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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전】 7 즉위 초기 한인 제도를 모방해 원조(元朝) 수립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동생인 아릭부케가 신복(臣服)한 후, 쿠빌라이가 실제 관할하게 된 정치 판도는 이미 중원 지역(장성 이남, 진령·회하 이북), 동북 지역(흑룡강 유역 전체 포함), 한반도 북부, 막남·막북 몽골 초원 전 지역(지금의 내몽골과 외몽골 지역) 및 시베리아 남부 지역, 서역(西域) 대부분 지역(지금의 신강 동부와 남부), 토번(吐蕃, 지금의 청해, 티베트, 사천 서부 등 지역 포함) 그리고 운남(雲南) 지역 등을 포함했다. 이 광활한 지역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는 쿠빌라이가 직면한 또 하나의 큰 문제였다.

전편에서 이미 말했다시피, 소년 시절의 쿠빌라이는 예사롭지 않았고 마음속에 큰 뜻을 품고 있었다. 20대 때 쿠빌라이는 일찍이 해운 법사에게 “불법(佛法) 중에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법이 있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해운은 그에게 “대현(大賢)과 석유(碩儒 큰 선비)를 구해 고금의 치란흥망(治亂興亡)에 관한 일을 물으십시오”라고 권고했다.

이로부터 쿠빌라이는 유학자들을 초빙해 그들과 대담하고, 그들이 유가 경전을 강술하는 것을 들으면서 유가 문화가 박대정심(博大精深)하여, 사람이 되는 도리와 처세 방법, 각종 인간 관계를 처리하는 법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군주가 되는 도리와 치국(治國)의 법 등을 망라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즉위 조서에서 단초를 드러내다

유가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은 쿠빌라이는 1260년 대칸 지위에 오를 때부터 왕악(王鶚)이 기초한 즉위 조서(即位詔書)에서 문치(文治)에 힘쓰고 한법(漢法)을 모방하려는 뜻을 표명했다.

조서에서 쿠빌라이는 한인 지역 습관을 모방해 스스로를 “짐(朕)”이라 칭하고, 형인 뭉케 칸(蒙哥汗)을 “선황(先皇)”이라 했다. 조서에서는 먼저 “짐은 조종(祖宗)께서 구우(區宇, 천하)를 여시고 사방을 소유하시며 무공(武功)이 번갈아 일어났으나 문치가 많이 빠졌으니 지금 50여 년이 되었노라”라고 했다. 즉 조부인 칭기스칸 이래 무공은 탁월했으나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을 뿐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음을 지적한 것이며, 수십 년간 결여되었던 문치에 대해 자신이 이에 힘쓸 것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때에는 선후가 있고 일에는 완급이 있으니, 천하의 대업은 한 성인과 한 조정이 겸비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어서 쿠빌라이는 조서에서 군신들이 자신을 옹립해 즉위한 원인을 말하면서, 자신이 “비록 정벌하는 중에도 매번 인애(仁愛)의 마음을 두어 널리 베풀고 많은 이들을 구제해, 실로 천하의 주인이 될만하다. 하늘의 도는 순리를 따르는 자를 돕고, 사람의 도모는 능력 있는 자와 함께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조상의 방법을 따르되 현실에 맞게 변통한느 ‘조술변통’(祖述變通)이 바로 오늘에 있으니, 비록 태평성대를 신속히 이룩하기는 쉽지 않지만 굶주림과 목마름(饑渴)을 마땅히 먼저 힘쓸 바로 삼는다”라고 천명했다. 즉 개혁은 바로 오늘부터 시작해야 하며 중원 백성들의 실제 요구에 적응하고 새로운 형세에 맞는 제도를 건립해야 하는데, 당장의 가장 절박한 문제는 백성들이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임을 말했다.

조서의 마지막에서 쿠빌라이는 자신이 “공경히 하늘의 명(命)에 따르고 공신과 종친들에 의지하니, 어찌 감히 열조(列祖)의 규범을 잊겠는가?”라며, “원근의 종족과 중외(中外)의 문무(文武)가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치기”를 희망했다.

원세조(元世祖) 쿠빌라이는 경신년(1260년) 음력 4월에 한문으로 된 《황제등보위조(皇帝登寶位詔·황제가 보위에 오르는 조서)》를 반포했는데, 이 즉위 조서 중에서 쿠빌라이는 자신을 “짐(朕)”이라 자칭하고, 그의 형이자 대몽골국 제4대 대칸인 뭉케를 “선황(先皇)”이라 칭했다. 이 즉위 조서는 원 영종(元英宗) 시기 원나라 관청에서 편찬한 《대원성정국조전장(大元聖政國朝典章)》(간칭 《원전장(元典章)》)에서 발췌한 것으로,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원나라 간행본의 영인본(影印本·사진 복사본)이다. (공유 영역)

막 대칸의 지위를 계승한 쿠빌라이에게 있어 그의 치하에 있는 몽골 제국 강역(疆域)에 대해 이전과 다른 통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일종의 큰 변혁이었다. 아울러 쿠빌라이의 금련천(金蓮川) 모사이자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학경(郝經)은 문치에 힘쓰고 눈길을 한인의 통치 제도로 돌리려는 쿠빌라이의 생각과 일치했다.

학경은 한법(漢法)을 채용하는 것이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 여겼다. 그는 쿠빌라이가 대칸 지위에 오른 후 쿠빌라이에게 “남들이 하지 못하는 바를 하고, 남들이 세우지 못하는 바를 세우며, 남들이 바꾸지 못하는 바를 바꾸라”고 건의했다. 그는 “강기(綱紀)와 예의는 천하의 원기(元氣)이고, 문물과 전장(典章)은 천하의 명맥(命脈)입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임금 노릇을 해야 하는가? 그는 한대(漢代) 이래의 명군(名君)들이 모두 “천하에 세운 공이 매우 크고 백성에게 베푼 덕이 매우 두터웠다”고 열거하며, 천하 사람들이 “군신·부자·부부·형제가 있음을 알아 인륜이 큰 혼란에 이르지 않고 강기(綱紀)예의(禮義)와 전장문물(典章文物)이 크게 무너짐에 이르지 않은 것”이 바로 명군이 다스린 결과라고 했다.

쿠빌라이에게 당장 필요한 계책은 마땅히 “크게 떨치고 씻어내 천하와 더불어 새로 시작하고”, “하늘의 기강(황제의 통치권)을 떨쳐 드높이며, 하늘의 뜻에 부응해 혁명하는” 것이다. 학경은 또한 북위의 효문제(孝文帝)와 금 세종(金世宗)을 예로 들어, 그들이 중원 통치를 확립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한법으로 정치를 행한 것이며 그 결과는 “천하가 편안하고 법제가 되며 풍속이 온전하고 두터워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학경이 언급한 한법이 가리키는 것은 “당(唐)·송(宋)의 옛 전례를 원용하고 요(遼)·금(金)이 남긴 제도를 참고해 관직을 설치하고 직분을 나누며 정치를 세워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왕법(王法)을 이루는 것”으로, 몽골 전통의 “성법(成法)”도 유익한 부분은 마땅히 보존해야 한다고 했다.

이외에 석자총(釋子聰, 유병충) 역시 쿠빌라이의 요구에 따라 중원 각대 왕조의 고제(古制)를 참고하고 이를 선별해, 몽골에 적합한 법을 조목별로 나열해 쿠빌라기가 참고할 수 있게 했다. 이때까지도 석자총은 여전히 승려의 복색을 하고 있어 시의에 맞지 않았으므로, 쿠빌라이가 이에 그의 지위를 광록대부(光祿大夫), 태보(太保)에 이르게 했으며, 큰 저택과 두터운 작위를 내리고 한림시독학사 두묵(竇默)의 딸에게 장가보내고 “유병충(劉秉忠)”이라는 이름을 새로 하사했다.

석자총은 “이미 하늘이 만물을 내셨으니 스스로 분수에 따라 안배가 있다”고 생각하여 담담히 왕명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인재를 선발하고 북경(北京)에 도읍을 정하며 국호를 정하고 예의전장을 제정하는 등 많은 큰 일에 모두 직접 참여했다. 그는 천하를 자기의 임무로 삼아 일이 작은 것도 불문하고 국가의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일이면 자신이 아는 바를 말하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에 어떤 이들은 그를 일컬어 “땅을 바꾼 제갈량(易地諸葛)이요, 하늘에 가득 찬 도안(彌天道安)”이라고 했다.

[역주; 도안 스님은 동진의 전설적인 고승인데 한번은 자신의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습착치(習鑿齒)와 만날 때 습착치가 그의 실력을 떠보기 위해 “사해습착치(四海習鑿齒-사해에 유명한 습착치)”라고 소개하자 “미천석도안(彌天釋道安 하늘을 가득 채우는 석도안)”이라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중원 왕조를 모방해 연호와 국호를 정하고 원조를 건립

쿠빌라이가 한법(漢法)을 추진하는데 중요한 첫걸음은 연호(年號) 채택이었다. 원래 몽골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칭기스칸 때에는 십이지신 즉 띠로 연도를 표시했다. 예를 들면, 쥐의 해, 양의 해 등이다. 1260년 쿠빌라이가 대칸에 오른 후 중원 왕조의 일반적인 연호 기년법(紀年法)을 배워 5월에 《중통건원조(中統建元詔)》를 발표하고 정식으로 “중통(中統)”이란 연호을 만들었다.

이 조서에서는 명확히 “열성(列聖)의 큰 규범를 상고하고 전대(前代 한족 왕조)의 제도를 논한다”라고 말하여, 즉위조서에서 언급한 “조술변통(祖述變通)”과 맥을 같이했다. 조서에서는 또 “연호를 세워 해를 표시하는 것은 만세(萬世)에 걸친 왕위 계승을 보여주는 것이요, 시간을 기록하되 왕(王)을 적는 것은 천하가 한 집안이란 대의(大義)를 나타내는 것이니, 《춘추》에서 시작을 바르게 한 법도를 본받고, 《주역》의 건원(乾元 우주의 근본 시초)을 체득하고자 함.”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1260년은 “중통 원년”이라 칭해졌다.

같은 해 12월, 쿠빌라이는 다시 조서를 내려 “과거의 낡은 것을 고쳐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천하 만방의 모든 백성을 하나로 묶는 데 힘쓰겠노라.”라고 선포하여, 그의 한화(漢化) 개혁 추진 결심을 다시금 표명했다.

1264년 8월, 쿠빌라이는 《지원개원조(至元改元詔)》를 발표하여 《역경·곤괘(坤卦)》의 “지극하구나! 곤원(坤元)이여, 만물이 말미암아 생겨나나니 이에 순응하여 하늘을 받드는 구나(至哉坤元, 萬物資生, 乃順承天)”라는 뜻을 취해 “중통 5년”을 “지원(至元) 원년”으로 고쳐 연호를 고치면서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1271년(지원 8년), 쿠빌라이는 유병충의 건의를 받아들여 《역경》의 “크도다 건원이여(大哉乾元)”라는 뜻을 취해 국호를 “대몽골국(大蒙古國)”에서 “대원(大元)”으로 고쳤다. “대원”은 큰 근원인 “하늘(天)”을 암암리에 포함하니 국가가 극히 광대함을 표시하는 동시에 자신이 천명을 받았음을 표명한 것이다. “대원”이란 국호가 정식으로 출현함에 따라 쿠빌라이도 대몽골국의 카안(合罕, 대칸)에서 대원 왕조의 최초 황제가 되었으니, 쿠빌라이가 곧 원 세조(元世祖)가 된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초상화(공유 영역)

쿠빌라이는 《건국호조(建國號詔·국호를 세우는 조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의 큰 명(景命)을 엄숙히 받아들여 사해(四海)를 통치하며 존귀한 자리에 올랐으니, 반드시 아름다운 이름이 있어 백대(百代)의 제왕들을 계승하고 그 정통을 기록해야 한다. 먼 상고 시대로부터 새로이 시작하는 것은 비단 우리 집안뿐만이 아니다. 또한 ‘당(唐)’이란 말은 광대하다는 뜻이니 요(堯)임금이 이로써 일컬어졌고, ‘우(虞)’라는 말은 즐겁다는 뜻이니 순(舜)임금이 이로써 호(號)를 삼았다. 이어 우(禹)임금이 흥하고 탕(湯)임금이 (상나라를) 세움에 이르러, 이름짓기를 ‘하(夏)’는 대(大)로 하고, ‘은(殷)’은 중(中)으로 불렀다. 세대가 아래로 내려오면서부터는 일이 옛날과 판이해졌다. 비록 때를 타고 나라를 소유했을지라도, 이익으로써 이름을 짓지 않았다. ‘진(秦)’이 되고 ‘한(漢)’이 된 것은 처음에 일어난 곳의 지명을 따른 것이요, ‘수(隋)’라 하고 ‘당(唐)’이라 한 것은 즉위하기 전에 봉해졌던 작위와 읍(邑)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는 모두 백성들이 보고 듣던 익숙한 습관을 따른 것이자, 한때의 다스림을 위한 임시방편이었으니, 지극히 공(公)적인 이치로 헤아려 본다면 약간 폄하(少貶)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쿠빌라이가 자신을 중국 역대 왕조의 정통 계승자로 여겼음을 나타내며, ‘몽골’이라는 호칭은 ‘한때의 다스림을 위한 임시방편’일 뿐 완벽하지 않으며, ‘대원(大元)’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온 세상을 통치하며 존귀한 자리에 오르고’, ‘백대의 제왕들을 계승하여 정통을 기록하는 것’이라 여겼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쿠빌라이가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했다.

쿠빌라이가 원조(元朝)를 개창한 것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일찍이 예언이 있었다. 북송 시기 소옹(邵雍 소강절)의 《매화시》 제3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지가 서로 곱한 수의 근원은 하나이니,
문득 갑자년을 만나 또 원나라가 흥하도다.
세월이 이팔(二八)이 되니 건곤이 바뀌는데,
지는 꽃을 모두 보아도 끝내 말하지 않네”

天地相乘數一原
忽逢甲子又興元
年華二八乾坤改
看盡殘花總不言

여기서 “천지가 서로 곱한 수의 근원은 하나”라는 것은 천간과 지지가 서로 곱해지는 연대가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즉 새로운 왕조의 기수(氣數·운수)가 시작되는 때를 뜻하며, 원조의 국호는 《역경(易經)》의 ‘크도다 건원이여(大哉乾元)’에서 취한 것이니, 그 자체에 포함된 비유적 의미가 바로 ‘만물이 이에 바탕하여 시작하나니 곧 하늘을 통솔(萬物資始乃統天)’하는 기상임을 뜻한다.

“문득 갑자년을 만나 또 원이 흥하도다(忽逢甲子又興元)”에서 ‘문득 홀(忽)’이란 글자는 원 세조 쿠빌라이(忽必烈)를 은유하고, ‘흥원(興元)’은 원조가 흥기함을 가리킨다.

중원 왕조를 모방하여 연호와 국호를 확립하기 전후로, 쿠빌라이는 도읍을 카라코룸[和林]에서 한인 지역[漢地]으로 옮기기도 했다. 1263년 5월, 쿠빌라이는 개평(開平)을 상도(上都)로 격상시켜 여름에 머무는 처소로 삼았다. 이듬해, 쿠빌라이는 조서를 내려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의 이름을 중도(中都)로 고치고 도읍을 세울 준비를 했다. 1272년 2월, 쿠빌라이는 또 유병충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도를 대도(大都)로 고치고 이곳에 도읍을 세운다고 선포했다.

중원 왕조를 모방한 행정 기구의 확립

중원 왕조를 모방하여 연호와 국호를 세운 것 외에도, 쿠빌라이는 몽골 고유의 통치 기구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중원 왕조를 참조하여 새로운 행정 기구를 확립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이전의 몽골 제국은 칭기즈칸부터 뭉케에 이르기까지 국가 최고 행정 기구의 장관을 ‘대단사관(大斷事官· 자루구치)’이라 불렀는데, 이는 중원 왕조의 재상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대칸의 친위대인 케식 조직에는 비치치[必闍赤]를 두어 대칸의 조령과 기타 궁정 문서 사무를 관장하게 했는데, 그 중요성은 몽골의 강역이 확장됨에 따라 갈수록 중요해졌으며, 점차 정사에 참여하여 보좌하는 신하[輔相之臣]라 불렸다.

우구데이 시기, 한화(漢化)된 대신 야율초재(耶律楚材)의 건의에 따라, 우구데이는 중원의 관제를 모방해 비치치를 ‘중서성(中書省)’이라 개칭하고, 비치치였던 야율초재, 염합중산(粘合重山), 진해(鎮海) 세 사람을 각각 중서령(中書令)과 중서 좌승상 및 우승상에 임명했으나, 이는 몽골 중앙 기구의 상설 제도는 아니었다.

쿠빌라이는 즉위 초기에 행정 기구가 혼란한 국면에 직면하여, 유병충, 허형 등에게 “고금의 마땅함을 참작하여 안팎의 관직을 정하게” 했다. 그들은 당송(唐宋)의 기구 및 제도를 저울질하고 중원 왕조를 모방했던 금나라의 제도를 참조한 후, 쿠빌라이에게 간단하고 실용적인 금나라의 제도를 채택할 것을 건의했다. 즉, 중앙에 행정을 관장하는 중서성(中書省), 군사를 관장하는 추밀원(樞密院), 감찰을 관장하는 어사대(御史台)를 두어 중앙정부의 주요 행정 기구로 삼자는 것이었다. 쿠빌라이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유병충, 허형 등은 당송의 기구와 제도를 저울질하고 중원 왕조를 모방했던 금나라의 제도를 참조한 후, 쿠빌라이에게 간단하고 실용적인 금나라의 제도를 채택할 것을 건의했다. 그림은 청 진사관(陳士倌)의 《성제명왕선단록(聖帝明王善端錄)·원세조》/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1260년 4월, 중서성이 정식으로 건립되었으며, 그 최고 장관은 중서령으로 황태자가 겸임하되 태자를 세우지 않을 때는 공석으로 두게 했다. 진금(真金)은 태자로 책봉되기 전에 이미 중서성 사무를 맡았다. 중서령 예하 관원은 초기에는 정해진 수가 없었으나, 나중에는 우승상과 좌승상 각 1명을 두어 백관을 통솔하게 했고, 평장정사(平章政事) 4명을 두어 승상의 조수로 삼았으며, 우승(右丞)과 좌승(左丞) 각 1명을 두었다. 참지정사(參知政事) 3명을 집정관(執政官)으로 삼았다. 중원 왕조가 좌측을 존귀하게 여긴 것과 달리, 몽골인은 우측을 존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우승상의 지위가 좌승상보다 높았다. 재집(宰執·재상) 아래에는 참의중서성사(參議中書省事), 낭중(郎中), 원외랑(員外郞), 도사(都事) 등 기타 보조 관원을 두었다.

쿠빌라이는 자신을 보좌하는 재상단의 균형을 맞추는 데 몹시 주의했고, 다양한 민족을 포함시켰다. 예컨대 1261년의 중서성 재상단에는 몽골인 3명, 한인(漢人) 6명, 한화된 거란인 1명, 한화된 위구르인 1명, 무슬림 1명이었다. 중서성 아래에는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의 6부를 두었으며, 각 부의 최고 장관은 모두 상서(尚書)라 칭하고 구체적인 사무를 책임졌다.

추밀원은 1263년에 정식으로 설치되어 중앙 최고 군사 기관으로서 천하의 군사 대권을 관장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 최고 장관은 추밀사(樞密使)로 황태자가 겸임하되, 태자를 세우지 않았을 때는 공석으로 두었다. 상무 관원으로는 추밀부사(樞密副使),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등이 있었다.

감찰을 관장하는 어사대(御史臺)는 1268년에 정식으로 설치되어 중앙 최고 감찰 기관이 되었으며, 장관으로는 어사대부, 어사중승(御史中丞), 시어사(侍御史), 치서시어사(致書侍御史) 등이 있었다.

중서성, 추밀원, 어사대는 모두 직접 일을 황제에게 상주하고 속관(屬官)을 자체적으로 선발하며 각각 황제에게 책임을 졌으나, 서로 문서를 보내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래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즉, 중서성이 추밀원과 어사대에 발송하는 문서는 상급 기관이 하급 기관에 내리는 행문인 ‘찰(劄 지시한다는 의미)’을 사용한 반면, 추밀원과 어사대가 중서성에 발송하는 행문은 하급 기관이 상급 기관에 올리는 ‘정현(呈現 바친다는 의미)’을 사용했으니, 이는 백관을 통솔하는 중서성의 직권을 드러낸 것으로 추밀원과 어사대 역시 지시를 받아야 함을 보여준다.

상술한 3대 기구 외에도, 쿠빌라이는 중앙에 선정원[宣政院·초기 이름은 총제원(總制院)], 대종정부(大宗正府), 선휘원(宣徽院)을 설치했다.

선정원은 전국의 종교와 티베트 사무를 관장하며 국사(國師) 파스파[八思巴]로 하여금 이를 이끌게 했는데, 이는 이전 중원 왕조에는 없었던 것이다.

대종정부는 몽골 제왕 등 몽골인과 색목인(色目人)의 범죄 사건 및 한인·남인(南人)과의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을 심리하는 것을 책임졌으며, 이전 몽골 제국의 최고 형사 장관이었던 자루구치[札魯乎赤]가 그 사법 장관이 되었다.

선휘원은 전대(前代)의 선휘원이 관장하던 조회, 연회, 제사, 예의, 어선(임금의 수라) 등의 사무를 관장했을 뿐만 아니라, 막북(몽골 고원) 몽골인들의 부세 징수, 제왕 및 숙위(친위대)의 명부 관리 및 인원 추천, 몽골 부족의 진휼 등도 관장했다.

또한 국사를 편찬하고 제고(制誥·조서와 칙령) 문서 등을 기초하는 것을 책임지는 한림국사원(翰林國史院)을 설치했고, 전국의 역참을 관장하는 통정원(通政院), 전국의 농업·양잠·수리를 관장하는 대사농사(大司農司) 등을 두었다. 쿠빌라이는 국사원에 명령하여 금나라, 요나라, 송나라의 통사(通史)를 편찬하게 하여 총 80년이 소요되었는데, 이전에 오직 중원 왕조에만 역사를 편찬하는 관례가 있었다.

직책이 명확한 중앙 기구들이 하나둘 설립됨에 따라, 왕왕 몽골 제국의 중앙 기구가 부실하고 법도가 부족했던 국면이 크게 개선되었고, 업무 효율이 신속하게 향상되어 황제의 조령이 매우 빠르게 집행될 수 있었다.

《노구교 목재 운반도[盧溝筏運圖]》, 1266년 원 세조가 노구교 부근에서 하천으로 석재와 목재를 운반해 대도(大都)의 궁전을 건설하던 정경을 묘사했다. (공유 영역)

중앙 기구를 개혁하는 동시에, 쿠빌라이는 지방 행정 기구에 대해서도 개혁을 진행하여, 이전 대칸들의 분봉제와는 다른, 행정 구역을 나누는 행성(行省·행중서성) 제도를 확립했다. 쿠빌라이가 막 대칸의 자리에 올랐을 때, 지방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에 십로선무사(十路宣撫司)를 최고 행정 기구로 설치하는 한편, 금나라 말기의 행성 제도를 모방하여 흔히 중서성의 재상들에게 ‘행모처중서성(行某處中書省· 모처에서 중서성 사무를 행한다는 뜻)’이라는 직함을 얹어주어, 외지에 나가 중서성의 직권을 행사하며 지방의 정치·경제·군사 등 사무를 주재하게 했으나, 고정된 치소(治所)와 관할 구역은 없었다.

천하가 통일됨에 따라 이러한 행성이 갈수록 많아지자, 쿠빌라이는 이를 지방 최고 행정 기구로 고정시켜 전국에 보급하기로 결정했고, 이로써 행성 제도를 정식으로 확립했다. 쿠빌라이는 전국에 총 10개의 행성을 두었다. 섬서(陝西)행성, 감숙(甘肅)행성, 요양(遼陽)행성, 하남강북(河南江北)행성, 사천(四川)행성, 운남(雲南)행성, 호광(湖廣)행성, 강절(江浙)행성, 강서(江西)행성, 정동행성(征東行省)이 그것인데, 그중 정동행성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성격이 다른 행성과 달랐으며, 고려에 설치되어 행성 승상을 고려 국왕이 겸임했다.

행성의 장관은 권력이 매우 커서 지방의 행정, 군사, 경제 등 각 방면의 사무를 관장했으며, 중앙과 중서성에 직접 책임을 졌다.

10개 행성 외에도, 쿠빌라이는 막북에 화림전운사(和林轉運司)를 설치했다가 나중에 화림선위사도원수부(和林宣慰司都元帥府)로 고쳐 현지 사무를 관리하게 했으며, 원 무종(元武宗) 시기에 이를 기반으로 영북행성(嶺北行省)을 설치했다. 위구르 지역에는 베슈발리크 등에 선위사도원수부(宣慰司都元帥府)를 설치했고, 토번 지역은 중앙의 선정원에서 직접 관할했다.

쿠빌라이가 확립한 행성 제도는 진한(秦漢) 이래의 지방 군현 제도를 발전시킨 것이며 후세로 이어졌으니, 명청(明淸) 시대에는 이름만 달라졌을 뿐, 지방 최고 일급 행정 기관의 명칭으로서 ‘성(省)’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다.

행성 아래로 쿠빌라이는 여전히 한제(漢制)와 금제(金制)를 모방하여 로(路·직할부, 직할주), 주(州·부), 현(縣)을 두었다. 현 아래에는 향(鄉), 도(都) 등 기층 조직을 두어 통칭 ‘리(里)’라 했고, 책임자는 ‘리정(里正)’이라 불러 세금과 군량의 징수를 독촉하고 지방 치안을 유지하는 등의 일을 책임지게 했다.

쿠빌라이가 한법(漢法)을 채택하여 설치한 중앙과 지방의 행정 기구는 분공이 명확하고 직책이 고유했기에, 제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게 했다.

황위 계승자의 확립

몽골 제국 시기, 대칸 지위의 계승은 쿠릴타이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효력이 발생했다. 쿠릴타이는 몽골 및 투르크 족의 부족과 각 부족 연맹의 의사 기구로, 수령을 추대하고, 정벌을 결정하며, 법령을 반포하는 등의 대사를 토론하는 데 사용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몽골의 ‘국회’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사실 많은 허점이 있어 제국 내부의 분쟁을 일으키기 쉬웠고, 집안싸움을 부르거나 심지어 유혈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 나타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후 학경(郝經)이 “후계자(儲貳)를 세워 난이 발생하는 원인을 막으라”는 건의를 올렸으나, 쿠빌라이는 당시 아직 후계자 건립을 의사 일정에 올리지 않았다. 다만 1262년 12월에 적자인 진금(真金)을 연왕(燕王)으로 봉하여 중서성 일을 주관하게 했을 뿐이다.

1267년, 요추(姚樞)가 제출한 8조의 치국 건의 중에서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 제2조에 배치되었다. 이듬해 진우(陳祐)가 다시 《삼본소(三本疏)》를 올려, “태자는 국가의 근본이니 마땅히 조속히 세워야 합니다(太子國本,建立宜早)”, “중서성은 정치의 근본이니 책임을 지우기를 마땅히 전일하게 해야 합니다(中書政本,責成宜專)”, “인재는 다스림의 근본이니 선거(인재 선발)를 마땅히 신중히 해야 합니다(人材治本,選舉宜審)”라는 세 가지 건의를 올리니, 태자를 세우는 일이 맨 첫자리에 놓였다. 대신들은 태자를 일찍 세워 인심을 일찍 안정시키는 것이 사직에 유리하다고 여겼다.

1273년 2월, 쿠빌라이는 중원 왕조가 후계자를 미리 세우던 도리를 모방하여, 적자(嫡子) 진금을 정식으로 황태자로 책봉했다.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후에 추진한 한제(漢制)는, 그가 남송을 정복하고 천하를 하나로 통일한 후, 더욱 광범위한 영역에서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참고자료:
《元史》
《新元史》
《忽必烈傳》
《忽必烈和他的世界帝國》
《成吉思汗忽必烈評傳》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6/7/n1300541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