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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전】 12 농업 장려, 세제 정비, 운하 개통과 역법 제정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전후로 토번(吐蕃), 대리(大理), 남송(南宋) 왕조를 차례로 정복한 쿠빌라이는 진정한 전국 대통일을 실현했다. 통일 이후 원조(元朝)의 강역은 광활하여 “북으로는 음산(陰山)을 넘고, 서로는 유사(流沙)에 이르며, 동으로는 요동, 남으로는 해표(海表 바다 너머 섬과 해외 지역)를 넘었다.”

전국의 대일통은 백성들에게 안정된 생활 환경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에도 유리하게 작용해 남북의 경제·문화 교류를 더욱 촉진하고 각 민족 간의 융합을 강화했다. 당시 많은 몽골인과 색목인(色目人)이 중원 내지로 유입되어 한인(漢人)과 섞여 살았고, 변방의 소수민족 지역으로 이주하는 한인들도 있었다.

이처럼 거대한 제국을 마주한 쿠빌라이 칸은 전국적인 범위에서 한법(漢法·한족의 제도와 법식)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지폐 발행법(行鈔法)을 제정했으며, 수리 교통을 강화하는 등 다방면의 정책을 펼쳤다.

농업과 잠업 장려로 거둔 성과

농업과 잠업(農桑)은 예로부터 국가의 근본이었기에 역대 명군(明君)들은 이를 매우 중시했다. 중원에 진출해 천하를 통일한 쿠빌라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한족의 풍습에 정통했던 그는 “누에를 치지 않고 옷을 입으며, 농사를 짓지 않고 밥을 먹는다”던 몽골인의 오랜 관습을 바꾸어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중요시했다. 그는 대칸의 자리에 오를 때 가장 먼저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고 입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며, 먹고 입는 것은 농업과 잠업을 근본으로 삼는다”라고 천하에 선포했다. 이를 위해 그는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째, 농업 장려 기구를 설치했다.

농업을 권장하는 관리인 권농관(勸農官) 제도는 오구데이 시기에 시작되었으나, 쿠빌라이는 대칸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농업을 중시했다. 1251년, 쿠빌라이는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장경(張耕)과 유숙(劉肅)을 형주안무사(邢州安撫使)와 부사(副使)로 임명했다. 그 결과 “유랑하던 백성들이 생업으로 복귀”하여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가구 수가 10배로 증가”했다. 1253년에는 요추(姚樞)를 보내 “경조선무사(京兆宣撫司)를 세우고 패란(孛蘭)과 양유중(楊惟中)을 사(使)로 삼으니, 관롱(關隴) 지역이 크게 다스려졌다.” 1254년에는 염희헌(廉希憲)을 관서도선무사(關西道宣撫使)로, 요추를 권농사(勸農使)로 임명했다.

1260년, 쿠빌라이는 각 지역 선무사에 명령해 농사에 정통한 자를 골라 수시로 권농관에 임명하도록 했다. 이듬해에는 권농사(勸農司)를 설치하고 진수(陳邃), 최빈(崔斌) 등 8명을 권농사(勸農使)로 삼았다. 1270년에는 “왕정(王政)은 마땅히 농업과 잠업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좌승상(左丞相) 장문겸(張文謙)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농사(司農司)를 세우고 장문겸을 경(卿)으로 임명해 농업, 잠업, 수리를 전담하게 했으며, 사도순행권농사(四道巡行勸農司)를 두어 관리들의 근면함과 게으름을 살피도록 했다. 같은 해 말, 사농사를 대사농사(大司農司)로 개편하고 순행권농사·부사 각 4명을 추가로 배치했다. 쿠빌라이 칸은 또한 각 주현(州縣)의 장관들에게 매년 연말마다 농업 장려 성과를 대사농사와 호부(戶部)에 보고하게 하여 이를 상벌의 기준으로 삼았다.

1281년 대사농사는 농정원(農政院)으로 개편되었고, 2년 후 무농사(務農司)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농시(司農寺)가 되었다. 그리고 3년 뒤 다시 대사농사로 복구되었다. 1289년에는 면화 재배를 확대하기 위해 목면제거사(木棉提舉司)를 설립했다.

권농사와 대사농시의 주요 책무는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여 “농토를 개간하고 뽕나무와 삼을 무성하게 키우는 것”이었으며, 목면제거사의 임무는 북방 밀 재배 지역에 면화 지배를 보급하고 방직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쿠빌라이와 이후 원조 황제들이 여러 차례 대사농사 등에 조서를 내려 농업을 독려한 것만 보아도 이들이 농업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木棉提举司的职责是在北方小麦区推广种植木棉,改进纺织技术。示意图,图为清陈枚绘 《画耕织图之攀花》局部。(公有领域)

목면제거사(木棉提舉司)의 직책은 북방 밀 지역에서 목면(면화) 재배를 권장·보급하고, 방직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시의도, 이 그림은 청 진매(陳枚)가 그린 《화경직도지반화(畫耕織圖之攀花, 경직도 중 꽃을 꺾는 그림)》의 일부분이다. (공유 영역)

둘째, 여러 차례 농상령(農桑令)을 발표하여 농작물 재배에 대한 지침을 제시했다.

예컨대 1270년에 반포된 《농상지제일십사조(農桑之制一十四條)》에서는 “사장(社長)과 관사장(官司長)을 세워 농민들을 지도하고 감독하게 한다. (…) 재배 규정에 따라 정남(丁男) 한 명당 매년 대추나무 20그루를 심는다. 토질이 적합하지 않은 곳은 느릅나무나 버드나무 등을 같은 수만큼 심도록 허용한다. 갖가지 과일나무는 한 명당 10그루씩 심되, 모두 살려 키워낸 수를 기준으로 삼으며 더 많이 심기를 원하는 자는 자율에 맡긴다”라고 규정했다.

셋째, ‘사(社)’를 세워 농업과 잠업을 장려하고 생산 지식과 기술을 보급했다.

쿠빌라이 시기 향촌에서는 50가구를 하나의 농사 공동체인 ‘농사(農社)’로 묶고, 나이가 많고 농사에 밝은 사람을 사장(社長)으로 선출하여 향민들의 농업 수리 발전을 독려하고 효제(孝悌)를 숭상하며 사설 교육기관을 열도록 유도했다. 안찰사(按察使)나 총관(總管) 등의 관리들은 권농문(勸農文)과 권선서(勸善書 선을 권고하는 글)를 작성하여 쉬운 글로 농사 기술을 소개했고, 현관(縣官)들이 사장과 동네 훈장 등에게 이를 널리 알리도록 했다. 1278년 하남하북도 제형안찰사(河南河北道提刑按察司)가 발표한 《권농문》에는 “소재지 관청은 이미 내려진 조항에 의거하여 향촌을 두루 돌며 성천자(聖天子)의 덕이 담긴 뜻을 받들어 선포하고, 사장과 노인 등에게 매사에 힘써 시행하도록 권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1273년, 사농사 관리들은 쿠빌라이 칸의 명을 받아 동서고금의 모든 농사 관련 서적을 참고하여 《농상집요(農桑輯要)》 7권을 편찬했다. 선진 농업 기술을 보급해 백성들이 근본(농업)을 숭상하고 말업(상업)을 억제하기를 바란 것이다. 1279년 회서강북도 안찰사(淮西江北道按察司)는 “서적을 구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좋은 양잠 방식”을 행어사대(行御史台)를 통해 각지에 보급했다.

1286년 6월에는 “대사농사가 정한 《농상집요》를 여러 로(路)에 반포하라”는 조서가 내려졌고, 이후 약 5~6년마다 1,400~1,500부씩 인쇄되어 총 발행 부수가 약 2만 부에 달했다. 《원사(元史)》는 쿠빌라이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지혜롭고 뛰어난 식견이 옛 제왕들과 다름없으니, 어찌 요(遼)나라나 금(金)나라 따위가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극찬했다.

넷째, 농토를 목초지로 점거하는 행위와 농작물을 훼손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몽골인들은 전통적으로 유목 생활을 해왔기에 중원을 차지한 이후 몽골 귀족과 군대는 수많은 농토를 점령해 말을 방목하는 목장으로 삼았다. 이에 쿠빌라이는 즉위 후 이를 엄격히 금지하는 명을 여러 번 내렸고, 수많은 목장을 다시 농지로 환원시켰으며 약탈한 인구를 노비로 삼는 것을 금지했다. 아울러 몽골인들에게도 농경을 장려하고 황무지 개간을 독려했다.

농잠업 권장과 더불어 수리 시설 건립도 중시되었다. 1261년 하남(河南) 지역에 광제거(廣濟渠)를 뚫어 3,000여 경(頃)에 달하는 민간 농지에 물을 댈 수 있게 했다. 이듬해에는 수리에 정통한 곽수경(郭守敬)을 임명해 여러 지역의 하천과 운하를 총괄하게 했다.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부담을 덜어주려 한 쿠빌라이의 정책은 10년이 지나자 눈부신 성과로 나타났다. 황하 유역의 농업 생산은 비교적 빠르게 회복하거나 발전했고, 민간에서 개간한 농지는 이전보다 몇 배로 늘어났다. “들판에 버려진 땅이 없고 재배의 이로움이 천하에 가득”했으며, “집집마다 풍족하고 사람마다 넉넉했다.” 백성의 삶은 더욱 안정을 찾았고 매년 곡식이 풍성하게 여물었다.

농업과 잠업이 발전하면서 쿠빌라이 시기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명초(明初) 사신(史臣)은 이렇게 평가했다. “세조(世祖·쿠빌라이)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집집마다 풍족하고 사람마다 넉넉했다. 천하의 가구 수는 총 1,163만 3,281호였고, 인구는 총 5,365만 4,337명에 달했으니, 근본을 돈독히 한 명백한 효험을 여기에서 똑똑히 볼 수 있다.”

黄河流域的农业生产得到了较快的恢复和发展,民间开辟农田较以往增加了数倍。图为清 陈枚《耕织图册‧一耘》。(公有领域)

황하 유역의 농업 생산은 비교적 빠른 회복과 발전을 얻었고, 민간에서 개척한 농토는 이전과 비교해 몇 배로 증가했다. 그림은 청 진매(陳枚)의 《경직도책·일운(耕織圖冊‧一耘, 경직도 화첩 중 첫 번째 김매기)》이다. (공유 영역)

세제 정비로 국가 재정 수입 확충

세금 수입은 어떤 정권이든 정권 유지에 지극히 중요하다. 1260년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후 한인 왕문통(王文統)을 중서성평장정사(中書省平章政事)로 임명해 재정 사무를 전담하게 했다.

왕문통은 재주와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익도(益都)의 세후(世侯·대를 이어 지역을 통치하던 군벌) 이단(李璮)이 그를 크게 아껴 자신의 아들 이언간(李彥簡)의 스승으로 삼고 또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지략이 넘쳤던 왕문통은 이단을 도와 남송 군대로부터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던 연수(漣水)와 해주(海州·지금의 강소 연수와 연운항)를 빼앗는 데 기여하며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 후 재정 관리 능력도 탁월했던 왕문통은 유병충(劉秉忠) 등의 추천으로 중서성에 들어가 일상 정무와 재정을 총괄하게 되었으며, “백성들의 세금 징수와 소금·철 등의 전매 제도(宣課)”에 관한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왕문통은 가장 먼저 호적을 정돈했다. 한지(漢地·한인 거주 지역)의 인구를 분류한 뒤 각자 조정에 납부해야 할 세금과 부역을 확정했다. 이러한 정리를 통해 몽골 통치 초기 호적의 귀속과 세금 부역이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1차적으로 바로잡고 조정의 수입을 늘렸다.

두 번째로 소금세(鹽稅) 수입을 조정했다. 쿠빌라이가 “사사로이 소금, 술, 식초 및 누룩 등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행위를 엄금한다”는 금령을 내린 상황에서, 왕문통은 관청에서 독점 영업하는 식초와 소금의 가격을 1인(引·고대 상인들이 화물을 운송할 때 규정된 무게 단위)당 백은 10냥에서 7냥으로 인하했다. 이는 관부에서 소금 상인들에게 소금 유통 허가증인 염인(鹽引)을 대량으로 도매하고 판매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해 오히려 조정의 수입을 증가시켰다. 아울러 각 지역의 소금 경영에 대한 관리 감독도 강화했다. 소금세 수입은 대원(大元) 왕조의 가장 중요하고 안정적인 재정 수입원 중 하나가 되었다.

세 번째로 행중서성(行中書省)에 명하여 지폐인 ‘중통보초(中統寶鈔)’를 발행하도록 했다. 액면가는 10개 등급으로 나뉘었으며 영주(潁州), 연수, 광화군(光化軍)에 교역 시장을 설립했다.

‘초(鈔)’는 원대(元代)에 통용되던 종이 화폐의 약칭이다. 원 이전의 송(宋)이나 금에서도 지폐를 발행하긴 했으나 모두 동전과 병용했다. 금조(金朝) 말기에는 지폐를 남발하는 바람에 가치가 폭락하여 민간에서는 점차 은(銀)으로 가격을 매겨 거래하게 되었고, 은과 비단이 실질적인 주요 교환 매개이자 가치 척도가 되었다. 오구데이 시기에도 교초(交鈔)를 발행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으나, 당시 각 지역 지방정부들이 무역 편의와 경비 조달을 위해 자체적으로 지폐를 찍어 인근 지역에서 유통하는 바람에 일정한 혼란과 불편이 야기되었다.

중통초는 은을 본위로 삼았으며 법정 가격은 중통초 1관(貫)을 백은 1냥과 같게 책정했다. 중통초는 시기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전국 어디서나 통용되었으며, 동시에 순수 지폐 제도를 시행해 금은과 동전의 유통을 금지했다. 민간에서 세금을 낼 때는 모두 보초를 사용하도록 했고, 여러 지역에서 쓰이던 기존의 옛 지폐는 기한을 정해 발행 관청에서 전량 수거해 교환한 뒤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못 박았다. 모든 지불과 각종 세금 납부는 오로지 초(鈔)로만 이루어지도록 규정한 것이다. 1287년에는 재정 금융을 정돈하기 위해 ‘지원금초(至元金鈔)’를 추가로 발행했다. 두 지폐는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나란히 유통되었다.

중통초의 광범위한 유통과 화폐 가치 및 물가의 안정은 백성들의 삶과 무역에 큰 편의를 제공했으며, 국가의 재정 수입 확보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왕문통의 재정 정책이 시행된 지 1년 만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 정부의 재정 수입이 늘어났다. 연경(燕京)에 쌓인 재화가 상도(上都)로 운반되어 오자 쿠빌라이 칸이 직접 확인하러 나와 매우 기뻐하며 “조종(祖宗) 이래로 이토록 많은 재물이 모인 적이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왕문통의 재간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쿠빌라이의 중용을 받았던 색목인 사이드 아잘(賽典赤)은 1261년 중서성평장정사에 임명되어 왕문통과 함께 재정을 총괄했으며, 중통교초의 발행을 겸하여 관리하며 청렴함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274년 운남(雲南)에 행성을 설치할 때 첫 번째 행정 장관으로 임명되어 책임을 다했다.

元代至元宝钞(<a href="https://zh.wikipedia.org/wiki/%E4%BA%A4%E9%88%94#/media/File:Yuan_dynasty_banknote_with_its_printing_plate_1287.jpg" rel="nofollow noopener noreferrer">PHGCOM/维基百科</a>)

원대 지원보초(至元寶鈔) (PHGCOM/위키백과)

곽수경이 수리 시설을 일으키고 대운하를 개통한 공로

대칸의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는 남북을 잇는 수로 운송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262년 승상 장문겸의 추천을 받은 그는 곽수경을 접견했다.

1231년에 태어난 곽수경은 어릴 때부터 조부 곽영(郭榮)의 가학을 이어받아 오경(五經)에 통달했고 천문, 산학(算學), 수리 기술에 능통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근면하여 10대 시절에 이미 대나무로 혼의(渾儀·천체 관측 기구)를 직접 만들어 천문을 관측했다. 조부 곽영은 유병충과 친분이 두터웠기에, 부친상을 당해 형대(邢台) 서남쪽 자금산(紫金山)에서 독서 중이던 유병충의 문하로 어린 곽수경을 보내 배움을 청하게 했다. 곽수경은 그곳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당시 함께 공부하던 동문 중에는 장문겸도 있었다.

유병충이 삼년상을 마친 후 다시 쿠빌라이의 부름을 받게 되자, 그는 곽수경을 장문겸과 동행하도록 했다. 이후 장문겸 역시 쿠빌라이의 중용을 받아 대명로(大名路·지금의 하북 대명 일대) 등지의 선무사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곽수경도 장문겸을 따라 함께 이동했다. 곽수경은 가는 곳마다 하천과 수리 상태를 조사하고 측량하는 작업을 철저히 수행했다.

1262년, 곽수경은 개평부(開平府)에서 쿠빌라이를 접견했다. 곽수경은 수리에 관한 6가지 조항의 건의를 직접 올렸다. 예컨대 중도(中都)에서 통주(通州)에 이르는 옛 조운하(漕運河)를 정비하고 옥천(玉泉)의 물을 끌어오면 배가 다닐 수 있게 되어 조운 제도를 확립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매년 수레를 고용하는 비용 6만 민(緡)을 아낄 수 있다는 내용 등이었다. 쿠빌라이는 그의 건의를 모두 채택하며 “일을 처리하는 자들이 모두 이와 같다면 헛되이 봉록을 먹는 자가 없을 것”이라 칭찬했다. 곧바로 그를 제거제로하거(提舉諸路河渠)에 임명하여 각지 하천과 운하의 정비 및 관리 업무를 관장하게 했다.

1263년, 조정은 곽수경에게 은부(銀符)를 내리고 부하거사(副河渠使)로 삼았다. 1년 뒤 그는 하서(河西) 지역의 당래거(唐來渠)와 한연거(漢延渠) 두 운하를 개보수하고 소통시켜 10만 경에 가까운 농지에 물을 댔다.

1265년, 곽수경은 도수소감(都水少監)에 임명되었고, 연경 서쪽의 금구(金口) 수로를 소통시킬 것을 쿠빌라이에게 건의했다. 쿠빌라이는 그의 안목을 깊이 신뢰하여 모두 허락했다. 1275년 바얀(伯顏)이 남정을 떠날 때 수운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자, 곽수경에게 명하여 하북과 산동 일대 중 배가 다닐 수 있는 수로를 시찰하고 지도를 그려 보고하도록 했다.

1291년, 60세가 된 곽수경은 다시 쿠빌라이의 부름을 받아 대도(大都· 북경)의 조운 수로, 즉 대운하를 소통시켜 남방의 물자를 대도로 들여와 북방을 보급하는 사안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곽수경은 철저한 현장 답사를 거쳐 수많은 구체적 대안을 제시했다. 크게 기뻐한 쿠빌라이 칸은 도수감(都水監)을 특별히 다시 설치하고 곽수경에게 영도수감사(領都水監事) 직을 맡겼다.

이듬해 운하 소통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착공 당일, 쿠빌라이 칸은 승상 이하 모든 관원에게 공사 현장으로 나가 곽수경의 지휘를 받으라고 명했다. 이는 상징적인 조치였으나 수리 분야에서 곽수경이 가진 권위와 쿠빌라이 칸이 이 공사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곽수경의 감독 아래 대도의 백부언(白浮堰) 물줄기를 열고, 통주에서 대도 적수담(積水潭·지금의 북경 십찰해什剎海)에 이르는 대운하의 가장 북쪽 구간인 ‘통혜하(通惠河)’ 개착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총 길이는 164리에 달했다. 그는 대도의 지형과 고저차를 정확히 파악하여 통혜하의 수원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지형 변화와 수위 낙차에 맞추어 운하 곳곳에 보와 수문과 두문(斗門 농경지로 물을 빼는 물꼬)을 설치해 하천의 수량과 수위를 자유롭게 조절했다.

1293년 7월, 마침내 통혜하 건설 공사가 완공되었다. 통혜하가 뚫리면서 남북 대운하가 전면적으로 소통되었고, 강회(江淮) 지역의 조운선이 대도(大都)까지 직항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통주에서 대도까지 관청의 곡식을 육로로 운반해야 했는데, 매년 수십만 석에 달하는 곡식을 실어 나르느라 가을철 장마 때면 짐을 나르던 나귀와 소 같은 가축들이 지쳐 죽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새로운 수로가 열리면서 더 이상 육로로 식량을 나르는 고생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또한 남북방의 교류도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그해 쿠빌라이가 상도에서 대도로 돌아오던 길에 적수담을 지나게 되었는데, 수많은 조운선이 물 위를 가득 덮고 있는 장관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수로의 이름을 친히 ‘통혜하’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곽수경에게 지폐 1만 2,500관을 하사하고, 태사령(太史令) 직을 유지한 채 통혜하 조운 사무를 겸해 감독하도록 명했다.

이후 곽수경은 징청갑(澄清閘) 동쪽에서 물을 끌어와 북패하(北壩河)와 연결하고 여정문(麗正門) 서쪽에 수문을 설치해 배들이 대도 성을 둘러 왕래할 수 있도록 하자고 건의했으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1291年,60岁的郭守敬又被忽必烈找去询问大都漕运水道,即疏通大运河。示意图,图为《潞河督运图》局部,描绘了漕运的繁忙景象。(公有领域)

1291년, 60세의 곽수경은 쿠빌라이에게 다시 불려 가 대도(지금의 북경)의 조운 수도, 즉 대운하를 소통하는 일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시의도, 사진은 조운의 번창한 정경을 묘사한 《노하독운도(潞河督運圖)》의 일부. (공유 영역)

해상로 개척으로 식량 문제 해결

남북 운하를 개통한 것 외에도, 쿠빌라이 시기에는 해상 운송(海運)이 국가의 공식적인 조운 항로로 자리 잡았다. 대도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식량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원조 연간 세금 수입 1,211만 석 중 무려 1,000만 석이 강남(江南) 지역에서 나왔다. 대운하가 소통되면서 매년 수도로 운반되는 식량이 200만~300만 석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수요를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 위험을 무릅쓰고 바닷길을 이용하자는 제안을 냈다. 쿠빌라이는 득실을 저울질한 끝에 나벽(羅壁), 주청(朱清), 장선(張瑄) 세 사람을 발탁하여 동해, 황해, 발해의 3대 해역을 관통하는 해상 항로를 개척하게 했다. 뒤의 두 사람은 과거 바다에서 당할 자가 없던 해적 출신이었다. 주청은 숭명 요사(崇明 姚沙·지금의 상해 숭명구) 사람으로, 먼저 장선과 무리를 지어 사사로이 소금을 밀매하다가 나중에 함께 해적이 된 인물이었다. 이들은 해안 경계를 장악하고 있어 바닷길의 흐름과 항로를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었다.

명령을 받은 세 사람은 상해에서 평저선(바닥이 평평한 바다용 배) 60척을 건조하고 조운에 종사할 사공과 인부들을 대거 모집했다. 쿠빌라이는 선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가구당 5인 기준으로 식량을 넉넉히 배급해 주었다.

1283년, 세 사람은 목숨을 건 해상 모험의 길에 올랐다. 선단은 4만여 석의 식량을 싣고 평강(平江·지금의 강소 곤산崑山) 유가항(劉家港·지금의 강소 태창현太倉縣 유하瀏河)에서 바다로 나아가, 해문현(海門縣) 황련사두(黃連沙頭)를 거쳐 서해주(西海州·지금의 연운강連雲港 남해주진)에 도착한 뒤 산동의 교주(膠州), 성산(成山)을 거쳤는데 수로의 길이만 총 1만 3,050리에 달했다. 이어서 성산에서 내해를 따라 서쪽으로 진입하여 마침내 해진진(海津鎮·지금의 천진) 해안에 닻을 내렸다. 이듬해 이 식량들은 대도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처럼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공한 해상 조운은 강남의 식량을 북방으로 나르는 또 다른 거대한 문을 열어젖혔다.

이후 나벽, 주청, 장선 세 사람은 잇달아 두 개의 신항로를 더 찾아내 해운의 효율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조건만 좋으면 절강(浙江)에서 대도까지 최단 10일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대원해운기(大元海運記)》와 《원사·식화지(元史·食貨志)》의 통계에 따르면 해상으로 운송된 식량의 양은 계단식으로 증가했고 가장 많을 때는 한 해에 350만 석에 이르렀다. 운송 도중 발생하는 식량의 손실률도 초기 25%에서 1%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해상 조운은 이때부터 원의 수도 대도의 존망을 쥐고 흔드는 중요한 경제의 명줄이 되었다.

나벽은 이 공로로 쿠빌라이에게 특별 포상을 받아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 관군만호(管軍萬戶) 겸 관해도운량(管海道運糧)에 임명되었다. 주청과 장선 역시 원대 해운의 시대를 연 인물들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특히 주청은 대규모 선단을 꾸려 여러 나라와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유가항을 그 유명한 ‘육국부두(六國碼頭·6개국 배가 드나드는 무역항)’로 성장시켰고, 자신도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1287년, 쿠빌라이는 조서를 내려 행천주사(行泉州司)를 설립하고 해운 사무를 전담하게 했다.

此后,罗、朱、张三人又相继摸索出两条新航线,海运效率大增。示意图,图为南宋 马远《水图‧云生沧海》。(公有领域)

이후, 나(羅)·주(朱)·장(張) 세 사람은 또 잇달아 두 개의 신항로를 모색해 내어, 해운 효율이 크게 증가했다. 시의도, 사진은 남송 마원(馬遠)의 《수도(水圖)·운생창해(雲生滄海)》이다. (공유 영역)

《수시력》의 완성

일찍이 쿠빌라이가 즉위한 초기에 유병충은 역법(曆法)을 수정해야 한다고 건의한 바 있었다. 당시 요나라와 금나라가 사용하던 《대명력(大明曆)》이 이미 200여 년이나 지나 실제와 오차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처 실행에 옮기기 전인 1274년 유병충이 세상을 떠났다. 남송이 평정되고 천하가 하나로 통일된 후에야 쿠빌라이는 유병충의 유언을 떠올리고 역법 개정 작업에 눈을 돌렸다. 그는 조서를 내려 태사국(太史局)을 설치하고, 당시 공부랑중이던 곽수경과 왕순(王恂)에게 남북의 천문 관원들을 이끌고 나누어 관측하도록 명했다. 또한 장문겸과 추밀사(樞密使) 장역(張易)에게 데이터를 취합해 보고하도록 했으며, 좌승상 허형(許衡)이 총책임을 맡았다.

곽수경은 역법을 제정하는 기초가 ‘철저한 관측’에 있으며, 관측을 잘하려면 먼저 정밀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그는 간의(簡儀), 고표(高表), 후극의(候極儀), 혼천상(渾天象), 영롱의(玲瓏儀), 앙의(仰儀), 입운의(立運儀), 증리의(證理儀), 경부(景符), 규기(窺幾), 일월식의(日月食儀), 성구정시의(星晷定時儀), 정방안(正方案), 환표(丸表), 현정의(懸正儀), 좌정의(座正儀) 등 일련의 천문 관측 기구들을 제작했다. 이 기구들은 천체의 운행, 경도와 위도, 일식과 월식을 관측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나아가 《앙규복구도(仰規覆矩圖)》, 《이혼개도(異渾蓋圖)》, 《일출입영단도(日出入永短圖)》 등을 제작해 지도와 계기가 서로 참고가 되도록 했다.

1279년 태사국은 태사원(太史院)으로 지위가 격상되었고 왕순(王恂)이 태사령(太史令), 곽수경이 동지태사원사(同知太史院事)를 맡았다. 그해 곽수경은 자신이 제작한 관측 계기들을 헌상하며 쿠빌라이에게 상세히 설명했고, 광활한 영토 전역에 여러 관측 거점을 두어 천문을 관측하자고 제안했다. 쿠빌라이는 이에 흔쾌히 동의했다. 곧이어 곽수경의 총괄 아래 14명의 감후관(監候官)이 임명되어 각지로 파견되었다. 동쪽으로는 고려(高麗), 서쪽으로는 전지(滇池·운남), 남쪽으로는 주애(朱崖·해남도),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일대에 이르기까지 사해(四海) 내부 총 27곳에 관측 지점이 설치되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사해측험(四海測驗)’이라 불렀다.

이처럼 정밀한 실측 데이터를 바탕으로 1280년 마침내 《수시력(授時曆)》이 완성되면서 역법 제정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정교하고 훌륭한 역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듬해 왕순이 세상을 떠나자 곽수경이 태사원의 모든 업무를 도맡아 이끌었으며, 《추보(推步)》, 《입성(立成)》 등 다방면의 저술을 지속적으로 정리해 출간했다. 1286년 곽수경은 태사령으로 승진했고, 이후 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 지태사원사(知太史院事)에 임명되었다. 1316년, 곽수경은 향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郭守敬认为确定历法的基础在于观测,而观测首先要有仪表,因此制作了一系列天文仪器,计有简仪、高表等。图为郭守敬所发明的高表模型。(公共领域)

곽수경은 역법을 확립하는 데 있어 관측이 기초가 되며, 관측을 위해서는 우선 계측기가 필요하다고 보았기에, 간의(簡儀), 고표(高表) 등 일련의 천문 기구를 제작했다. 사진은 곽수경이 발명한 고표의 모형이다. (공유 영역)

참고자료:
《元史》
《忽必烈傳》
《忽必烈和他的世界帝國》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元史紀事本末》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6/25/n1304800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