재촉했다. 개념도. (Shutterstock)

학경과 염희헌의 분석은 쿠빌라이로 하여금 형세를 더욱 분명히 보게 했고, 군대를 물려 북으로 돌아가겠다는 쿠빌라이의 결심을 굳히게 했다. 다만 암중으로 북철(北撤)을 준비할 때 쿠빌라이는 대 병력을 이끌고 남하해 남송의 도성인 임안으로 직접 공격할 기세를 보여주었고, 가사도는 즉시 다시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며 남송이 기꺼이 신하를 칭하고 아울러 세폐(歲幣)로 은 20만 량과 비단 20만 필을 보낼 것이며 장강을 두 제국의 공동 경계선으로 삼자고 대답했다. 이는 바로 쿠빌라이의 마음에 맞아떨어졌기에 그는 화의(和議) 조건을 허락하고 즉시 철군해 북으로 돌아갔으며, 장절(張節)·염왕(閻旺)의 한 갈래 5천 명 군대만 남겨 장사를 포위 공격하던 우량카다이의 대군을 맞이하게 했다.

쿠빌라이가 군대를 보내 맞이한다는 말을 듣고 우량카다이 대군은 마침내 호북으로 방향을 돌렸고, 장절과 염왕은 장강 위에 부교(浮橋)를 설치해 맞이하여 양군이 병력을 합해 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가사도는 다시 약정을 위반하고 몽골 대군이 물러날 때를 틈타 공격하여 후방을 지키던 100여 명의 몽골 군인을 죽였다. 가사도는 고의로 이 소규모 공격을 거대한 승리로 과장하여 불렀고, 몽골군이 철퇴한 진짜 원인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주장(奏章)에 쓰기를 “여러 길에서 대첩을 거둬 악주의 포위가 비로소 풀렸고 장강과 한수가 깨끗해졌습니다. 종묘사직이 위태로웠다가 다시 편안해졌으니 참으로 만세에 무강한 복입니다”라고 했다. 송 이종은 이를 진실로 믿고 그를 크게 찬양했을 뿐만 아니라 큰 상을 내렸다. 이로부터 가사도는 남송 조정의 정치를 십여 년간 독단했다.

개평에서 대칸의 자리에 오르다

쿠빌라이가 북으로 돌아와 연경(燕京)에 도착한 후, 즉시 아릭부케의 명령을 따르던 탈리치(脫裏赤)가 징집한 군대를 해산하니 “민심이 크게 기뻐했고”, 개평에서 연경 일대를 통제했다. 연경 근교에 주둔하는 기간 동안 쿠빌라이는 제왕들과 연락을 전개하여 1260년 봄에 쿠릴타이를 개최할 것을 상의했다.

1260년 3월, 쿠빌라이는 개평부에 이르러 쿠릴타이를 개최했고 뫼게, 하단(哈丹), 아지기(阿只吉), 타차르, 에센부카(也先哥), 쿨라쿠르(忽剌忽兒) 등 제왕 40여 명이 문무대신을 거느리고 쿠빌라이를 옹립하여 대칸 위에 올렸다. 3월 24일(1260년 5월 5일) 쿠빌라이는 몽골 제국의 대칸 지위에 올랐다. 4월 4일(5월 15일) 즉위조서(繼位詔書)를 발표했다. 이 해에 쿠빌라이는 45세였다.

대칸에 오른 후, 쿠빌라이는 석자총(釋子聰, 유병충) 등에게 명하여 관직 및 각종 제도를 제정하게 하여 중앙에 중서성(中書省) 등의 부서를 설치하기로 확정하고, 왕문통(王文統)을 중서성 평장정사(中書省平章政事)로, 장문겸(張文謙)을 좌승상으로 임명했으며, 바춘(八春), 염희헌, 상정(商挺)을 섬서사천등로 선무사(陝西四川等路宣撫使)로, 조량필(趙良弼)을 참의사사(參議司事)로, 점합남합(粘合南合), 장계원(張啓元)을 서경등처 선무사(西京等處宣撫使)로 임명했다. 또한 사신을 보내 송과 강화하고, 남쪽을 공격하던 제군(諸軍)에게 귀환하라는 조령을 내렸다.

1260년(중통 원년) 5월 19일, 쿠빌라이는 《중통건원조(中統建元詔)》를 발표해 정식으로 연호 “중통(中統)”을 건립했는데, 이 또한 한제(漢制)를 모방한 것이다. 조서 중에서는 대신들이 간언을 올릴 것을 격려하며 비록 건의가 채택되지 않더라도 죄를 묻지 않을 것이고, 만약 채택된다면 포상하여 “충직함을 드러내겠다”고 했다. 사망하거나 부상한 병사들에 어루만져주고 사형 판결을 받은 자에 대해서도 다시 심사하게 했다.

이어서 쿠빌라이는 한인 지역을 십도(十道)로 나누고 또 십로 선무사(十路宣撫司)를 임명했는데, 그중 금련천막부(金蓮川幕府)의 장덕휘(張德輝)를 평양태원로 선무사(平陽太原路宣撫使)로, 요추(姚樞)를 동평로 선무사(東平路宣撫使)로, 장문겸을 대명창덕등로 선무사(大名彰德等路宣撫使)로, 염희헌을 경조등로 선무사(京兆等路宣撫使)로, 서세륭(徐世隆)을 연경 부선무사(燕京副宣撫使)로 임명했다. 이단을 강회대도독으로 임명하고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연경에 세워 육부(六部)를 만들게 했으며, 마마(祃祃)를 중서성 승상으로, 왕문통·조벽을 평장정사로, 장이(張易)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왕악(王鄂)을 한림학사승지 겸 수국사(翰林學士承旨兼修國史) 등으로 임명했다. 금련천 막부의 많은 인재들의 도움을 받아 쿠빌라이가 통치하는 중원 지역은 질서있게 운영되었다.

대칸의 자리에 오른 직후, 쿠빌라이는 유병충 등에게 명해 관직과 각종 제도를 제정하게 했다. (에포크타임스 제작)

아릭부케와의 첫 전투에서 승리

쿠빌라이가 대칸에 오른 후, 뭉케의 황후 쿠툭타이(忽都台), 뭉케의 아들 우룽타시(玉龍塔失), 아수타이(阿速歹) 등 몽골 제왕·귀족·대신의 지지를 얻은 아릭부케도 바쁘게 4월에 카라코룸에서 또 다른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자신이 새로운 몽골 대칸임을 선포했다. 하나의 제국에 두 명의 대칸이 출현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분열과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몽골 제국이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쿠빌라이는 한편으로 사신을 보내 동생인 훌라구와 베르케(別兒哥 칭기스칸의 장남인 주치의 장남)의 지지를 얻고자 했고, 한편으로 일방적으로 사신을 카라코룸에 보내 아릭부케를 설득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릭부케는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쌍방의 협상이 성과가 없자, 그는 쿠빌라이가 보낸 100명의 사신과 두 명의 종왕(宗王)을 죽인 후 두 갈래로 나눠 대군을 남하시켰다.

동로(東路)는 구육의 아들인 주무쿠르(主木忽兒), 주치의 손자 카라차르(合剌察兒)가 이끌어 개평·연경 등지로 진군했다. 서로(西路)는 아람다르(阿藍答兒)가 이끌어 하서주랑(河西走廊)으로 진입하여, 육반산(六盤山)에 주둔 중인 뭉케의 남송 공격 주력이자 대장인 쿤두카이(渾都海)와 카라부카(哈剌不花)가 장악한 군대와 회합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경조(京兆)의 유태평(劉太平), 곽노해(霍魯海) 등과 연락해 공동으로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했다.

쿠빌라이는 아릭부케가 출병했다는 말을 듣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조서를 내려 “친형제 사이에 권력 다툼이 나타난 것은 자신이 생각지 못한 일이며, 아우가 나이가 어려 감언이설에 눈이 가려진 것을 고려해 자신은 부자 형제의 친분과 종묘사직의 중함을 돌아보아 몇 차례 사신을 보내 효유했으나 어찌 반역자들이 따르지 않을 줄 알았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다시 싸움을 하는 것은 결코 본뜻이 아니니 내심 깊이 불안하다고 했다. 그는 아울러 내란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성강의 치(成康之治)를 이루겠다”고 표시했다.

여기서 성강의 치(기원전 1043년~약 기원전 996년)란 서주(西周) 초기 주 성왕(周成王), 주 강왕(周康王)의 치세를 가리킨다. 이 기간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여 40년간 형벌 도구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쿠빌라이가 조서 중에서 이와 같은 약속을 한 것은 또한 자신의 치하에서 청명(淸明)한 사회를 맞이하겠다는 큰 뜻을 표명한 것이다.

청명한 사회를 맞이하기 위해 쿠빌라이는 반드시 아릭부케와의 대칸 지위 다툼을 해결해야 했다. 대결에서 쿠빌라이는 재지(才智), 흉금, 모략(謀略), 인원과 군량, 재력 등의 방면에서 한 수 위였고, 아릭부케의 시야는 상대적으로 협소했다.

일찍이 쿠빌라이가 대칸에 오른 당일, 그는 한인 지역의 재정을 총관할 세 명의 책임 관원을 임명했는데 그들은 조벽, 마마, 동문병(董文炳)이었다. 조벽은 뭉케 초년에 이미 이 직책을 담당했었기에 일에 능숙해, 사서에서는 그가 “보급과 운송을 경영해 서로 끊이지 않게 했다”, “몸소 장부를 대조해 호귀(豪貴)들이 횡령하고 체납한 돈 수만 계(計)를 얻어내니, 수레를 타고 북정할 때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군자금이 충족했다”고 했다. 이는 그가 북방 변경 용병에 공급할 후방 보급 장관으로서 직책을 아주 잘 수행했음을 설명한다.

이외에 일찍이 북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쿠빌라이는 모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촉·롱(秦蜀隴) 지역이 받을 공격 가능성에 대해 일찍이 방비를 세웠다. 그 후 그가 위임한 경조 선무사 염희헌과 참의(參議) 조량필(趙良弼)이 관중에 도착한 후 신속하게 형세를 안정시켰으니, 먼저 모반하려던 유태평, 곽노해 등을 잡아 죽이고 이어서 쿤두카이(渾都海)와 카라부카(哈剌不花) 부대와의 정면 대결에서 두 사람을 죽이니, 아릭부케가 관중을 차지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다른 한편으로 쿠빌라이는 친히 인마(人馬)를 이끌고 아릭부케의 동로군을 맞이해 쳐서 신속하게 이를 격파했다. 아릭부케는 호룸에 계속 머물기 어려워지자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계승한 툴루이의 봉지인 키르기스(吉裏吉思, 지금의 예니세이강 중상류)로 물러났다.

1260년 겨울, 쿠빌라이는 순조롭게 호룸에 진입했다. 아마 성이 너무 피폐했기 때문인지 쿠빌라이는 이곳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남쪽의 왕길하(汪吉河, 지금의 옹긴강) 겨울 영지로 이동해 짧은 휴식을 취했다.

1260년 겨울, 카라코룸 남쪽의 왕길하(汪吉河) 겨울 주둔지로 가서 짧은 휴식을 취했다.(shutterstock)

아릭부케와 전쟁을 하는 동시에 쿠빌라이는 더욱 많은 지지를 쟁취하려 노력했으니, 특히 훌라구, 베르케와 차가타이 칸국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당시 서쪽 원정 중이던 훌라구는 동쪽으로 돌아오던 도중 쿠빌라이와 아릭부케가 다툰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서아시아에 머물러 일 칸국을 건립했는데, 쿠빌라이는 후일에 그를 “일 칸”으로 봉해 주었고 시야가 넓었던 훌라구 역시 쿠빌라이의 대칸 지위 계승을 지지했다. 쿠빌라이는 이에 아무다리아강 서쪽부터 이집트 경계에 이르는 페르시아 영토와 해당 지역의 몽골·아랍 군민(軍民)을 그에게 주어 통치하게 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는 줄곧 중립을 지키며 이 대칸 지위 다툼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표시했다. 그리고 차가타이 칸국의 칸이자 차가타이의 손자인 카라 훌라구(哈剌旭烈)은 뭉케와 친했으나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봉지는 그의 아내 오르기나(兀魯忽乃)가 섭정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릭부케를 지지했다. 하지만 쿠빌라이가 차가타이 칸국과 아릭부케 사이의 교통을 봉쇄했기 때문에 오르기나는 아릭부케에게 물자를 제공할 방법이 없었다.

물자 공급이 곤란한 상황에서 아릭부케는 자신을 따르던 차가타이의 또 다른 손자 알루구(阿魯忽)을 차가타이 칸국에 돌려보내 국사를 주관하게 하고, 그와 자신을 위해 무기와 군량을 제공하며 훌라구와 베르케가 쿠빌라이를 지지하는 것을 막게 했다.

이때의 형세는 아릭부케에게 대단히 불리했다. 쿠빌라이가 자신을 추격할까 걱정된 아릭부케는 이에 사신을 파견해 쿠빌라이에게 용서를 청하고, 가을이 되어 말이 살찌기를 기다려 찾아가서 죄를 청하겠다고 했다. 그는 또 베르케, 훌라구, 알루구 삼왕과 함께 입조해서 공동으로 대칸 지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표시했다.

쿠빌라이는 속임수가 있음을 의심치 않고 즉시 동의하며 “내가 아우의 말을 믿으니, 아우는 삼왕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한 번 만나자”라고 대답했다. 이에 칭기스칸의 동생인 카사르(哈撒兒)의 아들 에센게(也孫哥)를 남겨 막북(漠北)을 진수하며 아릭부케를 기다리게 하고, 자신은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개평으로 돌아와 국사를 처리했다.

아릭부케의 복종

쿠빌라이의 신임을 얻은 아릭부케는 이에 키르기스에서 휴식하며 정비했다. 사실 쿠빌라이에게 용서를 청한 것은 단지 시간을 버는 계책일 뿐이었다. 한 차례 겨울과 봄을 지낸 후, 이듬해인 1261년 가을 자신의 군대가 강해지고 원군이 도착하자 아릭부케는 약속을 위배하고 다시 쿠빌라이를 공격했다. 그는 먼저 카라코룸을 지키던 에센게에게 거짓으로 무리를 이끌고 귀순해 온다고 일컬으니 에센게는 깊이 믿어 의심치 않고 환영을 표시했다. 하지만 아릭부케는 방비가 없는 틈을 타서 기습 공격을 발동해 그를 격파하고 카라코룸을 점령했다. 이어서 아릭부케는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쿠빌라이의 개평부를 직접 치려했다.

쿠빌라이는 아릭부케가 거짓으로 귀순하고 카라코룸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친히 제로(諸路)의 한군(漢軍)과 몽골 제왕 소속 부대를 거느리고 북상해 맞섰다. 쌍방은 시무투 노르(昔木土腦兒, 지금의 몽골 수흐바타르 남부)에서 만났고, 쿠빌라이의 대군이 아릭부케의 우익군을 대패시켰다. 뭉케의 아들 아수타이가 거느린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아릭부케가 군대를 돌려 다시 싸우니 두 군대가 밤늦도록 싸워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에 징을 울려 군대를 거두고 잠시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쌍방은 고비 사막 남쪽에서 대치했다.

이때 차가타이 칸국으로 돌아가 권력을 취했던 알루구는 아릭부케가 여러 차례 자신에게 징병하고 식량을 징발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그에게 다시 식량 제공을 거절했다. 식량이 갈수록 곤란해진 아릭부케는 어쩔 수 없이 직접 사람을 차가타이 칸국에 보내 가축, 마필과 무기를 징집하게 했다. 알루구가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해 군사를 이끌고 후지르(忽只兒 몽골 지명)로 가 사신을 죽이고 공개적으로 아릭부케와 결별했으며, 반대로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승인했다. 쿠빌라이는 나중에 알타이산부터 아무다리아강 사이의 땅을 알루구의 소유로 하는데 동의하자 알루구는 매우 기뻐했다.

아릭부케는 알루구가 자신을 배반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화가 나서 쿠빌라이 대군과 대치하는 형세도 돌아보지 않고 1262년 봄에 알루구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으며 아울러 카라코룸을 포기했다. 카라코룸의 수비군(守軍)이 쿠빌라이에게 투항하자 쿠빌라이는 안무 정책을 채택하고 아울러 그들의 올해 부세(賦稅)를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쿠빌라이는 본래 군사를 보내 아릭부케를 추격하고자 했으나, 강회대도독 이단(李璮)이 산동(山東)에서 반란을 일으켜 대부분의 몽골군을 죽이고 땅을 가지고 남송으로 귀속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군사를 거느리고 막남(漠南)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후 쿠빌라이는 이복형제 하비치(哈必赤), 승상 사천택(史天澤)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이단을 포위 공격했다. 이단은 제남성(濟南城)을 고수했으나 4개월 후 양식이 떨어진 제남성이 함락되었고, 이단은 처첩을 손수 찔러 죽인 후 배를 타고 대명호(大明湖)로 들어가 물에 투신해 자진하려 했다. 물이 얕아 성공하지 못하고 몽골군에게 포획된 후 피살되었다. 그리고 구원하러 온 송군(宋軍)은 비록 산동에 도착하긴 했으나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4개월 후, 군량이 떨어진 제남성이 함락되었다.(당시 상황을 묘사한) 일러스트. (공유 영역)

다시 아릭부케로 돌아가자. 처음에 알루구를 공격하던 아릭부케는 패전하고 대장 하랄부카가 전사했으나, 이어서 알루구가 적을 경시하는 것을 틈타 아릭부케가 알루구를 대패시키고 차가타이 칸국의 도성 알말리크(阿力麻裏)를 점거했다. 알루구는 일단 올단(兀丹, 지금의 신강 화전和田)으로 도망쳤다가 후일에 사마르칸트로 패주했다.

아릭부케는 비록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그가 멋대로 알루구의 부중(部眾)을 죽이고 몽골 동포를 해치고 능욕하는 잔인한 행동으로 그 수하 대신과 군사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들은 분분히 핑계를 찾아 그를 떠났는데 예컨대 주무쿠르, 뭉케의 아들 시리기(昔里吉) 등이 모두 그를 떠났다.

1264년 알말리크에 기근이 발생해 죽은 자가 셀 수 없었음에도 아릭부케는 도리어 일하지 않고 오히려 계속 방종하게 즐겼다. 하루는 그가 한창 술을 마실 때 큰 천막이 한바탕 광풍에 찢어지고 지주가 부러져 여러 사람이 부상을 입는 일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이로부터 군심(軍心)은 더욱 해이해졌고 더 많은 사람이 떠나갔다.

이때 아릭부케는 무리가 배반고 친족이 떠나 식량이 부족한 위기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알루구가 권토중래할까 근심해야 했다. 이에 그는 사람을 보내 알루구의 비(妃)를 알루구에게 송환하며 화해를 청했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된 아릭부케는 남은 병력을 데리고 쿠빌라이에게 투항했다. 장장 4년이 넘게 지속된 대칸 지위 다툼은 이로써 끝이 났다.

사서에 전하기를 아릭부케가 큰 장막에 들어가 쿠빌라이를 알현하기 전에 몽골 습속에 따라 사람이 천막 휘장으로 그 머리를 덮고 무릎 꿇고 절하며 죄를 청했다고 한다. 큰 장막에 들어간 후 쿠빌라이는 그를 보고 먼저 아무 말이 없다가, 아릭부케가 우는 것을 보고 자신도 울기 시작했다. 잠시 후 쿠빌라이가 “만약 상식적인 이치에 비추어 말한다면, 너와 나 형제 두 사람 중 도대체 누가 대칸 지위를 계승해야 마땅하겠느냐?”라고 물었다.

아릭부케가 대답하기를 “옛날에는 마땅히 나였지만, 지금은 형님입니다”라고 했다. 아릭부케의 뜻은 몽골에는 원래 막내아들이 가족의 재산을 계승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대칸의 자리 또한 당연히 그에 의해 계승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긴 것이므로 그가 대칸 지위를 다툰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사실 꼭 막내가 대칸 지위를 계승한다는 법은 없었고 실제로 그들의 아버지인 툴루이 역시 대칸 지위를 계승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이로 보나 재지(才智)로 보나 쿠빌라이가 대칸 지위를 계승하는 것이 더욱 명분에 합당했다.

아릭부케, 아수타이 등 제왕은 모두 칭기스칸의 후예로 황금씨족(黃金家族) 구성원에 속했기 때문에 쿠빌라이는 그들에게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석방했으며, 아울러 훌라구, 베르케 등 제왕들에게 고하여 그들의 동의를 얻었다. 다만 아릭부케 신변의 일부 모신들은 처형되었다. 1266년 우울증이 심해진 아릭부케는 세상을 떠났다.

참고자료:
《新元史》
《元史》
《忽必烈傳》
《忽必烈和他的世界帝國》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6/5/n13001599.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