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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전】 11 만리 강산을 일통(一統)하고 한족 신하들을 잘 활용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남송 조정이 원조(元朝)에 귀순하고 원나라 군대가 남송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했음에도,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항복을 거부한 남송의 대신들이 작은 조정을 다시 세워 저항을 이어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문천상(文天祥)이었다.

강산 일통(一統)

문천상은 중국 역사에서 충의(忠義)의 상징으로 이름이 높다. 그가 남긴 “예로부터 죽지 않은 이 누가 있으리, 붉은 마음 남겨 역사에 비추리라(人生自古誰無死, 留取丹心照汗青)”라는 문구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는 과거 시험 마지막 시험인 전시(殿試)에서 시국의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개혁 방안을 제시하며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펼쳤다. 당시 주고관(主考官)은 그를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철석처럼 굳건하다”고 극찬했고, 이종(理宗) 황제는 그를 601명의 진사 중 장원으로 직접 낙점했다.

이후 십여 년 동안 문천상은 환관 동송신(董宋臣)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가사도(賈似道)를 풍자했다가 변방으로 좌천되는 등 여러 차례 관직에서 쫓겨남과 복귀를 반복했다. 1274년 쿠빌라이가 대군을 보내 송을 공격할 때, 문천상은 임안(臨安)의 관문인 독송관(獨松關)을 긴급 지원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관문이 함락되자, 그는 급히 임안으로 돌아와 결사전을 준비했다. 이후 그는 나라의 위기 속에 승상으로 임명되어 원군(元軍)과 화의를 협상하게 되었다. 원군 총사령관 바얀은 문천상의 인품과 재능을 높이 사서 그를 원에 귀순시키고자 억류하고 북쪽으로 압송했다.

문천상은 처음에 단식으로 저항했으나, 배가 진강(鎮江)에 이르렀을 때 수행원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온갖 고초 끝에 온주(溫州)에 도착한 그는 대신 장세걸(張世傑), 육수부(陸秀夫) 등과 함께 겨우 9세였던 조강(趙罡)을 새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바로 남송의 단종(端宗)이다. 이어 문천상은 조칙을 받아 복주(福州)로 들어가 추밀사 겸 제로군마도독(都督諸路軍馬)이 되었고, 남검주(南劍州, 복건 남평南平)에 도독부를 세워 각지에서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며 항전을 호소했다.

원군이 복건으로 진격하자 단종과 대신들은 바다로 도망쳐 광둥성 일대에서 배를 타고 표류했다. 1277년, 문천상은 군대를 이끌고 용암(龍岩)과 매주(梅州)에 주둔한 뒤 강서(江西)로 진격했다. 우도(雩都)에서 원 군대를 대파하고 흥국(興國)을 점령했으며, 공주(贛州)의 10개 현과 길주(吉州)의 4개 현을 수복하자 강서 전역이 호응해 항원(抗元) 세력이 다시 일어났다. 이에 크게 놀란 쿠빌라이는 한인 장수 장홍범(張弘範)과 이항(李恒)에게 명령해 수륙 양면으로 송나라의 잔존 세력을 토벌하게 했다.

그 후 원나라 군대의 주력이 문천상의 흥국 본영을 공격하자, 문천상은 중과부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퇴각했다. 여릉(廬陵)과 하주(河州 지금의 복건 장정長汀)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처자식마저 원군에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1278년 늦은 봄 단종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육수부 등은 다시 6세의 조병(趙昺)을 황제로 옹립하고 조정을 광동 신회현(新會縣)에서 50여 리 떨어진 바다 위의 작은 섬으로 옮겼다. 그리고 문천상을 신국공(信國公)에 봉했다. 겨울이 되자 문천상은 조주 조양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험준한 산과 바다를 의지해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를 모아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원나라 군대는 수륙 양면으로 사납게 공격해 들어왔다.

그해 연말, 문천상은 해풍(海豐)현 북쪽의 오파령(五坡嶺)에서 원군의 기습을 받아 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는 즉시 빙편(氷片)을 먹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원 대장 장홍범 등이 그에게 귀순을 권했으나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1279년 2월, 원군은 남송의 마지막 거점인 애산(崖山)을 공격했다. 잔여 송나라 군사는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멸했다. 육수부는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투신해 자결했고, 대장 장세걸은 양태비(楊太妃)를 보호하며 탈출을 시도하다가 갑작스러운 태풍을 만나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쿠빌라이가 송조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남송 조정이 부패해 국운이 다한 점과 원조의 철저한 준비 덕분이기도 했지만, 쿠빌라이가 천의와 민심에 순응하여 송조에서 투항한 신하들을 우대하고 중용했으며, 성을 함락한 후에는 살육과 약탈을 금지하는 정책을 펴서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로써 대송(大宋) 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했다. 쿠빌라이는 마침내 남방을 포함한 중국 전역을 정복하고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으로 중원의 분열 국면을 종식시켰다. 통일 왕조인 원조는 이제 역사의 중심에 섰고, 중화 문명에 깊이 매료된 쿠빌라이는 이 거대한 무대 위에서 계속해서 한제(漢制)를 추진해 나갔다.

인재를 끔찍이 아낀 쿠빌라이와 투항을 거부하고 순국한 문천상

南宋将领文天祥在被俘后写下歌以咏志的五言长诗《正气歌》。(羊妹/大纪元制图)

남송의 장령(將領) 문천상이 포로로 잡힌 후 자신의 뜻을 노래한 오언장시 《정기가(正氣歌)》. (양메이/에포크타임스 제작)

애산 전투가 끝난 후, 장홍범은 문천상에게 다시 한번 귀순을 권했다.

“나라는 망했으니 승상께선 충효를 다하셨습니다. 송을 섬기던 마음을 바꾸어 황상(쿠빌라이)을 섬기신다면 앞으로 재상의 자리를 잃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나 문천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죽음으로 보국하길 청했다. 장홍범은 쿠빌라이에게 상소를 올려 처분 방안을 물었다. 쿠빌라이는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1283년 1월 8일 문천상을 직접 접견하고 투항을 권유했다. 하지만 문천상은 “죽음 외에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심지어 포로로 잡혀 있던 송나라의 옛 황제 공제(恭帝) 조현(趙㬎)이 와서 직접 권유했지만 문천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문천상은 포로 생활 6년 만에 47세의 나이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형이 집행된 직후 “처형을 중단하라”는 황제의 조칙을 가진 사신이 급히 도착했으나 문천상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쿠빌라이는 깊이 탄식하며 “참으로 훌륭한 사내로다! 내 사람으로 쓰지 못하고 죽였으니 참으로 애석하구나!”라며 탄식했다. 훗날 몽골 원나라가 편찬한 《송사(宋史)》에서도 문천상, 육수부, 장세걸 등의 충군(忠君) 절개를 아낌없이 찬양했다.

쿠빌라이가 천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또 다른 핵심 요인은 한인 책사, 대신, 장수들을 대담하게 기용하고 전적으로 신임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금련천 막부의 일원들과 유정(劉整) 외에도, 사천택(史天澤)과 장홍범 두 사람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위로 의심받지 않고 아래로 원망을 사지 않은” 한인 승상 사천택

사천택은 사병직(史秉直)의 셋째 아들이다. 사씨 가문은 원래 하북 진정(真定) 지역에서 강력한 실력을 행사하던 군벌로 본래 금을 섬겼으나, 1213년 몽골이 금을 공격할 때 사병직이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칭기스칸의 대장 무칼리에게 귀순했다. 무칼리는 사병직에게 기존의 부족들을 그대로 통솔하게 하여 패주(霸州)에 주둔시켰고, 그의 아들 사천예(史天倪)를 만호(萬戶)로 삼았으며 사천택은 장전총령(帳前總領)에 임명했다.

기록에 따르면 사천택은 키가 8척에 달하고 목소리는 큰 종과 같았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용력(勇力)이 뛰어난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1220년 금나라의 진정경략사(真定經略使) 무선(武仙)이 몽골에 투항하자, 사천예가 하북서로병마도원수(河北西路兵馬都元帥)가 되어 진정을 지키고 무선이 부사령관이 되었다. 사천택은 형을 따라 진정을 함께 지켰다.

그러나 1225년, 사천택이 어머니를 모시고 북쪽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선이 반란을 일으켜 사천예를 살해하고 다시 금나라에 붙었다. 사천택은 결연히 남쪽으로 돌아와 군사를 모았다. 몽골의 제도에 따라 형의 직위를 이어받아 도원수가 된 그는 군대를 이끌고 무선을 격파해 진정을 수복했다. 그 후 그는 무선과 내통한 남송의 대명총관(大名總管) 팽의빈(彭義斌)의 군대와 진정성 내부의 반란군을 연이어 진압하며 진정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사천택은 진정을 중심으로 옛 금나라 치하의 유학자들과 관리들을 등용했고, 성벽과 성루를 보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흩어진 유민들을 모으고 빈민들을 구제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큰 성과가 나타났다.

1229년 오구데이가 대칸 자리에 오른 후 사천택, 유흑마(劉黑馬), 소차랄(蕭劄喇) 세 사람을 대장수로 선발하여 한인 군대를 통솔하게 했다. 사천택은 진정·하간·대명·동평·제남 5로 만호에 임명되며 한인 세후(世侯, 세습 제후)의 거두가 되었다.

오구데이 시기, 사천택은 다시 한번 무선을 격파했고, 군대를 이끌고 금나라를 정벌하라는 명을 받아 경동(京東) 땅을 공략했다. 태강(太康 하남 태강), 탁현(拓縣 하남 임현 북쪽), 와강(瓦岡 하남 활현 남쪽), 안주(眼州 하남 아현) 등을 연이어 항복시켰고 양읍(陽邑)에서 금나라 장수 완안경상노(完顏慶山奴)의 목을 베었다.

이후 사천택은 경기병(輕騎兵)을 거느리고 금군에 포위당한 신위(新衛)를 구원하러 가 아군에게 “곧 구원병이 당도할 것”이라 안심시켰다. 본대가 도착하자 사천택의 군대와 합공하여 금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금 애종(哀宗)이 채주(蔡州)로 천도하자 오구데이는 대군(大軍)에게 포위를 명했다. 사천택의 군대는 북쪽에서 공격해 들어가 뗏목을 타고 물을 건너가며 며칠 동안 혈전을 벌여 큰 공을 세웠다. 1234년 정월, 채주성이 함락되고 애종이 자결하면서 금나라는 멸망했다. 사천택은 군대를 이끌고 진정으로 귀환했다.

示意图,图为蒙古将士雕像。(shutterstock)

몽골 병사의 모습 (shutterstock)

금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몽골 대군은 남벌(南伐)과 서정(西征)을 계속했다. 과도한 세금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자, 사천택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관청이 백성들의 대출 원금과 이자를 대신 갚아주도록 했다. 또 중등(中等)의 가구를 군적(軍籍)에 편입시키고 빈부에 따라 세금을 차등 징수했다. 당시 연이은 가뭄과 황충(蝗蟲 메뚜기) 피해로 백성들은 빚을 내어 공물을 바쳐야 했고, 그 채무가 1만 3천여 정(錠)에 달했다. 사천택은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털고 친족 및 관리들과 힘을 합쳐 이 막대한 부채를 모두 상환했다.

한편 형인 사천예의 아들 사읍(史揖)이 장성하자, 사천택은 즉시 사읍을 데리고 오구데이를 알현하여 자신의 도원수 직을 내려놓고 사읍에게 직위를 넘겨줄 것을 청했다. 오구데이는 감탄하며 말했다. “과거에는 관직을 다투는 자는 많았어도 직위를 양보하는 자는 적었다. 그대의 행동은 참으로 찬양받을 만하다.” 그리고 즉시 사읍을 진정병마도총관(真定兵馬都總管)으로 임명했다.

오구데이와 뭉케(蒙哥) 시기에 이어진 남송 정벌 전쟁에서도 사천택은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용맹하게 돌격하며 남송의 많은 성들을 함락하고 수많은 공을 세웠다.

1252년, 뭉케는 사천택에게 위주(衛州) 지역 5개 성을 하사하여 그 세수를 식읍으로 삼게 했다. 당시 “한지(漢地)가 다스려지지 않아” 관리들의 폭정과 가혹한 세금으로 인해 많은 지역에서 인구가 유출되고 토지가 황폐해졌는데, 하남과 섬서(陝西) 일대가 특히 심했다. 쿠빌라이의 하남 봉지 역시 같은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사천택이 유능하다는 말을 들은 쿠빌라이는 그와 조벽(趙璧)을 경략사로 임명해 달라고 청했다. 사천택과 조벽은 부임 후 현명한 인재를 뽑고 지휘관을 배치했으며, 비리를 척결하고 세금을 공평하게 매겼다. 또한 지폐 유통법을 바꾸고 창고를 세웠으며 변방의 성을 구축하고 관리를 엄히 단속했다. 둔전과 보갑 제도를 세워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을 제거하니, 불과 2~3년 만에 경내(境內)가 크게 다스려졌다. 쿠빌라이는 그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사천택은 또한 사람을 알아보고 적절히 쓸 줄 알았다. 남정북벌을 떠날 때마다 그는 수십 장의 백지 임명장을 챙겨 두었다가, 쓸 만한 인재가 보이면 그 자리에서 즉시 임명했다. 위주가 그의 식읍이 된 후, 사천택은 군전참의(軍前參議) 왕창령(王昌齡)에게 그곳을 다스리게 하여 이전의 모든 폐단을 철폐했다. 어떤 직무 유기자가 왕창령을 모함했을 때도 사천택은 이를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더욱 신뢰했다.

뭉케가 송을 칠 때 사천택은 서촉(西蜀 지금의 사천)으로 진군했다. 이후 조어성(釣魚城)에서 가로막혀 몽골군이 몇 달 동안 성을 깨지 못했다. 여름이 되어 군중에 전염병이 돌자 뭉케가 철군을 고려하던 중, 남송 장수 여문덕(呂文德)이 1,000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가릉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몽골군이 맞서 싸우기에 불리해지자 뭉케는 급히 사천택에게 방어를 명령했다. 사천택은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강을 건너 반격했고, 직접 수군을 이끌고 흐름을 타고 돌격하여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승리했다. 적함 수백 척을 격파하고 중경(重慶)까지 추격한 후 귀환했다.

1260년 쿠빌라이가 즉위하자마자 사천택을 불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도를 물었다. 사천택은 “조정에서 먼저 중서성과 6부를 세워 기강을 바로잡고, 감찰관을 두어 각 지역을 감독해야 합니다.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배반하지 않게 하고, 탐관오리를 제거하며 어진 인재를 등용해야 합니다. 관리의 녹봉을 정해 청렴함을 기르고 뇌물을 엄금하여 간교함을 막는다면, 위아래가 호응하여 안팎으로 안정을 찾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쿠빌라이는 이를 옳다고 여기고 그의 건의를 수용했다.

이듬해 사천택은 중서성 우승상에 임명되었다. 그가 집권한 후 앞서 제시했던 치국안민의 책략들이 차례로 시행되었다. 또한 성규(省規) 10조를 정하여 중서성 정무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그해 9월, 그는 쿠빌라이를 수행하여 아릭부케(阿里不哥)를 친정했고, 시무투(昔木土) 땅에 이르러 사천택이 좌군을 이끌고 합공을 펼치니 아릭부케는 패하여 달아났다.

이후 사천택은 다시 중책을 맡아 여러 장수들을 조율하며 이단(李檀)의 난을 진압했다. 하지만 그는 황제가 친히 내린 조서를 아랫사람들에게 과시한 적이 없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왔을 때 쿠빌라이가 그의 노고를 치하하자, 그는 공을 모두 다른 장수들에게 돌렸으니 그 겸손함과 신중함이 이와 같았다. 반란이 평정된 후 일부 유신(儒臣)들이 상소를 올려 제후들의 권력이 너무 강해 난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이에 사천택은 스스로 상소를 올렸다. “병사(兵事)와 민사(民事)의 권력은 일가에 집중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후들의 병권을 회수하시되, 부디 제 가문부터 시작해 주십시오.” 사씨 가문의 자제 중 그날로 병권을 내려놓은 자가 17명에 달했으니, 사천택의 흉금이 얼마나 활달한 지 알 수 있다.

1266년, 여전히 우승상이었던 사천택은 보국상장군(輔國上將軍)·추밀부사(樞密副使)에 봉해졌고, 이듬해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제수받고 중서 좌승상(左丞相)이 되었다. 1269년 쿠빌라이는 남송이 귀순하지 않자 양양과 한수 일대를 취하고자 사천택과 부마 홀라(忽刺)에게 양양을 실지 조사하여 전략을 세우라는 조칙을 내렸다. 그들은 양양에 도착해 요지를 골라 성벽과 요새를 구축하고 군량을 비축하며 남송 공략의 기반을 다졌다.

이듬해 사천택은 병으로 인해 연경(燕地)으로 돌아왔다. 이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로 승진했다. 쿠빌라이는 그의 건강을 배려하여 중서성, 상서성, 추밀원, 어사대에 큰 일이 있을 때만 한 달 혹은 열흘에 한 번 사천택과 상의하고 소소한 일로는 그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규정했다. 그에 대한 중시와 배려가 얼마나 깊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1273년, 사천택은 아주(阿術) 등과 함께 번성(樊城)을 함락했고 양양이 항복했다. 이듬해 쿠빌라이는 사천택과 승상 바얀에게 대군을 총괄하여 양양에서 수륙 양면으로 송을 치라는 조칙을 내렸다. 영주(郢州)에 이르렀을 때 사천택은 병세가 위독해져 북쪽 진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쿠빌라이는 그의 병세를 매우 염려하여 그의 아들 사강(史杠)과 어의를 보내 약을 하사하고 문병하게 했다.

1275년 3월 5일, 사천택은 진정에서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상소를 올려 “신의 수명이 다했으니 죽음은 아깝지 않으나, 바라옵건대 천병(天兵 원군)이 강을 건널 때 부디 살육과 약탈을 삼가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비보를 들은 쿠빌라이는 큰 충격을 받고 애도하며 시종을 보내 사씨 집안에 은 2,500량을 하사하고, 사천택을 태위(太尉)로 추증하며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훗날 태사가 추가되었고 진양왕(鎮陽王)에 봉해졌으며, 조에서 그를 기리는 사당을 세웠다.

中国河北省正定县南城门(长乐门)内的史天泽雕像(<a href="https://zh.wikipedia.org/wiki/%E5%8F%B2%E5%A4%A9%E6%B3%BD#/media/File:A_statue_of_Shi_Tianze.jpg" rel="nofollow noopener noreferrer">David Chen/维基百科</a>)

하북 정정현(正定縣) 남성문(南城門 장락문) 내에 있는 사천택(史天澤)의 동상. (사진=David Chen/위키백과)

사천택은 비록 원조가 천하를 대일통(大一統)하는 그날을 보지 못했으나, 그가 수립한 남송 공략 전략은 원군이 송군을 격파하고 강산을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초석이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사천택은 도량이 넓고 식견이 명철했으며 시세를 알고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평소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으나 대사를 만나면 의연히 천하를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가 정승에 임명되던 날 그의 집 마당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고 한다. 중서성에서 재상으로 있을 때 아랫사람들의 상반된 의견을 경청했으며, 일을 결단할 때는 황제의 뜻을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이치에 따라 고치며 사방으로 주선했다. 그는 40세에 비로소 역사서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특히 《자치통감》에 정통하여 그가 내놓는 논리는 늘 사람들의 허를 찔렀다.

사천택은 50년 동안 밖에 나아가면 장수가 되고 조정에 들어오면 재상이 되었으며 “위로는 의심받지 않고 아래로는 원망을 사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그를 당조 명장 곽자의(郭子儀)와 북송의 명장 조빈(曹彬)에 비유하곤 했다. 쿠빌라이가 이런 문무를 겸비한 대신의 보좌를 받은 것 또한 어찌 하늘의 안배가 아니겠는가?

‘바투루’ 칭호를 하사받은 진국대장군 장홍범

장홍범(張弘範)은 칭기스칸 시기의 도원수 장유(張柔)의 아홉째 아들로, 위로 여덟 명의 형과 아래로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쿠빌라이 금련천 막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학경(郝經)이 한때 장씨 가문 자제들의 가정교사였다.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란 장홍범은 장성하여 문무를 두루 갖춘 인재가 되었다.

20세 때 그의 키는 7척에 달했고 풍채가 당당했다. 당시 성인 남성들이 수염을 기르는 풍습이 있었는데, 장홍범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와 미염공(美髯公)이라 불릴 만했다. 말타기와 활쏘기는 물론이고 긴 창을 다루는 솜씨로 세상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뿐만 아니라 말주변이 좋았고 시를 짓고 노래하는 데도 능했다.

당시 그의 여덟째 형인 장홍략(張弘略)이 순천로총관(順天路總管)으로 있으면서 수양(壽陽)의 행도(行都)에 내려가 일 년 동안의 호구, 토지, 세금 징수 등 정무를 보고해야 했다. 이때 장홍범이 형의 직무를 대행했는데 관리와 백성들이 그가 일을 과단성 있고 조리 있게 처리하는 모습에 모두 감탄했다. 그는 또한 관할 하에 있는 몽골군의 군기를 신속하고 엄하게 정돈했다.

1260년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후, 24세의 장홍범은 어용국총관(御用局總管)에 임명되었다. 1262년에는 행군총관으로 임명되어 친왕 하비치(合必赤)를 따라 산동에서 일어난 이단의 반란을 토벌하러 떠났다. 군중에서 그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청렴하게 봉직했으며 사사로운 감정 없이 공평하게 일을 처리했다. 상과 벌을 확실히 하고 병사들의 고통을 깊이 살피니 군대 내에서 명망을 얻었다.

반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장홍범은 유인책을 써서 반란군의 일부 세력을 소탕하는 등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쿠빌라이에게 중용되었다. 반란 평정 후 형인 장홍략이 쿠빌라이의 친위대인 케식으로 전임되자, 쿠빌라이는 친히 금호부(金虎符)를 장홍범에게 하사하며 순천로관민총관(順天路管民總管)의 직을 잇게 했다. 당시 금호부를 차는 것은 대단한 영예였다.

1265년, 장홍범은 대명태수(大名太守)로 전임되었다. 그는 부임 전 암행을 통해 관리들이 불법으로 세금을 추가 징수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하다는 것을 알아냈고, 부임하자마자 불법 관리들을 엄벌에 처했다. 이에 관할 지역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해 큰 홍수가 나 많은 백성의 가옥이 침수되고 세금을 낼 수 없는 처지에 놓이자, 장홍범은 독단으로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쿠빌라이 역시 그의 독단적인 처사를 처벌하지 않았다.

1269년 몽골군이 양양을 포위했을 때, 양양을 포위한 한인 군대의 대부분은 반란 평정 후 개편된 이단의 옛 부하들이었다. 이들은 용맹하고 사나워 통제하기 어렵기로 유명했기에, 그들을 이끌려면 능력이 있으면서도 군심을 얻는 장수여야 했다. 쿠빌라이는 단번에 장홍범을 떠올려 그를 익도·치래등로행군만호(益都、淄萊等路行軍萬戶)에 임명했다. 장홍범은 총사령관 바얀에게 중병으로 양양을 포위하되 먼저 양양의 보급로를 끊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바얀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에게 군사 1,000명을 주어 만산(萬山)의 보급로를 지키게 했다. 만산 요새에서 장홍범은 쳐들어온 송군과 만났으나 침착하게 대응하여 적은 수로 다수를 이기는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1269年,蒙军围攻襄阳。(大纪元制图)

1269년 양양성을 포위 공격하는 몽골군(에포크타임스 제작)

1271년, 바얀은 다시 한번 장홍범의 건의를 받아들여 양양으로 압박해 들어가는 곳에 ‘일자성(一字城)’을 구축했다. 즉, 원래 하나였던 양양과 번성의 군사 방어 구역을 둘로 쪼개어 번성을 먼저 공략하기로 한 것이다.

이듬해 번성을 공격할 때 장홍범은 팔꿈치에 화살을 맞았다. 그는 상처를 싸매고 즉시 바얀을 찾아가 건의했다. “수로를 차단해 구원병을 막고 수륙으로 합공한다면 번성은 반드시 함락될 것입니다. 번성이 함락되면 양양은 의지할 곳이 없어집니다.” 바얀이 이 말대로 행하자 번성이 함락되었고 양양의 守將도 투항했다. 이 가장 핵심적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장홍범은 양양 전투의 공훈을 인정받아 투항한 장수 여문환(呂文煥)을 데리고 쿠빌라이를 알현했다. 그는 비단옷, 백은, 보물 안장 등을 하사받았고 그의 부하들 역시 상을 받았다.

1274년, 바얀은 남송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 바얀은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회서(淮西)와 회동(淮東)을 공격해 양주로 곧장 향하게 했고, 다른 한 갈래는 자신이 직접 이끌고 임안(臨安)으로 진격했다. 주력 대장은 아리카야(阿里海牙)였으며 장홍범은 아리카야 군단 소속이었다. 원나라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했고 장홍범은 진강(鎭江)에서 장세걸이 이끄는 수군을 궤멸시켰으며, 정가주(丁家洲) 전투에서는 가사도가 이끄는 13만 송군을 격파한 후 장거리를 직접 달려 건강(지금의 남경)에 도달했다.

원나라 군대가 계속 전진하려 할 때 쿠빌라이가 사신을 보내 바얀에게 가볍게 진격하지 말며, 날씨가 무더우니 잠시 휴식을 취하고 명령을 기다려 진격하라고 훈계했다. 그러나 장홍범은 지금 송군의 기세가 꺾였으니 원나라 군대가 파죽지세로 연속 공격해야지, “어찌 지체하여 적들에게 기회를 주겠습니까?”라며 반대했다. 바얀은 그 말을 매우 옳게 여겨 조정으로 돌아가 쿠빌라이에게 강남의 형세를 직접 보고했고, 계속 진군해도 좋다는 어명을 받아냈다.

이후 장홍범은 군대를 이끌고 과주(瓜州)와 초산(焦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남송은 초산에서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초산 전투는 임안이 함락되기 전 원나라 군대의 송나라 정벌 중 마지막 대전투였는데, 장홍범은 전함 80척을 빼앗고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의 공로로 쿠빌라이는 그에게 ‘바투루(몽골어로 용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내렸고 호주(毫州) 만호로 임명했다.

1275년 10월, 장홍범은 군대를 돌려 북쪽으로 귀환한 뒤 진국상장군·강동도선위사(江東道宣慰使)에 임명되었다. 그가 대도(大都 북경)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쓰러지자 쿠빌라이는 특명으로 어의를 보내 치료하게 했으며, 매일 병세를 보고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가까운 시종을 보내 어의에게 구두로 전했다. “나에게 군국의 대사가 있어 구바투루(九拔都 장홍범)와 상의해 결정해야 하니, 반드시 정성을 다해 치료하여 그가 속히 건강을 회복하게 하라.” 쿠빌라이가 장홍범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278년, 쿠빌라이는 장홍범을 몽골한군원수(蒙古漢軍元帥)로 임명하여 남송의 작은 조정을 치게 했다. 출발하기 전 장홍범은 한인이 본래 몽골군을 통솔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들어 쿠빌라이에게 신임하는 몽골 신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그에 대한 전적인 신임을 표시하며 칼과 갑옷을 하사하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 칼로 처분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장홍범은 또한 이항(李恒)을 부사령관으로 추천하여 승인을 받았다.

과연 장홍범은 쿠빌라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애산에서 남송 조정의 마지막 잔존 세력을 소탕했으며 승상인 문천상을 포로로 잡았다. 다른 저항 세력들 역시 이를 계기로 기세가 꺾여 흩어졌다. 영해 일대가 평정된 후 장홍범은 애산 남쪽에 돌을 깎아 공적을 기록하고 돌아왔다.

1280년 10월, 큰 공을 세운 장홍범은 43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그는 은청영록대부(銀青榮祿大夫)·평장정사(平章政事)로 추증되었고 ‘무렬(武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311년에는 추충효절익운공신(推忠效節翊運功臣)·태사·개부의동삼사·상주국(上柱國)·제국공(齊國公)이 더해졌고 시호는 ‘충무(忠武)’로 바뀌었다. 1319년에는 보대공신(保大功臣)이 추가되었고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다시 ‘헌무(獻武)’로 고쳐졌다.

문천상과 함께 포로로 잡혔던 남송의 내부시랑 등광천(鄧光薦)은 장홍범과 교류가 많았는데, 장홍범이 병사한 후 이렇게 적었다.

“말안장에 의지해 종횡무진 누비고, 창을 가로지른 채 술을 마시며, 호령할 때마다 바람이 이니 그 호방하고 유쾌함은 하늘이 내린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그를 존재하게 하였으니, 이야말로 실로 고금을 통틀어 하나의 기이한 인물이로다.”

참고자료:
《元史》
《新元史》
《忽必烈傳》
《忽必烈和他的世界帝國》
《國朝名臣事略》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6/20/n1303480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