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輕舟)
【정견망】
기린에 대해 말하자면, 대부분의 중국인 인상 속에는 용의 머리, 사슴의 몸, 소의 꼬리를 하고 온몸이 비늘 갑옷으로 뒤덮인 형상이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사령(四靈, 기린·봉황·거북·용) 중 하나다. 다만 거북(龜)이 비교적 흔하게 보이는 것 외에, 나머지 ‘세 신령(三靈)’은 매우 희귀하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금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흔히 앞에 접두사를 붙여 “전설 속의”, 혹은 “신화 속의”라고 말하곤 한다. 말의 속뜻은 뒤에 이야기할 내용이 단지 하나의 이야기나 우화일 뿐이라는 듯이, 의심하는 자들로부터 미리 ‘면책 성명’을 발표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것도 비난할 일은 아니다. 현실에서 기린을 본 사람은 정말로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보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펼쳐보면, 고인들이 기린에 대해 상당히 풍부한 기재를 남겨둔 것을 볼 수 있다.
《사기(史記)》에서는 “그 이듬해, 옹(雍) 땅에서 교사(郊祀)를 지낼 때 외뿔 짐승을 잡았는데 큰사슴(麃)과 같았다. 유사(有司, 담당 관리)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엄숙하고 경건하게 교사를 지내시니, 상제께서 제사를 받으시고 외뿔 짐승을 내리셨는데 아마도 기린인 듯합니다’라고 했다.”
한무제(漢武帝)는 외뿔 짐승을 얻고 기린이라 여겼으며, 《백린의 노래(白麟之歌)》라는 시를 짓기도 했고, 심지어 연호를 ‘원수(元狩)’로 고치기까지 했다. 한대(漢代) 미앙궁(未央宮) 안에는 기린각이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바로 공신들의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곳이었다. 고대에 ‘인각에 들어간다(入麟閣)’는 것은 신하로서의 최고 영예를 대표했다.
물론 기린과 관련된 연호는 한 곳만이 아니다. “겨울 10월 병신일에 강주(絳州)의 개산(介山)에서 기린이 나타났다. 병오일에 함원전(含元殿) 앞에서 기린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11월 계유일에 진눈깨비가 내렸다. 12월 경자일에 조서를 내려 이듬해 정월 초하루를 인덕(麟德) 원년으로 고치게 했다.”(《구당서》)
당고종(唐高宗) 때에도 기린이 발견되었고, 나중에는 기린의 발자취가 황궁 안에도 나타나자 당고종은 연호를 ‘인덕’으로 고치라고 명령했다. 혹자는 ‘궁전에 기린 발자국(麟趾)이 나타난 것 가지고 이토록 대대적으로 법석을 떨 일인가? 심지어 연호까지 고치다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 ‘기린 발자국’이라는 단어에는 주대(周代) 조상들이 기린에 대해 가졌던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시경(詩經)》 <인지지(麟之趾)>에선 이렇게 노래했다.
“기린의 발자국이여, 인후하신 공자(公子)들이로다.
아, 기린이여! 기린의 이마여, 인후하신 공성(公姓)들이로다.
아, 기린이여! 기린의 뿔이여, 인후하신 공족(公族)들이로다.”
간단히 이해하자면, 공자, 공성, 공족과 같은 귀족들이 인후하고 성실한 미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 마치 기린의 발자국, 기린의 이마, 기린의 뿔과 같다는 것이다. 만약 기린의 습성을 안다면 우리는 이러한 비유를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기린은 온순한 인수(仁獸)로서, 발굽으로 살아있는 생명을 밟지 않고, 머리의 뿔은 싸우는 데 쓰지 않으며, 무리 지어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매우 영성이 있어서 함정과 그물을 분별할 줄 알며 쉽게 붙잡히지 않는다. 주대(周代) 선민들이 기린의 신체 부위로 사람의 아름다운 품덕을 형용한 것에서도, 그들이 기린의 생활 습성과 법칙에 대해 상당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야(廣雅)》에서도 말하기를, “기린이란 어진 마음을 머금고 의로움을 품고 있어, 걸음걸이는 규(規, 원을 그리는 자)에 맞고 도는 것은 구(矩, 직각을 재는 자)에 맞으며, 노닐 때는 반드시 땅을 가리고 살핀 후에 처하며, 살아있는 벌레를 밟지 않고 살아있는 풀을 꺾지 않으며, 무리 지어 살지 않고 무리 지어 다니지 않으며, 함정에 빠지지 않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인수는 점차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이미 그것의 생김새를 잊어버렸고, 오직 대성인(大聖人) 공자(孔子)만이 그것을 알아보았다. 《좌전(左傳)》에 따르면, “14년 봄, 서쪽 대야(大野)에서 사냥을 하다가 숙손씨(叔孫氏)의 마부 서상(鉏商)이 기린을 잡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우인(虞人)에게 주었다. 중니(仲尼, 공자)가 이를 보고 ‘기린이다’라고 말한 후에야 그것을 거두었다.”라고 했다.
이것이 역사상 매우 유명한 ‘서수획린(西狩獲麟)’ 사건이다. 하지만 기린을 만난 공자도 그리 기뻐하지 못했던 것 같고, 오히려 그것이 올 때가 아닌 때에 왔다고 여겨 “나의 도가 다했구나!”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마침내 《춘추》의 수정 작업을 중단하고 ‘기린을 잡은 데서 절필(絕筆於獲麟)’했다.
고인(古人)은 기린이 도래할 때는 현덕(賢德)을 갖춘 군왕이 세상에 있을 때여야 한다고 여겼는데, 지금은 예악이 무너졌으니 기린이 왜 왔겠는가? 게다가 조심하지 못해 인간의 그물에 빠지기까지 했다. 공자의 일생은 마치 눈앞에서 애처롭게 우는 이 기린의 형국과도 같았으니, 난세에 인도(仁道)를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겪기 힘든 일이었겠는가? 과연 몇 년 지나지 않아 공자도 세상을 떠났다.
공자가 기린을 만난 이후로도 기린의 자취는 사서에 끊이지 않았으며, 이는 제왕이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에 부합하는 징조가 되었다. 기린의 자취가 발견되기만 하면 각급 관리들은 당연히 이 같은 중대사를 누락하거나 숨기지 않고 보고했다. 어쩌면 이것이 옛그림 속의 기린들이 왜 모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해 우스운 일도 생겼는데, 명조 영락대제(永樂大帝)는 해외에서 진상한 목이 긴 동물을 기린이라 믿고, 궁정 화가에게 그 모습을 그리도록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를 근거로 기린이 단지 사람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또 다른 극단에 빠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균랑우필(筠廊偶筆)》에 이러한 일이 기재되어 있다. 명조 정덕(正德) 시기에 하남(河南)에서 기린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죽은 후 그 유해를 업군(鄴郡)의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 한 군수가 몰래 기린 유해의 다리 한 마디를 잘라내어 집으로 가져가 사사로이 소장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니, 기린의 비늘은 네모나고 황색이었으며 마치 밀을 바른 것처럼 매끄럽고 윤기가 흘렀다. 자세히 보니 그 비늘 주변에는 오채(五彩)의 빛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마치 달무리처럼 매우 아름다웠다. 이토록 세부적인 기록은 과거의 전설 속에도 없던 것이다.
그것이 천자(天子)에게 도가 있음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기린송자(麒麟送子, 기린이 자식을 보내줌)’이든 간에, 그것의 형상과 그것이 대표하는 내함은 이미 중화문화의 다방면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기린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각자의 견해에 달린 일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1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