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년—588년)
심연(心緣)
【정견망】
북위(北魏)의 분열
528년, 호태후가 아들인 효명제(孝明帝)를 독살하고, 종실의 아이디 세 살 된 원쇠(元釗)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웠다.
3월, 수용천(秀容川, 산서성 흔현 경계)의 계호(契胡) 추장 이주영(爾朱榮)이 이를 빌미로 삼아 수도인 낙양(洛陽)으로 쳐들어왔다.
4월, 이주영이 원자(元子) 유(攸)를 황제로 세우니, 이가 곧 효장제(孝莊帝)이다. 낙양에 진입한 이주영은 호태후와 원쇠를 황하에 빠뜨려 죽였고, 하음(河陰)의 도저(陶渚, 하남성 맹현)에서 북위의 왕공대신 2,000여 명을 살해했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하음의 변(河陰之變)’이라 부른다.
이주영은 전횡을 일삼고 오만방자했으며, 북위 정권을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몄기에 효장제와의 모순이 날로 첨예해졌다.
530년, 효장제는 이주영이 입조하여 알현하는 기회를 틈타 이주영을 직접 살해했다. 이주영의 조카 이주조(爾朱兆)가 병주(並州)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낙양을 공격해 효장제와 좌우 대신들을 죽이고, 원공(元恭)을 세워 절민제(節閔帝)로 삼았다.
이주조가 권력을 독점한 후, 각지의 지방 세력들이 연이어 할거했는데, 그중 가장 강대한 세력은 동방의 고환(高歡)과 관중(關中)의 우문태(宇文泰)였다. 고환의 조부는 법을 범한 탓에 회삭진(懷朔鎮)으로 유배되어 대대로 북쪽 변방에서 살았는데, “그곳의 풍습을 익혀 마침내 선비족(鮮卑)과 같아졌다.”
고환 자신도 변진(邊鎮)의 봉기에 참가했다가 나중에 이주영에게 투항했다. 이주영이 죽은 후, 고환이 그의 군대 20여 만 명을 거두어들였고, 이주조의 허락을 얻어 기주(冀州)를 점령했다. 이어 그는 낙양으로 진군해 절민제를 죽이고 원수(元修)를 꼭두각시 황제(효무제)로 세웠다. 533년, 그는 진양(晉陽)으로 진격해 이주조를 격파하고 이주씨(爾朱氏) 세력을 소멸시켰다.
한편 우문태는 예전에 하북 봉기의 영수 갈영(葛榮)의 부하로 직책을 맡았었으나, 갈영이 실패한 후 이주영에게 귀순했고 하발악(賀拔嶽)의 부하로 편입되었다. 효무제가 하발악을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삼아 관중의 봉기군을 진압할 때, 우문태는 하발악을 따라 관중으로 들어갔다. 534년, 하발악이 살해당하자 우문태가 마침내 관롱(關隴) 지역을 점거했다.
534년, 원수(元修 효무제)가 고환과의 갈등이 첨예화되자 관중으로 도망쳐 우문태에게 의지했다. 고환은 다시 원선견(元善見)을 황제(효정제孝靜帝)로 세우고 업(鄴)으로 천도하니, 역사에서는 이를 동위(東魏, 534년~550년)라 부른다. 원수는 관중으로 도망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했다. 535년, 우문태는 원보거(元寶炬)를 황제(문제文帝)로 세우고 장안(長安)에 도읍하니, 역사에서는 이를 ‘서위(西魏, 535년~557년)’라 부른다.
당시 동위와 북제(北齊)가 점유했던 지역은 북쪽으로는 사막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강회(江淮)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황하 및 하남 낙양 일선을 경계로 서위 및 뒤를 이은 북주(北周)와 이웃했다. 서위와 북주가 점유했던 지역은 동쪽으로 동위 및 북제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유사(流沙)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하투(河套)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파촉(巴蜀), 운남(雲), 귀주(貴)와 한수(漢水) 유역에 이르렀다.
동위와 서위가 존재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550년,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이 동위를 폐하고 북제(北齊, 550년~577년)를 건국했다. 557년,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도 서위를 폐하고 북주(北周, 557년~581년)를 건국하면서 주(周)와 제(齊)가 대립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동위(東魏)의 흥망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된 후, 고환은 진양(晉陽, 지금의 산서성 태원 남서쪽)을 중심으로 통치를 실행했다. 고환은 한편으로는 선비족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비화(鮮卑化) 정책을 밀어붙이는데 온 힘을 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족(漢族) 호강(豪強) 지주들의 옹호를 얻기 위해 그들이 탐오와 부패 등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도록 방임해 정치가 날로 부패해졌다.
동위는 서위와 비교했을 때, 지역이 더 넓고 인구가 많았으며 경제도 더 발달했다. 때문에 고환은 서위를 공격하기 위해 누차 군대를 출동시켜 상대방을 집어삼키려 기도했다. 537년, 동위 군대가 서정(西征)을 감행했으나, 동관(潼關) 좌측의 소관(小關)에서 서위 군대의 기습을 받아 대패했고, 대도독 두태(竇泰)가 자살하자 고환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철수했다.
이후, 사원(沙苑)의 전투(537년), 하교(河橋)의 전투(538년), 망산(邙山)의 전투(543년)에서 양측은 서로 이기고 지기를 반복했다. 546년, 고환은 친히 10여 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서위가 굳게 지키고 있던 옥벽(玉壁, 지금의 산서山西 직산稷山 남서쪽)을 포위 공격하여 50여 일 동안 고전했으나, 그가 군중에서 병으로 쓰러지면서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초, 그는 진양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고징(高澄)과 고양(高洋)이 잇달아 동위의 정권을 장악했다. 550년, 고양이 효정제를 폐하고 자립해 북제를 건국했다.
서위(西魏)의 흥망
서위 정권이 수립된 후, 실제로는 우문태가 권력을 장악했다.
우문태는 535년에 24조의 신제(新制)를 반포했고, 나중에 다시 36조까지 증편해 이를 “중흥영식(中興永式 나라를 중흥시키는 영원한 법식)”이라 불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탐오(부패)를 엄금하고, 관원을 감축하며, 정장(正長: 정은 여정閭正·족정族正을 뜻하고 장은 보장保長을 가리킨다. 여기서 보·여·족은 지방 기층 조직의 명칭이다)을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실시하며, 계장(計帳: 이듬해의 부역과 세금의 개수를 미리 추산하는 것)과 호적 등의 제도를 제정하는 것이었다.
대통(大統) 7년(541년), 관중의 대족 출신인 소작(蘇綽)이 한족 통치의 경험을 6가지로 총괄했다. 그것은 청심(清心, 마음을 맑게 함), 돈교화(敦教化, 교화를 두터이 함), 진지리(盡地利, 땅의 이로움을 다함), 탁현량(擢賢良, 현명하고 어진 이를 발탁함), 휼옥송(恤獄訟, 옥사와 송사를 너그럽게 함), 균부역(均賦役, 부역을 균등히 함)이다. 우문태는 이 경험들을 매우 중시하여 “육조조서(六條詔書)”로 반포해 시정방침으로 삼았으며, 특별히 중하급 관리들을 조직해 학습하게 하고, 이 6가지 조항과 계장에 통달하지 못한 자는 관리가 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대통 16년(550년), 우문태는 또 팔주국(八柱國)이 금려(禁旅, 근위대)를 나누어 장악하는 부병제(府兵制)를 정식으로 건립했다. 부병은 총 병력이 약 5만 명이었는데, 우문태와 종실인 원흔(元欣)을 제외하고, 각각 6명의 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들이 이끌었다. 이 제도의 건립은 군대에 대한 통일된 지휘와 훈련을 진행하게 하여 중앙 정권의 강화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우문태는 균전제(均田制)도 계속 추진했다. 돈황 문서인 《서위 대통 13년 계장》에 근거해 보면, 균전제 하에서 토지를 주고받는 수수가 이미 실행되었으나, 수여된 토지가 정량에 미달하는 현상이 보편적이었다. 당시 가장 보편적인 역역(力役 노역)의 종류는 “육정병(六丁兵)”이었는데, 즉 각 정남(丁男 성인 남자)이 6개월 안에 정부를 위해 한 달 동안 복역하는 것으로, 1년에 두 달 동안 복역하는 것이다.
서위 사회는 비교적 안정되었고 국력은 갈수록 강성해졌다. 비록 동위처럼 지역이 광대하고 인구가 많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동위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해 냈고, 게다가 폐제(廢帝) 2년(553년)에는 남조 양(梁)나라의 촉(蜀) 땅을 손에 넣었으며, 이듬해에는 강릉(江陵)을 빼앗았다. 557년 초, 우문각(宇文覺)이 서위 공제(恭帝)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으니, 이가 곧 효민제(孝閔帝)이며 북주를 세웠다.
북제(北齊)의 흥망 (550년 ~ 577년)
처음에는 현명했으나 나중에 혼미해진 문선제(文宣帝) 고양,
550년, 고양이 위나라 효정제를 폐하고 동위를 대신해 자립하니, 곧 제 문선제(文宣帝)이다. 국호는 제(齊), 연호는 천보(天保)이며, 업(鄴)에 도읍을 정하니 역사에서는 북제라 부른다.
고양은 젊었을 때부터 큰일을 할 만한 도량이 있었고, 또한 지식과 식견이 깊고 침착했으며, 성격은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속으로는 강하고, 과단성이 있어 결단을 잘 내렸다. 정사를 처리함에 종일토록 지칠 줄 몰랐으며, 또한 “시작을 헤아려 끝을 알았고, 복잡하고 바쁜 일을 잘 다스렸다.”
그는 황제에 오른 후 공도(公道, 공평한 도리)를 우선하는 것을 중시했다. 비록 친척과 공신이라 할지라도 형법을 범했을 때는 예외 없이 법률에 따라 처분했다. 때문에 신하들 중 경외하며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제면에서 고양은 균전제를 계속 실행했는데, 북위와 유사했으나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북제는 배전(倍田)을 지급하는 규정을 취소했으나, 부부 한 쌍의 실제 토지 수여량은 여전히 배전에 상당했다. 북위는 노비의 토지 수여에 제한이 없었으나, 북제는 관품에 따라 300명에서 60명 사이로 노비 수를 제한했다. 또한 부세를 규정했는데, 전조(田租, 토지세)와 호조(戶調, 가구세)는 부부 한 쌍[1상(床)]을 계산 단위로 삼았다. 1상마다 비단 1필, 솜 8량을 징수했다. 무릇 10근의 솜 중에서 1근을 꺾어 실(絲)로 삼았고, 개간한 토지의 세금인 간조(墾租)는 2석, 공공 비축용 세금인 의조(義租)는 5두였다. 노비는 양인의 절반을 기준으로 했고, 소(牛) 한 마리당 비단 2척, 간조는 1두, 의조는 5승을 받았다. 만약 장가를 들지 않은 자는 1상의 절반을 납부했다. 백성들은 부담을 덜기 위해 장가들지 않았다고 허위 보고를 많이 했는데, 예컨대 양적(陽翟, 지금의 하남 우현) 한 군(郡)에는 수만 가구가 있었으나 호적 대장상에는 처자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주변의 소수민족들을 평정하기 위해, 고양은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고 군사들을 엄격히 조련했으며, 좌우 숙위(宿衛 호위대)에 백보군사(百保軍士 최정예 부대)를 두었다.” 싸움을 할 때면 자주 몸소 군사들 앞에 서서 앞장서 돌격했다.
북제는 동위가 통제하던 땅을 계승하여, 지금의 황하 하류 유역인 하북, 하남, 산동, 산서(山西) 및 강소 북부, 안휘 북부의 광활한 지역을 점유했다. 가구 300만 호에 인구는 2,000만 명에 달했다. 552년 이후 고양은 북쪽으로 고막해(庫莫奚)를 치고, 동북쪽으로는 거란(契丹)을 쫓아냈으며, 서북쪽으로는 유연(柔然)을 깨뜨렸고, 서쪽으로는 산호(山胡, 흉노족의 일파)를 평정했으며, 남쪽으로는 회남(淮南)을 취해, 세력이 줄곧 장강까지 뻗어 나가 “위엄이 융(戎, 오랑캐)과 하(夏, 중화)에 진동했다.”
고양의 재위 기간이 북제의 국력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당시 농업, 소금과 철업, 도자기 제조업이 모두 상당히 발달해 남조 진(陳), 북주에 비해 가장 부유했다.
하지만 말기에 고양은 자주 자신의 공업(功業)을 스스로 자랑하더니, 이내 주색에 빠져들어 음란함과 폭정을 자행했다. 《제서(齊書)》에 따르면 그가 “어떤 때는 몸소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노래 부르기를 쉬지 않았는데, 아침부터 밤을 새우고 밤을 이어 낮까지 이르렀다. … 음탕한 부녀자들을 징집하여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조석으로 그것을 임하여 지켜보는 것으로 오락을 삼았다.”라고 했다. 게다가 살해당한 사람들은 태반이 사지가 찢기거나, 불에 태워지거나, 강물에 던져졌다. 많은 충신과 어진 이들이 잔혹하게 해를 입었다. 조정과 민간의 상하 모두가 고양을 몹시 증오했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나중에 고양은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죽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죽기 전에 자주 귀신을 보았다고 하는데 또한 기이한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북제의 멸망
북제 후기의 통치자들은 황제로부터 각급 관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어리석고 잔인했다. 후주(後主) 고위(高緯)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온종일 거문고를 타고 노래하며 즐겼고, 돈을 물 쓰듯 낭비하며 백성의 힘을 아끼지 않았다. 정치는 부패했고 탐오가 풍조를 이루었다. 후주는 심지어 지방의 관직을 총애하는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이 팔아넘기도록 했다. 세금 징수는 날로 무거워지고 요역은 날로 번잡해져, 인력이 고갈되고 부고(府庫)가 텅 비게 만들었다. 광대한 농민들은 가혹하고 무거운 부역 아래에서 도망친 자가 열에 여섯 일곱에 달했다.
북제 정권이 날로 부패해 갈 때, 관중에 있던 북주 무제(武帝)는 정치를 힘써 다스리고 개혁을 실시하여, 일련의 개혁 조치를 통해 국력을 날로 강성하게 만들었다. 577년, 북제는 북주에 의해 멸망당했다.
북제는 28년 동안 존재했으며, 모두 6명의 황제를 거쳤다.
북주(北周)의 흥망 (557년 ~ 581년)
557년 초, 우문각이 서위 공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으니 이가 곧 효민제이며, 국호를 주(周)라 하고 장안(長安)에 도읍하니 역사에서는 이를 “북주”라 부른다.
효민제가 즉위한 후, 대권은 사촌 형인 우문호(宇文護)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9월, 우문호는 효민제를 죽이고 우문육(宇文毓)을 황제로 세웠으니(명제明帝), 560년에 우문호는 또 명제를 독살하고 우문옹(宇文邕 우문태의 아들이자 우문각의 동생)을 황제로 세웠다. 이가 곧 북주 무제(武帝)다. 572년, 주 무제 우문옹은 우문호(宇文護)를 죽이고 친히 조정을 장악했다.
* 북주 무제가 정치에 힘써 개혁을 실시
무제 우문옹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부친(우문표)의 사랑을 깊이 받았다. 성인이 된 후에는 성격이 침착하고 원대한 안목과 지모가 있었다.
무제는 사람됨이 매우 검소하여 늘 베 도포를 입고 베로 만든 이불을 덮었으며, 어떤 보석 장식도 하지 않았다. 궁전 안의 모든 사치스러운 장식품들을 전부 치워버렸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의 후궁이 겨우 십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화려한 궁전을 중수하는 것을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려 백성의 힘을 아꼈다.
무제가 친정을 시작한 후 “스스로를 다스리고 열심히 노력해, 정사를 듣고 살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법을 집행함에 엄격하고 가지런했으며, 정령(政令)이 명확하여 신하들 중에 두려워하며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는 부하들을 대할 때 겸손하고 사랑했다. 한 번은 전쟁 중에 무제가 맨발로 있는 군사를 보고는 자신의 신발을 벗어 그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용맹하게 앞으로 돌진했으니 종종 약한 군사로 강자를 이겼다.
무제는 또 여러 방면에서 개혁을 진행했다. 우선 병제(兵制) 면에서, 주 무제는 건덕(建德) 3년에 부병제 하의 “군사(軍士)”를 “시관(侍官)”으로 고쳐 불렀는데, 이는 부병이 황제에게 종속된 시종임을 표시하며 황제가 친히 거느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울러 장안에 부병 숙위(宿衛 궁궐 수비)를 통제하는 기구를 설치해, 본래 육주국과 십이대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거나 숙위장군을 충당하도록 임명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직접 병권을 장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군사들이 장수에 대해 가졌던 종속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고, 과거 부병이 부족화되던 경향을 약화시켰다. 동시에 부병의 징집 범위를 한인(漢人)으로 확대해, 선비족은 군인이 되고 한인은 농사를 짓던 ‘호한분치(胡漢分治)’의 경계를 깨뜨렸다. 이러한 행동은 민족 융합과 국가 통일의 추세에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북제를 집어삼키고 북중국을 통일하는 데 군사적 힘을 제공했다.
경제 면에서 주 무제는 균전과 조조(租調) 등의 제도를 수정하여, 이미 장가든 남자는 140무의 토지를 수여받고, 장가들지 않은 남자는 100무의 토지를 수여받도록 규정했다. 18세부터 64세까지의 백성들은 모두 조조를 납부해야 했는데, 장가든 남자는 매년 비단 1필, 솜 8량, 곡식 5곡을 납부하고, 장가들지 않은 정남은 절반을 감면했다. 18세부터 59세까지의 백성은 모두 복역해야 했는데, 풍년에는 30일, 보통 해에는 20일, 흉년에는 10일 동안 복역했으며, 아주 극심한 흉년에는 노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는 또 수리 시설을 일으키고 더 많은 농토를 개간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예컨대 562년에는 포주(蒲州, 지금의 산서 영제永濟 서쪽)에서 하거(河渠 운하)를 뚫었고, 동주(同州, 지금의 섬서 대려大荔)에서는 용수거(龍首渠)를 뚫었다. 무제는 또 수차례 조서를 내려, 서위 시절 강릉(江陵)의 포로들 중 관청이나 사가의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하여 평민이나 부곡(部曲)으로 삼았다.
개혁을 진행하는 것과 동시에, 주 무제는 즉위 4년에 친히 육군(六軍)을 이끌고 북제를 향해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북주 군대는 먼저 하음(河陰)의 외성을 함락시킨 후, 다시 금용성(金墉城)을 포위 공격했으나, 나중에 무제가 병에 걸려 군대를 돌려 회군했다. 이듬해 중요 거점인 진주(晉州) 평양(平陽, 지금의 산서 임분)을 함락시키자, 제나라 후주의 전군이 궤멸하여 진양(晉陽, 지금의 산서 태원 남서쪽)으로 도망쳤고, 다시 진양에서 수도인 업(鄴)으로 도망쳤다. 북주 군대는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진양을 함락시키고 다시 업성을 향해 진격했다. 제나라 후주는 여덟 살 된 아들(고항 高恒)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산동을 거쳐 진(陳)나라로 망명하려 시도했으나 도중에 생포되었다. 북주 군대는 순조롭게 업성에 진입하여 북제 정권을 소멸시키고 중국 북방을 통일했다.
북제를 멸망시킨 후, 주 무제는 개혁을 계속 진행했다. 건덕 6년에 선후로 조서를 내리기를, 황하 이남의 제반 주(州)에서 무릇 제나라 무평(武平) 3년(572년) 이후에 제나라에 의해 노비로 약탈당한 자들은 일률적으로 평민으로 해방한다고 했다.
영희(永熙) 3년(534년) 이래 동위와 북제의 인민들 중 노비로 된 자들 및 강릉 백성들 중 노비로 몰수된 자들을 해방하여 평민으로 삼았으며, 만약 옛 주인이 함께 거주하기를 요구하면 부곡이나 객녀(客女 노비는 아니지만 주인집에 종속된 신분)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아울러 잡호(雜戶)를 해방한다고 선포했다. 원래 북제가 통치하던 지역에서도 불교와 도교를 계속 금단했다. 그는 또 《형서요제(刑書要制)》를 반포하여 탐오를 엄벌했으며, 전국이 통일된 도량형을 실행하도록 규정했다.
주 무제의 개혁은 북주를 점차 강성하게 만들었으며, 그 실력은 남조의 진(陳)을 뛰어넘었다.
* 2번째 멸불로 보응을 받다
주 무제는 즉위한 지 세 번째 해에 불교와 도교 두 종교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아울러 불경과 불상을 불태워 없앴으며, 승려와 도사들에게 강제로 환속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578년 6월, 주 무제는 악질(惡疾)에 걸려 온몸이 문드러져 죽었으니, 이때 나이 36세였다.
《속고승전(續高僧傳)·위원숭전(衛元嵩傳)》에 이러한 이야기가 하나 실려 있다. 수(隋) 개황(開皇) 8년(588년), 경조윤 두기(杜祈)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깨어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염라대왕을 보았고, 또 불교를 멸한 탓에 보응을 받아 음간(陰間 저승)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주 무제를 보았다고 했다. 두기가 주 무제에게 왜 지옥에 머물고 있는지 묻자, 무제는 자신이 예전에 멸불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제는 두기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청하면서, 아울러 대신 위원숭(衛元嵩)에게 복을 지어 하루빨리 자기를 구해내어 고해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북주의 멸망 ─ “그 자리가 두세 번 바뀌더니, 양에서 끝나고 말에서 시작”
무제가 죽은 후 아들 선제(宣帝)가 즉위했으나, 재위 2년 만에 황음(荒淫)하다가 죽었다. 어린 정제(靜帝)가 즉위하자 외척인 양견(楊堅)이 정사를 주관했고, 불교와 도교를 회복하여 받들어 행할 것을 선포했다. 581년 2월, 양견은 주 정제에게 강제로 양위하게 한 후 스스로 황제에 올랐으니, 이가 곧 수 문제(隋文帝)이며 북주는 이렇게 멸망했다. 북주는 모두 5명의 황제를 거쳤고, 국운은 짧디짧은 25년에 불과했다. 서기 589년, 수나라가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남북조 시대가 끝나고 천하가 다시 통일되었다.
이 대분열과 대격변의 수백 년 동안, 오호십육국이든 남북조이든 각 왕조와 각 국가의 국운은 모두 매우 짧아서, 길어야 수십 년이었고 짧으면 겨우 몇 년에 불과했다(“그 자리가 두세 번 바뀌다”). 오직 북위의 국운만이 조금 더 길었을 뿐인데, 그것도 겨우 148년이었다.
이는 마치 제갈량이 《마전과(馬前課)》 제3과에서 말한 바와 똑같으니, 참으로 “어지러운 중원에 산천의 주인이 없으니, 그 자리가 두세 번 바뀌도다(擾擾中原 山河無主 二三其位)”이다. ‘말에서 시작함(馬始)’는 천하의 대란이 사마(司馬)씨 가문의 진(晉)에서 시작되었음을 가리키고, ‘양에서 끝남(羊終)’은 대란이 양견(楊堅)이 건국한 수(隋)나라에서 끝났음을 가리킨다. 역사는 또다시 중화 역사의 찬란하고 큰 연극을 맞이하려 하고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