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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연소 전기】 정사 속의 양연소와 양문광

앙악

【정견뉴스】

양가장 이야기는 유명한 북송 영웅 양업 가문이 5대에 걸쳐 나라를 지킨 충렬(忠烈)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는 중국에서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와 집안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역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평서, 희곡, 소설은 수백 수천 편에 달하며, 양가장과 관련된 유적지와 지명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정사에 기록된 양가장의 감동적인 사적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본편에서는 전편에 이어 청사에 이름을 남긴 양연소, 양문광 부자의 영웅적인 사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양연소: 지모가 뛰어나고 용맹하며 싸움에 능하다

양연소(958년~1014년)는 양업의 아들이고 본명은 연랑(延朗)이었으나, 나중에 성조(聖祖 역주: 북송 황실이 조상으로 추존한 조현랑趙玄朗)의 휘를 피해 연소(延昭)로 이름을 바꿨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양육랑(楊六郎)이라 불렀다. 어린 시절 그는 말수가 적고 군진을 배치하는 놀이를 즐겼다. 양업은 일찍이 “이 아이가 나를 닮았다”라고 말하며 출정할 때마다 그를 데리고 다녔다. 연소는 응주와 삭주를 공격할 때 선봉을 맡았는데, 삭주성 아래에서 싸우다 흐르는 화살에 팔이 뚫렸음에도 두려운 기색 없이 더욱 용맹하게 싸웠다.

양업이 세상을 떠난 후 조정은 그의 아들들을 중서성과 문하성의 공봉관(供奉官 황제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관직)으로 등용했다. 연소는 숭의부사(崇儀副使 황실 기물을 관리하는 숭의사의 부사로 정8품 관직)가 되었다. 연소는 평생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하북과 안문관 일대의 송나라와 요나라 접경지에서 거란을 방어하며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안문관은 만리장성의 중요한 관문 중 하나로, 양가장이 충렬로 나라를 지킨 요충지이기도 하다.(Shutterstock)

함평 원년, 강남과 회남에 큰 기근이 들자 연소는 강남·회남남도순검사로 임명되어 현지 이재민들을 위무했다. 이듬해 다시 변방으로 돌아와 병사를 다스리고 요새를 지켰다. 송 진종(真宗)이 대명부(大名府 지금의 하북 한단시 대명현)에 머물 때 행영(行營)에서 수차례 연소를 불러 변방 방어의 요체를 물었는데, 연소의 핵심을 찌르는 대답은 진종의 큰 찬사를 받았다. 진종은 여러 왕에게 이르기를 “연소의 부친 양업은 전조(前朝)의 명장이었고, 연소가 병사를 다스려 요새를 지키는 것은 아버지의 풍모가 있으니 참으로 가상하다”라고 했다.

함평 2년(999년) 가을 9월, 거란이 국경을 침범했다. 10월에는 수성(遂城)이 작고 방비가 적은 것을 틈타 며칠간 급히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거란의 승천(承天)태후가 직접 전투를 독려하자 성안의 인심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연소는 수성의 낮은 담벼락에 성안의 장정들을 모아 갑옷과 장비를 나누어 주고 성을 지키게 했다.

어느 날 초겨울 날씨가 갑자기 크게 추워지자 연소는 기막힌 계책을 내어 장정들에게 물을 길어다 성벽 위에 붓게 했다. 다음 날 아침 성벽은 모두 얼음으로 뒤덮여 견고하고 미끄러워 기어오를 수 없게 되었다. 거란군은 결국 패해 물러갔다. 연소는 거란군의 갑옷과 병기를 수없이 노획했으며, 이 전투의 공으로 막주(莫州)자사가 되었다. 함평 3년(1000년) 거란이 다시 남하하자 양연소는 양산(羊山)에 매복하여 적을 유인한 뒤 거란 장수의 목을 베어 대승을 거두었다.

경덕(景德) 원년(서기 1004년) 거란군이 다시 대거 남하했다. 연소는 상소하기를 “거란군이 전연(澶淵)에 주둔하고 있는데 국경에서 이미 천 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먼 길을 출정했으니 반드시 사람과 말이 지쳐 있을 것이며, 병력이 비록 많으나 실제로는 격파하기 쉽습니다. 거란군의 약탈은 대부분 기병에 의지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제군에게 명하여 중요한 길목을 막아 지키게 하면 한꺼번에 섬멸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유주(幽州)와 이주(易州) 등지도 기세를 몰아 되찾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황제의 답을 얻지 못했다. 시기가 긴박해지자 양연소는 곧장 병사를 이끌고 적의 경계로 들어가 고성(古城 지금의 산서 광령廣靈 서남쪽)을 격파하고 수많은 적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결국 조정은 요나라와 전연의 맹약을 맺었고, 북벌 대업은 이로써 중단되었다.

이 전쟁 후 양연소는 보주(保州)지주 겸 연변도순검사(緣邊都巡檢使)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수비의 공로로 추가 포상을 받아 본주방어사(本州防禦使)로 승진했고, 얼마 후 고양관부도배서(高陽關副都部署 고양관 방어하는 부사령관)로 옮겨 인생의 마지막 9년 시간을 주둔지에서 보냈다.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1014년) 정월, 양연소는 영주방어사(英州防禦使) 임지에서 향년 57세로 별세했다. 조정은 그의 충훈을 표창하여 세 아들에게 관직을 내렸다.

거란이 두려워하고 장졸들이 추대하다

양연소는 지모가 뛰어나고 용맹했을 뿐만 아니라, 군중의 봉록과 하사품을 모두 장졸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단 한 번도 집안을 위해 재물을 쌓아두지 않았다. 그는 군령이 엄명(嚴明)했고 사졸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추워도 갖옷을 입지 않았고 더워도 일산을 펴지 않았으며, 적을 만나면 반드시 솔선수범했다. 전쟁에서 이기면 공을 부하들에게 돌렸으므로 누구나 즐거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는 변방을 20여 년간 지키며 이역만리까지 위엄을 떨쳤다.

거란은 그를 매우 두려워하여 하늘의 장성인 육랑성(즉 천랑성)이 내려온 것이라 여겼고, 그를 경외하여 양육랑(楊六郎)이라 불렀으니 그의 위명이 멀리 퍼져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연소가 세상을 떠나자 진종은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탄식했고, 특별히 사신을 보내 영구를 호송해 장사 지내게 했다. 하삭(河朔) 일대의 백성들은 영구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영구를 바라보며 우는 자가 많았다.

양연소의 셋째 아들 양문광(?~1074년)은 자가 중용(仲容)이다. 부친의 음덕으로 조정 관리가 되었으며, 도적 장해(張海)를 토벌한 공으로 전직(殿直 황제 측근에서 시위하는 무관) 직책을 받았다. 나중에 범중엄이 섬서 지역을 위무할 때 그와 대화를 나누어 보고는 그를 기재(奇才)라고 찬탄하며 특별히 자신의 막하(幕下)에 머물게 했다.

양문광은 일찍이 명장 적청(狄靑)을 따라 남정한 적이 있으며, 그 후 덕순군(德順軍 지금의 영햐 융덕현 동북쪽)을 주관하고 광서검할(廣西鈐轄)을 맡아 군대의 훈련과 상벌에 관한 일을 다스렸다. 이어 의주(宜州)와 옹주(邕州)의 지주(知州)를 지냈으며 관직이 거듭 올라가 좌장고사(左藏庫使)와 대어기계(帶禦器械) 등 군직에 올랐다. 영종은 문광에게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치평(治平) 연간에 조정에서 숙위 장령 인선을 논의할 때 영종이 직접 결정하기를 “문광은 명장(名將)의 후손이며 전공이 있다”고 했다. 문광을 성주단련사(成州團練使), 용신위사상도지휘사(龍神衛四廂都指揮使)로 발탁했고 다시 흥주방어사(興州防禦使)로 옮겼다. 문광의 계급는 착실히 승진했다.

송 신종(神宗) 연간에 서북 변방의 정세가 긴박해졌다. 당시 서하(西夏) 군사가 진봉로(秦鳳路) 지역을 자주 약탈하자 신종은 특별히 명재상 한기(韓琦)를 보내 영흥군(永興軍)을 주관하게 하고 변방의 대국을 경영하게 했다. 한기는 진주(秦州) 마중보(馬仲甫)의 제안을 받아들여 필률성(篳篥城 감곡보)을 쌓아 고위성(古渭城)과 기각의 방어선을 형성함으로써 적 기병의 왕래를 끊기로 결정하고 양문광을 총감독관으로 임명했다. 문광은 이 성이 “구슬을 뿜어낼(噴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급히 행군하여 날이 저물기 전 현장에 도착해 배치를 마쳤다.

다음 날 새벽 적군 기병이 대거 압박해 왔으나 송군이 이미 엄중히 경비하는 것을 보고 강공할 수 없음을 알아차려 병사를 물렸다. 적군이 떠날 때 “국주(國主)에게 보고하여 수만 기병을 이끌고 너를 쫓아낼 것이다”라는 위협 편지를 남겼으나 문광은 흔들리지 않고 즉시 장수를 보내 출격시켜 수많은 적을 베고 사로잡았다.

나중에 어떤 이가 그 이유를 묻자 문광은 “나의 조상님들은 싸울 때 먼저 상대의 기세를 꺾었다. 이처럼 반드시 다투어야 할 험지를 적이 먼저 알고 점령한다면 우리 편은 다시 나아가서 취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황제는 특별히 조서를 내려 상을 내리고 채색 옷과 옥대(玉帶), 보마(寶馬 좋은 말)를 내려 포상했다. 그 후 문광은 다시 여러 차례 승진하여 지위가 더욱 중해졌다. 요나라 사람이 송나라와 대주(代州) 국경의 땅을 다툴 때 문광은 황제에게 작전도와 유연(幽燕 연운 16주)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계책을 올렸으나 회답을 받지 못한 채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 조정은 그에게 동주관찰사(同州觀察使)를 추증하여 평생의 충용(忠勇)을 표창했다.

참고 자료:
《宋史‧列傳第三十一》
《隆平集》宋 曾鞏著
《楊家將故事考信錄》餘嘉錫著 1945年出版
《楊家府世代忠勇通俗演義》明朝 佚名著 秦淮墨客校閱
《兩宋志傳》明朝 熊大木著 秦淮墨客校閱
《楊家將(穆桂英)傳說》北京美術攝影出版社 2015年出版 高雪松整理
《楊家將外傳》河北少年兒童出版社 1986年出版 趙雲雁搜集整理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945