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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불법(佛法)이 흥성했던 양진남북조 시대 (4)

(265년—588년)

심연(心緣)

【정견망】

남북 대치를 확립한 비수대전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한다는 소식을 들은 동진의 재상 사안(謝安)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처하며 동생 사석(謝石)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삼고, 조카인 사현(謝玄)을 선봉으로 삼아 8만 북부병(北府兵)을 거느리고 맞서 싸우게 했으며, 별도로 수군 5천 명을 파견하여 수춘(壽春)을 증원했다.

10월, 전진의 선봉 부융(苻融)이 수춘을 공격해 차지하고 한편으로는 협석(硤石)을 공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양성(梁成) 등 5만 명을 파견하여 낙간(洛澗, 안휘 정원定遠 서쪽)에 진주시키고 회수(淮水)를 봉쇄해 진군(晉軍)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저지당한 진군은 낙간에서 25리 떨어진 곳에 주둔했다. 부견이 진군 선봉의 군량이 부족하다는 정황을 알게 된 후, 친히 정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배의 거리를 달려 수춘으로 가서는 포로로 잡았던 동진 장수 주서(朱序)를 동진 진영에 보내 사석에게 투항하라고 위협했다.

주서는 사석을 만난 후 전진 군대의 허실을 알려주며, 전진의 대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틈을 타 그 예기를 꺾어 승리를 차지하라고 권했다. 사석은 주서의 건의를 채택해 명장 유뢰지(劉牢之)를 파견해 정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밤에 낙간을 기습하게 하니 전진 군대 1만 5천 명을 섬멸했다. 사석 등은 또 대군을 거느리고 회수를 따라 전진하여 비수(淝水) 동쪽 기슭에 이르러 전진 군대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부견은 진군이 공격해 왔다는 말을 듣고 부융과 함께 수춘성에 올라 형세를 바라보았는데, 진군의 대오가 엄정함을 보고 또 팔공산(八公山, 안휘 수춘 북쪽) 위의 초목을 바라보며 모두 동진 군사라고 생각하여 다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진 군사들이 비수에 임해 진을 치자, 사현은 사람을 보내 부융에게 진지를 뒤로 옮겨 동진군이 강을 건너 결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부견은 동진 군이 반쯤 건넜을 때 돌연한 습격할 의도로 군대를 휘둘러 후퇴시켰다. 뜻밖에 대오가 이로 인해 크게 어지러워졌고, 주서가 또 진영 뒤에서 연달아 “부견이 패했다!”라고 외치니 전진 군대는 한번 후퇴한 걸음을 다시 멈출 수 없었다.

동진군은 승세를 타고 추격했고 전진 군대에서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다. 부견은 혼전 중에 날아온 화살에 맞은 채 단기(單騎)로 회북(淮北)으로 도망쳤고 낙양(洛陽)에 이르러 남은 무리를 점검하니 10여 만 명에 불과했다.

비수대전은 전진이 전국을 통일하고자 시도했던 한 차례 전쟁이자, 동진(東晉)이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와 싸워 승리를 거둔 전쟁이다.

비수대전 이후, 남방은 동진의 승리로 인해 한 차례 혼란과 파괴를 면하여 경제와 문화가 계속 발전할 수 있었고, 북방은 다시 분열되었다. 남북이 장기 대치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비수대전 이후 동진의 발전

비수대전 이후 사안의 권력이 한층 더 커지자 효무제(孝武帝)의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압력을 받아 광릉(廣陵)으로 출진하면서 중앙 권력을 효무제의 동생인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司馬道子)에게 넘겨주었다. 사안이 죽은 후 사마도자가 군정 대권을 독차지했고, 태원의 대족(大族)인 왕국보(王國寶) 등을 끌어들여 정사에 참여하게 하고, 남연주자사(南兗州刺史) 왕공(王恭), 형주자사 은중감(殷仲堪)을 배척했다. 이듬해 왕공과 은중감은 왕국보를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켜 사마도자에게 반대했다. 사마도자는 막아낼 힘이 없자 왕국보 등을 죽이고 왕공에게 군대를 물리기를 청했다. 이때 무제가 죽고 안제(安帝)가 옹립되었다.

이듬해 왕공이 두 번째로 군사를 일으키자 은중감과 광주자사(廣州刺史) 환현(桓玄, 환온의 아들) 등이 군사를 일으켜 호응했다. 나중에 왕공의 부장 유뢰지가 배반해 왕공이 살해당했고 환현이 은중감 등의 세력을 섬멸하니 이번 연합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이때 환현은 장강 중류를 점거하고 있었고, 유뢰지는 장강 하류 북쪽 기슭을 통제했으며, 고아지(高雅之)는 회남(淮南)을 통제했다. 결과적으로 동진 중앙이 직접 통제하는 지역은 회계(會稽, 절강 소흥), 영가(永嘉, 온주), 신안(新安, 순안), 오(吳, 소주) 등 8개 군에 불과했으므로 동진 정부는 모든 부담을 이 8개 군의 백성들에게 가하여 부세를 증가시켰다.

비수대전 이후 북방의 혼전

* 관동(關東) 지역 정권의 경질

비수대전 이후 전진은 점차 와해되었다. 원래 부견의 통제 아래 있던 각 부족의 상류층들이 분분히 자기의 정권을 건립하니 반 세기 남짓한 시간 동안 북방은 다시 분열과 혼란 속에 빠졌다. 384년부터 439년까지 북방의 각 소수민족은 앞뒤로 13개의 정권을 건립했다.

관동 지역에서 가장 먼저 정권을 건립한 이는 비수대전에서 실력을 보존했던 전연(前燕)의 귀족 모용수(慕容垂)였다. 384년, 그는 자칭 연왕(燕王)이라 하고 중산(中山, 하북 정현)에 도읍했으니 역사에서는 ‘후연(後燕)’(384년~407년)이라 부른다.

이듬해 모용충(慕容衝)이 황제를 칭하고 장자(長子, 산서 장치長治)에 도읍했으니 역사에서는 서연(西燕)이라 부른다.

386년, 선비족 탁발규(拓跋珪)가 대왕(代王)을 자칭하고 성락(盛樂, 내몽골 호린게르)에 도읍했다가 나중에 국호를 위(魏)로 고쳤으니 역사에서는 ‘북위(北魏)’라 부른다.

384년, 강족(羌族) 요장(姚萇)이 자칭 진왕(秦王)이라 하고 장안(長安)에 도읍했으니 역사에서는 ‘후진(後秦)’(384년~417년)이라 부른다. 후진은 한족 지주를 임용하고 탐오를 처벌하며 형옥(刑獄)을 정돈하고 가혹한 법을 폐지하여 전진 말년의 혼란한 국면이 다소 변했다.

그의 후계자 요흥(姚興)은 유학과 불교를 제창했고 또 농업 생산을 발전시키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후진은 요흥 때 단번에 강성해져서 서쪽으로는 하서(河西), 동쪽으로는 서주, 연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제했다. 그러나 연이은 전쟁으로 ‘나라에 물자가 부족’해지자 잡세를 증가시켜 계급 모순이 첨예해졌고 인민들이 끊임없이 반항했으며 각 부족도 이 틈을 타 난을 일으켰다. 417년, 유유(劉裕)가 후진을 멸했다.

후연은 건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진의 세력을 소멸시켰다. 392년 적조(翟釗)가 건립한 위국(魏國)을 멸했고, 1년 격해 또 서연을 멸하여 전연의 판도를 회복했다. 395년, 후연은 북위를 대거 공격했으나 위군에게 패했다. 모용수가 죽고 아들 모용보(慕容寶)가 지위를 잇자 내부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때 북위가 도성인 중산과 하북의 몇몇 군현을 공격하니 후연은 남연(南燕)과 북연(北燕)으로 분할되었다.

398년, 모용덕(慕容德)이 업성(鄴城)에서 활대(滑台)로 옮겨 자칭 연왕이라 했다가 나중에 광고(廣固, 산동 익도益都)에 도읍했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남연(南燕)(398년~410년)이라 부른다. 410년, 진(晉)의 유유(劉裕)가 북벌해 남연을 멸했다.

후연 말년에는 정치가 부패하여 위아래로 원망과 배반이 일어났다. 이에 대신 풍발(馮跋)이 기회를 틈타 정권을 탈취하고 연왕(燕王)을 칭하며 용성(龍城)에 도읍을 정하니, 역사는 이를 북연(北燕, 409년~436년)이라 부른다. 북연은 후연의 폐단을 개혁하고, 관리들의 기강을 정돈했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학교를 세우는 등 제법 새로운 기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선비족 귀족들이 자신들의 이익이 충족되지 않자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켜 국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나중에 북위(北魏)에 의해 멸망당했다.

* 하서주랑(河西走廊) 지역 정권의 경질

하서주랑 지역에서 가장 먼저 정권을 건립한 것은 서진(西秦)이다. 서진(385년~431년)은 농서 선비족 걸복국인(乞伏國仁)이 건립한 것으로 완천(宛川, 감숙 유중)에 도읍했다. 비수대전 때 그는 부견을 따라 남정했다가 전쟁 후 본부로 돌아와 자립했다. 나중에 하(夏)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비수대전 전, 부견은 저인(氐人) 여광(呂光)을 파견해 서역을 정벌하게 했다. 여광이 구자(龜茲)를 공격하니 “왕후(王侯)로서 항복한 자가 30여 국”이었다. 비수대전 후 그는 스스로 양주자사가 되었다. 부견이 죽자 그는 후량(後涼)(385년~403년)을 건립하고 고장(姑臧, 감숙 무위)에 도읍했다. 그는 한인 단업(段業), 노수갈인(盧水胡人) 저거라구(沮渠羅仇) 등 5명을 상서(尚書)로 삼았다. 나중에 고의로 라구를 죽이자 라구의 조카 저거몽손(沮渠蒙遜)과 단업(段業)이 이어 후량을 배반했다.

여광의 조카 여륭(呂隆) 때 내부 모순이 첨예해졌고 밖으로는 북량(北涼)과 남량(南涼)의 공격이 있어 여륭은 후진(後秦)에 투항했다. 저거몽손은 반란을 일으킨 후 단업을 주인으로 추대하고 양왕(涼王)이라 칭하며 장액(張掖)에 도읍했으니 역사에서는 ‘북량(北涼)’(397년~439년)이라 부른다. 이후 몽손이 단업을 죽이고 자립했다가 나중에 북위에 의해 멸망당했다.

남량(南涼)(397년~414년)은 염천보(廉川堡, 청해 낙도樂都)에 도읍했으니 하서(河西) 선비족 독발오고(禿發烏孤)가 건립한 것이며 나중에 서진에 의해 멸망당했다.

서량(西涼)(400년~421년)은 한인 이고(李暠)가 건립한 정권으로 선후로 돈황(敦煌), 주천(酒泉)에 도읍했다. 이고는 생산을 발전시키는 데 주의를 기울여 “해마다 곡식이 자주 풍년이 들고 백성들이 즐겁게 업에 종사했다.” 또 옥문(玉門), 양관(陽關) 일대에 둔전하여 세력이 서역에 두루 미쳤으나 나중에 북량에 의해 멸망당했다.

십육국 시기의 정권은 대부분 ‘호인’ 귀족을 위주로 한 ‘호’, 한 상층 집단의 연합 통치였다. 그 내부 모순이 복잡했기 때문에 이 정권들이 존재한 시간은 모두 길지 않았다.

불교가 동진 남북방에 광범위하게 전파

불교는 동진 시대에 남북 구역을 형성했으니, 북방 소수민족이 건립한 이조(二趙), 삼진(三秦), 사연(四燕), 오량(五涼) 및 하(夏), 성한(成漢) 등 십육국의 통치자들은 대부분 불교를 신앙하고 게다가 제창했다. 후조(後趙), 전후한(前後漢), 북량(北涼)에서는 모두 불교가 성행했으며, 특히 전진과 후진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신앙했고 몇몇 고승들이 나왔으니 대표 인물은 도안(道安)과 구마라집(鳩摩羅什)이다. 이 밖에 신이(神異)함으로 유명한 불도징(佛圖澄)은 후조의 석륵, 석호의 숭봉을 얻었기 때문에 화북의 불교가 보전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남방의 동진 왕조는 그 문화가 서진 문화의 연장이었다. 몇몇 유명한 승려들이 끊임없이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여산(廬山)과 건강(建康) 두 곳의 불교가 흥성했으니 대표적인 인물로는 혜원(慧遠)과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있다.

동진 조정 안에서도 불교를 믿는 이들이 매우 많았으니 원제와 명제는 모두 사문(沙門)을 예경했고, 원제는 또 “와관사(瓦官寺), 용관사(龍官寺) 두 절을 짓고 단양(丹陽)과 건강에서 천 명의 승려를 출가시켰다.” 명제 역시 “황흥사(皇興寺), 도량사(道場寺) 두 절을 짓고 문학적인 능력이 있는 백 명의 승려를 모았으며”, 적지 않은 제실(帝室), 조정 귀족(朝貴), 명승(名僧) 및 일반 사인들, 예컨대 허순(許詢), 왕희지(王羲之) 등도 불사 건축에 심취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동림(東林), 와관(瓦官), 장간도량(長幹道場) 등의 절이 모두 이 시기에 건축되었다.

이 시기 북방 불사(佛寺)의 건축도 아주 강성했다. 불도징이 북방에 세운 불사만 해도 893소였고, 후진의 요흥은 “영귀리(永貴裏)에 부도(浮圖 탑)를 만들고 반야대를 세웠으며 한가운데에 수미산을 만드니 사면에 높은 암석과 가파른 절벽,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 수풀과 풀이 정밀하고 기이했고 신선과 불상이 모두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거창한 불교 건축이다.

동진 말년의 천재(天災)와 북방 통일 전쟁

동진 말년 안제(安帝) 시기에는 전란이 극심해졌고 역병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405년 10월에는 유행성 반진상한(斑疹傷寒 피부질환을 동반한 급성 감염병)이 발생해 상황이 비교적 심각했다. 408년 유경선(劉敬宣)이 촉을 정벌할 때 부대에 역병이 크게 돌았다. 411년 봄에도 또 큰 역병이 나타났다. 역병의 지속적인 유행은 대량의 인구 사망과 심각한 기황(饑荒)을 조성했다. 이는 마치 동진 왕조가 쇠망의 운명으로 걸어가고 있음을 예시하는 듯했다.

동진 말년, 비참한 운명을 감당하지 못한 백성들이 낭야의 대족인 손태(孫泰), 손은(孫恩)의 영도 하에 강동(江東)에서 대규모 봉기를 폭발시켰고 강동 8개 군을 점령했다. 나중에 진군(晉軍)에 진압당해 섬으로 퇴각했다. 404년, 의군(義軍)이 수로를 통해 광주(廣州)를 점령했다.

그리고 이때 동진 왕조 내부에도 혼란이 출현했다. 402년, 회계왕 사마도자의 세자 원현(元顯)이 형주에 기근이 발생한 틈을 타 군사를 일으켜 환현을 토벌했다. 환현은 건강으로 난입해 원현, 도자와 북부병 장수 유뢰지 등을 죽이고 동진의 대권을 장악했다. 이듬해 환현은 안제를 폐위하고 자립해서 국호를 초(楚)라 했다.

404년, 동진의 대장 유유가 환현을 토벌하고 소멸시키니 동진 정권이 유유의 손에 떨어졌다. 유유는 상당히 재략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동진의 대권을 장악한 후 일련의 개혁을 진행했으니 주요하게는 다음과 같다.

하나, 공직 기강을 바로잡았다. 그가 파면하거나 죽인 관리 중에는 사족(士族)이나 황족 출신이 많았다. 그의 심복과 공신 중에서도 ‘교만하고 방자해서 사치스럽게 정사를 돌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마찬가지로 엄하게 징벌했고 심지어 죽이기도 했다.

둘, 재능이 있는 한인(寒人, 문벌이 낮은 사람)을 중용했다. 동진 시기 관리를 선발할 때는 주로 문벌에 의거했으니 소위 “하위직에는 세도가가 없고 고위직에는 천한 가문이 없다(下品無高門, 上品無賤族)”는 것이다. 이렇게 선발된 관리들은 대부분 재능도 식견도 없는 무리들이었다. 유유는 권력을 잡은 후 이러한 상황을 개혁하라는 명령을 내려, 구품중정제가 처음 설치될 때의 정신에 따라 인재를 선발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출신이 ‘한미(寒微)’한 사람들을 중용했으니, 예컨대 유목지(劉穆之), 단도제(檀道濟), 왕진악(王鎮惡), 조륜지(趙倫之) 등이다.

셋, 원적지가 아니라 현재 거주지를 중심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토단(土斷)’을 계속 실행해 겸병을 억제했다. 호강들이 산택(山澤)을 가로막고 멋대로 조세를 거두는 것을 금지하여 백성들이 임의로 땔나무를 하고 고기를 잡을 수 있게 했다.

넷, 부역 제도를 정돈했다. 유유는 지방 관리가 조세와 요역을 함부로 징수하는 것을 엄금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조세와 요역은 모두 현존하는 호구를 기준으로 삼도록 규정했다. 무릇 주, 군, 현의 관리가 관부의 이름을 빌려 둔전과 정원을 점거한 자는 일률로 폐지했다. 무릇 궁부(宮府)에 필요한 물자는 ‘백성과 매매해’ 가격대로 돈을 주었으며 함부로 거두지 못하게 했다. 그는 또 잡세와 요역 등을 경감했다.

유유의 정치, 경제에 대한 정돈은 정치와 사회 상황을 개선시켰고 노동 인민의 고통 역시 이로 인해 다소 경감되었다.

이 밖에 전국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유유는 또 군대를 거느리고 북진했다.

409년, 유유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북벌하여 수로와 육로로 병진하며 남연의 군대를 연달아 격파했다. 410년, 남연을 공격해 멸해 버렸다. 이때 후방이 공허했다. 의군(義軍)이 기회를 틈타 광주에서 출발하여 두 길로 북벌하니 봉기군이 건강을 직접 쳐들어왔다. 유유는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돌려 진압했다. 416년, 후진에 권력 다툼 투쟁이 발생하자 유유는 기회를 틈타 두 길로 출병하여 이듬해 8월 장안을 공격해 후진을 멸해 버렸다.

동진의 멸망

유유는 공이 높고 권력이 컸기 때문에 안제 416년 상국(相國)에 임명되었고 송공(宋公)에 봉해졌다. 이듬해 왕(王)으로 작위가 올라갔다. 418년, 안제가 죽고 공제(恭帝)가 옹립되니 유유가 보정(輔政)하며 동진의 군정 대권을 장악했다. 420년, 공제가 선위(禪位)하자 유유가 정식으로 황제를 칭하니 이가 무제(武帝)이며 국호는 송(宋)이라 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유송(劉宋)’이라 부르며 연호는 ‘영초(永初)’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