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년—588년)
심연(心緣)
【정견망】
서진(西晉)의 흥망 (265년-316년)
앞서 삼국 역사를 말할 때, 제갈량(諸葛亮)이 지어 삼국 이후 및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대사를 예언한 기문(奇文)인 《마전과(馬前課)》를 언급했었다. 제갈량은 《마전과》의 제일과(第一課)에서 촉한(蜀漢)의 멸망을 예언했고, 제이과(第二課)에서는 서진의 흥망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제2과의 네 구절은 다음과 같다.
불 위에 불이 있으니
중토를 환히 비춘다
명분이 바르지 않으니
강동에 호랑이가 있다.
火上有火
光燭中土
稱名不正
江東有虎
우리는 역사적 사실과 결합하여 예언의 선견지명을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서진의 건립─“화상유화(火上有火)”
조위(曹魏) 후기에는 정치가 나날이 부패했다. 더욱이 마지막 세 명의 황제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조상(曹爽)을 우두머리로 하는 파벌과 사마의(司馬懿)를 우두머리로 하는 두 파벌의 다툼이 출현했다.
사마의는 지금의 하남(河南) 온현(溫縣) 출신의 저명한 사족(士族)으로, 지모가 남달랐고 여러 차례 군공(軍功)을 세웠다. 조조(曹操) 때부터 기용되기 시작하여 조비(曹丕) 때 지위가 점차 현달하고 요직에 올랐다. 위 명제(明帝) 때 사마의는 주장(主將)으로서 대촉(對蜀) 작전을 지휘하여 제갈량의 몇 차례 북벌을 저지했다. 이외에도 그는 군대를 이끌고 요동(遼東)을 할거하던 공손연(公孫淵)을 평정해 위나라의 중신이 되었다. 명제 사후 어린 조방(曹芳)이 즉위하자 사마의는 태위(太尉)가 되어, 종실 출신 대신인 조상(曹爽)과 함께 유조를 받아 공동으로 보정(輔政)했다. 조상이 표문을 올려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올렸으나, 실질적으로는 실권을 빼앗은 것이다. 이에 사마의는 표면적으로는 병을 칭하며 조정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으나, 암암리에 도리어 힘을 기르며 조상을 소멸할 기회를 엿보았다.
249년, 사마의는 조상이 조방을 모시고 낙양성 남쪽의 명제릉(明帝陵)을 배알하러 간 기회를 틈타 정변을 일으켜 조상이 굴복하도록 핍박했고, 조상 및 그 당여들을 처형해 조정의 대권을 탈취했다. 이때부터 사마씨(司馬氏) 일가가 조정을 장악했다.
251년 사마의가 병사하자 큰아들인 사마사(司馬師)가 계속해서 권력을 잡았다. 254년 사마사는 조방을 폐위하고 조모(曹髦)를 황제로 삼았다. 이듬해 사마사가 죽자 동생인 사마소(司馬昭)가 집정했다. 이 기간에 사마씨는 회남(淮南)의 왕릉(王凌, 250년), 관구검(毋丘儉, 255년), 제갈탄(諸葛誕, 257년)의 군사 반란과 기타 조정 신하 및 사인(士人)들의 반항을 차례로 진압해 사마씨의 통치를 공고히 했다. 260년 조모가 꼭두각시가 되는 것에 불복하여 수백 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사마소를 공격했으나 결과적으로 살해당했다. 사마소는 따로 조환(曹奐)을 세워 황제로 삼고, 스스로 진왕(晉王)에 봉했으며 아들인 사마염(司馬炎)을 태자로 세웠다. 조위 정권은 이미 이름만 남은 상태였다.
263년, 사마소는 촉나라 내부가 부패하고 조정 정사가 혼란한 기회를 이용해 등애(鄧艾), 제갈서(諸葛緒), 종회(鍾會)에게 대군을 나누어 세 길로 촉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두 길의 군대는 촉나라 장수 강유(姜維)와 농상(隴上) 답중(沓中) 및 한중(漢中)에서 전투를 전개했고, 한 길의 군대는 칠백 리의 무인 지대를 통과하여 성도(成都)로 진격해 압박했다. 촉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은 전방의 전황이 아직 진행 중일 때 성을 나와 투항하니 이로써 촉한이 멸망했다.
265년 사마소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사마염은 위나라 황제 조환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진(晉)’이라 하고 낙양에 도읍을 정했다. 후대의 남쪽으로 천도한 동진과 구별하기 위해 역사에서는 흔히 서진(西晉)이라 부른다.
‘화상유화(火上有火, 불 위에 불이 있는 것)’는 ‘염(炎)’ 자로, 사마염이 위나라를 찬탈하고 진나라를 세운 것을 가리키니 이가 바로 진 무제(武帝)다.
서진의 천하 통일─“광촉중토(光燭中土), 칭명부정(稱名不正)”
사마염은 정권을 탈취한 후, 한편으로는 새로운 제도를 제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익주(益州)에서 수군(水師)을 양성하고 선박을 건조하며 오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279년 겨울, 진 군대가 출병해 장강을 따라 내려가며 수도인 건업(建業)을 공격했고, 이듬해 3월 건업을 함락하니 오나라 황제 손호(孫皓)가 투항하여 오나라가 멸망했다.
서진은 이렇게 280년에 정식으로 천하를 통일했으니, 가히 ‘중토를 환히 비췄다’고 할 만하여 중국에 다시 한번 일통(一統)의 국면이 출현했다. 하지만 사마염의 진조(晉朝)는 실질적으로 조위(曹魏)를 찬탈해 건립한 것이기 때문에 ‘이름이 바르지 못하다’고 한 것이다.
*서진 초기의 발전과 “팔왕의 난(八王之亂)”
무제는 전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후, 공이 있는 십여 명의 동성(同姓) 종친을 왕으로 분봉했고, 아울러 진나라의 관제(官制), 병제(兵制), 법제(法制) 등 일련의 정치 제도를 조정했다. 서진은 조위(曹魏) 때 건립된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관원 선발법을 계속 사용했으나 폐단이 속출해 세가대족(世家大族)이 정권을 독점하는 도구가 되었고, 등급적인 사족 문벌 제도(士族門閥制度)를 형성했다. 서진은 또한 법령으로써 관료 귀족의 경제적 특권, 즉 관품(官品)에 따른 점전권(占田權 토지 점유권)과 은객제(隱客制 호적에 올리지 않는 사병이나 가노)를 확정했다.
경제적으로는 주로 두 가지 중대한 조치를 취했으니, 곧 주군(州郡)의 군사를 폐지하고 농촌으로 돌려보낸 것과 점전제(占田制)를 반포한 것이다. 점전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했다:
첫째, 호조식(戶調式): 무릇 정남(丁男, 16세 이상부터 60세까지 남녀)이 가정을 꾸린 경우 매년 호조로 비단[絹] 3필과 면(綿) 3근을 납부하고, 정녀(丁女) 및 차정남(次丁男, 남녀 15세 이하부터 13세까지 또는 61세~65세까지를 차정이라 한다)이 가정을 꾸린 경우 그 절반을 납부했다. 변방 군(郡) 민호(民戶)의 호조는 규정 수치의 3분의 2를 납부했고, 더 먼 곳은 3분의 1을 납부했다.
둘째, 농민의 점전(占田)과 과전(課田): 남자 1인은 토지 70무(畝)를 점유할 권리가 있었고, 여자는 30무였다. 이는 점유할 수 있는 토지의 한도액이지 실제 수여한 토지가 아니었다. 점점 중에서 정남은 50무, 차정남은 25무, 정녀는 20무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를 과전(課田 과세되는 경작지)이라 불렀다. 과전 1무당 곡식 8승(升)을 징수했다. 실제 토지 점유와는 상관없이 모두 정해진 이 액수에 따라 징수했다.
셋째, 사족(士族) 지주의 점전, 음객(蔭客) 및 음친속(蔭親屬) 등의 특권: 1품 관원은 토지 50경(頃 1경은 100무)을 점유할 권리가 있었고, 이하 각 품마다 5경씩 체감해 9품 관원은 토지 10경을 점유했다. 귀족 관료는 또한 친속을 비호[蔭 세금을 면제받는다는 의미]할 수 있었는데 많은 자는 9족, 적은 자는 3족까지였다. 1품 관원부터 9품 관원까지는 또한 전객(佃客)을 15호에서 1호까지 비호할 수 있었고, 식객은 3인에서 1인까지 비호할 수 있었다.
조위에서 시행한 둔전제(屯田制)와 비교하면, 점전제 하에서 농민의 부담은 다소 경감되었다. 특히 둔전제 아래 군사 관제에 따른 강제 노동을 해제했으므로 농민의 생산 적극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음으로 점전은 나이 구분이 없지만 과전은 나이와 성별의 구분이 있었으며 점전이 과전 수보다 높았는데, 이러한 규정들은 사람들이 가서 토지를 점유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장려할 수 있어 경지 면적을 확대하는 데 유리했다.
《진서·식화지(晉書·食貨志)》에서는 “이때에 천하에 일이 없어 부세(賦稅)가 균등하고 일정하니,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생업과 일을 편안히 여기며 즐거워했다”라고 했다. 이것은 비록 과장된 부분이 있으나, 점전제 시행 후 태강(太康) 연간의 번영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290년, 진 무제 사마염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차남인 사마충(司馬衷)이 즉위하니 이가 곧 진 혜제(惠帝)다. 혜제는 유약하고 무능했으며 심지어 좀 어리석었다. 사서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다.
천재지변과 전란으로 인해 많은 백성이 굶어 죽었다. 궁중의 어떤 사람이 이러한 상황을 진 혜제에게 보고하며 속히 명령을 내려 이재민을 구제할 것을 청했다. 혜제가 보고를 듣고 한편으로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기며, 다른 한편으로는 반복해서 읊조렸다.
“밥이 없어 사람이 굶어 죽는다, 밥이 없어 사람이 굶어 죽는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고 상황을 보고하러 온 사람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어찌하여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오(何不食肉糜乎)?” 즉 이재민들이 먹을 밥이 없다면 어찌하여 고기죽을 먹지 않는가? 라는 뜻이다. 그의 지혜가 어떠했는지 대략 알 수 있다.
진 혜제가 제대로 국가를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조정의 대권은 황후인 가씨(賈氏) 손에 떨어졌다. 서진 정권은 이때부터 어지럽고 불안한 상태에 처했다.
가황후(賈皇后)는 비록 용모는 추했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서진의 개국원훈인 가충(賈充)이었으니, 이것이 그녀가 당시의 황태자와 혼인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가황후는 사람됨이 잔혹해 일찍이 직접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녀는 비록 여인의 몸이었음에도 여론을 조작하고 기회주의적 처세에 능했으며 권모술수에 정통했으므로, 역사에서는 ‘투기가 많고 권모와 사술이 많았다’고 칭한다.
가황후는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을 주멸(誅滅)하는 방법을 채택하여 혜제의 통치 지위를 공고히 했다. 진 혜제의 보정 대신이자 태부였던 양준(楊駿)이 바로 그녀의 손에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양준은 진 무제의 황후였던 양씨(楊氏)의 아버지다. 진 무제는 오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천하에 일이 없자 더는 조정에 마음을 두지 않고 종일 주색에 빠져 지냈기에, 조정의 사무는 외척 세력인 양씨에게 의존했다. 이때 양준, 양요(楊珧), 양제(楊濟)가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어 당시 ‘삼양(三楊)’이라 불렸으니 가히 권력이 한 시대를 기울일 만했다.
권세가 높고 지위가 무거웠던 양준과 권력욕에 마음이 멀어버린 가황후 사이에는 자연히 조화될 수 없는 모순이 형성되었다. 291년, 가황후는 양준 및 그 동당(同黨)을 주살했고 또 그 3족을 멸했으며, 아울러 황태후 양씨마저 해쳐 죽였다.
가황후의 전권은 사마씨 여러 왕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너도나도 가씨를 죽이고 독자적으로 대권을 장악하고자 했으니, 이에 곧 진나라 역사상 유명한 ‘팔왕의 난’이 발생했다.
이들 여덟 왕은 전부 진나라 황실의 종친이다. 그들은 바로 여남왕 량(亮), 초왕 위(瑋), 제왕 경(冏), 조왕 륜(倫), 성도왕 영(穎), 장사왕 예(乂), 하간왕 옹(顒), 동해왕 월(越)이다.
291년부터 이 여덟 제후왕들 사이에 격렬한 쟁탈이 시작되었다. 299년, 조왕 륜은 가후(賈后) 및 그 당여들을 죽이고 대권을 독점했다. 301년에는 또 혜제마저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 이후로 제왕 경, 조왕 륜, 장사왕 예, 하간왕 옹, 성도왕 영 사이에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서로 잔혹하게 죽였다. 306년에 이르러서야 동해왕 월이 혜제를 독살하고 무제 사마염의 스물다섯째 아들인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熾)를 옹립해 즉위시키니, 16년간 지속된 ‘팔왕의 난’이 바야흐로 끝났다.
‘팔왕의 난’은 원래 쇠약했던 진조(晉朝)의 통치를 더욱 악화시켰고 생산은 파괴를 당했으며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도시가 약탈 당하고 불에 타서 망가졌다. 낙양에서는 13세 이상의 남자가 전부 강제로 부역에 동원되었고 성내의 쌀값이 1석(石)에 만 전(錢)까지 치솟아 허다한 사람이 굶어 죽었다. 이는 국내 인민들이 폭정에 반항하여 너도나도 봉기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영역 밖에 있던 흉노, 선비 등 여러 부족이 서진의 정권을 호시탐탐 노리게 만들었다.
*서진 소수민족의 내부 이주와 불교의 전파
동한 말년 이래로 한 왕조의 군사 정복과 중원의 병력 및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그리고 주변 소수민족 간의 다툼으로 인해, 중국 서부와 북부 변강의 각 소수민족이 끊임없이 내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삼국 말기와 서진 초기에 이르러 호족의 내부 이주는 정점에 달했다.
이렇게 중국 내로 이주한 소수민족은 주로 흉노, 갈, 선비, 저, 강 등을 포함했으며 역사상 널리 ‘오호(五胡)’라 칭했다. 서진 통치 시기 중국 북부, 동부, 서부, 특히 병주(幷州)와 관중(關中) 일대에는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사서에는 “서북의 여러 군은 모두 융족의 거처가 되었다”라거나 관중의 백만여 인구 중 “융적이 절반을 차지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소수민족과 한족은 섞여 사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한편으로는 한족의 영향 하에 이들 내부로 이주한 소수민족이 점차 유목에서 농업 정착으로 전환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소수민족이 대부분 불교를 신앙했기 때문에 한족과 융합할 때 불교가 점차 전파되어 한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서진 때 낙양의 저명한 승려로는 축법호(竺法護), 축숙란(竺叔蘭), 지민도(支敏度) 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주로 경전을 번역하는 작업에 종사했다. 축법호는 대승 경전이 아직 중국에 전래되지 못했음을 탄식하고, 곧 서진 무제 때 서역으로 가 학문을 배우며 36개국의 언어를 통달한 후 귀국하여 법을 널리 알렸다.
서진 당시 동서 양경(兩京, 동경 낙양과 서경 장안)의 사원은 도합 180개였고 승니(僧尼, 승려와 비구니)는 삼천칠백여 명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비록 후세의 기록이어서 반드시 믿을 만한 역사는 아니겠지만, 축법호 시대에 이미 “사찰과 도상이 도성에서 숭상되었다는 설”이 있다. 현존 기록 중에 살펴보면 서진 때 낙양의 백마사, 동우사(東牛寺), 보살사(菩薩寺), 석탑사(石塔寺), 민회태자부도(湣懷太子浮圖), 만수사(滿水寺), 반마산사(盤瑪山寺), 대동사(大東寺), 관성서법시립사(官城西法始立寺), 죽림사(竹林寺) 등 십여 개의 사찰이 있었다.
서진 팔왕의 난 이후 오호가 침입하자 외부에서 온 승려들이 이 기회를 빌려 불경을 널리 알리고 번역할 수 있었으므로, 불교가 중원 지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파되게 했다.
서진 말기의 천재지변 경고
‘팔왕의 난’이 폭발함과 동시에 천재지변 역시 매우 빈번했다.
《진서·오행지(晉書·五行志)》에 따르면 진 원강(元康) 3년(293년), 사천(四川)에 지진이 일어났고; 원강 5년(295년) 4월 경인일 밤에는 폭풍이 불어 성 동쪽 도랑의 파도가 사람을 죽였다. 7월에는 하비(下邳)에 큰 바람이 불어 가옥을 무너뜨렸다. 9월에는 안문(雁門), 신흥(新興), 태원(太原), 상당(上黨)에 재난성 바람이 불어 농작물을 상하게 했다. 원강 6년(296년) 5월에는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에 홍수가 났다. 원강 7년(297년)에는 진주(秦州)와 옹주(雍州) 두 주에 큰 가뭄과 전염병이 돌았고 관중이 굶주려 쌀 한 곡(斛)이 만 전에 달했다.
원강 9년(299년) “3월 18일에 하남 형양(滎陽)과 영천(穎川)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상하게 했다.”
영녕(永寧) 원년(301년) 7월에는 남양(南陽)과 동해(東海)에 홍수가 났다. 10월에는 의양(義陽), 남양, 동해에 장마비가 내려 가을 밀을 물에 잠기게 했다.
영가(永嘉) 3년(309년) 5월에는 큰 가뭄이 들어 양평현(襄平縣) 양수(梁水)의 담지(淡池)가 말라붙었다. 황하[河], 낙수[洛], 장강[江], 한수[漢]를 모두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천재가 이토록 많고 빈번했으나 서진 왕조는 또한 종종 이재민을 구제할 능력이 없어 많은 백성이 굶어 죽었다. 이는 하늘이 경고를 내림으로써 서진 왕조의 통치가 바야흐로 붕괴를 향해 가고 있음을 예시한 것이다.
서진의 멸망─“강동유호(江東有虎)”
서진이 내란에 휩싸였을 때 영역 밖의 흉노 귀족들은 유연(劉淵)을 대선우(大單于)로 공동 추대했다.
유연은 자가 원해(元海)이고 흉노 좌부수(左部帥) 유표(劉豹)의 아들인데 한화(漢化) 정도가 매우 깊었다. 유표가 죽은 후 부친을 대신해 좌부수가 되었고 혜제 때 오부대감독(五部大都督)이 되었다.
304년 유연은 군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주 신속하게 5만 명으로 발전하여 이석(離石, 산서 이석)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했으며 스스로 한왕(漢王)이라 칭하니, ‘호인’과 많은 한족 사람이 그에게 귀부했다. 그는 군사적으로도 일련의 승리를 거두어 태원, 평양(平陽, 산서 임분) 등을 차지했고 남쪽으로 포자(蒲子, 지금의 산서 습현隰縣)로 천도했다.
308년 유연은 황제를 칭하고 평양으로 천도했다. 이어 왕미(王彌), 유요(劉曜) 등을 파견해 대군을 이끌고 서진의 수도인 낙양을 공격하게 했다. 당시 낙양에서 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해왕 월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뜻밖에도 4만 명의 군사와 대량의 조정 신하들을 거느리고 낙양에서 철수해 동쪽의 항(項) 땅에 주둔했으나 다음 해에 우울증으로 죽었다.
유연의 아들인 유총(劉聰)이 이 기회를 틈타 동해왕의 군사를 소멸하고 낙양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진 회제 사마치를 잡아갔다. 회제가 사로잡힌 후 예주자시(豫州刺史) 염정(閻鼎)과 옹주자시(雍州刺史) 가필(賈疋) 등은 또 무제의 손자인 사마업(司馬鄴)을 황제로 옹립하고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했다. 316년 장안마저 포위당했으나 이때 진은 이미 적을 방어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진 민제(湣帝) 사마업이 성을 나와 항복하면서 서진 왕조가 끝났다.
310년 유연이 죽자 아들인 유총이 형을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317년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을 수비하던 서진의 친왕 사마예(司馬睿)가 즉위를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며 건강에 도읍을 정하니 역사에서는 이를 ‘동진(東晉)’이라 부른다. 건강은 지리적으로 강동(江東)에 처해 있었으므로 ‘강동에 호랑이가 있다(江東有虎)’고 한 것이다.
서진은 무제가 정권을 건립한 이래로 도합 3대 4제(帝)를 거쳤으며 전후로 겨우 51년이었다. 그것은 삼국 이래의 분열 국면을 종결하고 중국을 다시 통일하여 당시 사회와 경제의 발전에 단기적인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서진 왕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외래 민족(外族)에게 소멸당한 왕조이다. 다만 서진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거의 절반의 시간은 전란 속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경제 발전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서진의 문학은 도리어 독립적인 형태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