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오천 년 신전문화(神傳文化)와 지금의 우리 (상)

우퉁(宇桐)

【정견망 2026년 3월 3일】

(중화문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다루는 내용: 삼황오제, 하, 상, 주, 진, 한. 이 부분은 우리 조상의 기원, 그리고 중국인의 처세와 도리에 관한 최초의 규율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를 다룬다.)

중국인들은 흔히 스스로를 “염황의 자손(炎黃子孫)”, “화하의 자녀(華夏兒女)”라고 말한다. 바쁜 현대 생활 속에서 우리는 이 몇 글자 뒤에 담긴 무게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멈춰 서는 일이 거의 없다. 중화문명의 사서(史書)를 펼쳐보면, 그 시작은 파란만장한 신화 시대이다. 이는 중국인만의 특징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 서사시》부터 고대 인도의 《마하바라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고대 민족이 신화로 역사를 시작했다. 그때는 바로 “인신동재(人神同在, 인간과 신이 함께 존재함)”의 시대였다.

당시의 부족 수령은 부나 권력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천도(天道)’를 장악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천(天)’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푸른 하늘이 아니라, 만물이 운행하는 미시적인 법칙을 가리킨다. 고대인들은 하늘의 성신(星辰) 운행과 땅 위의 인사(人事)가 서로 대응한다고 여겼는데, 이것이 바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이다.

삼황(三皇) (기원전 약 3300년 — 기원전 2600년, 약 700년)

삼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이 다양하다. 복희(伏羲), 신농(神農)은 그중 두 분이며, 세 번째 인물에 대해서는 여와(女媧)라는 설, 수인(燧人)이라는 설, 혹은 황제(黃帝), 축융(祝融)이라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초인적인 능력을 갖추었으며, ‘신성(神性)’을 지닌 성왕(聖王)이 인간 세상에 내려온 존재들로서,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인류의 손을 잡고 야만에서 벗어나 문명을 개창했다.

복희伏羲씨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살펴 팔괘(八卦)를 그렸다. 그는 우리에게 단순히 물고기 잡는 법뿐만 아니라, ‘상(象)’을 통해 우주의 오묘함을 읽어내는 법을 가르쳤으며, 우리에게 세계를 관찰하는 하나의 사고방식을 가져다주었다. 즉, 만물에는 모두 상이 있고, 만

물에는 모두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신농神农씨는 몸소 백초(百草)를 맛보아 중의학(한의학)과 농업을 남겼다. 그는 우리에게 인체의 건강이 대지의 초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여와女娲씨는 돌을 녹여 하늘을 메우고(연석보천 煉石補天), 진흙으로 사람을 빚었다. 이는 중국인들이 뼛속 깊이 사람의 생명은 신성하며, 천지와 같은 근원을 두고 있다고 믿게 했다.

수인燧人씨와 유소有巢씨는 각각 불을 가져다주고 집 짓는 법을 가르쳐, 인류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온기와 안전을 해결해 주었다.

이러한 신화들은 사실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진실하게 그려낸 것이다. 이는 현대인들에게 말해준다: 문명의 기원은 자원을 쟁탈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의 압박을 느끼고 내면이 들뜰 때, 이러한 “천인합일”의 지혜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 법칙에 순응하여 일을 처리해야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질 수 있다.

오제(五帝) (기원전 약 2600년 — 기원전 2070년, 약 530년)

삼황 이후, 중국 역사는 《사기》에 기록된 “신사(信史, 기록이 확실한 역사)” 시대로 진입했다. 이는 단순히 정권의 교체일 뿐만 아니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위대한 실천이기도 했다. 오제인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은 천의(天意)를 받들어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며 화하 문명의 영혼을 주조했다.

헌원 황제는 ‘인문초조(人文初祖, 인문 문명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5천 년 전, 황제와 염제 부족은 손을 잡고 치우가 이끄는 구려九黎족을 물리쳤다. 전후, 세 부족은 중원 대지에서 하나가 되어 중화민족 최초의 기초를 형성했다. 황제는 화하를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앞장서서 문명을 개창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글자를 만들고, 역법을 정하고, 악률을 짓게 하여 선민(先民)들을 이끌고 야만에서 벗어나게 했다. 의학 서적인 《황제내경》은 그의 지혜를 기록하고 있다. 즉, 사람은 자연의 리듬에 순응하고 심신을 잘 조절해야 신체가 조화롭고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제는 모두가 공인하는 조상이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염황의 자손”이라 부른다. 이 네 글자는 단순히 혈맥이 이어졌다는 뜻뿐만 아니라, 우리가 선조가 남긴 문화와 지혜를 공동으로 계승했음을 의미한다.

황제가 공덕을 원만히 이루고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후, 제위는 손자인 전욱에게 전해졌다. 전욱제는 재위 기간 중 중요한 일을 했다. 바로 “절천지통(絕天地通, 하늘과 땅의 소통을 끊음)”이다. 이 조치는 신성을 단절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의 도덕을 높이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으로써 하늘과 감응하도록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뒤를 이은 제곡은 검소하고 인자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원대한 안목으로 공경하게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맞이하고 배웅하며, 하늘의 은택이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게 하여 천하를 다시 수신(修身)하고 도를 중시하며 자연에 순응하는 태평한 모습으로 돌려놓았다.

요제와 순제 시기에 이르러 “선양제(禪讓制)”는 덕치(德治)를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요제는 “어짐과 덕이 하늘과 같았으며”, 제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효도로 이름난 순에게 물려주었다. 순제는 한때 요제의 아들에게 나라를 돌려주려 했으나, 백성과 제후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순을 따랐다. 이것이 바로 가장 이른 민본(民本) 사상이다. 진정한 권력은 혈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민심과 천의에서 오는 것이다. 순제는 평생 덕으로 원한을 갚았으며, 그가 창작한 《소악(韶樂)》은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아름다워 새와 짐승을 감화시켰고, 후세 수천 년의 마음을 감화시켰다.

오제 시대는 “대도가 창성한(大道昌明)” 시대였으며, 사람들은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믿으며 만방이 화합했다. 이러한 “다투지 않는(不爭)” 상태와 “감사하는” 상태야말로 인류가 마땅히 가져야 할 생활 모습이다. 현대 사회의 투쟁 철학과 신앙 부재에 비추어 볼 때, 오직 양심으로 돌아가고 도덕으로 돌아가야만 현대인들은 내면의 평온을 되찾고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하(夏)나라 (기원전 약 2070년 — 기원전 1600년, 약 470년)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는 화하 문명의 발원지인 하남에서 탄생했다. 그 건립은 중화문명이 신화 시대에서 정식으로 국가 시대로 진입했음을 상징한다.

넘쳐나는 홍수를 마주하여 대우(大禹)는 13년간 치수 사업을 벌였으며, 세 번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았다(삼과가문불입). 그는 ‘막는 것’에서 ‘소통시키는 것’으로 바꾸어 물의 성질에 순응하여 홍수를 평정했다. 이에 순제로부터 하늘에 천거되어 제위를 계승했다. 치수 과정에서 대우는 대지를 측량하여 천하를 ‘구주(九州)'(예주, 기주, 양주 등)로 나누었다. 이때부터 ‘구주’는 중국의 대명사가 되었다. 대우는 산천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가장 이른 측정 도구와 도량형을 제정했으니, 그는 영웅일 뿐만 아니라 화하 질서의 제정자였다.

중국의 별칭인 “화하(華夏)”는 바로 이 시대에 깊은 내포를 응축하고 있다. “화(華)”는 복장(옷)의 아름다움을 가리키는데, 고대에 ‘화’는 ‘꽃(花)’과 통하며 중국 전통 복식이 꽃처럼 화려하고 찬란함을 상징한다. 일 대 일 대마다 복식의 화려함이 있었다. “하(夏)”는 크다는 뜻으로, 예의(禮儀)가 큼을 가리킨다. 이른바 “예(禮)”란 《좌전》에서 말했듯이 “예란 하늘의 경도(經)이며, 땅의 의리(義)이며, 백성의 행실이다”라고 했다. 이는 예의가 단순히 사람의 행동 준칙일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운행 법칙을 본받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찬란한 복식과 방대한 예의가 결합하여 “화하”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하나의 가장 심원한 변화는 왕위 계승제이다. 대우가 죽은 후, 백성과 제후들이 자발적으로 대우의 아들 계(啟)를 옹립했는데, 이러한 민심의 자연스러운 선택이 중국 4천 년의 “부자 상속, 가천하(家天下)” 역사를 열었다. 하나라는 400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총 17명의 왕이 전해졌다. 마지막 군주 하걸은 포악하고 무도하여 민심을 잃었다. 결국 상(商) 부족의 수령 성탕이 천의에 순응하여 하걸을 타도하고 상나라를 건립했다.

대우의 치수 지혜는 우리에게 난제를 해결하려면 형세에 따라 순응해야지, 강제로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화하”라는 두 글자는 우리에게 중국인으로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가 천 년을 거쳐 끊이지 않고 이어온 덕행, 예의, 그리고 미학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

상나라 (商朝 기원전 약 1600년 — 기원전 1046년, 약 554년)

상나라는 황하 중하류 지역에서 일어났다. 역사상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으나, 제20대 군주 반경(盤庚)이 은(殷, 현재의 하남성 안양)으로 도읍을 정한 뒤에야 안정되었다. 은 지역에 가장 오래 거주했고 국력이 가장 강했기에, 사람들은 이 강력한 왕조를 ‘은상(殷商)’이라 부르곤 한다.

개국 군주 성탕(成湯)은 인덕으로 천하를 세웠으며, “망개삼면(網開三面)”과 “상림도우(桑林禱雨)”의 전설을 남겼다. 그는 사냥꾼이 사방에 그물을 치는 것을 보고, 세 면의 그물을 치우게 하여 새와 짐승들에게 살길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자비심에 천하의 민심이 진심으로 복종했다. 상나라 초기 7년간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성탕은 머리카락과 손톱을 자르고 흰 띠(白茅)를 두른 채 하늘에 ‘죄기(罪己, 자신의 허물을 탓함)’하며 기우제를 지냈고, 하늘이 자신을 벌하고 백성들은 용서해 주기를 빌었다. 이러한 지극한 정성이 천지를 감동시켜 곧 큰비가 내렸다. 그때는 신령을 경외하던 시대였고, 선민(先民)들은 갑골문을 통해 거북 등껍질에 하늘의 뜻을 탐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기록했다.

그러나 상나라 말기 주왕(紂王)은 선조들의 덕행에서 멀어졌다. 그는 황음무도하여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술과 고기에 취해 살았고, 이로 인해 관원들의 탐욕이 만연했으며 기층 백성들은 고통받았다. 이렇게 부패가 극에 달한 통치는 은상이 서서히 천명의 보살핌을 잃게 만들었다. 바로 이때, 서쪽의 주족(周族)이 문왕(文王)의 인덕으로 일어났다. 수도자 강자아(姜子牙)는 하늘의 뜻을 따라 주무왕을 도와 폭군을 토벌했다. 결정적인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상나라 군대가 진전에서 칼끝을 돌렸고(陣前倒戈), 전투는 단 하루 오전 만에 끝났으며, 기고만장하던 상나라는 무너져 내렸다. 역사는 이를 “회조청명(會朝清明)”이라 일컫습니다.

이 역사적 대서사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집권자가 탐욕과 사치에 빠져 백성을 압박하기만 한다면, 멸망은 순식간에 닥쳐온다는 말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오직 천의에 순응하고 도덕을 되찾는 것만이 살길이다.

서주 (西周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771년, 275년)

주나라는 800년 동안 이어진 가장 긴 왕조이다. 이 긴 성세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중국은 단순한 지리나 혈연의 개념이 아니라, 더더욱 ‘문화’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화하(華夏) 문화를 인정한다면 설령 혈연적으로 소수민족이라 할지라도 진정한 화인(華人)이다. 반대로, 한족의 혈통을 가졌더라도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을 조상으로 여기며 중국의 전통문화를 파괴한다면, 문화적으로는 한인이 아니며 중국인도 아니다.

덕(德)을 핵심으로 하는 문화 전통은 이미 주나라가 건립되기 전부터 씨앗이 뿌려졌다. 주문왕의 두 백부인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은, 현명한 동생(문왕의 아버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던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몸에 문신을 새기며 야만적인 땅으로 숨어들었다. “태백이 세 번이나 천하를 사양한(泰伯三以天下讓)” 일은 부모의 소원을 이루었고, 주나라 800년 성세를 이루었으며, 사회 전체의 기풍을 바로잡았다.

그 후 주문왕은 가풍을 이어받아 덕으로 천하를 다스려 깊은 민심을 얻었고, 그 아들 주무왕은 봉건제를 시행했다. 천하가 너무 넓어 군주 혼자 관리할 수 없었기에 “봉방건국(封邦建國)”을 시행했다. 영토 경계에 흙을 쌓고 나무를 심어 경계로 삼는 것을 ‘봉(封)’이라 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을 ‘건(建)’이라 했다. 봉건의 대상은 친척과 강자아 같은 공신들 외에도 전 왕조인 하, 상나라의 후예들을 포함했다. 이러한 포용적인 제도는 각 부족이 공동의 문화 아래 각자 제자리를 지키게 했다.

그러나 천도가 교체될 때는 항상 조짐이 있다. 서주 후기 지진이 발생하고 경수(涇), 위수(渭), 낙수(洛) 세 강이 말라버리자, 노신 백양보는 “산이 무너지고 강이 마르는 것은 망할 징조”라고 예언했다. 과연 서주의 마지막 국군 주유왕은 상나라 주왕의 전철을 완전히 밟았다. 총비 포사(褒姒)의 웃음을 보기 위해 “봉화희제후(烽火戲諸侯)”라는 희극을 벌였다. 이러한 신의와 예법에 대한 제멋대로인 짓밟음은 결국 민심을 흩어지게 했고, 서주도 그에 따라 멸망했다.

역사의 윤회는 다시 한번 경고한다. 한 민족의 흥성은 덕행과 문화에서 시작되지만, 한 왕조의 멸망은 대개 민족의 뿌리를 저버리고 문화적 근간을 파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동주 (춘추전국시대)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56년, 514년)

동주 시대, 중국 역사는 첫 번째 거대한 변국을 맞이한다. 이 500년에 걸친 분쟁 속에서 전통적인 사회 구조는 서서히 와해되었다. 이는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던 난세일 뿐만 아니라, 뭇 별처럼 빛나는 사상의 성세이기도 했다.

이 시기는 인류 문명의 “축의 시대(Axial Age)”로 불린다. 당시 동서양 문명이 동시에 깨어났다.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탄생했고, 동양에서는 도가의 노자, 불가의 석가모니, 유가의 공자가 탄생했다. 이 세 성인의 탄생 연도는 20년 이내였으며, 이들은 이후 2천 년 중화 문명의 주맥을 다졌다. 노자는 5천 자의 《도덕경》을 남겨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라는 우주의 진리를 가리켰고, 세상 사람들에게 소박함을 지키고 사욕을 줄이라 가르쳤다.

공자는 중화 문화를 계승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다. 광(匡) 땅에 포위된 위급한 순간에도 그는 극도로 태연했다. 그는 하늘이 이 땅의 문화를 멸절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대 문헌을 정리하고 “인애(仁愛)”와 “중용(中庸)”을 창도했으며, 수신양덕(修身養德)하여 정직한 “군자”가 되라고 가르쳤다. 공자는 화하 문명의 횃불을 대대로 전하게 했으며, 후세에 만세사표(萬世師表)로 추앙받았다.

전국 시대로 접어들며 진(秦), 한(韓), 조(趙), 위(魏), 연(燕), 제(齊), 초(楚)를 “전국칠웅”이라 불렀다. 전국 초기에는 위나라가 먼저 강성해졌고, 이후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어 결국 뒤늦게 앞서 나갔다. 이 500년 동안 천지를 꿰뚫어 보는 성자들도 있었고, 운주유악(運籌帷幄, 전략을 짜는 것)하는 통솔자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발자취는 수많은 회자되는 고사성어를 남겼다.

* 완벽귀조(完璧歸趙): 외교관 인상여는 강대한 진나라 왕 앞에서 진정에서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담력으로 보옥인 ‘화씨벽’을 지켜 안전하게 귀국하여 국가의 존엄을 지켰다.

* 지상담병(紙上談兵): 조나라 통솔자 조괄은 종이 위에서 병법만 논할 뿐 실전 경험이 없었다. 그는 노장 염파를 대신했다가 장평대전에서 진나라에 참패하여 천고의 교훈을 남겼다.

* 절부구조(竊符救趙): 조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신릉군은 도의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병부를 훔쳐내어 동맹을 구했다. 이러한 사생취의(捨生取義)의 행동은 후세에 미담으로 전해진다.

풍운이 격동하던 이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더 깊이 깨닫게 된다: 정세가 아무리 흔들려도 지혜와 덕행은 언제나 문명을 앞장서서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이다.

진나라 (秦朝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7년, 14년)

전국시대라는 대막이 내리면서, 진시황(영정嬴政)은 천시를 따르고 지리를 얻어 신속하게 6국을 휩쓸며 500년간 이어진 춘추전국 난세를 종식했다. 이 역사는 겉보기에는 복잡하게 얽힌 권력 다툼 같지만, 실상은 역사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바가 있다. 질서를 세우고 자연 법칙(천도)을 존중해야만 무한한 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 결국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사람들은 하늘의 뜻은 어길 수 없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전국의 문화와 경제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진시황은 비범한 기개로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문자, 화폐, 도량형을 통일하여 신주 대지에 비로소 공통의 문화 언어와 경제 표준을 갖게 했다. 구주를 연결하는 치도(馳道, 큰길)를 건설하여 교통을 편리하게 했고, 정국거(鄭國渠) 등의 수리 사업을 주관하여 농업을 도와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남으로는 백월을 정벌하고 북으로는 흉노를 쳐서 화하의 생존 공간을 크게 확장했다.

진시황의 풍공위적 중에서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매우 심원한 전략적 의미를 지닌다. 쑨원 선생은 일찍이 “만리장성의 방위가 없었다면, 중국의 북적에 의한 멸망은 송·명 시대가 아니라 초·한 시대에 이미 일어났을 것이다”라고 감탄했다. 세계 7대 기적 중 하나인 만리장성은 인류 문화와 기술의 기적으로 후세에 전해질 뿐만 아니라, 바로 이 만리장성의 존재로 인해 중화 대무대에서 펼쳐지는 신전문화(神傳文化)의 공연에 대한 방해를 효과적으로 배제하여, 중화 정통 문화가 보호받을 수 있었다.

중국은 진나라 이후 대일통(大一統) 시대로 진입했다. 대일통의 개념은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이후 200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분열을 겪었지만, 그것의 전체적인 추세, 혹은 중국인들 마음속의 동경은 여전히 ‘통일’이었다.

한나라 (漢朝 기원전 202년 — 서기 220년, 422년)

서한(西漢)의 개국자는 한 고조 유방이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유방은 처음에 ‘한왕(漢王)’으로 봉해졌는데, 영지는 한수(漢水) 유역이었다. 그는 전쟁의 신 한신의 보좌를 받아 항우를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한 뒤, ‘한(漢)’을 국호로 삼았다. 대한(大漢) 왕조가 전례 없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주변 국가와 민족들은 중국인과 한나라 사람을 통칭하여 ‘한인(漢人)’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중국’과 ‘한’은 등호가 성립되었다. 중국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한어(漢語)’가 되었고, 쓰는 글자는 ‘한자(漢字)’가 되었으니, 이는 대한 왕조가 우리에게 끼친 심원한 영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외에도 한나라는 중국의 ‘유·불·도’ 삼교가 병행하며 발전하는 구도를 공식적으로 열었다. 이 세 가르침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며 화하의 자녀들에게 전방위적인 삶의 지침을 제공했다.

* 유교의 확립 (입세의 준칙): 한 무제 시기 “백가를 물리치고 오직 유학만을 존숭(罷黜百家,獨尊儒術)”하며, 유학을 국가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공식 사상으로 확립했다. 이는 유가가 단순히 하나의 학문에 그치지 않고 인재 선발의 기준이자 사회의 공인된 준칙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유가의 ‘입세(入世, 세상에 들어가 활동함)’는 중국인들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의예지신)를 처리하는 법을 가르쳤다.

* 불법의 서래 (생명의 깊이): 동한 명제 시기, 불교가 공식적으로 중국에 전래되었으며 백마사(白馬寺)는 중국 불교의 제1조정이 되었다. 불교 문화의 융합은 중국인들의 우주와 생명에 대한 인식을 풍부하게 했다. 불가의 ‘각오(覺悟, 깨달음)’는 중국인들에게 인과의 눈으로 세간 만물을 바라보도록 가르쳤다.

* 도교의 흥기 (출세의 진제): 동한 후기, 본토 도교가 정식으로 형성되었다. 도교는 상고시대부터 내려온 ‘도를 존중하고 하늘을 경외(尊道敬天)’하는 전통을 계승하여, 진리를 찾고 선을 지향하는 정신이 민간에 뿌리내리게 했다. 도가의 ‘출세(出世, 세상을 초월함)’는 중국인들에게 자연의 법칙에 순응(반본귀진)하는 법을 가르쳤으며, 혼란스러운 세월 속에서도 내면의 청정과 너그러움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한나라의 강대함은 여러 대의 걸출한 군주들이 함께 이룩한 결과이다.

* 문경의 치(文景之治): 한 문제와 한 경제는 성세를 개창하여 두터운 국력을 쌓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 경제의 이름이 ‘계(啟)’였기 때문에, 피휘(避諱, 임금의 이름을 피함)를 위해 이십사절기 중 봄의 천둥이 만물을 깨운다는 뜻의 ‘경계(驚啟)’가 ‘경칩(驚蟄)’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명휘(名諱)에 대한 신중함은 당시 사회가 질서와 예법을 얼마나 경외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 한 무제의 웅풍: 한 무제는 앞선 세대가 쌓아둔 저력을 바탕으로 북쪽의 흉노를 격퇴하며 “진나라 때의 밝은 달, 한나라 때의 관문(秦時明月漢時關)”이라 할 만한 웅장한 기상을 드러냈다. 동시에 그는 《태초력》을 반포하여 처음으로 이십사절기를 역법에 포함시켰으며, 화하의 자녀들이 봄에 갈고 여름에 김매며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저장하는 법을 지도하여 중국인의 ‘순천응시(順天應時, 하늘의 때에 순응함)’하는 생존 지혜를 정형화했다.

* 광무중흥(光武中興): 서한 말년 왕망이 찬탈하자, 한 고조의 9대손 유수(광무제)가 하북성 백향에서 군대를 일으켜 동한을 건립했다. 유수는 무공과 모략을 겸비하여 국가의 강성함을 재건했을 뿐만 아니라, 동한을 후세인들의 눈에 유풍이 가장 성하고 풍속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대로 만들었다.

양한(兩漢) 400년은 ‘물’의 본성을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막을 수 없는 강맹함도 있었고, 만물을 조용히 적시는 유연함도 있었다. 정권은 교체되었으나 한나라가 남긴 문화적 보물들—장건의 실크로드, 채륜의 종이, 그리고 시대를 앞선 의학과 천문학은 오늘날까지도 후세 사람들을 감탄하게 한다. 바로 이러한 물과 같이 “하나의 맥으로 이어지면서도 끊임없이 풍부해지는” 생명력이 있었기에, 중화 문명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단절되지 않은 고대 문명이 될 수 있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