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년—588년)
심연(心緣)
【정견망】
문화편 ─ 문학과 사학
문학
*시가와 소설
건안칠자(建安七子) 이후 문학상에서 비교적 큰 성취를 이룬 이는 진(晉)·송(宋) 교체기의 도잠(陶潛 도연명)이다. 도잠은 자가 연명(淵明)이며 심양(潯陽) 시상(柴桑 지금의 강서 구강) 사람이다. 그의 대표작은 《도화원기(桃花源記)》로, 행복한 세외의 무릉도원을 써서 후세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대와 삼국 시대에 7언시는 이미 어느 정도 발전해 있었다. 유송(劉宋) 때의 포조(鮑照)는 7언시의 발전에 또 새로운 공헌을 했다. 그는 매 구절마다 운을 달던 축구용운(逐句用韻)을 한 구절씩 건너뛰어 운을 다는 격구용운(隔句用韻)으로 바꾸고 자유롭게 운을 바꿀 수 있게 하여, 후세 7언시의 발전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양진남북조 시기에는 민가(民歌)가 비교적 큰 발전을 이룩했다. 남방 민가는 《청상곡사(清商曲辭)》 중의 《오성가(吳聲歌)》(주로 태호 유역에서 유행)와 《서곡가(西曲歌)》[주로 강한(江漢 장강과 한수 사이) 지역에서 유행]를 위주로 한다. 이 민가들은 한 가지 공통 특징이 있으니, 즉 거의 모두 사랑 노래라는 점이다.
북조의 민가는 남방에 비하여 더욱 선이 굵고 호방함이 있었다. 예컨대 《칙륵가(敕勒歌)》를 보자.
“칙륵의 천은 음산 아래라.
하늘은 유목민 천막 같아 온 대지를 덮었네.
하늘은 푸르고 들은 아득한데,
바람 불어 풀 낮아지니 소와 양이 보이네
敕勒川,陰山下。
天似穹廬,籠蓋四野。
天蒼蒼,野茫茫,風吹草低見牛羊。”
단 27자만으로 아득히 넓고 망망한 초원의 정경을 묘사했다.
또한 5언을 위주로 한 잡시인 《목란사(木蘭辭)》는 목란이 남장하고 아버지를 대신해 군대에 복무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묘사했다. 저작 기교의 능숙함과 풍부하고 다채로운 언어 및 운용상의 독특함으로 인해, 이 작품은 북방 민가 중의 뛰어난 작품이 되었다.
남북조 시대에는 변문(駢文, 변려문)이 성행했다. 변문이란 한부(漢賦)에서 발전해 온 것이다. 진말(晉末)과 송초(宋初)의 안연지(顏延之) 등 사람들의 제창을 거쳐 전고(典故)를 사용하는 것과 대구를 강조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대구체가 점차 형성되었다.
남조 양나라 때 심약(沈約)이 성률(聲律)을 제창하면서 시문은 또 점차 율체(律體)로 전환되었다. 남조 말기에 이르러 서릉(徐陵), 유신(庾信) 등이 변문을 최고봉으로 발전시켰는데, 이들은 오로지 형식적인 기교만을 논하여 실제 내용은 부족했다.
불교와 도교가 광범위하게 유포되었기 때문에 신화와 지괴소설(志怪小說)도 흥기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것으로는 동진 시기 갈홍(葛洪)의 《신선전(神神傳)》, 간보(幹寶)의 《수신기(搜神記)》와 양나라 오균(吳均)의 《속제해기(續齊諧記)》가 있다. 송(宋)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는 내용은 문인의 일화에 속하며, 동한부터 동진까지 사족(士族)들의 생활 면모를 반영했다.
*문학 비평
문학의 발전에 따라 문학 비평, 문학 이론과 문학 선집 전문 저서가 출현했다. 남조 양나라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은 문학 비평과 문학 이론에 관한 명저(名著)이다. 총 50편으로 각종 문장의 체재와 창작 방법을 체계적으로 논술해, 체제가 방대하고 사상이 정밀해 이전까지 문학 비평을 총결하는 저작이다.
사학(史學)
서진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三國志)》와 송 범엽(範曄)의 《후한서(後漢書)》가 이 시기 사학의 대표작이다.
《삼국지》는 총 65권으로 《위지(魏志)》 30권, 《촉지(蜀志)》 15권, 《오지(吳志)》 20권을 포함하며, 주로 위·촉·오 삼국 정립 시기의 역사를 기재했다. 진수는 위나라와 오나라 사서에서 자료를 모으고 또 스스로 촉나라 사서를 편집해 편찬함으로써 《삼국지》를 완성했다.
진수가 책을 쓸 당시 마침 위진(魏晉) 교체기에 해당해 천하가 어지러워 자료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용이 아주 충실하지는 않으며 표(表)와 지(志)도 없다. 그러나 《삼국지》는 서사에 능하고 문필이 간결하며 분량이 적당하다. 진수가 죽은 지 백여 년 후 삼국의 사료가 대량으로 출현하자, 남조 송나라 문제는 《삼국지》가 너무 간략하다 여겨 배송지(裴松之)에게 명하여 주석을 달게 했다.
《사기》와 《한서》의 주석이 문장의 뜻을 풀이하는 데 중점을 둔 반면, 배송지의 《삼국지》 주는 사실(역사적 사실)을 증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대략적인 통계에 따르면 주석 중에 열거된 위진 시대의 저작이 200여 종에 달하고 사료를 비교적 완전하게 인용했으며, 주석의 총 글자 수가 원래 문장인 정문(正文)을 3배나 초과하므로 주석의 가치는 《삼국지》 정문(正文)에 못지않다.
남조 송의 범엽이 저술한 《후한서》는 총 120권으로, 주로 동한 광무제 유수로부터 헌제 유협에 이르기까지 근 200년에 걸친 동한의 역사를 기재했다. 범엽은 여러 가의 후한에 관한 역사, 특히 유진(劉珍) 등의 《동관한기(東觀漢記)》를 기초로 삼아 취사선택함으로써 《후한서》를 작성했다. 그가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지(志)》는 쓰지 못했다. 그래서 본기와 열전의 저자는 범엽이고, 지의 저자는 동진의 사마표(司馬彪)다.
《후한서》는 간명하면서도 치밀하며 서사가 생동감 있어 후대에 나왔음에도 이전에 나온 여러 가의 후한 역사를 도태시켰다. 양나라 유조(劉昭)가 《후한서》에 주석을 달았고 또 진나라 사람 사마표가 《속후한서》의 30권 《지》를 뽑아내어 주석을 가하고 《후한서》에 보충해 넣었다.
상술한 두 부의 사학 저작 외에 또 남제 심약의 《송서(宋書)》, 양 소자현(蕭子顯)의 《남제서(南齊書)》, 북제(北齊) 위수(魏收)의 《위서(魏書)》가 있다. 남제 장영서(臧榮緒)의 《진서(晉書)》는 당대(唐代)에 새로 만든 《진서》의 바탕이 되었다. 북위의 최홍(崔鴻)은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를 지어 16국의 역사를 전문적으로 기록했으나 현재는 단지 집본(輯本, 흩어진 글을 모은 책)만 남아 있다.
이 시기에는 인물 전기와 지방지(地方志) 또한 흥기했다. 양 석혜교(釋慧皎)의 《고승전(高僧傳)》은 250여 명의 승려를 위해 전기를 작성해 불교사를 연구하는 사료가 된다. 진(晉) 상거(常璩)의 《화양국지(華陽國志)》는 한중(漢中)과 사천, 운남, 귀주 지방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법(書法)
서예는 조위(曹魏) 때 종요(鍾繇)가 해서(楷書)를 창립해 일시에 독점적인 명성을 누렸다. 동진의 왕희지(王羲之)는 한위(漢魏)의 여러 가의 정화(精華)를 흡수하여 서예를 대성하였으며 예·초·진·행(隸, 草, 真, 行)에 모두 능통해 서성(書聖)이라 일컬어졌다. 사람들은 그가 쓴 글씨를 평하여 “날아오르는 형상은 뜬 구름과 같고 굳센 모습은 놀란 용과 같다(飄若浮雲, 矯若驚龍)”라고 했다.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의 서예 성취도 그 아버지만 못지않아 사람들은 소성(小聖)이라 불렀으며, 부자를 합해 흔히 ‘이왕(二王)’이라 한다.
북조의 서예 역시 매우 큰 성취가 있었는데, 그 특성은 구조가 근엄하면서도 기세가 웅후하다는 점으로 현존하는 위비(魏碑, 위나라 비석 글씨)는 대부분 이러한 서체이다. 위비는 아직 예서의 일부 유적을 보존하고 있어 남방과는 약간 다르다.
용문석굴의 고양동(古陽洞) 안에는 불감 조상에 제기(題記, 기록)가 많이 있어 북위 서예 예술을 연구하는 가장 소중한 자료가 됩니다. 금석 비석 조각 예술 중에서 국내외에 명성이 자자한 《용문이십품(龍門二十品)》 중 19품이 고양동 안에 있다. 용문이십품은 서예가들이 우아하다고 칭하는 위비의 정품(精品)으로, 즉 용문석굴 중에서 정교하게 조성된 20개의 조상제기를 말한다. 이 조상제기들은 서로 다른 정도의 역사적 가치와 서예 예술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용문이십품》으로 대표되는 위비체(魏碑體)는 자형이 단정하고 반듯하며 기세가 강건하면서도 질박해, 글자 구조와 용필(用筆)이 예서와 해서의 사이에 있어 예서가 해서로 과도하는 중에 나타난 일종의 비교적 성숙한 독특한 서체이다. 글자 크기의 형세가 흐트러진 듯하면서도 글자체의 기세가 서로 돌아보는 것이 마치 물고기가 물에서 노는 듯하다.
청대의 무억(武億)은 《이궐제조상기(伊闕諸造像記)》에서 “용문은 단지 돌에 새긴 불장(佛場)일 뿐만 아니라 고비림(古碑林)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용문의 고양동은 참으로 불교 비림의 축소판이라 일컬을 만한다. 중국 서예 예술 발전사상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강유위(康有爲)는 《광예주쌍집(廣藝舟雙輯)》에서 위비의 서예를 찬미해 “기백과 힘이 웅장하면서도 강하고”, “필법이 도약(跳躍)하며”, “정신이 날아 움직이고”, “구조가 자연스럽다”고 했다. 《용문이십품》은 용문석굴 비각 서예 예술의 정화라 할 수 있으며 수백 년 동안 서예가들에게 칭송받아 왔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