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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불법(佛法)이 흥성했던 양진남북조 시대 (10)

(265년—588년)

심연(心緣)

【정견망】

문화편: 회화 예술

양진남북조 시기의 회화 성취는 두 가지 측면에서 체현된다. 하나는 북방의 석굴 벽화로 작가는 대부분 이름이 전하지 않으며, 다른 하나는 남방의 인물화와 산수화로 동진의 고개지(顧愷之)가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이 시기 중국 회화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미학적 가치와 지위를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화가 역시 더는 장인(工匠)의 대열에 묶여있지 않고 전례 없는 독립을 획득했다. 고개지, 육탐미(陸探微), 장승요(張僧繇) 등 후세에 종사(宗師)로 추앙받는 화단의 거장들이 무리 지어 출현했고, 《여사잠도(女史箴圖)》, 《낙신부도(洛神賦圖)》, 《직공도(職貢圖)》와 같이 모본이 전해 내려오는 거대한 필적들도 나타났다. 또한 고개지의 《논화(論畫)》, 사혁(謝赫)의 《고화품록(古畫品錄)》, 종병(宗炳)의 《화산수서(畫山水序)》, 왕미(王微)의 《서화(敘畫)》 등 후세를 위해 체계적인 화론들을 남겼다.

남조의 사혁이 제기한 화화를 평가하는 ‘육법(六法)’, 즉

① 대상이 지닌 내면의 정신, 살아 숨 쉬는 기(氣)와 생동감 넘치는 운치(韻)를 화면에 표현해야 한다는 기운생동(氣韻生動),

② 붓을 쓸 때 대상의 구조적 골격을 강인하고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골법용필(骨法用筆),

③ 그리고자 하는 객관적인 사물(物)에 부합하도록(應) 그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응물상형(應物象形),

④ 사물의 종류와 성격에 따라 그에 알맞은 색채를 부여해야 한다는 수류부채(隨類賦彩),

⑤ 화면 안에서 소재들을 어디에 배치할지 깊이 고민하고 설계해야 한다는 경영위치(經營位置),

⑥ 옛 명작들을 그대로 모사하는 과정을 통해 선인들의 훌륭한 법식과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전이모사(傳移模寫)는 후세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양진남북조 이후로 중국 회화는 점차 고조기로 진입하였다.

북조의 석굴 회화

불교의 광범위한 전파는 남북조의 일부 불교를 믿는 황제들로 하여금 불교 사찰을 건축하게 하거나 석굴을 개착(開鑿)하라는 명을 내리게 했다. 불사와 석굴 안에는 불상의 조각과 소상 외에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때문에 불교와 관련된 회화에서 남조의 화가들은 주로 목조 구조의 사원을 창작의 중심지로 삼았고, 북조의 화가들은 주로 석굴 불사를 활동 장소로 삼았다. 지금까지 후세에 전해지는 북조의 회화는 남조의 것보다 훨씬 많은데, 대부분 감수, 산서, 신강 등지의 석굴에 집중되어 있다. 그중 한 가지 원인은 아마도 목질이 석질만큼 보존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돈황 막고굴 벽화

북조의 석굴 회화 중에서는 감수의 돈황 막고굴이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현존하는 492개의 동굴 안에는 총 4.5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벽화가 있다. 벽화의 주요 내용은 부처의 조상인 석가모니가 출세하기 전에 겪었던 불본생(佛本生,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와 부처가 세상에 나와 도를 이룬 후 설법하는 정경을 서술한 것이다.

불본생 이야기는 내용이 풍부하여 녹왕본생(鹿王本生), 살타나본생(薩垂那本生), 수달나본생(須達拿本生) 등의 이야기가 있으며, 불가의 인양(忍讓, 참고 양보), 선량함과 인과응보 사상을 선양한다. 이야기는 연속적인 장면으로 전개되며 좌우에서 중심을 향해 발전하여 구상이 완벽하다. 화면은 중후하고 소박하며 선이 굵고 넓은 면적에 색을 평평하게 칠했는데, 한대 무덤 벽화 및 인도의 아잔타 벽화의 이중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설법도는 부처님을 중심에 두고 주변에 청중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데, 인물 조형은 서역 예술의 영향을 받아 배와 허리가 튀어나오고 상체가 약간 뒤로 젖혀져 육신이 S자형을 이루며 동감이 풍부하다. 기법상으로는 중원의 선 스타일로서 유창하고 힘이 넘치며, 화풍 또한 중국과 외국의 것이 겸비되어 있다.

어떤 벽화에는 기악을 연주하는 비천(伎樂飛天)이 그려져 있다. 화가는 단지 바람을 따라 날아오르는 몇 가닥의 채색 띠만으로 인물의 가볍고 하늘거리는 자태를 아낌없이 표현해 냈다.

신강 크질 천불동 벽화

이 밖에 위진 시기에 개착된 신강 크질(克孜爾) 천불동에도 대량의 벽화가 보존되어 있다. 그 벽화에는 한 가지 현저한 특징이 있으니 바로 마름모꼴 도안이 있다는 점이다. 각 마름모꼴 안에는 서로 다른 불본생 이야기, 인연 이야기, 공양 이야기와 천불(千佛) 이야기가 그려져 있으며, 모두 단일한 그림의 형식으로 하나의 완벽한 내용을 표현한다. 이 마름모꼴들은 불교적 의미 또한 함축하고 있는데, 연꽃잎(蓮瓣)은 연꽃을 표시하고 산은 수미산, 나무는 보리수(菩提樹)를 나타내어 모두 불가의 상서로운 상징이다.

크질 천불동 벽화의 인물은 철사를 구부려 고리 모양으로 감은 듯한 ‘곡철반사묘(曲鐵盤絲描)’ 기법과 요철형태의 입체감을 주는 ‘요철염색법’을 사용하여 선의 운율감이 강하다. 인물의 얼굴은 타원형이고 목은 굵고 투박하며 가슴은 건장하고 신체는 길고 수려하다. 손등은 둥글고 두툼하며 손바닥은 풍만하면서도 탄력성이 있어 치졸(稚拙)하고 순박한 미감을 띠는데, 이는 현지 소수민족의 심미관과 부합한다.

크질 천불동 벽화는 장식성이 풍부하고 색채가 화려하여 유한한 돔 천장과 굴 벽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로 개척해 냈고, 회화 예술이 표현하는 공간의 차원과 깊이를 확대했기 때문에 후인들에게 서역 미술의 뛰어난 꽃으로 예찬 받고 있다.

용문석굴 벽화

낙양 용문석굴 중에는 불상 외에도 수많은 벽화가 있다. 벽화 위의 선녀 조형은 흘러가는 구름 속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거나, 손에 과일을 받쳐 들고 허공을 날아 춤추거나, 음악을 받들고 높이 노래하거나, 꽃비를 흩뿌리는데 그 자태의 가벼움과 표정(神情)의 우아함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석굴 벽화 외에도 북방에서는 묘실(墓室) 벽화도 매우 발달했다. 하남 등현 남제 묘문의 채화 벽돌, 하북의 동위 여여린화공주(茹茹鄰和公主) 묘 벽화, 산서 태원의 북제 누예(婁睿) 묘 벽화 등이 있으며, 가욕관(嘉峪關)의 위진 시기 묘실 벽화가 가장 풍부하다.

발굴된 6개의 무덤 속에 총 600여 점의 벽화가 보존되어 있다. 내용은 농사, 목축, 우물물 긷기, 사냥, 수목원, 둔전 개간, 영루(營壘), 부엌, 연회, 음악 연주, 바둑 및 장기 등을 포함하여, 여러 방면에서 위진 시기 하서(河西) 지역의 사회생활을 진실하고 생동감 있게 반영하고 있다.

벽화는 벽돌 한 장마다 각각 단위가 되는 소폭의 구도인데, 한대 회화가 층을 나누어 배열하던 레이아웃 방법과는 다르다. 화공들은 호쾌한 수법으로 대략 몇 붓 만에 활달하고 감동적인 화면들을 묘사해 냈다. 색조는 뜨겁고 명쾌하며 단순하면서도 조화롭고, 주제 또한 소박하여 생활의 감정이 넘쳐흐른다. 이 벽화들은 하서 지역의 전통 벽화 예술이 북조의 불교 벽화가 흥성하기 이전에 이미 성숙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남조 회화

남방의 회화는 명가들이 무리 지어 배출되었는데, 그중 성취가 가장 높은 이는 동진의 고개지이다. 그는 인물화는 물론이고 산수화에도 뛰어났다. 현존하는 고개지의 《여사잠도권(女史箴圖卷)》은 후인이 모사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진적(真跡 진품)의 유풍을 보존하고 있다.

*후세 산수화의 기초를 확립한 종병

위진 시기 일부 사대부들은 당시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산림으로 피해 숨었다. 특히 진나라 왕실이 남쪽으로 건너간 후, 강남의 수려한 산수 또한 수많은 문인을 매료시켰으며, 산수를 모방하고 본받는 것은 화가가 자신의 사상과 정취를 기탁하는 한 가지 방식이 되었다. 대규(戴逵), 고개지 등도 모두 산수화를 그린 적이 있다. 그러나 산수화가 진정으로 인물의 배경에서 탈피하여 독립해 나온 것은 남조 유송(劉宋) 시기의 전문 산수화가 종병(宗炳)으로부터 시작된다.

종병은 평생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았고 자연을 극진히 사랑해 그의 유람 발자취는 강남과 상악(湘鄂, 호남과 호북)의 이름난 산천에 두루 미쳤다. 만년에는 평생 보았던 명승지를 벽 위에 그리며 이를 ‘와유(臥遊, 누워서 유람함)’라 하여, 마치 대자연 속에 있는 듯 스스로 기쁘고 만족해했다.

종병은 《화산수서(畫山水序)》에서 산수를 그리는 종지(宗旨)로 ‘징회관도(澄懷觀道, 마음을 맑게 하여 도를 관찰함)’와 ‘창신이신(暢神怡身, 정신을 펼치고 몸을 기쁘게 함)’을 제기했다. 즉 천지 자연에 대한 묘사와 감상을 통해 초탈하고 다툼이 없는 도를 깨닫고 정신적 추구를 표현하며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유가의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와 도가의 ‘마음이 사물 밖에서 노니는(遊心物外)’ 사상을 하나로 합치시켰다. 그의 견해는 훗날 산수화가 ‘허(虛)’, ‘정(靜)’, ‘무쟁(無爭)’, ‘유목빙회(遊目騁懷, 눈을 노닐어 마음을 달램)’의 방향으로 발전하는 기초를 확립했다.

*화단의 “치인(癡人)” 고개지

고개지(346년 ~ 407년)는 동진의 저명한 화가이자 문학가로, 세상에 ‘화절(畫絕, 그림의 독보적 경지), 재절(才絕, 재주의 독보적 경지), 치절(癡絕, 어수룩함의 독보적 경지)’로 이름이 높았다. 가장 이름난 것은 그의 인물화다.

고개지는 인물을 그릴 때 전신(傳神, 정신을 전달)의 묘미가 있어야 하며, 그 관건은 눈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위(漢魏) 시기 고졸(古拙)한 풍조를 일변시키고 오로지 전신에 치중하였으며 눈동자를 찍는 점정(點睛)이 가장 절묘했다. 젊은 시절 그는 건업(지금의 남경)의 와관사(瓦棺寺)를 위해 유마힐상(維摩詰像) 벽화를 그렸는데, 대중 앞에서 눈동자를 점찍자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희사한 돈이 경각 간에 백만을 넘었으니 이때부터 그의 명성이 사방에 널리 퍼졌다.

고개지가 그린 인물화는 긴밀하게 이어지며 끊이지 않는 ‘긴경연면(緊勁連綿)’의 필법을 잘 사용하여 탈속하고 날아갈 듯 유려하다. 또한 인물 안면의 복잡한 표정을 통해 그 내면의 풍부한 감정을 은연중에 나타내었으며, 옷의 선은 유창하고 휘날리듯 아름답고 생동감 있다. 이 밖에 그는 풍경을 묘사하는 데도 뛰어났는데 그린 나무와 산악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만년의 필법은 더욱 성숙하여 졸박한 듯 기교를 이겼고, 짙은 색을 칠하며 미세하게 점을 더할 뿐 훈식(暈飾, 번지게 칠함)을 하지 않았으나 신기(神氣)가 홀연히 표출되어 낭만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남조의 육탐미(陸探微), 당대(唐代)의 오도자(吳道子) 등이 모두 그의 화적을 임모(臨摹 베껴 그림)했다.

현재 세상에 전해지는 고개지 작품의 모본으로는 조식과 견씨의 사랑을 노래한 《낙신부도》와 부녀자의 덕행을 권계한 《여사잠도》, 《열녀인지도(列女仁智圖)》가 있다.

기타 화가

남북조 때 회화는 비교적 높은 발전을 이룩했으며 회화가 더욱 보급되었다. 문인들이 회화에 참여한 것 외에 일부 황제들 또한 화가의 대열에 합류했다. 남조 양 원제 소역(蕭繹, 약 508년 ~ 554년)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 화가이다.

소역은 양무제 소연의 일곱 번째 아들로,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어려서부터 서화(書畫)를 짓기 좋아했다. 당시 남조는 여러 나라와 우호적으로 지냈기에 조공하러 오는 사신들이 길에 끊이지 않았다. 소역은 자신이 본 바에 근거하여 《직공도》를 지어 활국(滑國 에프탈), 페르시아, 백제 등 12개국 사신의 모습을 그리고, 글을 찬술하여 각국의 풍속을 서술함으로써 그 일을 기록했다. 원본 그림은 현존하지 않으나 현재 송나라 사람의 모본이 남경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세로 27.2센티미터, 가로 200.7센티미터에 달하는 이 그림 위에는 사신들이 각양각색의 민족 의상을 입고 두 손을 맞잡은 채 공수(拱手)하고 서 있다. 풍진을 겪은 그들의 얼굴에서는 남조에 와서 조공할 때의 엄숙하면서도 흔연히 기뻐하는 표정이 흘러나오며, 동시에 서로 다른 지역과 민족 사신들의 제각기 다른 용모와 기질을 전달합니다. 얼굴형과 피부색이 저마다 특징을 갖추고 있다.

이 그림의 선은 가늘고 유연하면서도 힘 있는 묘사를 위주로 하고 간혹 ‘난엽묘(蘭葉描)’를 섞어 간결하면서도 굳세며, 층차를 나누어 훈염(薰染)을 가해 형상이 정확하고 생동감 있으며 장식성이 풍부하다.

위진 시기 ‘죽림칠현(竹林七賢)’은 방탕하고 얽매이지 않으며 통치자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1961년 남경 지역의 남조 무덤 안에서 《죽림칠현과 영계기》 화상벽돌이 출토되었다. 그림 속의 영계기(榮啟期)는 춘추시대의 명사로, 그와 칠현은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함께 그려졌다.

남경 서선교(西善橋) 남조 묘실의 화상은 200여 장의 무덤 벽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물의 형상이 모두 선각(線雕)으로 처리되어 화면 위에 볼록하게 돋아나 있다. 남쪽 벽은 혜강, 완적, 산도, 왕융 네 사람이고 북쪽 벽은 향수, 유령, 완함, 영계기 네 사람이며 인물들 사이는 은행나무, 수양버들, 소나무와 회화나무로 서로 격리되어 있다. 여덟 사람은 모두 땅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으나, 저마다 자신의 개성을 가장 잘 체현할 수 있는 일종의 자태로 표현되어 있다. 어떤 이는 거문고를 타며 휘파람 불어 노래하고, 어떤 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어떤 이는 고담준론으로 현리(玄理)를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여의(如意)를 만지작거리니, 사람마다 옷을 넓게 입고 띠를 크게 둘러 고고하고 우아하다. 노장을 숭상하는 정과 개성을 추구하는 마음이 화면에 넘쳐흐른다. 사족(士族) 지식인들의 자유롭고 청고(清高)한 이상적 인격이 화상벽돌 위에 충분히 표현되어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