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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십국 시기 신족통을 지녔던 세 이인(異人)

안단(顏丹)

【정견망】

중공에 의해 유물론, 진화론, 무신론을 강제로 주입당한 현대 중국에서, 신불(神佛)과 관련된 모든 사물과 현상은 늘 ‘봉건 미신’이라는 낙인이 찍혀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탐구하고 깊이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며,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신통(神通)을 예로 들면, 공산당 선전에서는 그것을 마술이나 사람의 주관적인 상상 또는 날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통은 진짜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에서 반영되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가령 사람이 불법(佛法)을 닦거나 도(道)를 닦거나 신선(仙)을 닦은 후 신체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일종의 초능력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를 지니고 태어나기도 한다.

중국은 사료가 가장 풍부하고 상세하며 전면적인 나라 중 하나다. 형형색색의 각종 신통이 실제 인물과 실제 사건의 형식으로 상세하게 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본 사람이라면 오늘날의 ‘미신’이라는 말과 고인(古人)의 기록이 전혀 다름을 발견할 것이다.

사실 우리 조상들은 지혜가 뛰어나 후세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신통과 신적(神跡)을 책에 기록해 두었으니, 여기에는 필경 깊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공산당은 한사코 부정하면서도 그것이 거짓임을 증명하지 못하는데, 이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배후에 숨겨진 원인을 탐색하도록 인도하기에 충분하다.

수도인 진윤승이 한담을 나누는 사이에 15리를 왕복

당조 말년, 강서(江西) 요주(饒州)에 진윤승(陳允升)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성격이 매우 차분하고 사람들과 많은 말을 하지 않았으나, 도(道)를 구하 마음이 있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사냥을 업으로 삼았으나 오직 진윤승만은 집에서 사냥한 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

갓 열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용호산(龍虎山)에 들어갔고, 산속에 은거하며 도를 닦았다. 그 후 그를 본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그의 가족들이 어쩌다 몇 번 그를 보았으나, 그때마다 그는 매번 아주 빠르게 가버렸다.

천우(天佑) 연간에 어떤 사람이 강서 무주(撫州)의 마고산(麻姑山)에서 그를 보았다. 당시에 그는 이미 집을 떠난 지 70년이 되었으나, 용모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예전과 똑같았다.

또 수십 년이 흘러 남오(南吳)가 건국되었을 때, 무주자사 위전풍(危全諷)이 그의 소문을 듣고 그를 성안으로 맞이하여 잠시 머물게 했다. 두 사람이 한 방에서 담소를 나눌 때마다, 진윤승은 말을 하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어느 날 밤, 두 사람이 또 한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위전풍이 “풍성(豐城)의 귤 맛이 아주 좋은데, 지금 그것이 좀 먹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진윤승이 대답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제가 귤을 가득 실은 화물선 한 척이 풍성 쪽 항구에 정박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지금 가서 몇 개 가져오겠습니다.”

그 항구는 두 사람이 있는 성곽에서 약 15리나 떨어져 있었으나, 진윤승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포대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 귤이 백여 개에 달했다.

한번은 위전풍의 집안에 혼사가 있어 황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성안에 황금이 부족해 수량이 부족했다.

진윤승이 그에게 말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이때 그가 몇 장의 두꺼운 종이를 가져오더니 특제 약을 바르고, 이어서 그 종이를 불속에 던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종이들은 금으로 변했고, 게다가 수량도 마침 위전풍이 일을 치르는 데 필요한 만큼이었다.

훗날 위전풍이 군대를 거느리고 오(吳) 땅의 군대와 전쟁을 벌이려 하자, 진윤승이 그를 가로막으며 말하기를 “부디 입안으로 들어가지 마세요(慎勿入口中)”라고 했다. 사실 이는 그에게 가지 말라고 권한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당시에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고, 결국 상아담(象牙潭)에서 패전했다.

다행히 위전풍은 목숨이 끊어질 운명이 아니었고, 그는 이전에 남오의 태조 양행밀(楊行密)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왕위를 계승한 차남 양융연(楊隆演)은 비록 위전풍을 생포했으나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저택 한 채와 많은 재물을 하사해 그가 천수를 누리고 편안히 세상을 떠나게 했다.

술자리에서 3백리를 왕복한 처사 이승(李勝)

이승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본래는 서생이었으나, 초상적인 법술(法術)을 몸에 지니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이처사(李處士)’라 불렀다.

어느 해 겨울, 그는 강서 홍주(洪州, 지금의 남창시)에 갔다. 눈이 내리는 어느 날 밤, 그는 당시에 서산(西山)에 은거해 있던 노처사(盧處士) 및 그의 벗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들은 모두 대여섯 명이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어떤 사람이 무심코 말했다.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니 어떻게 문밖을 나가겠는가?”

이승이 이 말을 듣고 대답했다.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겠는가,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네. 말해보게나, 내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가?”

그 사람이 말했다.

“내가 책 몇 권을 성자진(星子鎮, 지금의 여산시에 속함)에 두고 왔는데, 가져다줄 수 있겠는가?”

이승이 대답했다.

“할 수 있네!”

이렇게 말을 마치자마자 즉시 문을 나섰다.

서산에서 성자진까지는 총 300여 리나 되었으나, 서산의 술자리가 아직 흩어지기도 전에 이승은 성자진에서 그의 책 몇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전에 어떤 도사가 이승에게 매우 무례하게 대했다. 하루는 도사가 방에서 자고 있었다. 이승이 한 아이를 보내 문을 두드리게 하며 “나는 이처사의 비수를 가지러 왔다”라고 말하게 했다. 도사는 이상하게 여겼으나 몸을 일으킬 때 슬쩍 보니, 자신의 베개 옆에 비수 한 자루가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칼날이 날카로웠는데 마치 누군가 방금 던져 넣은 것 같았다. 그때 이후로 그는 왕년의 태도를 싹 바꾸어 이승에게 예를 갖추어 극진히 대했다.

하루에 수백리를 걸은도사 진서

호북 기주(蘄州)의 선단관(善壇觀)에 진서(陳曙)라는 이름을 가진 도사가 있었다. 현지 사람들은 그가 백 살이라고 말했으나, 구체적으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걸음걸이가 나는 듯이 빨라 하루에 수백 리를 걸을 수 있었다. 성안에 연회를 베푸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자리를 남겨두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그날 비록 어디를 갔을지라도 모두 정시에 연회에 참석하러 달려왔기 때문이다.

남당(南唐)의 열조(烈祖) 이변(李昪)이 그의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그를 청하려 했다. 그러나 사신이 아직 출발하기도 전에 진서는 집에서 탄식하며 말했다.

“내 이미 늙어 나라에 아무런 쓸모가 없거늘, 어찌 나를 부르려 하는가?”

며칠 후 사신이 와서 불렀으나 진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훗날 원종(元宗) 이경(李璟)이 제위를 계승했다. 그때 진서는 자주 밤에 마당에서 향을 피우며 기도하곤 했다. 그는 매번 매우 경건하게 재삼 하늘을 향해 큰절을 올렸으나, 방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목을 놓아 통곡하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하(淮河) 북안 일대에 전란이 폭발하여 사망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사람들은 그제야 비로소 그가 이전에 통곡한 것이 이날을 예견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전란이 있은 후 그는 강을 건너 남하했고, 한 망가진 도관을 찾아 들어가 머물렀으며, 또한 그 옆에 초막 하나를 지어 줄곧 홀로 그곳에서 살았다. 이때부터 그를 본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오직 어쩌다 그를 만난 사람들만 보았는데, 그의 곁에는 늘 호랑이와 표범이 따르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며칠이 지난 후에야 발견되었다. 이치대로라면 사람은 완전히 죽어 굳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를 관에 넣을 때 전신에서 여전히 땀이 솟아나고 있었다!

참고자료: 《강회이인록(江淮異人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