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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불법(佛法)이 흥성했던 양진남북조 시대 (3)

(265년—588년)

심연(心緣)

【정견망】

동진의 흥망(317년―420년)

제갈량(諸葛亮)은 《마전과(馬前課)》의 제2과에서 동진(東晉)이 서진(西晉)을 대체할 것을 예견하고 “강동에 호랑이가 있다(江東有虎)”고 했다. 그리고 제3과에서는 “어지러운 중원이여, 산하에 주인이 없도다. 두세 번 그 자리가 바뀌더니, 양(羊)에서 끝나고 말(馬)에서 시작되도다(擾擾中原, 山河無主, 二三其位, 羊終馬始).”라고 예언했다. 그렇다면 역사의 진실은 또 어떠했을까?

* 동진의 건국과 조적(祖逖)의 북벌

서진 말, 북방의 유연(劉淵)과 석륵(石勒)의 세력이 날로 강대해졌다.

317년, 진 민제(晉湣帝 사마업司馬鄴)가 투항했다는 소식이 건업(建業)에 전해지자 사마예(司馬睿)는 진왕(晉王)을 자칭했다. 이듬해 그는 제호(帝號)로 고치니 이가 바로 진 원제(晉元帝)이며, 건강(建康, 진 민제 사마업의 이름을 휘하기 위해 ‘건업’을 ‘건강’으로 고침)에 도읍하였으니 역사에서는 ‘동진’이라 부른다.

동진이 건국된 후, 원제는 국내를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중원의 전란으로 인해 많은 북방의 사족(士族)들이 남하했다. 동진 정부는 유민들이 집중된 곳에 그들의 원적지 명칭을 사용하여 주(州), 군(郡), 현(縣)을 임시로 설치했다. 교인(僑人, 이주민)들은 호적을 따로 세웠으니 이를 교호(僑戶)라 불렀다. 교호는 처음에 나라에 조세를 내지 않고 군역(軍役)을 서지 않는 우대를 받았으며, 나중에 조세를 낼 때도 일반 편호(編戶)보다는 가벼웠다.

동진 건국 후의 형세는 남방을 점유하고 있었고 그중 형주(荊州)의 세력이 양주(揚州)보다 강했으나, 북방 영토의 대부분은 유주(幽州)와 병주(並州)를 제외하고 모두 호인(胡人)의 손에 있었다. 그러므로 중원 수복은 동진의 뜻있는 인사들의 대외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강남에 편안히 안주하는 작은 조정을 세우는 것이 원제 사마예와 왕도(王導)의 공통된 생각이었기에, 그들은 북방에 뜻이 없었다. 당시 왕도가 조정 안에서 집정하고 왕돈(王敦)이 밖에서 군대를 장악해 세력이 매우 컸으므로, 당시에는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공유한다(王與馬, 共天下)”라는 말이 있었다. 원제는 왕돈을 형주자사로 임명해 중무장 병력을 이끌고 무창(武昌)을 진수하게 했다.

그러나 일부 뜻있는 이들은 편안히 안주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경구(京口, 지금의 강소 진강)에 거주하던 군자제주(軍諮祭酒) 조적(祖逖)이 사마예에게 상소를 올려 단호히 군대를 출정시켜 북벌할 것을 요구했다. 조적의 요구는 사마예 주변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조적의 요구를 직접 거절하여 중원 광복의 뜻을 품은 남하한 북방인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사마예는 조적에게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으니, 한편으로는 조적의 북벌에 동의해 그를 분위장군(奮威將軍)·예주자사(豫州刺史)로 임명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기와 갑옷을 공급하지 않고 군사도 모집해 주지 않으며 단지 1천 명분의 식량과 3천 필의 베만 주어 스스로 군대를 모집하게 했다.

조적은 범양(範陽) 수현(遒縣, 하북 내수淶水 북쪽)의 대족(大族) 출신으로, 서진 말기에 친족과 무리를 이끌고 경구(京口)로 이주했다. 그는 북방의 민심을 이용할 수 있으니 북벌이 성공할 희망이 있다고 여겼다. 조적은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넌 후, 회음(淮陰)에서 무기를 만들고 2천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전진하며 하남(河南) 일대의 오주(塢主) 세력을 초무했다. 조적은 사람을 열정적으로 대하고 사사로운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으며 장졸들과 동고동락하니, 비록 종족의 자제일지라도 모두 땅을 갈고 땔감을 짊어졌다. 그리하여 조적의 북벌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했으며, “석륵이 감히 하남으로 군대를 엿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왕돈의 난이 발발하자, 조적은 북벌 사업이 반드시 성과 없이 끝날 것임을 알고 우분(憂憤)으로 병이 들어 321년에 병사했다. 조적이 죽은 후 석륵이 다시 하남을 공격해 차지하면서 조적의 북벌은 실패를 고했다.

* 동진 정권 내부의 투쟁

왕돈이 무창을 진수하는 것과 동시에 원제는 또 왕씨의 세력이 너무 크다고 느껴 조협(刁協), 유외(劉隗), 대연(戴淵) 등을 중용했다. 322년, 왕돈은 간신 유외를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건강으로 쳐들어와 대연 등을 죽인 후 다시 무창으로 물러났다.

원제는 근심과 분노 끝에 죽고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왕돈을 양주목(揚州牧)으로 임명했다. 324년, 왕돈의 병이 위독해지자 명제는 왕돈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돈은 그의 형 왕함(王含)을 원수로 삼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다시 건강으로 진군하게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왕돈이 병사했고, 왕함은 군대가 무너져 살해당했다. 명제는 비록 재략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재위 3년 만에 병사했다. 그의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했으나 나이가 어렸기에 태후 유씨(庾氏)가 수렴청정했다. 태후의 오빠 유량(庾亮)이 집정했다.

당시 예주(豫州)자사 조약(祖約)은 배척을 받고 있었고, 역양(曆陽, 안휘 화현)내사 소준(蘇峻)은 왕돈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교만 방자했다. 유량은 소준과 조약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의심했다. 327년, 유량은 소준을 도읍으로 불러 대사농(大司農)으로 삼았다. 소준은 조정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조약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고, 건강으로 쳐들어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백관을 내쫓고 자기 심복들을 배치했다. 329년, 유량이 소준을 격파하고 건강을 수복했다. 이 후의 성제, 강제(康帝) 세대에는 정권이 모두 유씨 일가의 손에 장악되었다. 동진 정권은 잠시 안정되었다.

344년, 강제가 죽고 목제(穆帝)가 즉위했다. 환온(桓溫)을 형주자사로 임명하니, 그는 선후로 세 차례 북벌을 진행했다.

354년, 환온이 1차 북벌을 단행했다. 그는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이끌고 관중(關中)까지 직접 공격했으나, 나중에 전진(前秦)이 환온을 격파했고 진군(晉軍)은 식량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철군했다.

356년, 환온이 2차 북벌을 하여 낙양(洛陽)을 차지했다. 나중에 낙양은 다시 전연(前燕)에게 공략당했다.

369년, 환온은 5만 명을 이끌고 3차 북벌을 진행하여 서주(徐州), 연주(兗州)를 공격하며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역시 실패로 끝났다.

환온은 북벌 실패 후 오랫동안 조정의 정치를 독단했다. 373년, 환온이 병사하자 사안(謝安)이 집정하기 시작했다.

사안은 “화평과 고요함으로 진정시키고, 멀리 내다보는 계책으로 다스려” 각 방면의 모순을 완화시켰고, 조정과 재야의 옹호를 깊이 받아 동진에는 비교적 안정된 국면이 나타났다. 사안은 조카인 사현(謝玄 형의 아들)을 연주자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경구에 있는 북방의 유민과 강회(江淮)의 민병을 모집하게 하여 정예 신군(新軍)을 훈련시켰으니 이를 ‘북부병(北府兵)’이라 불렀다.

* 동진 시기 오호란국(五胡亂國)—“어지러운 중원이여, 산하에 주인이 없도다”

동진 내부에서 투쟁이 벌어지는 동시에, 북방의 호인(胡人)들 역시 상호 간의 정벌을 벌이고 있었으니, 각 소수민족의 상층부와 한족 관료 지주들이 분분히 정권을 건립하여 실로 ‘어지러운 중원’이었다. 유연이 한(漢)을 건국한 때부터 북위(北魏)가 북방을 통일하기까지의 130여 년의 시간을 역사에서는 ‘십육국 시기(十六國時期)’라 부른다.

다만 호인들이 건립한 정권은 모두 매우 단명했고 교체 역시 매우 빈번했으며 통일된 제왕이 부족했으므로 ‘산하에 주인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전진의 부견(苻堅) 때에 이르러서야 기본적으로 북방을 통일했고, 남방의 동진을 정벌하고자 결심했으니, 이로 인해 유명한 ‘비수대전(淝水之戰)’이 있게 된다.

* 전조(前趙)의 흥망

유총(劉聰)이 서진을 멸한 후, 한(漢)은 황하 중하류의 광대한 지역을 통제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민족의 백성들을 대거 평양(平陽)으로 이주시켰으며, ‘호인’과 한인을 나누어 다스리는 방법을 취했다. 좌우사례(左右司隸), 내사(內史), 영장(令長)을 두어 40여 만 호의 한인을 통치했고, 선우좌우보(單于左右輔), 도위(都尉)를 두어 흉노족을 포함한 20여 만 소수민족 인민을 통치했다.

유총 부자가 어리석고 무능한 데다 연이은 자연재해까지 겹치자 백성들이 살아가기 어려웠고, 통치계층 내부의 모순이 첩첩이 쌓였다. 유총이 죽은 후 대신 근준(靳准)이 정변을 일으켜 유총의 자손들을 모두 죽였다. 일부 대신들이 장안(長安)에 있던 유요(劉曜 유총의 6촌형)를 황제로 옹립했다. 318년, 유요는 군대를 평양으로 보내 근씨를 멸하고 장안으로 천도하여 국호를 조(趙)로 고치니, 역사에서는 이를 ‘전조(前趙)’라 부른다.

유요는 자가 영명(永明)으로, 유연의 친척 조카다.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고 기이한 도량이 있었다. 《진서(晉書)》에는 그가 “키가 9척 3촌이고 손을 내리면 무릎을 넘었으며, 태어날 때부터 눈썹이 희고 눈에는 붉은 빛이 있었으며 수염은 100여 가닥에 불과했으나 모두 길이가 5척이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성격이 시원스럽고 활달하며 다른 이들보다 뛰어났다. 또한 아주 힘이 세서 두께 1촌인 철판을 화살을 쏘아 뚫을 수 있었기에 당시 ‘신궁’이라 불렸다. 그는 자주 스스로를 악의(樂毅), 소하(蕭何)에 비유했다.

유요는 황제를 칭한 후, 국내에서 30여 만 명의 반항을 선후로 진압했고 또 농서(隴西)의 여러 부족을 항복시켰다.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한나라의 ‘호한(胡漢) 분리 통치’ 방법을 계속 사용했으며, 특히 각 부족의 상층 귀족을 이용해 그들의 원래 부족을 통치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또 한족 지주를 선발해 관직을 주었고, 조부(租賦) 제도를 채택했으며, 장안에 학교를 설립해 한족의 문화를 전하고 학습하게 했다. 상술한 조치들을 통해 전조(前趙)의 통치는 안정되어 갔다.

건국 초기의 유요는 간언을 수용할 줄 알았으니, 예컨대 능소대(陵霄台)와 자신의 능묘를 건축할 때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치스럽게 퍼붓지 않고 절약한 재물로 빈궁한 백성들을 구제했다. 예컨대 하늘의 경고 아래 자신의 잘못을 수정할 줄 알았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유요는 주색에 탐닉했고, 결국 석륵과의 전투에서 술에 취해 포로가 되었다. 330년, 전조가 멸망했다.

《진서·유요재기(劉曜載記)》의 기재에 따르면, 전조 말년에 “역병이 크게 유행하여 죽은 자가 10명 중 3, 4명이었다”라고 하니, 비록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사람이 역병으로 죽었다.

* 후조(後趙)와 염위(冉魏)의 흥망

319년, 갈인(羯人) 석륵(石勒)이 하북(河北)에서 조왕(趙王)을 칭하고 양국(襄國, 하북 형대)에 도읍했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후조(後趙)’라 부른다.

석륵은 한족 관료의 잔혹한 압박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기병 초기에는 한족 관리, 투항한 군사, 백성들을 대량으로 도살했다. 그때 각지의 지주나 호강(豪强)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분분히 오보(塢堡, 일종의 방어용 보루)를 만들어 스스로를 지켰고, 한인들은 전란을 피하기 위해 역시 오보로 투항했다. 오보는 당시에 ‘호인’ 귀족의 도살과 약탈에 저항하고 생산력을 보호하는 방면에서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한인들의 저항은 석륵에게 극심한 곤란을 안겨주어 그로 하여금 살육을 다소 거두게 만들었으니, 오보를 함락해도 더는 함부로 죽이지 않고 장정을 골라 병력을 보충하고 노약자는 예전처럼 생산에 종사하게 했다. 동시에 오보의 리더인 오주(塢主)를 관직에 임명하여 그들에게 인질을 보내고 군대를 위해 군량을 운송하도록 강제했다.

이후 석륵은 한족의 통치 경험을 학습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고 또 부하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기에, 살육과 약탈의 정책이 더욱더 변화했고 북방의 농업 생산이 회복되었다.

321년, 석륵은 유주, 기주(冀州), 병주 3개 주를 완전히 통제했다. 328년, 석륵은 전조의 제왕인 유요를 사로잡아 유폐시켰다. 330년, 전조가 망하자 석륵은 정식으로 황제를 칭했다. 이 시기 후조가 전성기에 도달하여 남쪽으로는 회하(淮河), 북쪽으로는 연대(燕代)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하서(河西),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대한 북방 구역을 점유했다.

333년, 석륵이 죽고 아들 석홍(石弘)이 제위를 이었다. 335년, 석륵의 조카 석호(石虎)가 석홍을 죽이고 자립해 황제가 되었으며 업(鄴)으로 천도했다.

석호는 사람이 상당히 잔인하고 폭력적이라 무고한 이들을 멋대로 도살했고, 사회 생산 역시 이로 인해 심각하게 파괴당했다. 그러나 그 세력이 아직 강했기에 권력은 여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349년, 석호가 죽자 여러 아들들이 권력을 다투며 서로 해쳤다.

한인(漢人) 염민(冉閔)은 석호의 양자로 성격이 용맹하고 사나웠다. 350년, 그는 석호의 아들을 다 죽이고 자립하여 황제가 되어 국호를 ‘위(魏)’로 고쳤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염위(冉魏)’라 부른다. 그는 등극한 후 호인들을 대대적으로 주살했다. 이때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요서(遼西)에서 일어나 후조의 내란을 틈타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352년, 염민은 위창성(魏昌城, 하북 무극)에서 모용씨와 교전하던 중 피살당했고 염위 정권은 멸망했다.

* 전연의 흥망

진 무제(晉武帝) 때, 선비족의 모용외(慕容廆)가 무리를 이끌고 요서로 이주했으며 위진(魏晉) 제도를 모방해 정치와 법률 제도를 수립했다. 서진 말 중원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한 무리의 한족 관료와 백성들이 모용씨에게 투항했다. 모용외가 죽은 후 셋째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즉위했다. 337년(함강 3년), 모용황은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전연(前燕)을 건립했으며 용성(龍城 요녕 조양)으로 천도했다.

전연은 위진의 제도에 따라 둔전(屯田)을 실시했고 문화 교육을 발전시키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348년 모용황이 죽은 후, 그의 둘째 아들인 모용준(慕容儁)이 연왕의 자리에 올랐고, 352년, 중산(中山, 하북 정현)에서 황제를 칭했고, 후조의 난을 틈타 중원으로 침입해 염위 정권을 소멸시켰다. 그러자 하북의 땅이 모두 전연으로 들어왔다. 모용준이 죽은 후 전연의 정치 날로 부패하여 백성들이 살기 어려워지자 사방으로 도망쳤다. 370년, 끝내 전진(前秦)에게 멸망당했다.

* 전량의 흥망

서진 말년, 장궤(張軌)가 양주자사(涼州刺史)가 되었다. 나중에 동진이 건국되자 장씨는 비록 그 봉호를 받아들였으나 실제로는 이미 할거(割據)를 시작했다. 그때 북방은 크게 어지러웠으나 오직 양주만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장궤는 양주에서 학교를 일으키고 경제를 발전시켰다. 장궤 및 그 후예들이 양주를 점거한 것이 모두 76년이니, 역사에서는 ‘전량(前涼)’이라 부른다.

전량 말년에는 정치가 날로 나빠졌다. 376년, 전량은 전진의 부견에게 멸망당했다.

* 전진의 흥기와 강성

전연이 중원으로 들어올 때, 저족(氐族)의 수령 부건(苻健)은 서쪽으로 관중에 들어가 장안을 점거했다. 351년, 부건은 천왕(天王)을 자칭하고 국호를 전(秦)이라 했으며 장안에 도읍했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전진(前秦)’이라 부른다.

부건은 비교적 현명한 군주였다. 그는 관중에서 부세를 경감하고 생산을 발전시켰으며 사족을 우대하고 유학을 존숭하여 전진의 각 방면에 약간의 생기가 나타나게 했다.

부건이 죽은 후 아들 부생(苻生)이 즉위했다. 부생은 잔인하고 무도해 얼마 지나지 않아 부건의 조카 부견(苻堅)이 한족과 저족 대신들의 지지 하에 부생을 죽이고 전진의 천왕이 되었다.

부견은 정사에 힘쓰고 비교적 업적이 있는 군왕이었다. 그는 저족 호강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인 왕맹(王猛)의 도움을 받아 내정을 개혁했다. 정치적으로 부견은 왕맹과 태원(太原)의 설찬(薛贊) 등을 중용해 정무의 핵심을 관장하게 한 것 외에도, ‘위진의 사적(士籍)을 복구하라(魏晉士籍)’는 명령을 내려 사족 지주의 특권을 옹호하고 한족 지주의 지지를 얻었다. 다른 부족의 상층 인사들에게도 환심을 사서 끌어들이는 정책을 취했다.

경제적으로 부견은 농업 생산을 매우 중시했다. 그는 자주 관리를 파견해 군국(郡國)을 순행하며 농상(農桑)을 권장하게 했다. 관중에 비가 적고 가물기 쉬운 상황을 겨냥해 그는 관중에서 한대의 구종법(區種法 구덩이를 판 곳에만 파종과 거름을 집중하는 농사법)을 보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중에 또 왕공과 부유한 집안의 노예 3만 명을 징발하여 수리를 다시 일으켰다. 농업을 발전시키는 것과 동시에 또 교통 사업 발전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사상적으로 부견은 학교를 널리 세우고 유학을 제창했다.

상술한 조치들을 통해 전진은 신속하게 강력해졌다.

전진 국력의 증강은 북방을 통일하기 위한 조건을 제공했다. 370년, 부견은 왕맹을 파견해 6만 군대로 전연(前燕)을 소멸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진은 또 구지(仇池)의 양찬(楊纂)을 항복시키고 그 땅에 남진주(南秦州)를 두었다. 양주의 할거 세력과 청해(青海)를 점거한 토욕혼(吐穀渾) 역시 사신을 보내 신하가 되기를 칭했다. 성한(成漢 사천성 성도에 도읍한 한)은 347년 동진의 환온에게 멸망당한 후 파(巴), 촉(蜀)과 남중(南中)이 동진의 통할로 귀속되어 있었다. 373년, 부견은 군대를 보내 한중(漢中), 익주(益州)를 공략했고 남중의 여러 부족이 모두 항복하니, 전진은 한중에 양주(梁州)를 두고 파촉에 익주를 두었으며 남중에 영주(寧州)를 두었다.

376년, 부견이 전량을 멸했다. 같은 해, 또 선비 탁발부(拓跋部)가 대북(代北)에 건립한 대국(代國)을 멸해 마침내 북방을 통일했다.

382년 1월, 부견은 군신들을 소집해 남벌(南伐)을 상의하고 중국을 통일할 준비를 했다. 당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벼이 망동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으나 부견은 도리어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다. 이듬해 7월, 부견은 대거 진(晉)을 정벌한다는 조서를 내리고 전국에서 군사를 징발했다. 8월, 부견은 장안을 출발했으니 보병이 60만 명, 기병이 27만 명으로 “깃발과 북이 서로 바라보며 앞뒤로 천 리에 달했다.” 각지에서 한꺼번에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이때 부견은 매우 교만하여, 출발하기 전에 동진 황제와 재상이 포로가 된 후의 관호와 공관까지 모두 준비해 두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