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칭기스칸, 오구데이 시기에 몽골인들은 몇 차례의 정벌을 거쳐 날로 쇠락해가던 서하(西夏)와 금(金)나라를 몽골 제국의 판도에 편입시켰는데, 이는 몽골 제국의 국경이 남송(南宋)과 맞닿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남송은 곧 몽골인이 다음 정복 목표가 되었으나, 이는 또한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목표이기도 했다.
칭기스칸은 붕어(駕崩)하기 전 후손들에게 남송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후, 몽골은 남송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양측은 전쟁 전에 금나라 영토의 소유권 귀속에 대해 협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몽골 군대가 철수한 후 송군이 진격하여 개봉(開封), 낙양(洛陽) 등의 지역을 점령했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단평입락(端平入洛 단평 시기에 낙양 입성)’이라 부른다. 송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금국에게 점령당했던 잃어버린 땅을 수복한 것이라 여겼고, 몽골 측은 송나라가 동맹 조약을 배신한 것이라 여겨, 오구데이가 마침내 이를 구실로 삼아 남송을 공격했다.
오구데이로부터 뭉케(蒙哥)를 거쳐 쿠빌라이에 이르기까지 세 명의 대칸(大汗)이 모두 남송에 대한 전쟁을 발동했으며, 그 기간에는 때로는 전쟁을 하고 때로는 화친을 맺었다.
제1차는 1235년부터 1241년, 제2차는 1253년부터 1259년을 거쳐, 제3차는 1268년부터 1279년에 이르기까지 총 22년(휴전 기간은 계산하지 않음)이 걸려서야 남송은 비로소 철저히 정복되었다. 몽골인이 정복한 국가들 중 남송은 정복에 가장 오랜 시간이 소요된 곳이다.
그렇다면 왜 쿠빌라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남송을 정복할 수 있었는가? 한 가지 원인은 그 당시의 남송은 기운이 이미 다했고, 조정이 위아래가 부패하여 하늘이 더 이상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원인은 쿠빌라이가 채택한 책략이 적절하여 민심이 향했기 때문이다.
남송의 기운이 이미 다하다(南宋氣數已盡)
남송의 멸망에 관해, 북송의 예언서 《매화시(梅花詩)》 제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호산에서의 한 바탕 꿈에 모든 일이 그릇되니,
구름 속의 용이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다시 보네.
삼백 년 만에 마침내 하루아침에 이르니,
먼 하늘과 푸른 물에 탄식이 깊고도 깊구나.”
湖山一夢事全非
再見雲龍向北飛
三百年來終一日
長天碧水歎彌彌
“호산에서의 한 바탕 꿈에 모든 일이 그릇되니”라고 한 것은 남송의 황제가 강남(江南)의 반쪽 강토에 편안히 안주하며 그 도성인 임안(臨安, 지금의 항주)이 서호(西湖) 가에 위치하여 산에 의지하고 호수를 끼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 시기의 남송 황제가 향락에 탐닉하고 술 취한 꿈속에 침잠해 있었음을 암시한다.
“구름 속의 용이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다시 보네”는 천상(天象)의 기수(氣數)가 북방에 떨어져 북쪽에서 진룡천자(真龍天子)가 탄생하고 새로운 왕조가 북방에서 탄생함을 가리킨다.
“삼백 년 만에 마침내 하루아침에 이르니”는 송조(宋朝)가 300여 년(960년부터 1279년까지)을 경과한 후 마침내 멸망하는 날에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먼 하늘과 푸른 물에 탄식이 깊고도 깊구나”는 곧 송조가 최종적으로 멸망할 때 연출된 가장 비장한 한 장면을 가리킨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온 역사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한 왕조가 멸망을 향해 갈 때 종종 상당히 많은 천재(天災)가 출현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니, 이는 집권자가 덕정(德政)을 닦지 않은 것과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하늘의 경고이다. 남송 왕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남송은 고종(高宗)으로부터 시작하여 멸망할 때까지 재앙이 발생한 빈도가 해마다 증가했다. 예컨대 전염병은 송 고종 때 평균 약 6년에 한 번 출현했으나, 효종(孝宗) 때에는 2년마다 한 번, 광종(光宗) 때에는 매 2.5년에 한 번, 영종(寧宗) 때에는 매 2.4년에 한 번, 도종(度宗)과 공제(恭帝) 때에는 매년 한 번씩 일어났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남송의 전염병은 임안을 중심으로 한 양절(兩浙) 지역에서 비교적 많이 발생했는데, 해당 지역은 바로 황제 및 그 중신들이 거주하는 소재지였다. 하늘이 이처럼 많은 재앙을 내린 것은 틀림없이 그들이 덕을 잃은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남송의 역병은 임안(臨安)을 중심으로 한 양절(兩浙) 지역에서 비교적 많이 발생했는데, 이 지역이 바로 황제와 그 중신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사진은 송조 사람이 그린 《서호도(西湖圖)》의 일부. (공유 영역)
그리고 역사는 과연 예언의 마련에 따라 연출되어 갔다. 쿠빌라이가 북방에서 굴기할 때 남송은 날로 쇠약해졌고, 영종, 이종(理宗) 시기의 권신(權臣) 사미원(史彌遠)은 제멋대로 조정을 독단하여 두 조정에서 도합 26년 동안 권력을 독점했으니, 이로 인해 조정이 부패하기 짝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 왕조가 만약 도덕이 미끄러져 내려가고 탐욕과 부패가 심각해지면 멸망에서 이미 멀지 않은 것이며, 이것이 또한 천재가 빈번했던 주요 원인이다.
사미원이 죽은 후 송 이종(理宗)이 친정하면서 외척 가사도(賈似道)를 중용하여 대권을 독점하게 하니, 조씨(趙氏) 정권은 더욱 쇠락했다. 가사도는 누나가 귀비(貴妃)였기 때문에 누나에 의지해 양회선무사(兩淮宣撫使)가 되었고, 남송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위를 가진 군사 사령관이 되었다.
뭉케가 남송을 남정(南征)할 때, 가사도는 일찍이 악주(鄂州)를 포위 공격하던 쿠빌라이와 사사로이 화약을 맺고 몽골에 신하를 칭하고 세폐를 납부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 후 그는 또한 악주에서의 전공을 거짓으로 보고했으며, 이로 인해 조정 권력을 독점했다. 몽골 원나라와 송나라의 전쟁 중에서 그의 부작위(不作爲, 아무것도 하지 않음)는 남송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가사도가 쿠빌라이 사절단을 억류
1260년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초기에는 남송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그는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학경(郝經)을 대사(大使)로, 한림대제(翰林待制) 하원(何源)과 예부낭중(禮部郎中) 유인걸(劉人傑)을 부사(副使)로 삼은 사절단을 파견하여 남송에 출사시켰고, 쿠빌라이가 대칸의 지위를 계승했다는 소식을 남송 조정에 통지함과 동시에, 아울러 그들이 악주 성 아래에서 가사도와 체결한 화약을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화약을 체결한 것을 은폐하고 ‘악주대첩’으로 황제를 기만했던 가사도는 진상이 폭로될까 두려워하여, 곧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학경 일행을 진주(真州, 지금의 강소 의정儀征)의 군영 속에 몰래 억류했다. 학경은 왜 억류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여 송나라 황제가 화호(和好, 화목하게 지냄)하기를 원치 않는 줄로 생각했고, 마침내 여러 차례 상서를 올려 송 황제가 “신의를 중시하고 화목을 닦아, 백성들을 구제할 대책을 세우기를(講信修睦,計要元元)” 희망했다. 회답을 얻지 못한 후 학경은 또 상서를 올려 송 황제 면담을 희망했다. 그러나 예외 없이 모든 상서는 가사도에 의해 가로막혔다. 가사도는 학경의 재능이 넘쳐흐르는 것을 보고 그에게 투항할 것을 권했으나 엄한 말로 거절당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자 가사도는 계속해서 그를 비밀리에 감금하고 어떤 소식도 누설되지 못하게 했다.
사절단의 실종 및 남송이 화약을 이행하지 않는 일은 쿠빌라이 역시 매우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기에, 그는 여러 차례 남송에 사람을 보내 사절단의 행방을 문의했으나 가사도는 모두 얼렁뚱땅 넘겨버렸다. 쿠빌라이는 크게 분노하여 1261년 7월에 조서를 내려 남송이 사절단을 구류한 거동을 통렬히 비난했고, 아울러 가을이 되어 말이 살찔 때를 틈타 수로와 육로 두 길로 남송을 진공할 예정이었다. 그 후 국내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고 아릭부케가 아직 신복(臣服)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쿠빌라이는 잠시 인내하는 것을 선택했고 주요 에너지를 내란을 평정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며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이때의 남송 조정 안에서는 가사도가 권력을 독점하여, 그는 온종일 먹고 마시고 놀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비록 앞에 몽골이라는 강적이 마주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가사도는 군대 내에서 청소를 전개했으니, 즉 군비 지출을 조사해 확인한다는 핑계로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장수들이 몽골 군대에 대항해 싸울 때 지출한 관물(官物)들을 모두 ‘장물’이라 말하며, 아울러 ‘관청의 돈을 훔쳤다’ 죄명을 무고하게 관직을 박탈하고 유배 보내거나 감옥에 가두어 박해해 죽게 했다.
이 외에도 그가 추진한 ‘공전법(公田法)’은 실상 낮은 가격으로 민간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은 것이어서 무수한 가정이 처자식이 헤어지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가 징수한 세금과 부역 또한 종류가 번다했다.
1264년 63세의 이종이 붕어하고 그의 조카가 즉위하니 이가 도종(度宗)이다. 도종은 가사도를 무한히 신뢰해 그를 태사(太師), 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로 승진시켰다. 또한 가사도가 황제를 세우는데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조배(朝拜)를 할 때마다 반드시 답례를 했고, 그를 ‘사신(師臣 스승과 같은 신하)’이라 불렀으며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다. 자신이 조정에서 가진 지위를 시험해 보기 위해 가사도는 자신이 나이가 많다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으나, 도종은 도리어 지시를 내려 그에게 6일에 한 번 조회에 참석하도록 허락했고 역시 백관들처럼 행례(行禮)할 필요가 없게 했으며 나중에는 심지어 10일에 한 번 조회에 참석하게 했다.
비록 매일 조회에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조정의 모든 대사는 가사도가 사사로운 뜻에 따라 결단했기에 관원들은 그의 부(府)로 찾아가 지시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첨하고 빌붙기를 잘하며 비위를 잘 맞추는 자는 승진할 수 있었고, 정직하고 공의로운 문천상(文天祥) 같은 이들은 타격과 배척을 받았다.
일찍이 어떤 이는 남송 후기의 4대 폐단을 총결(總結)했으니, 즉 민궁(民窮, 백성이 궁핍함), 병약(兵弱, 군대가 약함), 재궤(財匱, 재정이 고갈됨), 사대부무치(士大夫無恥, 사대부가 부끄러움을 모름)였다. 가사도는 이미 부패한 송나라를 더욱더 부패하게 만들었다. 남송에 이러한 권신이 있었으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의도. 그림은 남송 마원(馬遠)의 《수도(水圖)》 중 ‘황하역류(黃河逆流)’. (공유 영역)
양번(襄樊) 전투
남송이 갈수록 쇠락하는 지경에 처했을 때, 몽골 제국은 쿠빌라이의 다스림 하에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국내의 반란을 평정하고 경제가 발전을 얻었으며 사회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황 속에서 쿠빌라이는 시선을 다시 남송으로 돌렸고, 특히 학경이 이끈 몽골 사절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줄곧 그의 마음속에 매듭으로 남았다. 직접적으로 쿠빌라이의 행동을 추동한 것은 남송의 투항 장수 유정(劉整)이었다.
유정은 원래 북방 사람으로 침착하고 굳세며 지모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을 잘했다. 금나라 말기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그는 송조로 투항하여 형호제치사(荊湖制置使) 맹공(孟珙)의 휘하에 예속되었다. 적지 않은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선후로 동천부로안무사(潼川府路安撫使), 지노주군주사(知瀘州軍州事)를 지냈으니, 송과 몽골의 초기 전역(戰事) 속에서 그는 몽골인들을 골치아프게 했던 장령(將領)의 하나였다. 나중에 부하들에게 무고를 당할까 걱정되었고 또한 가사도가 무고한 장령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안위를 염려한 유정은 마침내 1261년에 소속된 노주(瀘州) 15군(郡)과 호구 30만을 이끌고 쿠빌라이에게 귀순했다.
이는 쿠빌라이를 크게 기뻐하게 만들었으니, 왜냐하면 노주는 사천(四川)으로 들어가는 천연의 요새였고, 게다가 유정의 귀순은 쿠빌라이로 하여금 남송의 내부 모순과 군사적 허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마침내 그를 기부행성(夔府行省 기주부 행중서성이란 의미) 겸 안무사로 임명하고 금호부(金虎符)를 하사했으며, 또 그에게 금은부(金銀符)를 주어 유정으로 하여금 공로가 있는 장령들에게 주도록 했다. 유정은 이때부터 전력으로 쿠빌라이에게 충성을 다했다.
이후 남송의 장령 유흥(俞興)이 노주를 진공해 왔으나, 수십 차례의 교전을 거친 후 유정이 유흥을 물리쳤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유정은 쿠빌라이에게 군대를 주둔시키고 비축을 두터이 쌓아 송을 도모할 대계(大計)를 제기하며 아울러 “예로부터 제왕은 사해를 일가(一家)로 삼지 않으면 정통이 되지 못합니다. 성조(聖朝)께서 천하의 10분의 7~8을 소유하셨는데 어찌 한 모퉁이를 방치해 스스로 정통을 버리려 하십니까?” 유정의 건의는 비록 조정 내 대신(大臣)들의 반대를 받았으나 도리어 다시금 쿠빌라이에게 남송을 공략하는 것이 형세상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임을 의식하게 만들었다.
1262년 쿠빌라이는 유정에게 성도(成都), 동천(潼川)에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설립하라고 명령하고 그에게 도원수(都元帥)를 겸임하게 하여 각 산봉우리에 진영과 보루를 세움으로써 송군이 내습하는 것을 저지하게 했다. 나중에 그는 동천도원수(潼川都元帥), 남경로선무사(南京路宣撫使)로 고쳐서 임명되었다.
1267년 유정이 조정에 들어와 다시 쿠빌라이에게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를 멸망시킬 계책을 바치며 말하기를, 지금 송나라 천자는 나약하고 대간들은 교만하니 이것은 하늘이 주신 통일의 기회라고 했다. 그는 반드시 먼저 양양(襄陽)을 공략해야 한다고 건의하며 “만약 양양과 무한(武漢)을 얻는다면 강남은 평정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일찍이 쿠빌라이 즉위 초기 훌라구(旭烈兀)를 따라 서아시아를 쓸어버렸던 대장 곽간(郭侃)도 그의 평송지책(平宋之策 송을 평정하는 책략) 속에서 송을 멸망시키려면 마땅히 먼저 양양을 취하고 그런 다음 임안으로 곧장 가야 한다고 명확히 한 바 있다.
이전에 몽골 대군이 송을 공략할 때 중점은 촉(蜀)을 공략하는 것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시종 송군(宋軍)과 대치했다. 그러나 양번(襄樊)은 남양분지(南陽盆地)의 남단에 위치하여 한수(漢水) 남안의 양양과 북안의 번성(樊城)으로 조성되어 “형주(荊州)와 예주(豫州)를 걸쳐 연하고 남북을 통제하여 움켜쥐니”, 두 성 사이에 또 한수를 끼고 상호 지원할 수 있어 역대로 수비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병가필쟁지지(兵家必爭之地)였다. 몽골 군대와 남송은 양양과 번성 등의 지역에서 군사적 쟁탈이 줄곧 매우 격렬했으니, 남송은 견고한 성지(城池 성과 해자)에 의지하여 줄곧 몽골 대군이 남하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만약 양양을 취한다면 남송의 횡방향 천리 방어선을 철저히 찢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쿠빌라이는 유정의 건의를 채택하여, 송에 대해 장기적인 작전 경험이 있는 대장 우량카다이의 아들 아주(阿術)을 몽골군도원수(蒙古軍都元帥)로, 유정을 한군도원수(漢軍都元帥)로 임명하고 공동으로 수로와 육로 대군을 이끌고 양번을 포위 공격하게 했다. 그는 성을 포위하여 “그들이 스스로 투항하기를 기다리라”고 했다. 또한 이 해에 여문덕(呂文德)이 그의 동생 여문환(呂文煥)을 양양지부(襄陽知府) 겸 경서안무부사(京西安撫副使)로 파견했다. 여문환은 남송 조정에서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는 장군으로 꼽힌다.
1268년 아주는 양번의 동남쪽 녹문보(鹿門堡)와 동북쪽 백하성(白河城)에 보루를 축조해 양양을 구원하려는 송군의 길을 차단했다. 1270년 쿠빌라이는 또 승상(丞相) 사천택(史天澤)를 파견해 군사(軍事)를 총괄해 돕게 했다. 사천택은 양양에 도착한 후 성지가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려움을 보고 곧 명령을 내려 양번 서부의 만산보(萬山堡) 백장산(百丈山)에 긴 포위벽을 축조하게 했고, 또 남면의 현산(峴山), 호두산(虎頭山)에 성을 쌓아 여러 보루들을 연결함으로써 양양과 서북, 동남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하고 그 식량 길을 끊어버렸다. 양번은 한 채의 고립된 성(城)이 되었다. 이 시기에 몽골 군대는 양번 외곽에 10여 곳의 성과 보루를 축조해 양번을 장기적으로 포위 통제하는 거점을 만들었고, 양번에 대한 전략적 포위를 완성했다.

이 시기 몽골군은 양번(襄樊) 외곽에 10여 곳의 성곽을 축조하여 양번을 장기적으로 포위할 거점을 구축했고, 양번에 대한 전략적 포위를 완성했다. (에포크타임스 제작)
강남에 위치한 남송은 큰 강과 호수가 도처에 널려 있었기 때문에 수전(水戰)이 지극히 관건이었다. 몽골 군대는 일찍이 송군과 안양탄(安陽灘)에서 수전을 진행하여 비록 최종적으로 패배를 승리로 전환했으나 몽골 군대의 수전이 송군만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수군에 익숙한 유정은 성을 쌓아 양번을 포위하는 한편 배를 제조하고 수군을 훈련하자고 제안했다. 쿠빌라이는 신속히 비준했다.
아주와 유정은 한마음을 힘을 합쳤고 신속히 전선 5천 척을 제조해 냈다. 아울러 주야로 조련하여 7만 명의 수군을 훈련했다. 그 후 다시금 양번을 공략했으나 여전히 함락시킬 수 없었다. 몽골 군대는 마침내 양양성을 물이 샐 틈도 없이 포위했으니 이로 인해 성 안의 공급이 심각하게 부족해졌다.
몽골 군대의 전략적 포위와 진공에 직면하여 송군 역시 반격과 반격을 진행했다. 1268년 몽골 군대의 녹문, 백하의 포위를 타파하기 위해 여문환은 양양 수비군(守軍)에게 명령해 몽골 군대를 진공하게 했으나 몽골 군대에게 패배당하여 송군의 사상자가 심각했다.
이듬해 3월 송 장수 장세걸(張世傑)이 군대를 이끌고 번성을 포위한 몽골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했다. 7월 연강제치사(沿江制置使) 하귀(夏貴)가 가을철 큰비가 내리는 기회를 틈타 군대를 이끌고 양양을 구원하러 왔으나 패배했다. 이 해에 여문덕이 병으로 죽었다. 조정은 이정지(李庭芝)에게 경호제치대사(京湖制置大使)로 군대를 감독해 양양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1270년 봄 여문환이 양양에서 출병하여 만산보를 공략하자 몽골 장수 장홍범(張弘範), 이정(李庭)이 반격하여 송군이 대패했다. 9월 여문덕의 사위이자 송나라 전전부도지휘사(殿前副都指揮使)인 범문호(範文虎)가 이정지의 지휘를 듣지 않고 수군을 이끌고 양양을 증원하러 오자 몽골 군대의 수로와 육로 두 군데 군대가 맞이해 싸워 송군이 대패했고 범문호는 도망쳐 돌아갔다. 1271년 범문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양양을 원조했으나 또 한 번 대패했다.
3년 동안 송군의 수차례에 걸친 양양 구원은 모두 몽골 군대에게 패배당했고, 양양성 중 송군의 반포위 역시 성공할 수 없었다. 양양성 안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던 송군은 패배하는 형국에 직면해서도 여전히 견수(堅守)를 선택했다.
1272년 4월 영주(郢州, 지금의 호북 종상현鍾祥縣)에 주둔하고 있던 이정지가 조정에 양번을 증원할 군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구했으나 결과가 없자 어쩔 수 없이 현지에서 3천여 명의 민병을 모집해 총관(總管) 장순(張順), 노분검할(路分鈐轄) 장귀(張貴)로 하여금 이끌고 양양을 지원하게 했다.
장순, 장귀 등은 100척의 화창(火槍), 화포(火炮) 등의 무기를 장착한 배와 대량의 물자를 타고 몽골 군대의 봉쇄를 억지로 돌파해 모험을 무릅쓰고 양양성 안으로 들어갔으나 장순은 전투 중에 진중에서 사망했다. 장순의 시신은 수일 후에 수면에 떠 올랐는데 그의 몸에는 4개의 창상과 6개의 화살이 있었고 손에는 여전히 활과 화살을 죽도록 움켜쥐고 놓지 않았으니 당일 전투 상황의 격렬함을 족히 볼 수 있다.
그 후 몽골 군대는 한수 수면에 별모양으로 배치한 말뚝을 배치해 봉쇄를 확대하니 양양의 형세는 더욱 심각해졌다.
7월 초 여문환은 장귀를 파견하여 겹겹의 포위를 뚫고 용미주(龍尾洲)에 주둔한 범문호(範文虎) 부대와 기일을 약속해 만나 안팎으로 원군(元軍)을 협공하고자 했으나 뜻밖에 범문호는 이미 철수해 버렸고 양군이 한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송군이 지극히 피로했기 때문에 전투 중에 사상자가 너무 많아서 장귀도 중상을 입고 피습되어 죽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자 이정지는 이간책(離間計)을 시행하여 쿠빌라이와 유정 사이에 간격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그 계책을 간파하고 계속해서 유정을 중용했다.
비록 몽골 군대가 송의 지원군을 쳐부수긴 했으나 양번성을 주둔해 지키는 송군은 여전히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이 관건적인 시각에 원조의 한인(漢人) 대장 장홍범이 양양과 번성 사이의 연락을 끊어 두 성이 각각 고립되게 만든 다음 수로와 육로로 번성을 협공하면 번성을 격파할 수 있고 양양 역시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 제안했다. 유정 역시 유사한 분할 포위공격 전술을 제기다.
아주도 깊이 공감하고 마침내 물에 익숙한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한수 속의 나무기둥을 톱으로 자르게 하고 쇠사슬을 끊게 했으며 양양과 번성 사이를 연결하는 부교(浮橋)를 불태움으로써 양양 수군이 번성에 대해 지원하는 통로를 차단했다.
1273년 정월, 몽골 군대는 번성에 대한 공격을 발동했다. 이번 진공에 쿠빌라이는 또 서역(西域)에서 생산한 회회포(回回炮 아라비아 대포)를 조달해 왔다. 이 포는 공격력이 강하고 위력이 대단해서 심지어 가장 큰 나무조차도 포 한방에 파괴할 수 있었다. 몽골 군대의 맹공 하에 번성이 함락되자 송 장수 범천순(範天順)은 힘써 싸우다 굴하지 않고 자살하여 순국했고 부장(副將) 우부(牛富)는 성이 파괴된 후에도 여전히 100여 명을 이끌고 몽골 군대와 시가전을 벌이다 마지막에 불 속으로 뛰어들어 순절(殉節)했다.
번성이 함락된 후 양양은 매우 위태로워졌고 양양 수장(守將) 여문환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조정에 위급함을 알렸으나 가사도가 이미 소식을 봉쇄해 그 누구도 조정에서 도종에게 변경이 위급하다는 사정을 말하지 못하게 했고 아울러 도종에게 양번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누설한 궁녀를 죽이기까지 했다. 밖으로는 원군이 없고 안으로는 충분한 양초(糧草, 식량과 말먹이 풀)가 없었던 여문환은 6년 동안 굳게 지킨 끝에 쿠빌라이가 파견한 언변에 능한 아리해야(阿裏海牙)가 투항을 권하자 마침내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그 후 그는 쿠빌라이의 예우를 받아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 시위친군도지휘사(侍衛親軍都指揮使) 등에 봉해졌고 그의 휘하 군장(軍將)과 사졸들 역시 상을 하사받고 안치(安置)되었다.
여문환의 투항은 조정을 진동시켰고 남송에게 의심할 바 없이 중대한 타격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는 남송의 장령과 대신들에게 쿠빌라이의 넓은 아량을 보게 만들었고 아울러 민심을 얻었다.
6년 동안 역사에 남은 양번의 치열한 전투 끝에 몽골의 원조는 최종적으로 승리를 얻었고 남송의 멸망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참고자료:
《新元史》
《忽必烈傳》
《忽必烈和他的世界帝國》
《成吉思汗忽必烈評傳》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6/13/n13019873.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